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공간 여운

아이루다 2014. 3. 4. 09:04

 

꽤나 오래 전, 나는 강원도 화천 지역에서 군 생활을 했었다. 당시 나는 흔히 말하는 철책선에 있는 부대에서 근무 했었는데 제대한지가 벌써 20년 가까이 되는데도 불구하고 이상하게 군대에 있을 때 기억은 그만큼이나 오래 된 것처럼 느껴지지 않는다. 그리고 정말 아주 가끔 군대 꿈을 꾸곤 한다. 그 꿈의 내용은 보통 재 입대 하거나 먼저 제대한 고참들이 다 돌아오는 꿈이다.

 

우리나라 지형에서 가장 추운 지역은 북쪽이면서 내륙인 지역이다. 그리고 그곳은 바로 철원, 화천 지역인데 내가 근무한 부대가 그 부근에 있었기 때문에 나는 그 지역의 추위를 제대로 경험할 수 있었다실제로 그곳은 눈이 많이 오는 것은 아니지만 정말 춥긴 추웠다그 덕분에 10월만 되도 겨울 분위기가 났고 한 참 시간이 지나 3월이 되었어도 봄 분위기가 느껴지지 않았다. 그래서 뉴스에서 남쪽 지방 벚꽃축제 이야기가 한참 일 때도 그곳은 아직도 겨울을 보내고 있었던 기억이 난다.

 

3월 중순 쯤인가 정확히 기억은 안 나지만 아무튼 봄이 된 무렵에 휴가를 나온 적이 있었다. 부대에서 한참을 나와 서울까지 가는 버스를 타고 서울을 거쳤다가 당시 부모님이 계시던 전라북도 군산까지 가는 여정 중 나는 내가 이용했던 버스에서, 기차에서 빠르게 스쳐가는 창 밖의 풍경을 바라 봤었는데 놀랍게도 그 속에서 단 몇 시간 만에 계절이 겨울에서 봄으로 변해갔던 기억이 지금도 꽤나 뚜렷하게 남아 있다.

 

3월의 화천은 봄이 아니었다. 아직도 그곳은 눈이 내리고 영하의 날씨가 거의 계속 되는 지역이어서 산은 온통 겨울 속에서 빠져 나오지 못하고 있었다. 그 지역의 산에는 앙상하고 잿빛으로 변한 가지들이 아직 다 가지 않은 겨울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는데 서울까지 오는 길에 점점 푸르러진 산들은 군산에 도착할 무렵이 되자 완연한 봄의 기운 속에서 그 푸른 생명력이 넘쳐나는 봄의 산이 되어 있었다.

 

그 때 내가 이동한 거리는 약 400km 이며 시간으로는 8시간 정도 걸렸으리라. 나는 그렇게 하루 만에 군 부대를 떠나 고향집까지 오면서 겨울이 가고 봄이 오는 것을 눈으로 보았었다. 그때 분명히 나는 추운 아침에 일어나 부대에서 주는 단체 식사, 일명 짬밥을 먹고 준비한 군복을 입고 부대에서 나온 후 반나절 남짓 여행을 거쳐 저녁 밥을 먹을 땐 집에서 어머니가 해주시는 따뜻한 식사를 먹을 수 있었다.

 

모든 행동이 규제된 공간과 반대의 자유가 있던 공간짬밥으로 불리던 단체 식사와 집에서 먹는 어머니가 정성스럽게 차려주신 , 아직도 추운 겨울 속에 있는 공간과 봄이 한창이고 곧 벚꽃이 피어나는 시기가 오는 고향 집. 비록 많은 시간을 들여서 이동 했지만 나의 하루 속에서 이 변화는 정말로 어마어마 했다.

 

그 때문일까집에 도착 한 첫날은 마치 시차 적응처럼 낯설었다. 특히 잠을 자고 난 그 다음 아침에 나는 한참 동안이나 내가 어디에 있는지 생각해야 할 정도로 나의 의식과 자각 능력은 군 부대를 떠나지 못하고 있었다. 어쩌면 그것은 당연했는데 그렇게 익숙해진 공간을 갑자기 벗어나 완전히 다른 어떤 곳으로 갔을 때 우린 흔히 이런 혼란스러움을 느끼게 된다.

 

나는 오늘 이것을 공간 여운이라고 부르고 싶다그리고 이 공간 여운은 우리의 기술 발전이 만들어 낸 것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 인간이 일상적으로 걸음보다 빠른 운송 수단을 개발해서 타고 다닌 지는 이제 겨우 백 년 남짓 하다. 영국의 산업혁명을 일으킨 증기 기관의 힘은 내연 기관으로 발전하고 그 후 대량 생산 체제의 시대를 연 산업화는 현재 대한민국에 웬만한 집에 차 한대 쯤은 있기 마련인 시대로 변화 되어 왔다.

 

이 말은 지금은 너무도 당연하게 느끼는 이런 빠른 이동을 누릴 수 있는 시간이 오랜 진화 기간에 대비 시켜보면 정말로 짧은 시간이었다는 것을 의미 한다. 그것으로 인해 우리의 공간과 시간을 인지하는 우리 몸에 새겨져 있는 본능적 감각과 기술 발달로 인해 너무도 빠르게 이동 가능한 시대를 살아가게 되면서 뭔가 부조화가 일어나는 것이 아닌 가 싶다.

 

만약 조선시대라면 내가 군부대에서 휴가를 나와서 집에까지 가려면 최소 한 달은 걸었어야 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 한달 사이에 나는 미세하게 변하는 하루하루의 계절 변화를 나도 모르게 천천히 받아드리고 결국 고향집에 도착했을 땐 이미 겨울은 이미 한참 과거이며 봄은 현실이 되어 있었을 것이다. 즉 내가 천천히 이동함으로써 어떤 공간이나 시간에 '적응' 할 수 있는 시간을 가질 수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우리의 뇌 속에서 일어나는 주변에 대한 적응 능력이 빠른 이동을 따라가지 못해서 내가 그 어떤 큰 변화에 적응할 여유를 주지 않고 있기 때문에 그런 현상이 일어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오늘도 나는 영월 집에 오기 위해 아침에 서울 집에서 출발을 했고 지금은 서울이라는 공간을 떠나 이곳에 오게 되었지만 나는 아직도 서울 집의 여운이 남아 있음을 느낀다. 물론 서울에서 그리 부산하게 산 것은 아니지만 아침에 눈을 뜨고 일어나 출근을 준비하고 한참을 걸어서 회사까지 이동 속에서 경험했던 그 많은 공간내의 시간들에 대한 기억이 아직은 현실감 있게 느껴진다.

 

나의 몸이 오랜 시간도 아닌 단 두 시간 만에 이곳까지 왔기에 나의 머리 속은 아직도 그곳을 완전히 벗어나고 있지 못한 것이다. 이것은 보통 사람들을 만나 재미나게 논 후 집에 돌아간 후에도 잠시간 동한 그 흥겨움이 남아 있는 것과 유사한 듯 하다. 우린 그것을 여흥이라고 표현하기도 하는데 아마도 우리가 우리의 감정 상태를 공간적 차이로 인해서 바로 끊어 낼 수 없기 때문에 나타나는 현상으로 보여진다. 즉 공간은 급격하게 변했지만 감정은 서서히 그 공간에 적응해 가기 때문일 것이다.

 

이번 영월 방문도 역시 일주일을 있다가 갈 생각인데 아마도 서울로 다시 간 날은 적응했던 영월의 시간에 벗어나지 못해서 한 동안 서울이란 공간이 꽤나 낯설 것이다. 그것은 실제로 과거 몇 차례 반복했던 경험이다.

 

100년 전부터 급격하게 발달 해 온 인간의 기술력은 우리가 가지고 있는 신체적 한계를 많이 극복해 내었다. 그래서 우리는 세상의 그 어떤 동물보다도 빠르게 이동하고 높게 날며 또한 깊은 물 속으로도 들어 갈 수 있다. 심지어 우린 지구를 떠난 공간에도 다녀 왔다.

 

눈으로는 보지 못했던 것들을 볼 수 있으며, 눈과 귀를 통해 얻을 수 있는 정보를 우리가 만든 장치 속에 저장해 둔 후 언제라고 다시 볼 수 있게 되었고 거대한 네트워크 망을 통해 언어적 한계만 있을 뿐 세계 어느 곳에 있는 정보라도 쉽게 접근이 가능해졌다. 물론 이 언어적 한계 역시도 얼마간의 시간이 흐른 후 모두 자연스럽게 해결 될 것이다.

 

만약 외계에서 어떤 훨씬 발달 된 존재들이 왔을 때, 우리의 문명 수준은 형편없을지 모르지만 실제로 우리가 이룩한 기술 문명의 수준은 과거 우리의 모습을 생각하면 정말로 대단한 수준임이 분명하다. 하지만 문제는 우리의 이런 물리적 발달과 다르게 우리의 정신적 영역의 발전은 거의 이루어지지 못한 것이 사실이다. 물리적인 부분은 만들면 되지만 정신적인 부분은 그 실체가 없으니 만들기가 불가능 하다. 단지 우린 여러 가지 물리적 약품을 통해 우리 뇌를 속이거나 진정시키는 수준에 불과한 것이다.

 

앞에서 말한 공간 여운 역시도 이런 물리적 발달과 정신적 정체가 가져 온 불일치 현상에 일종으로 나는 보여진다. 물론 이렇게 말하는 그 어떤 과학적 근거도 없지만 그런 식으로 우리에게 느껴지는 수 많은 미세한 변화들이 결국 우리의 정신 체계를 혼란스럽게 만드는 원인이 아닌가 싶다.

 

현대인들은 그 외부적으로 나타난 현상이 심각하지 않아서 그렇지 실제로 많은 자잘한 내부적 문제를 안고 살아 간다. 기술 문명의 발달은 분명 우리를 무척 편하게 해주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그만큼 행복해지진 않았던 것이다.

 

시멘트로 이루어진 세상, 밤을 잊은 도시, 계절의 변화가 거의 영향을 미치지 못하는 편한 공간공간과 공간을 쉽게 옮겨 주는 교통 수단, 사람간의 교류가 참으로 편하게 해주는 기계들, 심심할 틈이 없게 해주는 각종 오락 도구들이 우리를 더욱 편리하게 해주어서 실제로 행복하게 해주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면 우리가 그것들 때문에 잃어버린 행복은 없을까?

 

우리는 질척거리지 않은 땅을 얻었지만 온도와 습도 조절을 불가능한 공간을 만들어 냈고, 24시간을 움직일 수 있지만 편안한 휴식의 시간과 잠을 잃었으며, /난방 기술로 인해 따뜻한 겨울과 시원한 여름을 보내게 되었지만 계절의 변화를 거의 인식하지 못하게 되었고, 빠른 이동이 가능해졌지만 그 만큼이나 빠르게 적응하지 못한 정신적 혼란함과 운동 부족 현상을 얻었으며, 수 많은 사람과 쉽게 교류가 가능해졌지만 결국 우리를 정말로 행복하게 해주는 깊은 관계를 맺기가 더욱 어려워졌고, 심심할 틈은 없지만 사색을 위한 시간은 잃어버린 건 아닐까?

 

우리는 해외 여행을 하고 난 후 느끼는 시차 적응은 꽤나 알려진 증상인데 이 역시도 일종의 시간 여운이 아닌가 싶다. 급격하게 변화된 밤과 낮에 대한 절대적 시간 변화를 몸이 바로 적응하지 못해서 나타난 증상이니까 말이다. 즉 이 시간 여운 역시도 빠른 이동이 불가능했다면 결코 느낄 수 없는 증상이라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이 시차 문제와는 달리 공간에 대한 느린 적응, 즉 공간 여운에 대해서는 거의 알려진 바도 없고 있다고 해도 너무 미세하여 이것에 대해 그리 생각할 필요가 없다.

 

나는 가끔은 이런 우리가 느끼지 못하지만 실제로는 존재하는 것으로 판단되는 이런 미세한 불일치가 결국 우리를 조금씩 생채기 내고 행복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 아닌가 싶다. 물론 우리는 그것을 무시할만큼 큰 행복감을 얻기에 그런 것쯤은 인식하지 못해도 아무 문제가 없지만 언젠가 그런 큰 행복을 얻기가 힘들어질 경우 과연 무엇을 이용해서 오래된 습관이 되어버린 그것들을 어떤 방법으로 무시하고 살아 갈 수 있을까?

 

부대를 떠나 고향 집으로 가는 길과 다시 부대에 복귀하는 과정은 완전히 정반대의 경험을 하게 하는데 이때  복귀의 여정은 이 공간 여운 현상으로 인해 더욱 더 깊은 불행을 느끼게 해주었다. 나의 생각과 몸은 천천히 적응해가고 싶은데 아침에 집에서 출발한 나는 저녁엔 부대 안에서 다시 짬밥을 먹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앞으로는 그리 경험하고 싶지 않은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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