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사회

타고난 승부사

아이루다 2014. 2. 18. 13:48

 

초등학교 시절, 가을이 되면 운동회를 했다. 물론 이것은 중학교에서도 고등학교 때에도 마찬가지였는데 아무튼 그 중에서 초등학교 때 했던 운동회가 제일 기억에 남는다. 학교 운동장엔 각 경기를 위한 흰색 선이 그어지고 교정과 화단엔 빤짝이 띠가 매달렸으며 운동장 각 구석에 설치된 확성기에서는 제목은 모르지만 신나는 행진곡이 울려 퍼졌다.

 

그리고 우리 학생들은 반별로 홀수나 짝수 혹은 앞 반 뒷 반의 규칙으로 백팀과 청팀으로 나뉘어서 그날 하루 종일 자신이 소속된 팀을 응원 했다. 그 어린 나이의 학생들은 왜 자신이 청팀인지 또는 백팀인지 중요하지 않았고, 단지 머리에 다는 띠가 있었는데 이것이 앞면은 백색, 뒷면은 청색이어서 일단 문방구에서 산 후 자신이 속한 팀의 색으로 맞춰서 맬 뿐이었다.

 

그래서 청팀에 속했는데 줄다리기를 청팀이 이기면 환호했고 백팀이 이기면 좌절했으며 운동회가 다 끝난 후 응원상이라도 못받 게 되면 그것을 그리 아쉬워 했다. 하지만 이것은 그 운동회 단 하루 만에만 유효한 팀일 뿐, 다음 날이 되면 우리는 언제 백팀이었는지 청팀이었는지는 중요하지 않고 그저 그리 기다렸던 가을 운동회가 끝남을 아쉬워 했을 뿐이다.

 

이런 팀을 나누어 경쟁시키는 것은 중학교 때도 이어지고 고등학교 때도 이어졌다. 단지 그 때는 보통 청팀 백팀이 아닌 반별로 나누어 경쟁을 했는데, 그래서 반 대표 운동선수가 되는 것은 매우 중요했다. 특히 운동에 매우 능한 애들은 이때 몇 개의 종목을 걸쳐서 참가하기도 했고 계주라도 열릴 때면 모두들 운동장 중앙으로 나가 400M 트랙을 따라 타원형으로 둥글게 선 후 자신이 속한 반의 선수들이 1등을 하길 바라며 목이 터져라 응원을 했다. 그렇게 우린 최후의 피날레를 만끽하기도 했다.

 

대학교부터는 이런 노골적인 편가르기 현상은 조금 사라지긴 하지만 역시나 과별로 어떤 행사가 있을 때면 우리는 자신이 속한 과에 이기길 바라는 공통적인 행동양식을 보이곤 했다. 또한 이것 말고도 야구나 축구와 같은 국내나 국외 경기가 있을 때면 자신이 속한 지역에 연고를 둔 팀을 응원하거나 혹은 대한민국 대표팀을 응원을 하는 것이 참으로 자연스러웠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나는 이것이 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그것은 바로 내가 속한 그 어떤 것에 대한 우연성 때문에 그런 것인데, 단지 내가 1반 이라서 청팀에 소속되었고, 내가 랜덤하게 책정된 결과로 인해 들어간 학교와 또 다른 랜덤함으로 책정된 반의 일원으로서 소속되었고, 특정 지역에 태어났거나 혹은 특정 국가에 소속되어 태어났다는 그 우연성으로 인해 나는 막무가내 식 편들기를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도대체 이 우연성으로 (필연성을 믿는 분들도 있겠지만) 인해서 과연 내가 어떤 편들기를 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인가?

 

물론 전쟁과 같은 생명이 위협을 받는 상황이나 각종 실제적인 문제에서 소속된 지역과 국가의 의미는 무척 중요하다는 점은 이해가 가나 운동회나 스포츠와 같은 행위들에서 내가 소속된 우연함의 결과로 벌어지는 지지하고 응원하는 팀들이 결정되는 것은 다소 웃긴 일이란 생각이 들었다.

 

거기에 보통 사람들은 한번 편을 들기 시작하면 지역을 옮기거나 국가를 옮겨도 계속 그것에 대해 거의 영구적인 지지를 보내게 되어 있는데 이것은 어떤 의미로 보면 마치 새끼 오리의 각인 현상과 비슷하다.

 

우리나라 프로야구가 출범을 할 때, 나는 전라북도 지방에서 살고 있었는데 그로 인해 나는 해태 타이거즈를 응원했고 지금은 기아로 바뀌었지만 아직도 이 타이거즈 팀을 모든 야구 팀 중에서 제일 관심 있게 보고 있다. 만약 그때 내가 어떤 이유로 서울에 있었다면 나는 현재 LG나 두산 팀을 응원하고 있을까? 아니면 타이거즈를 응원하다가 회사를 LG로 입사해서 그룹 차원에서 응원을 다니다 보니 결국 LG로 바뀌었을까? 그리고 또 그렇게 LG를 응원하다가 회사를 또다시 옮겨 두산으로 갔으면 이젠 두산을 응원하고 있을까?

 

실제로 이렇게 보면 우리가 어떤 특정 팀을 응원하고 지지하는 것은 거의 연관도 없고 의미도 없는 짓이긴 하다. 하지만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이런 지지에 대한 다른 의견은 실제로 큰 말싸움이 나기도 하고 이것이 심한 사람들의 경우엔 폭력 현상까지 벌어지기도 한다.

 

거기에 이것이 국가 단위로 확대되면 거의 이젠 민족과 민족의 대결의 장이 되고 이런 이유로 인해서 월드컵이나 올림픽이 열리게 되면 온 세계가 각자 소속된 나라의 승리를 기원하면서 낮이고 밤이고 중계되고 있는 TV를 바라보고 그것을 다른 사람들과 이야기 하면서 패배의 아쉬움과 승리의 쾌감을 공유하기도 한다.

 

도대체 우리 인간은 왜 먹을 것이 되는 것도 아니고 실제로 이겼다고 해서 단지 어떤 스포츠 경기에서 그 자신이 아닌 우리가 속한 그룹의 대표로 나간 나와 아무런 관련도 없고 일면식도 없는 사람들의 승리를 위해 그런 과도한 관심과 그들의 경기 결과를 바라보면서 그 깊은 감정 이입을 하고 있는 것일까?

 

그 답은 아마도 이런 인간의 특징에는 바로 우리가 경쟁의 승리를 최고의 가치로 여기고 있는 우리 유전자적 특징이 있어서 그럴 것이란 예상은 한다. 그리고 실제로 이것이 그리 틀린 예상은 아닐 것이다. 왜냐하면 우린 유전자적 관점에서도 그렇고 실제로 세상을 살아가면서 결국 늘 그것이 직접적이든 아니면 간접적이든 간에 상관없이 늘 경쟁적 사고와 행동을 통해 살아 나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자신이 어떤 팀을 응원하느냐가 아니라 경쟁 자체를 즐기고 있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 우리는 국제 대회에서 그렇게 강한 대한민국의 승리를 원하고 있지만 실제로 이것은 매우 관념적인 것이란 뜻이다. 하지만 생각해보면 이것을 스스로 인식하기란 정말로 힘든 것이긴 하다.

 

과연 누가 자신이 지지하는 팀의 승리를 원하는 모습을 단순한 우연의 결과로 인해 그렇게 되었고 만약 다른 우연함이 있다면 그 자신이 그리도 싫어하는 상대 팀을 응원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쉽게 인정하겠는가? 그래서 우린 그 모든 국가적 갈등에 있어서 상대국에 대한 생각을 거의 할 수 없는 것이다.

 

지난 2 14일은 발렌타인 데이었지만 역사적으로 보면 안중근 의사의 사형 선고 일이었다고 한다. 그리고 우리가 아는 그분이 하신 일은 바로 일제 침략을 진두 지휘한 '이토 히로부미' 암살이었다. 그런데 일본의 입장에서 보면 이토 히로부미는 일본 건국의 아버지였으며 그로 인해 우리나라의 안중근 의사는 바로 테러리스트가 되고 만다. 이것은 오늘날 역사에서도 반복되는데, 미국의 중요 테러리스트 였던 '오사마 빈 라덴' 은 바로 그 중동 국가에서는 민족적 항쟁 영웅일 수 있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된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일본의 주장에 동조할 필요는 없다. 왜냐하면 일단 일본의 조선 침탈의 정당성은 그 어디에도 없으며, 안중근 의사 본인께서도 가진 신념이 바로 일본 타도가 아닌 '동양 평화론' 을 기반으로 한 평화주의 원칙을 기반으로 하시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공존과 평화의 시점으로 우리 인간 사회의 큰 갈등들을 바라보게 되면 가장 그것을 심각하게 방해하고 가로막는 것은 바로 우리가 우연히 갖게 된 특정에 무리에 속하게 된 편협적인 판단이다. 이것은 왜 그곳에 속해 있는지를 묻지도 따지지도 않는 우리의 단순성을 기반으로 해서 강한 배타적 행동을 가져오게 된다. 그리고 그 속에서 우린 우리 유전자가 본능적으로 가진 승부사의 기질에 완전히 승복하고 만다.

 

세상은 내가 옳을 수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나만 옳을 수는 없다. 각자가 처한 상황과 우연히 갖게 된 자신의 배경과 소속에 따라 우리의 옳고 그름은 상대적으로 존재하게 된다. 물론 이것은 매우 이론적인 이야기에 불과하다고 할 수 있다. 그럼에도 우리가 이것을 망각하고 자신이 현재 우연히 소속되게 된 어떤 무리 속에서 그것만이 유일한 정당성이라고 믿는 순간 다른 모든 무리는 바로 악당으로 변해 버리고 만다.

 

그리고 이런 우리의 특징은 인간의 보이지 않은 서열체계에 따라 지배층이 피 지배층을 원하는 방향대로 좌지우지 할 수 있는 매우 효과적인 수단으로 동작한다. 그래서 내적 불만이 강해지면 그들은 늘 가상의 외적을 만들어서 그 적을 향한 전 국민적인 통합을 이루어 내고자 한다. 하지만 이것이 과연 얼마나 우리를 위한 진정하게 제대로 된 일 일까?

 

아무튼 이런 배타적 경쟁심이 지배층의 지배 효율성으로 존재하는 한, 우린 늘 편 가르기를 위해 준비된 세상에서 살아 갈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초등학교 시절 청백 전에서부터 공식적으로 시작되고 있다고 나는 크게 확대 해석을 한다. 그래서 경쟁이 일상화 된 우리나라에서는 그 어떤 것이든 그 자체를 즐기지 못하고 그것을 하고 있는 다른 타인과 자신의 경쟁과 승패를 통해 행복을 얻으려 애를 쓴다.

 

그리고 그 길을 향하는 항로에서 우리 개인들은 오직 이겨야 한다는 생각에 배가 어디를 향해 가고 있든 상관없이 그저 옆 사람 보다는 조금이라도 자신의 노를 더욱 열심히 젓을 생각만 하고 살아 간다

 

그런데 정말 도대체 얼마나 많은 적을 만들고 이겨야만 우리는 행복해질 수 있을 것인가? 그리고 이런 배타적 사고방식이 우리 전체를 지배하게 될 때 우리가 더욱 행복해질 가능성은 많아질까? 우리가 다 같이 같은 목표를 가지고 서로의 진도를 살펴봐 주면서 다독이며 가는 길은 함께 행복하게 살 수 있는 길이건만 우린 너가 아닌 나만 행복해야 한다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인간은 어울리고 교류할 때 가장 큰 행복을 느낄 수 있는 존재들이다. 그런 우리들이 특정한 신념이나 사고방식에 따라 그것도 자신이 우연히 속한 무리가 추종하는 강요하는 생각에 따라 우리 자신을 '우리 편' 이라고 묶고 다른 나머지 사람들을 '경쟁자 편' 이라고 생각하는 사고 방식에 문제는 없을까?

 

어쩌면 너무도 오랫동안 승부에 익숙해진 우리들은 승부가 없는 세상에서 살라고 하면 심심하고 따분해서 살지 못할 것이다. 그래서 요즘은 그 모든 종류의 활동에 일명 '내기' 가 생활화 되고 있는지도 모른다. 즉 자신도 모르게 우린 승부 중독증에 빠져 버린 것이다. 그래서 그 활동 자체를 의미 있게 즐기지 못하고 꼭 이기고 지는 승부가 나와야 그것을 진정하게 즐긴다고 느끼는 것이다.

 

역설적으로 우리는 그래서 서로가 필요하다. 타인과 어울리고 교류를 하기 위해 그들이 필요한 게 아니라 내가 경쟁하고 이길 수 있는 승부를 위해 그들이 필요하다. 우리나라에서 경쟁적 온라인 게임이 특히 발달하는 이유도 바로 그런 성향이 깔려 있음을 부정할 수 없다.

 

우리 대한민국, 한민족은 이렇게나 타고난 승부사인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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