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안전과 자유

아이루다 2014. 5. 19. 16:10

 

일반적으로 '냥이'라고 일컬어지는 귀여운 인간의 친구인 고양이는 10년 정도를 산다고 한다. 그런데 이 고양이가 우리 인간의 주변에서 혹은 자연계에서 인간의 보살핌 없이 살게 되면 그 평균 수명이 3년 안팎이 된다고 알려져 있다.

 

산다는 것이 꼭 오래 살아야만 가치 있는 것은 아니지만 생명체는 모두 오래 살고자 하는 본능을 가지고 있으므로 오래 산다는 것은 어떤 생명체에게 나쁜 일은 아니다. 실제로는 좋은 일이라고 보는 것이 옳다.

 

그런데 우리 인간은 개나 고양이를 키울 때 어떤 이유로 인해 그들에게 중성화 수술을 시켜주기도 한다. 쉽게 말하면 개와 고양이가 더 이상 새끼를 낳지 못하도록 하는 수술인데 일명 '발정' 상태를 막거나 공격적 성향을 제어하기 위해서 그런 수술을 한다.

 

나 역시도 암컷 고양이를 키워본 적이 있는데 정말로 봄부터 가을 무렵까지 아주 자주 발정기가 와서 묘하고 꽤나 거슬리는 소리 때문에 좀 고생한 기억이 있기에 솔직히 말해서 내 스스로 내가 키우는 고양이를 중성화 수술 시키고 싶지는 않지만 그런 수술을 하는 사람들 심정을 이해 못하는 바는 아니다.

 

그렇다면 만약 인간의 주거지역이라는 한정된 공간 내에서 중성화 수술을 받고 10년을 먹을 것 걱정 없이 편히 살다가 죽는 동물과 밖에서 생존과의 싸움 속에서 늘 긴장과 스트레스를 받고 살다가 3년 정도의 수명을 다하고 죽는 아무데나 갈 수 있는 자유는 있지만 밖에 사는 존재 중 과연 어떤 삶이 선택하는 것이 현명할 것인가?

 

이것을 이해하기 쉽게 말하자면 우리 인간의 문명 세계 내에서 80년을 사는 것과 큰 위협은 없지만 늘 먹을 것을 구하는 것이 힘들고 안전한 장소 조차도 구하기 힘든 상태에서 40년을 사는 것 중 과연 어떤 삶을 선택하는 것인가에 대한 질문이다.

 

그런데 이 질문에 대한 답은 너무도 쉽다. 당연히 안정적이고 오래 살 수 있는 삶을 선택하는 것이 현명하다.

 

그럼 이 질문에 하나의 조건을 더 더해보자. 편하고 오래 사는 삶에는 성적 욕구를 갖지 못하도록 수술을 받아야 하며 늘 30평 남짓한 공간 내에서 평생을 보내야 한다. 거기엔 자신을 먹이고 각종 편의를 봐주는 돌보미는 있지만 말은 통하지 않고 삶의 전체 기간인 10년을 홀로 보내야 할지도 모른다.

 

반대로 밖의 삶은 위험하지만 다양한 사건들이 매일 매일 일어날 수도 있고 짝을 만나 결혼도 하고 아이를 낳을 수도 있다. 그리고 능력만 된다면 세상 어디를 언제라도 갈 수 있는 삶을 살아갈 자유가 있다.

 

이젠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

 

만약 이 질문에 대해 쉽게 답을 얻었다면 둘 중 하나이다. 현재에 지극히 만족하면서 사는 사람이거나 혹은 정말 생각을 하지 않고 사는 사람일 것이다.

 

우린 보통은 자유에 대한 환상으로 인해 집 안의 정해진 공간 내에서 쉽게 살기 보다는 집 밖에서 야성을 지닌 채 살아가는 것이 좋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정말로 그런 선택을 하기 쉬울까?

 

우리가 처음부터 정해진 공간에서 정해진 규칙대로 몇 년간 살았다면 우리는 밖으로 나가는 것이 매우 두렵고 또한 그럼으로써 그 길을 가려 하지 않을 것이다. 반대로 우리가 처음부터 밖에서만 살았다면 그 좁은 공간에 들어와 살려고 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 인간은 '자유'를 매우 큰 가치로 여기고 이 자유를 위해 매우 오랜 시간 투쟁해왔다. 실제로 우리 인간의 역사는 자유를 쟁취하는 과정이라고 말할 수 있을 만큼 자유는 그리 소중한 가치였다.

 

그런데 우리의 자유는 과연 진정한 의미의 자유일까?

 

우리가 주장하는 자유를 잘 살펴보면 우리의 자유는 바로 안락한 30평의 공간에 살면서도 성적 역할을 포기하지 않을 수 있고 언제든 밖에 나와서 돌아다닐 수 있는, 두 가지 삶의 형태에서 온전히 장점만 뽑아낸 안락함과 자유로움을 동시에 만족시키려고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런 조건적이 붙는 자유는 그 조건을 유지시키기 위해 결국 다시 보이지 않는 끈에 잡혀 있는 꼴이 된다. 그래서 우린 세상 어디에도 갈 자유가 있지만 평생을 그냥 일정 공간에서 살아가기도 하고 스스로 자유를 주어도 누군가에게 끝없이 예속된 삶을 선택하기도 한다.

 

자유는 스스로 뭔가를 결정하고 행동하는 좋은 것이지만 다시 말하면 그것에 따른 책임을 온전히 그 자신이 짊어 지어야 한다. 우리가 어린 시절 아이일 때 부모님의 간섭을 크게 받지만 결국 나이를 먹게 되면 언젠가 독립을 하여 그것보다는 훨씬 큰 자유를 얻지만 싫든 좋든 먹을 것을 스스로 구해야 할 상황에 놓이는 것이다.

 

뜬금없는 질문을 하나 던져본다.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사람이 누구일까?

 

답은 바로 잃을 것이 없는 사람이다. 사람은 스스로 가진 것이 많을수록 그것을 잃을 것에 대한 두려움과 거기에 더해서 자신을 둘러싼 그 환경에 종속되어 스스로 자유를 잃어버리게 된다. 웃기게도 우리는 아무것도 가지지 않았을 때 가장 자유롭게 된다. 설령 그 자유가 그리 좋은 쪽은 아닐지라도 말이다.

 

우린 분명히 어린 시절에 아주 먼 거리의 길을 걸었었다. 자동차가 이렇게 많이 도로를 누비기 전에는 우리는 기차와 버스로 여행을 다녔으며 그것은 힘들고 오래 걸리는 여정이라도 해도 그것 자체를 낭만으로 여기기도 했다.

 

하지만 자동차의 보급과 함께 우리는 그런 불편한 여행을 하지 않아도 되게 되었다. 그렇다면 우리는 분명히 편해진 것이 분명한데 차가 없는 상황에 놓이게 되었을 때 어떤 먼곳을 가고자 한다면 얼마나 그것이 불편하게 느껴질까?

 

문명의 발전은 분명히 인류에게 편리함을 가져다 준다. 하지만 그 문명의 발달은 다시 우리 인간을 문명에 절대적으로 예속 시키는 역할도 한다. 즉 우리는 문명이 주는 편리함과 안전함을 얻지만 그것으로 인해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점점 더 자유를 잃어가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집 밖에서 사는 동물이 집 안에서 사는 동물보다 낫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비교할 수 없는 선택의 문제이다. 하지만 자유를 꿈꾸는 자들은 집 안에 있는 동물을 비난하고 반대로 집안에 있는 자들은 자유를 꿈꾸는 자를 어리석은 몽상가라고 치부한다.

 

만약 여기에서 두 가지 삶의 이득을 모두 얻고자 한다면 집 안에서 살되 그 조건에 예속되지 않는 스스로의 부단한 노력이 있어야 할 것이다. 세탁기는 편하고 수도를 틀면 뜨거운 물이 언제든 나오는 삶이 좋지만 그 세탁기가 없는 상황도 뜨거운 물이 안 나올 수 있는 상황도 받아드릴 수 있는 마음의 자세를 말하는 것이다.

 

이런 삶에 대한 태도는 의도한 것은 아니지만 그 개인에게 아주 큰 행복을 가져다 주기도 한다. 왜냐하면 우리는 우리가 편히 즐기는 문명의 이기에게도 고마운 마음을 가질 수 있고 그럼으로써 거의 공짜에 가까운 행복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지금은 모두들 없으면 못살 것 같은 스마트폰은 겨우 이 세상에 나온 지 4년이 조금 넘었다. 이것을 보면 우리가 얼마나 빠르게 그 어떤 것에 예속되게 되는지에 대해 실감할 수 있다.

 

스마트폰을 열심히 쓰는 삶은 문제가 아니다. 중요한 것은 언제든 그 장치가 없는 세상에 살게 되더라도 아무런 문제가 없는 삶을 만들어 놔야 하는 것이다. TV 역시도 마찬가지다. 무엇을 하든 그것에 예속되지만 않고 우리가 가진 본능적 자유로움만 유지할 수 있다면 그 어떤 것을 하든 아무런 문제가 없다.

 

문제는 단지 그렇게 살기가 쉽지 않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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