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집착에 대해서

아이루다 2014. 5. 2. 09:19

 
누군가 나에게 사랑과 집착의 차이가 무엇이냐고 질문을 던진다면 나는 '음..' 하고 잠시 생각에 빠져들 것 같다. 물론 생각을 하다 보면 내 머리 속에서는 이것을 나름 나누는 기준이 있는 듯 느껴지기는 한데 이것을 말로 꺼내서 설명하려니 참 어렵다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그 이유가 바로 사랑을 하는 두 사람의 관계적 특이성으로부터 출발하고 있다는 생각도 더해진다.
 
인간 관계 중 가장 독과점이 심한 종류가 바로 남녀간의 그것인데 이것으로 인해 우리는 그 모든 인간관계에서 유일하게 연인 사이에서는 상대에게 100% 집중을 요구할 권리와 그것을 지켜야 할 의무를 갖게 된다. 그리고 이 의무는 그것을 제대로 해내지 못하거나 혹은 의심을 받을만한 행동을 한 사람들에게 일종의 구속과 비판의 근거로도 활용 되기도 한다.
 
하지만 이 사랑을 기반으로 한 남녀 관계의 특이성으로 인해 우리는 과연 어디까지가 상대에게 허용되는 범위인지 정의하기가 어렵다. 그래서 보통은 개 개인별 가치관에 준해서 판단하지만, 이것을 일반화 시키기란 꽤나 난감한 일이다. 현실 세계에서 보면 어떤 연인들은 거의 친구 수준처럼 느슨하게 유지하기도 하고 또 다른 연인들은 그 둘 이외의 거의 모든 관계를 단절시킬 정도로 서로에게 집중하기도 한다.
 
하지만 상대에 대한 요구와 권리가 지나치게 되면 언젠가는 사랑이란 감정이 집착으로 변질되기 마련이다. 물론 그 경계를 명확히 할 수 없다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사랑이 집착이 될 순 없다. 반대로 집착이 사랑이 될 수도 없다. 사랑이란 것은 감정이지만 집착은 어떤 상태이다. 그리고 집착은 단지 사랑하는 관계에서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다.
 
그나마 사랑이란 감정에 있어서 집착은 오래되고 상대적으로 파악이 쉬운 편이지만 보통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집착은 그 구분이 매우 모호하다. 사랑의 경우엔 사람과 사람의 관계라서 집착을 하는 쪽과 받는 쪽 모두 의사 표현이 가능하기에 어떤 상태에 대해 그것을 집착이라고 상대적으로 정의 내릴 수 있는 반면 사람과 물체 혹은 인간이 아닌 그 어떤 것들을 대상으로 한 집착은 집착을 받는 쪽에서 아무런 의사를 표시할 수 없기에 그것이 집착인지 집중이나 열정인지 구분하기가 힘들다.
 
나를 포함한 주변 사람들을 면밀하게 보면 개인마다 조금씩 다른 형태의 집착을 하나 둘 정도는 가지고 있는 편인데, 재미있는 사실은 보통 본인은 그것이 자신의 집착이라고 잘 생각하지 못한다는 점이다. 그리고 그들 역시도 타인의 집착에 대해 어떤 객관적인 판단을 하여 의견을 내 놓기도 하지만 정작 자신의 집착에 대해서는 거의 인지를 못하고 있는 모습을 보이곤 한다.
 
그 이유는 바로 사랑과 집착을 구분하기가 어려운 것처럼 어떤 것을 좋아하는 것과 어떤 것을 집착하는 것 역시도 구분하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취미 활동인 경우에 그 대상이 바로 자신일 때는 매니아, 열정 등의 단어를 쓰고 반대로 그것으로 인해 피해를 받는 제 삼자의 경우엔 그것을 집착이나 중독으로 판단한다.
 
이것은 나 자신에게도 완전히 동일하게 적용되는 상황이다. 그래서 가끔 나는 내 집착으로부터 오는 압박감에 눌려 허덕이다가 어느 날 문득 내가 왜 이러지 하는 생각과 함께 그 압박이 어느새 사라져버리는 경험을 하기도 한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고 또 슬금슬금 살아나 머리 속이 끝없는 압박에 눌리게 된다.
 
어떤 상황이 집착인지 혹은 열정이나 집중이지 판단하는 예를 몇 개 들어 보겠다.
 
내 주변 사람 중 한 사람은 어떤 제품을 사서 '유용하게 잘 쓰기' 에 아주 강한 집착을 보이는데, 그러다 보니 어떤 제품이 필요해서 살 때마다 정말 오래 시간을 고르고 또 고른다. 그리고 그런 후 자신이 그 제품을 산 이유가 마구 열거가 된다. 예를 들어 보통 사람이 컵을 하나 샀다면 그 컵은 원래 물을 담아 먹거나 음료수를 담아 먹는 기능이 99%이기에 다른 용도는 거의 고려되지 않고 그래서 단지 크기 정도나 디자인이 마음에 드는지 여부를 가지고 결정을 한다.
 
그런데 이 사람은 여기에서 이 컵의 다른 용도인 손잡이 편함, 위치, 컵의 모양, 심지어 여름에 찬 물을 담아 을 때 컵의 외부에 이슬이 맺혀 흘러내리지 않는 것까지도 고려해서 컵을 산다. 그리고 그러다 보니 각자의 상황에 그렇게 딱 맞게 적합한 컵이 다수가 필요해진다.
 
이것은 마치 장화가 필요한데 비가 많이 올 때 장화, 비가 오지는 않지만 혹시나 올 것 같아서 필요한 장화, 가벼운 장화, 절대 물이 들어가지 않는 장화, 보온이 되는 장화 등으로 세세하게 분류해서 사는 것과 비슷하다. 물론 어떤 제품을 사는데 있어서 이렇게 세세하고 다양하게 살피는 것은 꽤나 현명하고 좋은 일이다. 단지 문제는 제품을 사는데 있어서 너무도 많은 시간과 돈과 신경을 소모한다는 점이다. 그리고 그로 인해서 결국 다른 일을 할 시간이 부족해 늘 시간에 허덕이는 삶을 산다.
 
그래서 결국 다른 해야 할 일들에 대해서 하지 못하고 산다. 예를 들어 운동을 해서 몸의 건강을 지켜야 하는데 결국 시간이 부족해서 운동을 하지 않고 살아간다. 본인은 늘 운동을 해야 한다고 말하지만 결국 지키지 못하는 것이다.
 
이런 종류의 집착은 자신이 생각하는 딱 맞는 제품을 찾았을 땐 많은 행복감을 주지만 실제로 실패하는 경우도 많아서 결국 제품에 대해 자기 합리화를 하거나 그로 인해 기분이 상하고 그래서 결국 원하는 행복감을 얻지 못하는 경우도 자주 발생한다. 그래도 이 사람의 주변 사람들은 덕분에 좋다. 나의 경우에도 사고 싶은 제품에 대해 상담을 하면 알아서 정말 많은 조사를 하거나 혹은 그 동안 그렇게나 많이 찾았던 경력(?)을 바탕으로 나에겐 꽤나 적합한 제품을 소개시켜 주기 때문이다.
 
또 다른 이의 집착은 '관계성' 집착이다. 쉽게 말하면 거절 못하는 성격이기도 한데 그러다 보니 모든 경조사에 끝없이 참석을 한다. 실제로 이런 사람들은 우리나라에 흔히 볼 수 있기도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것을 집착으로 부르는 이유는 바로 그런 행동 패턴으로 인해서 그 자신의 삶이 위협을 받기 때문이다.
 
특히 결혼을 한 후 이런 집착이 유지될 경우 거의 주말이 없어져 버린다. 특히나 우리나라의 경우엔 아주 잘못된 경조사 문화가 자리잡고 있어서 조그마한 친분만 있어도 그 자신의 경조사에 초대하여 돈을 내고 가라고 하기 때문에 더 그렇다.
 
사람들은 결국 속으로는 이것을 귀찮아 하고 주말이 그렇게 사용되는 것에 대해 스스로 불만을 갖지만 결국 관계성에 대한 집착으로 인해서 자신의 주말을 반납하고 그 행사에 참가를 한다. 그리고는 그것을 하지 않았을 때 그 자신이 할 수 있는 것들을 하지 못하고 지나간다.
 
실제로 이것도 역시 앞의 경우와 비슷한데 결국 이런 집착들은 그 자신의 시간과 돈을 소모 시켜서 그 자신에게 다른 기회를 뺏는 역할을 한다. 하지만 단지 그것을 하지 않았기에 우리는 그것을 뺏겼는지 여부를 스스로 알아내기가 쉽지 않다.
 
내 친인척 중에서는 '절약'에 집착이 강한 분이 있다. 연봉도 많고 모아 놓은 돈도 많으며 자기 집을 가졌고 노후까지 모두 보장된, 실제로 일반인들이 가질 수 있는 경제적 어려움은 전혀 없어 보이는 분이다. 그런데 어린 시절 경제적 어려움을 겪은 이유로 인해 절약이 생활화 되어 있는데 문제는 본인이 이 절약에 행복을 느낀다는 점이다.
 
좋은 물건을 싸게 잘 산다는 것은 누구에게나 좋은 일이다. 하지만 모든 물건을 싸게 사야만 한다고 믿기 시작하면 여기에서부터 주변 인들과 작은 트러블이 생긴다. 물론 돈이 많다고 해서 돈을 막 써야 한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단지 본인의 그런 성향으로 인해 주변 사람들과 관계성까지 약간 틀어질 정도가 된다면 이것은 절약의 본연의 목적이 아닌 절약을 통한 행복 얻기에 집착으로 변질된다.
 
실제로 이런 사람들이 꽤나 많다. 우리가 아는 많은 절약하는 삶을 추구하는 사람들이 그 절약 자체에 의미를 두는 것이 아니고 절약하고 사는 삶에 대한 만족감을 통해 행복을 추구하고 있다. 하지만 세상은 그리 단순하게 돌아가는 것이 아니다. 모든 사람이 절약만 하고 살면 우리 사회는 경제적으로 크게 문제가 될 수도 있다. 경제학적 용어로 누구도 돈을 안 쓰는 상황을 디플레이션이라고 한다.
 
몇 가지 예를 들어 보니 집착을 판단하는 기준점이 나름 마련되는 듯 하다.
 
그것은 바로 그 원래 목적을 추구한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다른 목적을 가졌을 때 나타나는 현상이 된다고 말할 수 있다.
 
사랑의 경우, 그 사람과 같이 있어서 행복하기에 같이 있어야 하는데 그 사람의 모든 것을 그 자신이 독점하고 싶어서 사랑이란 이름으로 포장된 집착을 하는 것이다.
 
유용하게 잘 쓰는 경우, 좋은 제품을 적절하게 잘 쓰고 싶다는 것을 표명하지만 실제로는 그런 판단을 내릴 수 있는 자신의 지식과 그리고 인해 자신이 매우 합리적이고 효율적인 소비를 하고 있음에 의한 만족감을 누리고 싶어서, 어떤 의미로는 구매 그 자체를 즐기는 현상으로 나타날 수 있다. 즉 이 경우엔 사서 잘 쓴다 의 목적이 아닌 잘 샀다는 만족감이 더 큰 목표가 된다.
 
관계성 집착은 우리 사회의 많은 이들이 가지고 있는 불행한 면이기도 하다. 혹시나 혹은 어떤 관계에서 나 자신에 대한 평가가 나빠져 그로 인해 내가 어떤 불이익을 받거나 나중에 만났을 때 미안할까 봐 끝없이 서로에게 요구하고 요구 받는다. 그리고 그로 인한 서로의 시간 침해를 묵묵히 견뎌내고 있다.
 
결혼식이나 상가 집에 갈 때는 그들의 결혼을 정말로 축하하고 누군가의 죽음을 정말로 슬퍼할 사람들이 가야 하는데 이 사회의 관계성 집착은 그냥 기계처럼 타인의 경조사에 참석을 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목적을 완전히 벗어난 경우이다.
 
절약에 대한 집착도 관계성처럼 다수의 사람들에게 나타나는 증상이다. 실제로 불필요한 것을 낭비하지 않는 것은 매우 좋은 생활 습관이지만 필요한 것 조차도 너무도 심하게 싸게 사려고 하면 결국 우리 사회는 모든 제품이 겉만 멀쩡하고 그 속은 도대체 신뢰할 수 없는 제품들이 넘쳐나게 된다.
 
또한 그 당사자도 몇 십 원, 몇 천원 아끼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발 품이라도 팔아서 어떻게든 남들보다 조금이라도 더 좋은 물건을 좀 더 싸게 사고자 하여 그 결과를 행복으로 느끼는 것이다. 즉 어떤 상품을 사서 잘 쓰고 먹는 것이 목적이 아닌, 타인보다 더 잘했다는 것을 행복으로 느끼는 것이다.
 

 


 
우리 인간은 자신이 외부에 말하는 대외적인 목적과 실제로 자신의 안에 가진 자신도 잘 인지하지 못하는 진짜 목적을 가지고 살아간다. 왜냐하면 실제로 우리가 가진 대부부의 욕구는 매우 본능적인 것이라서 이것을 그냥 다 꺼내 놓으면 타인들과 관계 맺기가 무척 힘들기 때문이다.

 

그리고 너무 오랫동안 그것을 포장해버릇해서 이젠 그 포장이 정말로 자신의 내부적 목적이라고 믿기도 한다. 하지만 우린 아이들의 그 모습을 그대로 가지고 있다. 어른이 된다는 것은 단지 그것을 아이처럼 말하지 않을 뿐인 것이다.
 
누군가가 죽어서 슬프다면 그것은 그 사람의 죽은 것이 아닌, 그 후 살아가야 할 자신의 삶이 막막해서 그런 것이거나 혹은 누군가 옆에서 슬퍼하기에 같이 슬퍼지는 것이다. 하지만 누구도 이 말을 대 놓고 말하지는 못한다. 우리는 죽은 자를 위해 슬퍼한다.
 
이런 인간의 특징으로 인해 우린 많은 표층과 내부의 괴리감을 갖게 된다. 그리고 잘 포장된 표층은 타인들에게 매우 그럴싸하게 보여서 자신의 이득을 최대한 얻을 수 있도록 작동한다. 실제로 우리가 외부 표현에 대해서 내부적 상태와는 다르게 그럴싸하게 포장하는 이유도 바로 이 이득을 얻기 위한 것이니 이것은 따로 더 말할 필요도 없다.
 
그런 이유로 인해서 집착은 잘 포장되면 열정이 되고 집중이 된다. 일을 열심히 하는 사람들 중에서 워커 홀릭은 일 하는 것이 행복해서 일을 하는 사람들이다. 하지만 그들은 회사를 위해 열심히 일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이것도 명백한 중독이다. 불행한 중독 중 하나이다.
 
대부분의 집착은 타인과의 관계에 문제를 일으킨다는 점에서 좋지 않다. 그래서 실제로 집착은 행복한 삶이란 본연의 목적에 있어서 반대로 작동하는 경우가 많다. 어떤 이유로 인해 그 자신이 힘들고 불행해졌다면 이젠 그 원인이 되는 집착을 버리도록 노력해야 한다. 물론 충분히 감당할 만큼 행복을 얻을 수 있다면 상관은 없다. 어차피 행복 하려고 사는 삶인데 어떤 길을 가는 것은 온전히 개개인의 몫이니까 말이다.

 

나이를 먹는다는 것은 두 가지 형태로 나타난다. 하나는 젊은 시절의 객기와 자신에 대한 과도한 기대치를 버리고 세상을 관조하며 그로 인해 자신의 본질적 내부 목표를 인식하고 점차 마음이 넓어져 그 효과로 좀 더 행복해지는 삶이 있고, 다른 하나는 이와는 반대로 그 자신이 가진 마음의 벽을 더 공고히 하고 타인과 자신의 경계를 더 두껍게 하여 그 자신을 보호하려고 보다 더 단단해지는 삶이 있다. 그리고 그것을 신념이나 믿음, 고집 등의 가치화를 시키려고 한다.

 

물론 이 둘도 아닌 좀 더 본능적 욕구와 이루지 못한 욕망에 집착하여 살아가게 되는 더 많은 수의 사람도 존재한다.

 

어떤 삶을 사는 지에 대해서는 모두 개인이 판단할 몫이니 뭐라고 할 말은 없다. 하지만 매일 조금씩이라도 나아져서 결국 수 십년 후에 자신의 얼굴에 온화한 미소를 지을 수 있다면 그것이 조금은 낫지 않을까 싶다.

 

그리고 그 시작은 모두 자신의 내부적 목적을 제대로 보려고 하는 어려운 시도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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