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죽음은 왜 나쁜 것인가?

아이루다 2014. 4. 11. 08:16

 

이 글은 얼마 전 읽은 죽음에 관한 책 한 권의 내용을 통해 시작된 생각의 단초가 짬짬이 물고 물리면서 연결된 그 동안의 생각을 정리해보기 위해서 쓴다.


이 글의 실제 제목은 '죽음은 왜 나의 입장에서 나쁜 것인가?' 이다. 그리고 이 말처럼 나는 내 입장에서 죽음을 바라보았다. 물론 그 형식은 '죽음이란 무엇인가' 에 대한 셰리 케이건 교수님의 책을 참고했다.


그 책에서 죽음이라 왜 나쁜 것인가에 대한 명확한 결론은 내리지 않았다. 단지 책에서는 몇 가지 죽음이 왜 나쁜 것인지를 설명했던 여러 사람들의 생각을 소개했었다. 그리고 물론 저자는 모든 입장에 대해서 객관적인 서술을 했을 것이나 그 자신은 분명히 '박탈' 때문에 죽음은 나쁜 것이라는 의견에 동조한다고 표현했다.


이 '박탈'은 쉽게 말하면 내가 죽지 않았다면 누릴 수 있는 많은 것들을 죽음으로 인해 누리지 못하는 상황을 의미한다. 그리고 상식적으로 생각해도 단순한 죽음 순간에 느낄 수 있는 아픔과 고통을 빼고 나면 우리에게 죽음은 더 이상 나쁜 것이 되기가 힘들다.


좋은 예로써 잠자다가 죽는 경우에 본인이 죽음을 전혀 느끼지 못하고 죽었다면 과연 여기에서 죽음은 남은 자들에게는 나쁜 것이지만, 정작 그 죽음을 당한 본인은 아무 것도 느낄 수 없는 상황인 것이다.


그렇지만 이렇게 죽은 이라도 살았다면 뭔가 더 좋은 삶을 살 수 있는 가능성이 있었을 테니 그것을 누리지 못한 것이 물론 미래의 일이기에 확률적인 문제라고 해도 아쉽고 안타까운 것이다. 그것을 다른 말로 '행복 가능성' 이라고 표현할 수 있고 이것을 뺏기게 됨으로써 결국 죽음은 나쁜 것이 된다는 의미이다.


그런데 나는 일단 이 의견에 대해서 보편적인 동의는 하지만 생각해보니 나의 경우엔 그리 딱 맞지는 않는 것 같다. 물론 나 역시도 박탈에 대한 두려움은 분명히 있다. 그리고 죽는 순간 느낄 수 있는 공포스러운 경험에 대한 두려움도 분명히 가지고 있다. 그런데 나에게 죽음이 가장 두려고 그래서 나쁘게 느껴지는 것은 다름아닌 내가 가치 있다고 믿는 것들의 종말이다.


이것도 이해하기가 쉬운 이야기이다. 쉽게 말해서 내가 의미 있다고 믿는 '건강'은 죽은 후에는 완전히 가치가 0이 되어 버린다. 차라리 사람간의 관계나 내가 뭔가 남긴 유산이 있다면 그것은 나의 죽음 후에도 다 잊혀질 때나 혹은 써서 없어져 버릴 때까지 의미를 유지하겠지만 육체의 건강은 그야말로 끝이 된다.


또한 내가 느낀 감정들, 사랑하는 사람이나 소중히 여기는 것들의 가치 역시도 모두 없는 것이 된다. 이 말은 좀 헷갈릴 수 있는데, 만약 나에게 내가 너무도 소중히 여기는 사람이 하나 있다고 쳤을 때, 그 사람 자체가 소중한 것도 좋지만 내가 소중히 여기는 가치를 느낄 수 있다는 점도 매우 중요하다. 그런데 죽음 후에는 소중한 사람은 남지만 내가 소중히 여겼던 마음은 나의 부재와 함께 사라져버린다.


이 설명은 조금 어려울지 모르겠지만 우리가 소중히 여기는 것들이 과연 그 자체인지 아니면 우리 개개인의 마음속에 있는 것인지를 파악하면 이해가 될 것이다.


아이를 키우는 부모는 아이를 소중하다고 느끼고 행복하겠지만 실제로는 소중한 아이를 키우는 그 자신이 행복하고 그런 존재가 있는 것이 행복하며 또한 그렇게 살아가는 자신의 감정이 소중하다. 그 누구도 그 자신의 감정을 벗어난 감정을 느끼지 못한다.


그래서 목숨을 버려도 아깝지 않을 사랑을 하는 이들도 각자의 행복을 위해 사랑을 한다. 그리고 이들 역시도 죽음 후에는 그가 그리 가치 있고 의미 있다고 믿었던 그 자신의 감정이 영원히 사라지게 된다.


실제로 그 모든 가치는 그 대상이나 물체에서 자연 발생적으로 나에게 전달되는 것이 아닌, 내 스스로가 어떤 다양한 과정과 노력, 시간들을 들여서 만들어 낸 것이기 때문에 그렇다. 하지만 대부분의 많은 사람들은 여기에서 그 가치가 마치 원래 존재하였고 그래서 그 자신이 사라져도 존재할 것처럼 믿기도 한다.


글이 좀 샜는데, 아무튼 내가 느낀 모든 가치는 나의 종말과 함께 같이 종말을 맞는다. 그 대상은 상황에 따라 일정기간이나 혹은 매우 오랜 시간을 통해 존재하여 또 다른 타인에게 나와 비슷한 가치를 느끼게 해줄지 모르겠지만 (위대한 자연의 모습 등등) 그것은 비슷한 것이지 같은 것은 아니다. 그리고 더군다나 그 가치를 느낀 주체는 내가 아닌 내가 알거나 모르는 이들이다.


결국 이런 죽음과 함께 오는 나의 가치의 종말은 현재 내가 추구하는 그 모든 시간과 노력을 바로 물거품으로 만든다. 그래서 매일 운동을 하는 나의 노력과 그것을 통해 느낀 행복감도 사라지고 또한 또 다른 여러 가지 내 자신이 가치 있다고 믿고 하고 있는 글쓰기, 밤하늘 별 사진 찍기, 목공 작업, 작은 시골집 짓고 살기, 텃밭 가꾸기 등등의 것들에 대한 가치가 내 죽음과 함께 사라진다.


물론 여기에서 내가 사라져도 내가 찍은 사진, 쓴 글, 만든 가구, 집 등은 계속 있을 것이라고 말할지도 모르겠지만 앞에서 말했듯 지금 말하고 있는 것은 바로 그것들을 가치 있다고 믿고 그것을 위해 살아가는 내 자신의 내부적 가치를 말하는 것이다. 컵 안에 담긴 물이 컵이 깨어지고 나서 어떻게 그 모습을 유지할 수 있겠는가?


그런 의미에서 보면 어쩌면 오늘 하루 이렇게 가치를 추구하면서 살아가는 일 자체가 결국 시간이 흐르고 나서 나의 죽음이 필연적으로 찾아오게 되면 완전히 무가치한 것으로 변화될 것이란 것을 예상해 볼 수 있다. 그리고 이것은 꽤나 슬픈 일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것을 알면서도 오늘 또 하루를 어제 그렇게 살아왔듯 살아갈 수 밖에 없는 것이 존재가 바로 우리 인간이기도 하다. 내일 지구가 멸망하더라도 오늘 사과나무 한 그루를 심겠다는 오래된 철학자의 한 마디 말이 어쩌면 반대로 우리 삶에서 추구되는 그 많은 것들의 무의미성을 대표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셸리 케이견 교수는 자신의 책에서 시한부 인생을 살아가는 어떤 한 젊은이가 자신의 강의를 들었다는 이야기를 했다. 죽음이 몇 달 밖에 안 남은 이 학생이 그 몇 달을 어떻게 보내야 할지 고민하다가 결국 죽음에 대한 강의를 듣기로 했다는 것이다.


물론 사람마다 1년을 줄 테니 네가 하고픈 것을 해라 라고 한다면 정말로 다양한 것들을 하겠지만 적어도 사람들은 그 동안 돈을 벌려고 하지는 않을 것이다. 물론 당장 먹을 것이 없다면 그래야겠지만. 아무튼 사람들은 대부분 자신이 그래도 살아 생전에 할 수 있는 가장 행복한 일을 하려고 할 것이다.


그런데 죽음에 대한 강의를 듣는 것은 그다지 행복해 보이지 않긴 하다. 그래서 그 젊은이가 유독 눈에 들어오기도 하는 것이다. 결국 현실은 현실로써 그 학생은 학기를 다 채우지 못하고 심해진 병으로 인해 휴학을 했어야 했고 그 후 죽음을 맞이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그 후 예일대에서는 이 학생에 대한 최종 학위에 대한 회의를 한 후 학위를 부여하기도 결정한 모양이다. (학기를 다 채우지 못했으니 원래는 그렇게 하지 않아야 맞다)


죽음 후 명백하게 사라질 자신의 가치를 위해 살아서 시간과 노력을 쓰는 우리 인간의 삶이란 얼마나 아이러니 한가. 어쩌면 그런 의미에서 우리 인간은 그냥 동물처럼 매일매일 자신이 행복할 수 있는 꺼리를 찾아 아무 생각 없이 살아가는 것이 가장 현명한 것인지도 모른다.


왜 자신의 삶 안에다가 결국 사라질 가치를 만들어 놓고는 죽음과 함께 같은 종말을 맞게 할까?


아니 그래서 실제로는 그 모든 가치는 오직 내 안에서만 머물러야 하는 것이 맞는 것 같다. 하지만 우리는 늘 누군가와의 대화를 통해 자신의 안에 있는 가치를 전파하기에 바쁘다. 그래서 자기 자랑, 자식 자랑을 하고 살아간다. 설령 그런 것이 아니더라도 자신이 가치 있다고 믿는 수 많은 사상과 생각들을 서로 교환하면서 의미 있는 삶이라고 자부하기도 한다.


나 말고 한 명의 사람이 나의 생각을 의미 있다고 해주면 내 안의 가치는 더 의미 있어지는 것인가? 그리고 또 백 사람이, 천 사람이, 인류 전체가 그렇게 믿어주면 그렇게 되는 것인가? 물론 인류 전체가 그렇게 믿어주면 이 세상에서 누가 그 가치를 부정할 수 있으랴.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우리가 가진 한계는 부정될 수 없으며 나 역시도 그런 존재 중 하나라는 사실이 오늘 하루를 살아가는 나를 힘 빠지게 하기도 한다.

 

행복한 삶에 대한 박탈을 의미하는 죽음은 그나마 가능성이다. 살아서 더 행복할지, 죽는 것이 나았을지 모른다. 하지만 존재 안에 머문 가치의 종말은 단 0.001%의 가능성도 없이 완벽한 끝을 의미한다. 그래서 박탈보다 가치 종말로 인해 나의 입장에서는 죽음이 훨씬 나쁜 것이다.

 

이것을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단 한 가지는 바로  내가 밖으로 내 놓은 내 자신의 가치를 모두 안으로 갈무리하여 꽁꽁 싸매어 두는 것이다. 그리고 나 역시도 박탈이 내가 죽음을 나쁘게 보게 되는 이유가 되어야 한다.


아마도 정말로 그럴 수 있는 날이 온다면, 나는 이 블로그의 글을 그만 쓰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런 날이 오길 바라면서도 두렵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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