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삶의 두 얼굴

아이루다 2014. 3. 10. 07:50

 

우연히 MBC에서 방송되었던 다큐를 하나 보게 되었다. 프로그램 제목이 M 다큐 스페셜인 것 같은데 그 내용이 내 눈을 끌었다.

 

김광석이었다.

 

그 이름만 들어도.. 그 노래를 들으면.. 이상하게 마음 한켠이 아련하다. 그런데 그것이 나만 그런 것은 아닌 것 같다. 김광석은 노래를 불렀던 가수 중 하나 였지만 그가 떠난지 수 십년의 시간이 흘렀음에도 아직도 또 다른 김광석은 나오지 못하고 있다.

 

우리나라 가요계는 이미자, 조용필, 서태지로 이어진다고 다들 말 하지만 내 생각엔 그냥 우리나라의 대중 가요계엔 김광석과 그가 아닌 사람들로 나뉘는 듯 보인다. 물론 내 오바스러움이다.

 

그런 그가 그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33세의 나이, 콘서트 공연 1000회를 채운 95년도 8월을 넘긴지 겨우 6개월 후, 96년도에 벌어진 일이었다. 그의 죽음엔 아직도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가 있다고 한다.

 

그가 떠난지 벌써 20년 가까운 시간이 흘렀다.. 하지만 지금도 매년 한 살씩 더 먹어가는 사람들은 새롭게 김광석의 팬이 되고 가고 있다. 그리고 많은 이들은 그의 노래를 힐링이라고 말한다. 그의 노래는 우리를 치유시켜 준다고.

 

우리는 왜 그를 보내지 못하고 있을까? 이제 제법 맛난 것도 먹고 꽤나 살만큼 살고 있는데 왜 이리 20년 가까운 시간이 넘게 오래 전 불렸던 그의 목소리를 되찾아 가고 있을까? 지금 우리는 도대체 무엇을 듣고 싶은 것일까? 그리고 그의 목소리는 우리에게 무엇을 말해주고 있을까?

 

질문은 쏟아지지만 나는 그것의 답을 안다고 생각하면서도 표현할 방법이 없다. 그리고 아마도 누구도 그렇게 느낄 것이다. 그것을 꼭 설명하지 않아도 그의 노래를 듣던 모든 사람들은 다 고개를 끄덕여 줄 것이다.

 

나는 보통 거의 그가 노래를 하기 전 무대에 앉아서 어떤 이야기를 하던 모습이나 그 만이 할 수 있는 노래를 부르는 모습만 기억하고 있다. 하지만 그의 그런 모습은 그의 전부는 아니였을 것이다. 아마도 그는 돈을 벌어어야 했고 그가 짊어진 삶을 살아가야 했을 것이다. 돈을 풍족히 벌었을지도 모르고 돈이 늘 부족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결국 그는 지금도 정확히 알 수 없는 이유로 이 세상을 버리고 떠났다.

 

무대에서 노래를 부르던 그의 표정은 참 행복해 보인다. 관객과 소통하고 자신이 부르는 노래에 흠뻑 빠져서 부르는 그 당시 모습은 보기에 좋다. 그런데 그가 그 젊은 나이에 그 목숨을 놓아 버렸다. 많은 사람들이 자살하는 우리나라에서 그의 죽음 역시 그런 자살 중 하나였다. 아니 타살이라고도 한다. 진실은 알 길이 없다.

 

과연 그에게 현실이란 어떤 것이었으며 또 얼마나 무거웠길래 그렇게 떠나야 했던 것일까? 그의 노래를 들으러 온 그 많은 이들을 어루만져주던 그는 왜 그 자신은 스스로 어루만져주지 못한 것일까? 그것이 자살이든 타살이든 그 현실이 그의 비디오 동영상 속 표정과 노래와는 다를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지금 나를 한껏 이끌고 있는 것은 감성이다. 우리 삶을 나누는 두 가지 중 하나이다. 그런데 또 다른 것은 슬프지만 바로 '현실' 이란 녀석이다. 우리는 이 감성과 현실 속에서 매일매일 출렁거리고 있다.

 

우리는 겨울 바다의 쓸씀함을 느끼고 그것에 흠뻑 취하는 감성을 가지고 있지만 또한 그 바다에서 느낀 살을 에이는 추위를 현실로 느낀다. 현실은 감성을 또한 감성은 현실을 떨치지 못한다. 이 둘은 서로를 떼지지 못하기에 더 절실하다.

 

나에게도 현실이 있고 감성이 있다. 현실은 걱정이 많고 감성은 마음 한켠이 따뜻하다. 걱정은 걱정대로 흘러가고 감성은 감성의 길로 간다. 나는 그의 노래를 들으면서 현실의 힘에서 잠시 풀려 한껏 감성쪽으로 움직인다. 김광석의 노래는 그 누구의 노래보다도 그런 힘이 있다.

 

하지만 나는 또 시간이 지나면 다시 현실로 돌아와야 한다. 한 없이 머물고 싶지만 그것은 불가능하다. 그렇지만 돌아와야 했던 현실은 다시 내가 또 감성 속으로 들어 갈 수 있는 힘이 되어 준다. 나는 영원히 이 둘의 경계를 머물다가 결국 나 역시 삶을 마감하게 되리라.

 

넓은 TV 화면 속에서 보이는 아프리카 대 초원의 생과 사의 현장. 먹고 먹히는 그들의 삶을 바라보면서 나는 안타까움과 생명을 지키고자 하는 그 힘을 느끼면서 감동을 받는다. 하지만 그 화면에 잡힌 그들은 모두 최선을 다하고 있는 현실 속에 있을 뿐이다. 오직 보고 있는 나에게만 그것이 감성으로 다가온다.

 

우린 이렇게 내 자신이 아닌 것에 대해서는 그리 한없이 현실을 빼주기도 한다. 마치 나만 현실을 가진 냥 내 현실만이 힘들고 내 현실만이 진정한 고통으로 느껴진다. 그래서 다른 이들의 현실은 이해는 가지만 거기까지가 전부일 뿐이다.

 

현실은 생명을 연장 시켜주고 감성은 삶을 살 수 있게 해준다. 하지만 우린 지금 생명 연장만을 위해 살 수는 없다. 우리에게 어쩌면 세상을 더 살아가게 해주는 힘은 먹을 것이 아니라 우리를 인간답게 느끼게 해주는 감성일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살기가 힘들어질수록 우린 좀 더 먹을 것에 집착할 수 밖에 없다. 그래서 상대적으로 더욱 김광석의 노래가 주는 감성에 메말라 있는지도 모른다.

 

이 시대가 김광석을 다시 불러 내고 있다. 우리를 다독여 달라고 그 힘든 삶을 살아가 간 오래된 그를 다시 불러 내어 대중 앞에 서게 한다. 그것은 우리가 그 만큼이나 힘들다는 뜻일 것이다. 그렇다. 많은 사람들이 진짜 힘들다.

 

나도 많이 힘들었는지.. 한 동안 그의 노래만을 듣고 다녔었다. 그 노래가 청승맞고 우울하게 느껴진다면 아마도 그 사람은 지금 행복한 사람일 것이다. 하지만 그의 노래가 마음을 다독여주고 어깨를 두두리면서 '괜찮아' 라고 말해 주는 것 같다면 당신은 지금 힘든 것이다.

 

그런데 나는 이런 힘듬이 그리 싫지 않다. 아마도 그 힘듬이 내가 먹을 것만을 먹고 살아야 하는 생명체에서 내가 믿는 좀 더 인간이 되었기 때문이라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현실적으로 부정하긴 힘들지만 내가 소비하는 그 모든 물질적 가치들에 대한 나의 집착을 조금이라도 없앨 수 있기 때문이리라.

 

결국 삶이란 것은 이 현실과 감성의 조화로움 속에서 그 어느 하나도 소흘히 여기지 않는 진지함이 아닌가 싶다. 그래서 살아가는 그 모든 존재의 가치와 살아가면서 추해지지 않는 인간으로써의 가치를 한 몸에 모두 모아 두고서 살아가야겠다.

 

그것이 내가 살고 싶은 삶이다.

 

2014년 3월의 어느 날 그의 노래는 서른즈음을 훌쩍 뛰어 넘은 나를 한참 멍하게 만든다. 그리고 여기에도 광고라는 현실이 존재하고 있다. 나는 그를 노래를 듣기 위해 광고를 봐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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