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사회

우주의 중심에 서서

아이루다 2014. 4. 18. 08:34

 

16세기쯤 유럽의 이탈리아에 조르다노 브루노란 이름을 가진 사람이 있었다. 그는 당시 사회를 지배하고 있던 카톨릭교의  사제였으며 철학자였으며 천문 이론가이기도 했다.


당시 유럽의 사회엔 지구가 우주의 중심이라는 아주 오래된 학설이 지배하고 있었고 신이 유일하게 창조했다고 믿어지는 인간이 살고 있는 지구가 당연하게 우주의 중심이어야 했다. 그 증거로서 매일 태양이 지구를 돌고 있기 때문에 떴다 졌다는 반복하며 또한 밤하늘의 별들 역시도 태양과 거의 비슷하게 움직였다.


물론 이해가 되지 않는 현상들도 있었다. 매일 같은 시간에 별자리의 위치가 조금씩 바뀐다거나 어떤 밝은 별들은 다른 별들과는 다르게 지그재그 현상을 보이면서 움직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런 사소한 문제 말고는 당시에 믿어지던 규모의 우주가 지구를 중심으로 돈다는 사실은 너무도 명백했다. 우리 인간이 중요한 만큼.


당시 코페르니쿠스는 과학자로써 오랜 연구 끝에 지구는 태양의 주위를 돈다는 학설을 주장했다. 하지만 당시 사회를 지배하던 교황청의 분노를 두려워했기에 이것을 숨겼다. 그리고 갈릴레오 역시도 같은 주장을 했지만 재판을 받고 자신의 학설을 뒤집었다.


그런데 알려지지 않은 어떤 한 사람이 지동설뿐만 아니라 우주는 무한하고 밤하늘의 모든 별은 모두 태양과 같으며 그 태양들은 각자 우리의 지구와 같은 행성을 가지고 있다는 주장을 했다. 물론 그의 이론은 오직 직관에 의한 상상력일 따름이었다. 또한 그가 믿는 신이 정말로 무한한 존재라면 당연히 이것이 더 옳다고 느꼈다.


전지전능한 신이 왜 하나의 태양과 하나의 지구만 만들었겠느냐에 대한 그의 질문이었다. 그리고 이 사람이 앞에서 소개한 브루노였다.


결국 그는 종교재판을 받게 되지만 끝까지 자신의 주장을 굽히지 않았는데, 그 배경엔 그가 믿는 신에 대한 믿음이 함께했다. 즉 전지전능한 신이라면 당연히 그래야 한다고 말한 것이다. 결국 그의 이런 태도는 그 자신을 화형으로 이끌었고 그렇게 그의 삶을 마감했다. 확실하게 기억이 나질 않지만 이탈리아 어느 도시엔가는 그를 기억하는 조각상이 거리에 서 있을 것이다.


지금 이 시점에서 그의 우주론은 나름 타당한 부분이 있다. 물론 밤하늘의 모든 별이 지구와 같은 행성을 거느리고 있다는 점은 어느 정도 맞지만 그 행성에 모두 지구와 같은 생태계가 있는 것은 아니므로 이것은 그의 엇나간 상상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직관은 놀라울 정도로 대단하다. 거기에 정말로 그의 말처럼 그는 그런 우주야 말로 진정한 신의 능력에 합당하게 보여진다.


그런데 왜 종교 재판관들은 그를 이단으로 판단하고 사형에 처했을까?


실제로 그 이유는 신에 대한 이단이 아니었다. 그것은 바로 우리가 사는 이 세상, 지구를 포함해 당시 우주라고 정의된 모든 공간에서 인간은 유일하고 위대하고 전후 무후한 존재여야 했다. 그런데 그는 그런 인간과 그 인간이 살고 있는 지구가 일개 항성의 주위나 돌고 있고 또한 그런 우리와 같은 존재들이 이 우주에 수 없이 많다고 했던 것이다.


결국 당시 재판관들은 그를 인간에 대한 이단으로 판단한 것이다. 하지만 그것을 차마 스스로 말하기 어려웠던 듯 신의 이름을 빌러 그에 대한 판결을 내린 것이다.


정말로 당시 사람들이 그를 신에 대한 이단으로 처단했다면 그는 지금도 이단이어야 맞다. 신이 변하지 않았는데 왜 그는 당시엔 이단이었다가 요즘엔 무한 우주론을 처음으로 주장한 선지자로써 대접을 받고 있겠는가?


인간의 아이는 처음 태어나 부모의 품에서 거의 독식을 하면서 자란다. 울면 먹여주고 싸면 갈아준다. 그렇게 자란 아이는 형제나 혹은 어린이 집과 같은 곳에서 장시간에 걸쳐서 자신을 중심으로 돌고 있는 세상은 그저 자신과 부모가 함께 있는 공간뿐이란 것을 배우게 된다.


형제,자매가 있는 아이들은 집안에서 조차도 부모가 자신의 독점적 지위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란 것을 일찍 배우게 되고 혼자 자란 아이는 어린이 집, 유치원, 학교를 다니면서 조금 늦지만 결국 배운다. 실제로 우리가 어른이 된다는 것은 바로 이것을 배우는 과정이다.


물론 우리는 어른이 되면서 이 세상을 살아가는 아주 많은 것을 배운다. 그런데 그 중 정말로 중요한 것이 바로 사람과 상대하는 법을 배우는 것이다. 그리고 거기엔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 하나가 있다. 그것은 바로 나와 관계를 맺는 그 사람 역시도 나와 똑같은 시절을 보낸 동등한 존재라는 점이다.


즉 이 말은 누구도 내 밑이나 내 위가 아닌 나와 온전히 동일한 가치를 지닌 존재이니 그 사람을 내 부모처럼 독점할 수 없다는 뜻을 의미한다. 따라서 그와 어떤 관계를 맺고 이득을 추구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내 자신에 대한 한계지점을 설정해야 한다는 뜻이고 이 말은 어려서부터 익힌 세상은 나를 중심으로 돌지 않는다는 생각을 완벽하게 습득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실제로 사람들의 인간관계에서 가장 크게 애를 먹는 요소가 바로 이것이다. 모두 그 자신을 위해 살기에 이 이득 추구의 충돌이 일어나면서 서로 관계성을 유지하는데 애를 먹는 것이다. 거기에 모두 이것을 추구하는 것에 대한 강도가 다르고 대상이 다르고 욕구가 달라서 공통적인 개념을 만들어 내기가 무척 어렵다는 사실 역시도 추가적으로 난이도를 높이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린 틈만 나면 세상이 나를 중심으로 돌길 바란다. 그래서 우린 모두 그 자신이 중요한 사람 이길 바라는데, 실제로 인간 사회에서 중요한 사람이라고 판단될수록 그 사람을 중심으로 세상이 돌아가게 된다. 이것을 권력이라고 하는데 실제로는 상황 지배력이라고 해야 맞을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정치적으로 맡겨진 권력이나 재력을 바탕으로 한 권력을 추구하며 거의 모든 사람들은 이것을 평생 갖고 싶어하지만 좌절하거나 포기하거나 멀리하면서 살다 죽는다. 그리고 아주 소수만이 이것을 제대로 향유하고 살다가 죽는다.


그런데 만약 큰 노력 없이도 세상이 나는 아니지만 내가 속한 인간이란 종을 기준으로 돈다는 것이 사실이라면 어떨까? 누가 과연 그것을 부정하고 싶을까?


그리고 1600년대 이탈리아에서 그런 일이 일어났고 결국 브루노는 인간 중심설을 부정했다는 이유로 인해 비극적 최후를 맞이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 후 몇 백 년 동안 발전한 인간의 과학은 결국 우리가 브루노의 이야기처럼 우주의 변방에 존재하는 우연하게 만들어진 생명체란 것을 밝혀냈다.


하지만 이런 과학적 사실이 넓게 퍼진 현대 사회에서도 사람들의 인식은 보통 그 자신과 그가 관계를 맺은 사람들 크기 정도로 한정되어 있다. 즉 우리 인간은 아직도 인간 중심설에서 단 한발자국도 벗어나지 못하고 있으며 어린 시절 독점적 지위를 누리던 어린 아이의 인식 능력에 머물러 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단지 우리가 성인이 되면서 바뀐 것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관계의 효율성을 위해 이것을 확실하게 숨겨 놓고 있다는 사실과 크게 문제가 되지 않는 상황이라면 (너와 나 중에 하나가 죽어야 할 상황 같은) 어느 정도 상대의 입장을 이해하고 사는 척 하고 있다. 그러다 보니 마치 우리 개인 하나하나가 마치 우주의 중심에 서있는 특권을 내려 놓은듯한 착각을 불러 일으킨다.


현재 우리는 고성능의 망원경과 역사상 획기적인 발상의 전환을 통해 다듬어진 멋지고 아름다운 우주 이론을 통해 우주의 탄생과 진화, 지구의 생명체의 탄생과 진화에 대해서 설명할 수 있지만 그것을 아는 우리들 자신의 인식 범위는 천 년 전이나 백 년 전이나 지금이나 그리 달라진 것이 없다.


아마도 이것은 과거에도 현재에도 미래에도 그리 달라질 것은 없을 것이다. 그것은 바로 우리 존재가 유한한 시간을 허락 받은 지구라는 행성에 전적으로 예속된 생명체이기 때문일 것이다. 이것은 어느 날 우리가 전 우주를 마음대로 이동할 수 있으며 생명 또한 무한한 삶을 보장받기 전까지는 좀처럼 변하기 힘든 한계지점을 의미하고 있다.


이런 한계로 인해서 현재 사회를 구성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아도 잘못된 어린 시절을 보낸 사람들이 커서도 그 자신의 독점적 지위에 대한 포기를 제대로 배우지 못해서 그 인식 범위가 그 자신으로 한정된 사람들도 있고, 조금 커져봐야 그 범위가 가족 수준에 머무르며, 거기에서 조금 더 확대되어 봐야 자신이 신뢰할만한 지인 정도에 머무른다.


그리고 이 정도의 인식 범위를 가진 사람들이 우리 인간의 99% 이상을 차지하고 있다.


그럼 나머지 1%는 어떻게 되는가? 이들 중에서는 그 인식 범위가 그 자신의 범위를 벗어나 자신이 전혀 모르는 존재들인 인간 전체로 확대되기도 하는데 그 중 유명한 사람들이 보통 우리가 성인이나 위대한 인간으로 알려진 존재들이다. 이들이 유명한 이유는 바로 희소성 때문에 그렇다.


그리고 이들의 범주를 벗어난 지구 전체 생명체로 확대된 사람들도 존재하는데, 이 경우 인간의 이득만을 주장하지 않기에 더 넓은 인식 범위를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다른 일반 사람들에게 그리 환영 받지 못하는 사람들이 된다. 실제로 이들은 인간의 이득이 자연을 심하게 훼손하는 경우 이것을 방해하기 때문에 관련된 사람들은 이들을 매우 싫어하는 경우가 더 일반적이다. 그리고 보통 사람들 역시도 그들을 특이한 존재로 인식할 뿐, 인간의 범주에 머문 사람에게 했던것 같은 찬사는 보내지 않는다.


하지만 이렇게 지구 전체로 확대된 인식 범위를 가진 사람들 역시도 이 광대한 우주의 크기에 비하면 정말로 비교도 안될 만큼 작은 범위의 공간에 집착하고 있는 것 밖에 안 된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우주로 그 관심이 확대된다. 물론 이때는 우리와는 다른 그들이 우호적이라고 믿고 있기 때문이겠지만.


또 얼마의 시간이 흘러야 우주에 대한 새로운 해석이 나타나고 우리가 그런 우주 속을 여행을 하게 될지 모르겠지만 확실한 것은 내가 살아 있는 동안엔 불가능할 것이다. 그래서 나는 가끔 어차피 정해긴 기간을 살 것이라면 지금보다 좀 더 미래에 태어났으면 하는 생각을 한다.


만약 그렇게 되어서 개인 우주선을 타고 우주를 여행할 수 있는 기회가 있다면 어쩌면 돌아오지 않을 여행을 떠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내가 어린 시절 읽었던 '안드로메다 성운' 라는 SF 소설 속 주인공들은 책이 끝날 무렵 에리다누스 자리의 항성 아케루나로 향한다. 지구와의 거리는 70광년. 광속에 가까운 속도로 가더라도 왕복 140년이 걸리는 여행이며 책에서는 그 오랜 시간 동안 살아 있는 사람은 없다 라고 말한다. 물론 요즘 같아서는 냉동인간으로 그 시간을 보내게 될 것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돌아왔을 때 지구는 정말로 어마 어마 한 시간이 흘렀을 것이다.


이 책은 어린 시절 내가 읽은 후 오랫동안 나의 이룰 수 없는 꿈이 되어왔다. 끝없는 미지를 향해 떠나는 여행을 할 수 있는 기회가 있다면 얼마나 좋을지를 늘 상상하면서 살아왔다. 그리고 만약 정말로 그럴 수 있다면 나의 인식 범위는 도대체 얼마나 넓어질 수 있을까?


* 지금 생각하면 이 책의 제목이 '안드로메다 성운' 이라고 지어진 점이 흥미롭다. 실제로 안드로메다는 성운이 아닌 은하이다. 우리와 200만 광년이나 떨어진. 하지만 우리 은하와 가장 가깝기 때문에 희미한 그 모습이 육안으로도 보여서 오랜시간 성운으로 취급 받았다. 에드윈 허블 시대 전까지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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