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사회

여분의 시간

아이루다 2014. 1. 24. 10:36

 

흔히들 사람들 사이에 어딘가 모르게 바빠 보이는 이를 보면 ,'여유를 가져라' 라는 충고를 하곤 한다여기에서 사용되고 있는 단어인 여유는 뭔가 꽉 차지 않은 약간의 빈틈 같은 것을 표현하는 말인데보통 시간이나 생각에 대해서 이 단어를 적용한다. 그런데 우린 왜 이런 표현을 쓰고 또한 왜 타인에게 이런 조언을 하는 것일까?

 

그것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 여유에 대한 좀 더 깊은 이해가 먼저 필요하다. 개인적인 경험으로 집안에서 어떤 물건을 찾지 못할 때, 하루 종일 찾아도 안 보이는 것이 잠시 외출 후에 돌아온 후 너무도 쉽게 찾아졌거나 혹은 어떤 문제가 해결되지 않아서 쩔쩔매다가 잠이 들었는데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머리 속에서 좋은 해결책이 생긴 기억을 가진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어떤 면에서 우리의 삶 중에서 예측 불가능하거나 혹은 늘 상 일어나는 다양한 형태의 문제에 닥치게 되었을 때, 우린 보통 그것을 해결하는 가장 효율적인 방법을 최대한 빠르게 찾아서 해결하곤 하지만 실제로 이렇게 한다고 해도 언제가 이것이 늘 성공하지는 못한다.

 

거기에다가 이런 효율적인 해결책이란 것은 보통 경험에 의해 나오기 마련이어서 늘 비슷한 문제가 발생하면 늘 비슷한 해결책을 적용하곤 하는데도 불구하고 그것의 성공 여부는 상황에 따라 다른 경우도 많다. 물론 실패했다고 해서 여기에 적용한 해결책이 꼭 나쁘거나 잘못된 것은 아니다.

 

문제는 이런 해결 방법이 나이가 듬에 따라 점차 굳어짐으로써 또 다른 해결책이 나올 수 있는 가능성을 없애버린다는 점이다. 거기에 더해서 사람들은 과거의 경험을 굳게 다져서 이젠 아예 다른 해결책 자체를 자신에게서도, 타인에게도 나오지 못하게 막는 경우가 있다. 이것을 고정관념이라고 부르는데 이것은 늘 문제를 야기시킨다.

 

고정관념은 말 그대로 굳어진 사고 방식을 뜻한다. 그래서 결국 열린 사고를 하는 이들이 해내는 혁신에 뒤처져서 결국 도태되고 마는 결과를 초래하기도 한다. 그래서 우린 이것을 정말로 조심해야 한다. 그리고 이 고정관념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제일 먼저 해야 할 일은 바로 사고의 전환을 위한 생각과 시간의 여유를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많은 이들은 이런 시간을 낭비라고 여긴다. 왜냐하면 여유란 것은 결국 생산적인 일에 쓰이는 시간이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여유는 정말로 중요한 요소이다. 단지, 이것이 바로 효과를 나타내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사람들이 그것의 중요성을 간과할 뿐이다. 그것을 딱히 알고 있지 않아도 우린 때가 되면 머리를 식힌다고 하면서 여행을 가거나 집에서 하루 종일 뒹굴 거리기도 한다. 그리고 실제로 이 시간이 어쩌면 우리의 가장 생산적인 시간 인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지금부터 여유로움이 인간의 문명에 미친 영향에 대해 써보기로 하겠다.

 

우선 '인간에게 있어서 이렇게나 중요하게 여겨지는 여유로움은 도대체 언제부터 주어진 것일까?' 에 대한 질문으로 시작해보자. 집에서 키우는 개는 여유롭다 못해 시간이 남아 어쩔 줄을 모르는 모습을 보이지만 자연계에서 살아가는 야생 동물들의 처지는 그렇지 않은 것을 보면 실제로 동물들에게 있어서 여유로움을 즐기는 것은 그리 흔한 현상은 아니다.

 

자연계에서는 아마도 먹이의 풍부함에 따라 여유로움이 달라질 듯 보인다. 그래서 풍성한 먹이가 있는 곳에 사는 동물들은 반쯤은 먹고 반쯤은 자면서 살아가는 반면 혹독한 환경에서 살아가는 동물들은 실제로 하루를 먹이를 먹는 것과 먹이를 찾아 이동하는 것으로 시간을 보낼 것이다.

 

이런 현상을 토대로 인간의 역사를 되 집어 보면, 인간 역시도 풍부한 먹거리가 보장된 후 여유로움이 발생했다고 유추가 가능하다이것은 과거의 인간이 채집과 사냥을 위해 무리를 지어 이동하던 시대에서 한곳에 정착해 밀,보리,쌀 등을 직접 키운 시대로부터 시작되었을 것이다.  여유로움은 풍부해진 식량을 통해 어딘가로 끝없이 이동하는 시간의 낭비를 줄이고 또한 안정적인 마을을 이루어 부락 단위의 삶을 영위하면서 가능해졌다는 뜻이다.

 

그런데 가만히 보면 이 시기는 우리 인간의 대규모 문명을 발전시키기 시작한 시기와 거의 일치한다. 그런데 이것은 너무도 당연한 결과이다.

 

예를 들어 누구나 먹고 살기에 바쁜 시대라면 그 시대 사람 100명이면 100명 모두 낮 동안 먹을 것을 찾아서 다니면서 하루를 보내게 된다. 그리고 밤이 되어 집에 오면 모은 식량으로 밥을 만들고 이것을 먹은 후 어두워졌으므로 잠자리에 든다. 그리고 또 새로운 해가 뜨면 그 전날의 행위를 반복하는 무한 반복의 패턴을 보이게 된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먹을 것이 풍족해져서 하루의 반만 일하고 나머지는 쉴 수 있었다고 치자. 여기에서 바로 우리의 여유분의 시간이 발생한다. 그럼 일을 하지 않는 그 시간을 무엇을 하면서 보내겠는가?

 

매일 하루 종일 일을 하던 사람들은 갑자기 주어진 휴식을 처음엔 단지 쉬는 것으로 즐기다가 시간이 지남에 따라 점점 심심함을 느끼게 되었을 것이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같이 할 수 있는 놀이를 생각해보고  또 다른 이는 어떻게 하면 잠을 편하게 잘 수 있을지 고민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들과는 다른 생각을 하는 이들도 있었을 것인데 예를 들면 어떤 이들은 전날 잡은 가죽을 더욱 멋지게 다듬고 또 어떤 이는 수확한 밀을 더 잘 털 수 있는 방법을 생각하면서 그 시간을 보냈을 것이다.

 

인간에게 어떤 여분의 시간이 주어졌을 때, 많은 사람들은 각자 다양한 행동을 추가로 하게 되겠지만 아마도 일정시간이 흐르면 보통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이 선호하는 행동에 합류하게 될 가능성이 높다. 그래서 다 같이 모여서 놀거나 게임을 하거나 잠을 자거나 아니면 더 추가적인 일을 하게 될 것이다. 하지만 어떤 이들은 다른 이들이 하지 않는 행동을 한다. 그래서 누군가는 구리랑 주석을 섞어서 청동을 만들기도 하고 누군가는 철을 제련하는 법을 고민하기도 할 것이다.

 

또한 또 다른 누군가는 활과 화살을 어떻게 하면 더 멀리 날라가게 할지 고민하면서 하루를 보낼지도 모른다. 결국 문명이 태동되던 초반에 인간은 이 풍요로운 먹거리가 주는 여분의 시간을 활용하면서 인간 전체가 누리는 초기 문명을 이룩해낸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수로도 만들고 도로도 만들고 법률도 제정하게 된다. 그리고도 남은 식량이 있으면 이것을 이용해서 마을 치안 전담 자를 뽑아서 월급으로 지급했을지도 모른다.

 

이런 식으로 생산성 향상에 의한 여유분의 시간이 생겼을 경우, 추가로 일을 한 사람들은 하루를 일을 했을 때 자신이 하루간 필요한 식량 이상의 것을 얻어낼 수 있었다. 그래서 그것을 돌을 잘 다루는 이에게 지급하고 자신이 살 집을 지어 달라고 부탁했을 것이다. 이것은 일종의 혁명이었다

 

사람은 누구나 타고난 자신만의 능력이 있는데, 누군가는 힘이 세고, 누군가는 밧줄을 잘 꼬았다. 이렇듯 자신이 잘하는 것에 매진하여 전문적인 영역이 생김으로써 서로 비용을 지불하고 교환을 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 밑바닥엔 늘 먹을 것이 풍족했기에 가능하다는 전제가 붙어 있다
 

거기에 무기를 발달시킨 어떤 부족은 그 힘을 이용해 타 부족을 약탈함으로써 생산성 자체를 크게 향상 시켰고 그런 전쟁을 통해 잡아들인 사람들을 노예로 부리면서 더욱 더 여분의 시간을 얻어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시간을 더 잘 보내기 위해 먹을 것을 더 맛있게 만드는 것을 연구하고 심지어 로마처럼 콜로세움을 세워 검투사의 싸움을 구경하기도 했을 것이다.

 

결국 우리 인간의 문명은 식량 생산 기술의 발전으로 인한 여분의 시간이 생겨나 각종 직업의 분화가 가능해짐으로써 발전해 온 것임을 확인 할 수 있다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현대 사회에 이르러 우리가 엄청난 여유로움을 느끼고 사는 것은 아니다그래도 현대 사회에서 우리의 노동 시간은 점차 줄어들고 있다는 것은 사실이다. 이것은 생산성의 끝없이 높아지고 있음을 의미하고 있다.

 

아마도 미래에 로봇공학이 엄청나게 발달해 인간의 일을 모두 대신하는 날이 오게 된다면 어떤 사람들은 '그럼 나는 무슨 일을 하고 돈을 벌어야 하죠?' 라고 질문하게 될지도 모르겠지만 이것은 큰 착각에서 나오는 질문이다. 우리는 실제로 그 로봇들이 해내는 일을 통해 생겨난 것을 즐기면서 살면 된다. 그래서 로봇이 농사를 짓고 제품을 만들고 힘든 일도 대신하고 가정에서 모든 가정 일을 대신해주게 만들면 된다. 그리고 우린 이 24시간 일하고 고장이 안 나는 로봇만을 싸게 구입해서 사면 된다.

 

그럼 그것을 살 돈을 어디에서 구하냐고그때가 되면 우리의 일은 자신이 가진 로봇을 이용해 어떤 일을 대신하게 해줄 것인가를 생각하고 결정해서 그것을 통해 돈을 벌게 될 것이다. 이것은 마치 자동차와 유사하다. 우리는 여행을 위해 자동차를 쓰기도 하지만 화물차를 사서 돈을 벌 수도 있는 것이다.

 

결국 천원 짜리 로봇을 사서 이것을 이용해 한 달에 천 만원을 벌 수 있다면 되는 것이다. 여기에서 현재와의 차이는 지금은 직접 일을 해야 하지만 그때가 되면 우리는 로봇에게 일을 시키고 우리 인간은 그 시간을 다른 일을 하면서 살면 된다.

 

결국 이런 미래의 발전 방향은 우리에게 있어서 여분으로 주어진 시간을 도대체 어떻게 보내야 할지에 대한 새로운 과제를 주게 될 것이다. 물론 지금도 그 현상은 일어나고 있다. 하지만 그래도 아직까지는 대부분의 사람은 하루에 8시간 이상을 일을 해야만 하는 환경이라서 덜하지만 한 세대 전만해도 없었던 많은 여유분의 시간이 생긴 것만은 사실이다.

 

그렇다면 이 여분으로 주어진 시간은 어떻게 쓰는 것이 좋을까? 물론 이것은 사람마다 각자 추구하는 가치관이 달라서 매우 다양한 형태가 나타나는데 중요한 것은 어떤 보편적인 가치관의 관점으로 보았을 때 두 가지 형태로 구분이 된다는 사실이다.

 

하나는 여분의 시간이 여유로움으로 환산되는 경우이다. 그리고 나머지 하나는 바로 잉여로움으로 환산되는 것인데 보통 사람들은 여유롭고 싶어하지 잉여롭고 싶어하지는 않는다.

 

이것은 단어적인 늬앙스만 봐도 좀 차이가 나는데 여유로움은 어떤 것이 적당하게 존재하여 조금 넉넉한 상태라면 잉여로움은 무엇인가가 남아돌아서 가치가 없어지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여유로움 사람과 잉여로운 사람은 듣기에 정말 큰 차이가 난다.

 

그런데 과연 잉여로움을 정말로 그 단어가 가진 그 의미대로만 해석해야 할까? 이것은 인간의 역사를 통해서 좀 더 면밀하게 살펴봐야 할 문제이다. 물론 현대에서도 이 소위 말하는 잉여로운 짓은 끝없이 일어나고 있는 것도 사실이며 실제로 거의 잉여로운 짓은 쓸데없는 행동으로 평가되기 쉽다.

 

그런데 처음에 종이를 만든 사람이 있었다면 모든 사람들이 처음부터 그 종이란 발명품이 얼마나 가치 있을지 알았을까? 아마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왜 저렇게 힘들게 나무를 갈아서 종이를 만드는지 이해를 못했을 것이 틀림없다. 그래서 누구나 그 시간에 일을 하거나 그냥 쉬지 왜 힘들게 그런 짓을 할까라고 말하면서 혀를 찼을지도 모른다.

 

인간의 역사를 보면 정말 유수의 발명품들이 나타났었다. 그런데 아마도 그 수 많은 발명품 중 대부분은 그냥 스쳐 사라졌고 소수의 제품만이 사람들의 선택을 받아서 미래로 전달되었을 것이다. 그나마 요즘 세상은 정보의 기록이 쉽고 이것을 전파하는 것 또한 매우 쉬워졌고 이것이 경제적으로 매우 큰 효과를 낸 다는 것이 알려졌기 때문에 기업에서 돈을 투자해서 연구 개발을 하고 있지만 과거엔 이런 것이 단지 개인적 일탈에 불과했던 시절이 분명히 존재했다.

 

그리고 그런 일탈에는 분명히 여분의 시간이 존재했고 수 많은 잉여로움이 실제 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 시간에 어떤 생각이나 발명을 했는데 이것이 사람들에게 우습게 보이면 바로 아무짝에도 쓸데 없는 잉여로운 시간이 되고 사람들에게 선택이 되면 생산적인 시간으로 평가 받기 때문이다. 즉 시간을 어떻게 썼느냐는 바로 결과물로 결정되었다는 뜻이다.

 

사람의 머리는 효율적으로 쓰일 때 가장 일을 잘하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미래를 위해 어떤 발전을 위해서라면 머리를 비우고 새로운 생각이 차지할 수 있게끔 해주는 것도 매우 중요하다. 즉 여분의 시간을 여유로움으로 즐기든 잉여로운 시간을 즐기든 어떤 식으로든 간에 보내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우리는 현재 극단적 효율성을 추구하는 사회를 살아가고 있다. 그래서 결국 여분의 시간이 주어진다고 해도 이것을 다시 쪼개고 계획하고 준비하여 또 다른 효율성을 위한 시간으로 활용하고 있다. 결국 이런 가치관의 결과로 인해서 우리는 삶에서 불필요하다고 느끼는 요소는 모두 제거해 버리고 돈을 잘 벌 수 있는 것들만 아이들에게 가르치고 그 자신 역시도 끝없이 효율적인 생각과 행동을 하길 원한다.

 

하지만 과거의 역사에서 우리는 효율이 우리를 미래로 가게 해주는 것이 아니고 여분의 시간이 우리를 미래로 가게 해준다는 것을 배울 수 있다. 그래서 잠시라도 주어진 여분의 시간을 또 다른 효율을 위해 쓰는 강박관념에서 조금 벗어나야 할 필요가 있다.

 

하지만 요즘은 점점 이것이 더 나빠져서 친구를 만나는 여분의 시간에도 스마트 폰을 이용해 또 다른 온라인에 맺어져 있는 사람들과의 관계를 유지해 나가는 효율성을 추구한다. 이것은 기술의 발전이 준 능력인데 우리는 그럼으로써 하루 종일 단 일분의 여분의 시간조차 없어진 격이다.

 

여행을 가는 차 안에서, 화장실에서 볼일을 볼 때도, 퇴근길에 지하철 안에서도, 잠자기 직전이나 아침에 눈을 뜬 몇 분간의 시간에도 우리는 이제 더 이상의 여분의 시간이 없다. 아마도 본인은 그 시간들을 여분의 시간으로 느끼고 있을지 모르지만 이것은 그저 외적 자극에게 모두 뺏기는 시간에 불과하다.

 

여분의 시간을 온전히 그 자신을 위해 쓰려면 최대한 외부자극이 없는 환경이 좋다. 그래서 새로운 충전을 하겠다고 떠날 때 자극요소가 되는 인간이 없는 나무와 흙 밖에 없는 곳으로 여행을 떠나곤 한다.

 

하지만 현대인의 여분의 시간은 대부분은 외적 자극에 의해 소비되어 버리거나 또 다른 효율성의 위한 시간으로 쓰이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우리는 그래서 지금도 먹고 살기 바빠서, 머리가 아파서, 스트레스를 받아서라는 이유로 효율성과 외부 자극을 위해 주어진 여분의 시간을 모두 소비해 버리고 있다.

 

어쩌면 문명의 발달로 인해 우린 우리의 오래된 조상인 원시인들의 삶보다도 더 여유가 없을 수도 있다. 그리고 매일 출퇴근과 야근에 시달리면서 조그마한 자투리 시간만 생겨도 그것을 어떻게든 흡족하게 쓰고 싶은 욕구가 가득한지 모르겠다. 하지만 여유시간에 대한 집착이 결국 여유시간의 가치를 상실시켜 버리는 결과를 낳고 있다.

 

마음 먹기에 따라 아침 눈을 뜬 후 밤에 잠을 들기 1초 전까지도 외적 자극에 노출될 수 있는 삶을 살 수 있는 것이 현대인이다. 하지만 이 외적 자극은 우리를 여유의 시간을 빼앗아 가고 있는 것도 부정할 수 없는 현실이다. 그래서 자신의 삶에 너무 여유가 없다고 느끼는 사람이라면 일단 외적 자극 요소를 최대한 줄여야 한다. 그것이 우리를 미래로 나가게 해줄 수 있는 유일한 열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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