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봄

아이루다 2014. 4. 6. 07:25

 

벌써 10년이 지난 영화였다. 2003년 제작으로 되어 있으니 아마도 그 때 개봉을 했을 것이고 나는 거의 무의식 중에 이 영화의 제목에 대한 기억만을 가지고 있었나보다. 그래서 우연히 이 영화를 보게 될 기회가 생겼을 때 뭔가 묘한 끌림을 느끼면서 천천히, 아주 천천히 보기 시작했다.


이 영화의 감독인 김기덕씨는 우리나라에서 꽤나 손꼽히는 괜찮은 감독 중 하나이다. 온통 상업적인 목적만 갖은 영화들이 판치는 곳에서(이 표현은 좀 문제가 있다. 영화가 비상업적이란 의미는 원래 존재할 수 없다) 나름 예술적 영역을 품고 관객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하려고 노력하는 흔하지 않는 감독 중 하나이다.


하지만 나는 그의 영화를 그리 즐겨보지는 않는다. 대표적인 작품들도 거의 안 봤고 기껏해야 서너 편의 작품을 감상해왔다. 누구나 그렇겠지만 김감독의 작품은 보기가 좀 무겁다. 특히 비정상적인 상황과 다소 많이 뒤틀린 인물들이 많이 출연하고 있어서 더 그렇다. 무엇을 말하고 싶은지는 알겠지만 그 표현법이 다소 생소하기에 그렇다.


그런 와중에 2003년 감독 스스로 '쉬어간다' 라는 표현을 한 작품이 바로 이 영화이다. 그의 작품을 많이 보지는 않았지만 아마도 가장 밝고 아름다운 작품이 아닐까 한다. 물론 영화 속 이야기는 그렇지 않다. 단지 이 영화를 전체적으로 아우르는 주왕산의 사계, 즉 봄, 여름, 가을, 겨울의 풍광이 너무도 아름다워서 그렇게 느껴졌다. 거기에 더해서 호수와 같은 그 공간에 떠 있는 수상에 만들어 진 절이란..


이 영화를 보면서 특이한 점 하나는 바로 '문' 이다. 문은 문이지만 담이 없는, 연결된 것이 없는 문이다. 아마도 감독은 이 문을 통해 우리 인간이 가진 경계선을 표현하고 싶었나 보다. 네 개의 계절로 표현되는 동자승으로 출발해 소년, 청년, 장년으로 이어지는 한 사람의 인생을 그려낼 때 이 문은 바로 규칙과 깨어짐, 떠남과 돌아옴의 상징으로 의미되어진다.


나는 이 문에 대한 장면을 보면서 내가 가진 문에 대한 개념이 확장됨을 느꼈다. 그것은 마치 우리가 늘 상 살고 있어서 인식하지 못하는 집이란 공간과 비슷하다. 특히 아파트와 같은 공간은 그것이 더 심한데 바로 2M 위로 알지 못하는 타인이 살아가고 있고 또 바로 밑 2M에도 또 다른 사람이 살아가고 있다.


만약 아파트의 한쪽 벽면을 뚫어서 그 세 층의 삶을 동시에 바라보면 과연 어떤 느낌일까? 그 안에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은 콘크리트 바닥으로 혹은 천정으로 막혔다고 믿으면서 그 집을 자신만의 온전한 공간으로 믿고 살아간다. 하지만 한쪽 벽이 뚫리는 순간 이 공간은 정말 갑자기 심하게 우스워지기 시작한다. 위층, 중간층, 아래층 모든 이가 동시에 화장실에 들어가기도 하고, 싸우기도 하고, 밥을 먹기도 할 것이다.


이 영화에서 문은 문이 가진 원래 의미인 공간의 나눔을 탈피한다. 여기에서 문은 폐쇄된 공간의 의미가 아닌 우리가 마음 속으로 가지고 살아가는 경계지점을 말하고 있다. 담이 없는 문은 누구나 문을 통과하지 않고도 공간을 넘나들 수 있지만 영화 속에서 인물들은 고집스럽게도 문을 통해 넘나든다. 그리고 여름 편에 해당하는 청년은 결국 야밤에 여인에게 가기 위해 걸려서 열리지 않는 문을 통하지 않고 나오게 된다.


우리가 살고 있는 집 역시도 그것의 공간 폐쇄성을 믿고 살아가지만 실제로는 그 역시 의식의 경계지점이 된다. 우리는 집으로 정의된 공간 내에서 자신이 느낄 수 있는 가장 큰 안락감을 얻는다. 그것은 단지 콘크리트로 된 벽 때문이 아니다.

 

이 영화의 두 번째 특이한 점은 - 물론 나에게만 그렇지만 - 주인공이 과연 누구인가에 대한 문제이다. 그냥 보기엔 당연히 네 명이 연기하는 한 인물이지만 나는 어쩌면 그들은 정말로 한 시절만을 담당할 뿐 진짜로 그 영화의 주인공은 네 개의 계절을 모두 보내는 단 한 사람인 노스님을 주인공으로 보고 싶다.


영화는 한 사람의 삶을 네 개의 계절로 표현했지만 나는 이 주인공으로 보여지는 사람보다는 네 개의 계절을 같이 하는 스님의 삶이 더 끌렸다. 아이에게 돌을 메어주기도 하고, 여인을 찾아 떠나는 청년의 뒷 모습을 보기도 하고, 살인을 하고 돌아온 그에게 다시 승복을 내어주고 반야심경을 새기도록 하며, 그가 떠난 후 스스로 삶을 거두는 스님은 왠지 모르게 내 마음 한 켠을 차지해 버렸다.


실제로 이 영화의 전체적인 이야기는 꽤나 뻔하다. 아마도 그 멋진 촬영지와 몇 가지 뛰어난 감독의 연출이 없었다면 정말로 진부한 이야기가 될 수 있는 주제였다. 인간의 고뇌, 죄, 원죄, 고행, 깨달음 등으로 이어지는 이 이야기는 과거 많은 경험을 통해 우리에게 그리 낯선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이 영화를 보고 난 후 읽은 다른 이들의 영화 평을 보니, 역시나 자신이 보는 관점에서 보고 있다. 특히 겨울에는 김 감독 본인이 출연해서 고행을 하는 모습을 보여주는데 어떤 영화 평론 전문가는 이 장면의 신파적 느낌을 지적했고 또 다른 이는 이 장면에서 그 무거운 짐을 공감하면서 울고 싶었다고 한다. 같은 장면인데도 이렇게 사람들을 다르게 받아 들인다.


나는 솔직히 이 장면이 좀 지루하긴 했다. 단지 나는 이 순간에 내 뒤에 무엇이 매달려 있는지 궁금했고 그것을 나는 어떻게 하고 있는지를 생각했다.


생각해보면 영화에서 맷돌로 표현되는 우리네 삶에 누구나 가지고 있는 짐을 끌기 위해서 우린 보통 힘을 키우는 방향을 선호한다. 즉 더 많은 돈을 벌고 더 강한 신체를 갖길 원함으로써 우리가 지고 있는 짐을 더 빨리 더 수월하게 끌고 가길 원한다. 문제는 모든 물체의 무게는 속도가 붙을수록 더 무거워진다는 것이고 또한 그것이 평편한 곳이 아니라면 끝없이 어딘가에 걸리게 된다는 점이다.


이 문제를 해결하는 다른 하나의 방법은 바로 짐을 줄이는 것이다. 그렇지만 그것을 실천하기란 너무도 어렵다. 누구나 알겠지만 욕망을 버리는 것은 참으로 힘들기 때문이다.

 

이런 문제를 감독은 초기에 물고기, 개구리, 뱀에 아이가 장난을 치며 메달아 놓은 돌을 통해서 보여주려고 한다. 이 돌은 아이의 천진난만한 악함에 대한 설명이기도 하지만 또한 그 돌을 메단채 떨쳐버릴 방법을 알지 못해서 힘껏 발을 차지만 결국 그 자리에서 맴도는 개구리의 모습을 통해 우리의 인간의 삶을 이입시킨다. 물론 이것은 나만의 해석일 수도 있다.


영화 속에서 노스님은 자신의 첫 여자였던 여자가 떠난 후 그녀를 잊지 못하는 청년 승에게 말한다. 욕망은 집착을 낳고, 집착은 살의를 품게 한다고. 정말로 많이 들어 본 말이지만 과연 우리 중 얼마나 이 말의 의미를 진심으로 제대로 이해하고 있을까?


실제로 세상을 살아가다 보면 이런 느낌을 받을 때가 있다. 어떤 좋은 말을 혹은 삶이란 과정에서 진심으로 우러나는 가치를 가진 말을 정말로 그 의미를 그대로 이해한 사람이 얼마나 될까? 라는 생각 말이다. 우습지만 아마 이 말 자체도 그럴 것이다. 어떤 말을 제대로 이해한다는 뜻이 정말로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를 인식하는 이가 얼마나 될까?


그래서 아마도 아는 만큼 세상을 본다는 말이 나온 것 같다.


청년이 살인을 저지르고 난 후 절로 도망 왔다가 반야심경을 새기고 난 후 형사들과 함께 죄값을 치르러 떠나는 광경에서 잠시 배는 한 곳에 머무르고, 이것에 당황한 형사가 '배가 움직이지 않는다' 라고 소리치는 장면에서 스님은 아마도 마지막 세속의 인연을 떠난 보낸 듯 하다. 배가 움직이지 않자 청년은 놀란 표정으로 뒤를 돌아보고 그때 스님은 잘가라고 말해준다. 노스님은 그렇게 인연을 잠시 붙잡는다.


그 후 그들이 떠난 문이 스스로 닫히고, 그들이 타고 간 배가 스스로 돌아오는 장면에서 한 가지가 해결되고 한 가지가 느껴졌다. 해결된 것은 순수한 의문, 도대체 저 스님은 배가 없는데 어떻게 육지로 나왔을까? 였고 느껴진 것은 이 스님의 '물아일체(物我一體)' 였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기억에 남는 것은 바로 폐(닫을 폐, 閉) 라고 쓰여진 종이를 귀, 눈, 코, 입에 붙이고는 스스로 호흡을 멈추는 장면이었다. 살인을 한 청년이 그랬고 스스로 떠나는 스님이 그랬다.


나는 관객이다. 그래서 이 영화를 직접 쓰고 연출하고 출연까지 한 김기덕 감독의 마음속을 알 길이 없다. 그래서 이 글 역시 온전히 내 머리 속에서 나온 것이다. 그것이 확대되어 해석되었든 의도한 바와 달리 다르게 해석되었든 간에 그것은 감독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단지 이런 좋은 영화를 만들어 낸 감독에게 감사하다고 말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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