나의 이야기

고리타분한 한글 이야기

아이루다 2014. 6. 8. 21:37

 

한 십 년 전 단편 소설을 한 번 써본 적이 있다. 정말로 짧은 소설인데 그 내용은 아주 오래 시간이 흐른 후 문명이 사라진 이 땅에 발굴단이 와서 우리나라의 문명에 대해서 연구를 하는 내용이었다. 쉽게 예를 들자면 현재 시점에서 이집트나 잉카 문명의 유적을 발견한 것과 같이 모든 연결고리가 붕괴된 후 새롭게 해당 지역에 대해 연구를 하고 있다고 가정한 것이다.

 

내 소설에서는 과거에 한반도로 불렸던 지역에서 문명이 발전된 것으로 유추되는 지역을 발굴하던 역사학자들이 땅을 파서 나오는 유물을 토대로 이 땅의 문화와 특징을 정의 했는데 바로 그것은 미국의 속주나 혹은 미국령이었던 땅으로 판별 나게 되는 것으로 전개 된다. 물론 정체를 알 수 없는 이상한 문자가 쓰여져 있는 유물이 출토되기도 했지만 빈도수는 적었고 거의 모든 문자는 영어로 되어 있었기 때문에 그런 결론을 낸 것이다.

 

나는 그리 잘 쓰지 못하는 글 솜씨로 우리나라의 영어 사용의 강박관념에 대해 말하고 싶었는데 역시나 글 솜씨 부족으로 인해서 그리 만족스러운 글은 되지 못했다.

 

혹시나 이 글을 읽는 분이 개인적인 경험으로 우리나라 여자들이 쓰는 화장품 광고 문구를 구경한 적이 있나 모르겠다. 그 문구는 분명히 한글의 형식을 가지고 있지만 실제로는 거의 대부분 영어를 한글로 읽은 것에 지나지 않으며 한글은 오직 조사에서나 발견된다. 한글로 된 단어를 찾기가 정말로 힘들다는 것을 느낄 것이다.

 

물론 화장품에 대한 광고는 일반 제품에 비해서 좀 더 과한 영어 사용이 되는 편이긴 하다. 하지만 우리나라에서 제품에 대한 영어 사용 및 일반인들 사이에서 사용되는 용어조차도 영어와 한글이 혼란스럽게 섞여서 각종 콩글리쉬 및 조잡한 신조어를 만들어 내기도 한다.

 

거기에 더해서 약자 사용에 대한 사람들의 무한한 욕구는 점점 더 심해져서 이젠 거의 모든 것들이 두 자로 만들어 진다. 특히 드라마 제목은 아예 처음부터 두 글자로 만들어질 것을 예상한 것이지 사람들과 기자들은 끝없이 약자를 만들어 내어 사용하곤 한다.

 

혹시 '브금' 이란 단어를 들어본 분이 있나 모르겠다. 아마도 인터넷 커뮤니티 사이트를 조금이라도 이용하는 분이라면 아마도 알 것인데, 바로 배경 음악을 뜻하는 말이다. 그래서 가끔 어떤 글들엔 '브금 주위'라고 써 있기도 하다. 음악이 흘러나오니 조심하라는 뜻이다.

 

나는 브금이란 말을 처음 접했을 때 도대체 이 단어의 어원이 뭔지 한참 고민했다. 전체 맥락상 분명히 배경 음악을 뜻하는 것 같은데 도대체 알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러다가 우연히 BGM 이란 말을 보게 되었다. Background Music, 해석하면 말 그대로 배경음악이다. 그리고 이 용어의 영어 약자가 바로 BGM이며, 이 단어를 그냥 읽으면 브금이 된다. 정말로 놀라운 약자와 영어 단어의 혼종이 탄생하는 것이다.

 

나는 여기에서 조금 이해가 되니 않는 구석이 있었는데 배경 음악이란 우리나라 말을 약자로 해서 '배음' 라고 쓸 만도 한데 굳이 브금을 왜 사용 하지에 대한 여부였다. 도대체 사람들의 이런 말 장난과 같은 신조어를 만드는 능력은 잘 이해가 안가는 경우가 많았다.

 

최근에 들어 본 용어 중에는 '썸 타다' 라는 말이 있다. 남녀의 이성 관계가 시작되는 것을 의미하는 것 같은 단어인데 남녀 사이에 뭔가 있다는 뜻인 Something (썸싱) 과 우리나라 말인 '타다' 가 합쳐져서 만들어진 신조어 같다. 그런데 누군가는 이 단어를 재미나고 괜찮게 사용할지 모르겠지만 나에겐 이상하게 싸구려 말 같은 느낌이 강하게 든다.

 

실제로 보통 이런 신조어를 접하는 내 입장에서 이런 말들이 만들어지는 것을 보면 어떨 땐 많이 짜증이 난다. 몇 해전 갑자기 급하게 유행이 되기 시작한 '간지 난다' 혹은 ‘엣지 난다’ 라는 말도 그랬고 도대체 충분히 좋은 우리나라 말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왜 이런 종류의 혼종 단어들이 새롭게 생산되고 또한 사람들 사이에 이리 급하게 퍼지는 것일까?

 

아마도 내가 좀 고리타분한 구석이 있어서 그런지 모르겠다. 하지만 대체 불가능한 말도 아니고 충분히 이렇게 좋은 한글이라는 문자를 지니고 있으면서도 그것을 재미있고 유행을 탄다는 이유로 이렇게 심하게 비틀고 생략하고 뒤섞어 쓰는 것이 과연 좋은 일일까?

 

과거 우리나라 게임 회사들에서 만든 게임 내에서 마법을 표현하는 단어로써 '파이어 볼' , '아이스 애로우' 등의 한글이지만 영어를 읽은 용어들이 사용되곤 했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런 단어를 정말로 한글화 시켜서 게임을 만든 회사가 있었다. 그래서 그런 단어들은 '화염구', '냉기 화살' 등의로 표현 되었다. 그리고 더욱 놀라운 점은 그 회사가 미국의 회사였다는 점이다. 회사의 이름은 블리자드였으며 게임은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 이었다.

 

그리고 이 회사가 최근에 내 놓은 디아블로 3에는 '잉걸불' 이란 단어가 사용되고 있다. 나는 이 단어를 처음 접하고 신기해서 찾아 봤는데 '장작이 다 타고 남은 연기가 나지 않는 숯불' 상태를 뜻하는 순수 한국말이었다. 정말로 놀랍지 아니한가? 외국 회사 만든 게임이 한글화 되면서 그 나라 국민들도 잘 모르는 순수 한국어를 찾아서 썼다는 것이.

 

영어를 쓰면 뭔가 있어 보인다고 믿고 있는 많은 대중들은 영어를 쓰지 않으면 수준이 떨어진다고 믿고 모든 것에 영어를 쓰는 것에 너무도 오랫동안 익숙해져 있다. 실제로 그래서 일상 생활에서도 우린 충분히 한글 단어로 표현이 가능함에도 불구하고 영어를 쓰곤 한다. 나 역시도 이런 사람들 중 하나로 솔직히 이 부분을 지적할 자격도 없긴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영어 사용에 대한 무절제함은 정말로 신중하게 신경 써야 할 문제라고 나는 생각한다.

 

이것은 국수주의도 아니고 배타적인 것도 아니다. 이것은 그냥 우리 스스로 만들어 놓은 일종의 괴물이다. 과거 수십 년 전 배고픈 우리에게 던져준 밀가루 포대 위에 써 있던 그 뜻도 모를 영어는 우리들 유전자에 각인되듯 남아서 영어로 쓰여진 것은 좋은 것이란 기대를 품게 만들고 있다.

 

그래서 우스개 소리로 단팥 빵은 싫어하지만 '스위트 레드 빈 브레드' 는 좋아하고, 마늘은 싫어하지만 '갈릭'을 좋아하며, 계피 향은 싫지만 '시나몬 시럽'은 좋아하는 사람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물론 어떤 단어들은 참 재미있기도 하다. 나도 개인적으로 OTL 과 같은 재미난 용어는 좋아한다. 단어 모양으로 좌절을 뜻하는 말을 만들어냈으니 차라리 귀여운 면도 있다. 하지만 이런 면을 가지고 있는 약자나 혼용 단어들은 그리 많지 않다는 것이 문제이다.

 

언어는 살아 있는 존재이다. 몇 년 만에 많은 신조어들이 나타나고 과거에 쓰이던 단어들이 갑자기 어색하기도 하다. 하지만 이미 존재하고 있는 한국어로 된 단어를 단순히 영어로 치환해서 쓰는 것이 과연 언어의 발전 과정 중 하나로 보는 것이 맞을까?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요리법이라고 알려진 단어는 요즘엔 어딜 가도 레시피 라는 영어로 사용되고 있다. 왜 그 단어라 요리법, 요리책을 대신해서 쓰이고 있는지는 모르겠다. 어찌 이 단어뿐이겠는가?

 

아마도 이런 영 단어들이 아무런 이유 없이 대중에게 퍼지는 것은 그 업종 당사자들이 자신의 직업을 과거의 명칭과 차별화 된 다른 용어로 부르길 원하는 것과 대중에게 늘 노출되는 드라마 같은 작품에서 특정 직업 군을 주인공의 직업으로 선택하면서 좀 더 의도된 방향으로 흘러가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이런 예를 들어 보면 미용사를 헤어 디자이너, 보험 설계사가 라이프 플래너와 같은 영어를 사용함으로써 그 직종을 좀 더 전문적으로 보이게 한다거나 과거의 같은 일을 하는 사람들과는 차별화 된 어떤 능력을 가졌다 믿게 함으로써 더 많은 이득을 챙길 수 있게 해주는 역할도 하게 될 것이다.

 

아주 가끔은 순수 우리말이나 한문을 어원으로 하더라도 꽤나 괜찮은 신조어들이 광고 같은 수단을 통해 대중에게 소개되기도 한다. 실제로 우리 사회가 영어에 대한 무조건적인 호감을 버리고 조금 더 한국적인 것에 대한 신뢰를 가질 수 있다면 충분히 좋은 우리나라 말을 이용해서 어떤 개념이나 대상을 지칭하는데 어려움이 없을 것으로 보는데, 현재로써는 점점 더 나빠지고 있을 뿐이다.

 

뭐 이런 글에서 나 혼자 걱정해봐야 해결될 일은 아니지만 조금 씁쓸한 것은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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