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사회

스펙의 사회

아이루다 2014. 2. 4. 10:01

 

'Specification'

 

영단어로서 명세서 정도의 의미를 가진 말이다. 개인적인 경험으로 나는 직업상 이 단어를 프로그래밍 개발에 관한 좀 더 자세한 설명이 되어 있는 구체적인 개발 계획서나 혹은 제품 설명서 정도의 의미로 이해했었다. 혹은 어떤 새로운 기술이 나왔을 때 이것에 대한 꽤나 자세하고 복잡한 형태의 설명을 의미하기도 해서, 솔직히 이 단어를 떠올리면 골치가 아픈 기억이 생각난다.

 

정확히 모르겠다. 우리나라에서 이 단어의 준말로서 '스펙' 이란 말을 쓰기 시작한지가 언제부터 인지. 그래도 과거를 추론해 보자면, 아무래도 이 말이 쓰인 시점은 어떤 기업에 입사원서를 내는 과정에서 각 칸에 적어야 할 빼곡한 자신의 역량을 적다 보니 이것을 스펙이란 말로 표시하기 시작했고 거기에 좀 더 광범위한 사용이 되면서 거의 사람의 모든 수치화 된 역량을 뜻하는 말로 확대된 듯 하다.

 

개인적으로 나는 처음 이 말을 접했을 때꽤나 반감이 있었다. 그것의 가장 큰 이유는 바로 이 스펙이란 단어가 쓰인 곳이 원래 어떤 기술이나 제품 등과 같은 만들어진 상품들에 대해 사용 되었던  것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우리가 흔히 쓰는 컴퓨터의 스펙이라면 CPU 속도, 메모리 크기, 하드 디스크 용량 등과 같은 수치가 바로 이런 것들의 일종이다. 그런데 이것을 사람에게 적용시키면 마치 돼지의 등급을 뜻하는 말을 사람에게 쓴 듯한 느낌이 들었다. 누가 자신을 특A, A급 등으로 부르면 기분이 좋겠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즘 이 스펙이란 말은 너무도 자연스럽게 사용되고 있다.

 

현 시점의 대한민국에서 스펙은 크게 두 가지 상황에서 주요하게 사용되고 있다. 첫 번째는 취업을 앞둔 취업 준비생과 다른 하나는 결혼을 하고자 하는 혼기가 찬 젊은이들이다. 그런데 이 두 경우 모두 나이대가 크게 차이가 나지 않으면서 우리 사회는 이 나이에 가진 스펙에 따라 거의 나머지 인생이 모두 결정되어 버린다. 그러니 모든 20 중후 반 및 30대 초반의 젊은이들이 이 소위 말하는 스펙이 목숨을 걸 수 밖에 없다.

 

특히 스펙에 목을 메는 나이는 바로 취업을 앞둔 취업 준비 생들인데, 실제로 기업 입사 원서를 적다 보면 자신도 모르게 한숨이 나온다. 이것은 개인적으로도 충분히 경험했는데, 기업 원서를 적다 보면 정말로 내 자신이 무엇을 하고 살았는지에 대해 스스로 자신감이 없어진다. 여기에서 가장 큰 이유는 써야 할 칸은 참으로 많은데 적을 수 있는 것은 몇 개 안되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인해서 요즘 젊은 사람들은 입사 원서를 빼곡히 채울 수 있는 준비를 하는 것을 매우 중요하게 여기고 있다. 그래서 이것을 스펙이란 말로 표현하는 것으로 일반화 된 듯 하다.

 

스펙의 두 번째 사용인 결혼할 대상에 대한 요구는 좀 더 직접적이다그나마 기업은 미래에 관계의 변화가 심하게 일어날 상황이 가능한데(입사,퇴사,진급 등등) 결혼은 보통 한번 하면 물리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결혼을 앞둔 젊은이들이 자신의 연간 수입, 부모님의 재산, 가진 부동산, 다니고 있는 기업의 가치 등의 나름 계량이 가능한 수치를 적어서 자신의 스펙이라고 표현하면서 자신에게 어울리는 배우자를 찾는다. 이 방법은 결혼 정보 회사에서 회원의 단계를 분류 할 때 주로 쓰는 방법이다.

 

문제는 이 스펙이란 말의 어원이 이미 무엇인가 명확하게 표현 가능한 것만 간추려 놓은 항목 명세서라는 점이다.

 

취업 스펙에 들어갈 수 있는 것들은 토익 성적, 학교성적, 자격증 수, 해외 연수기간, 외국어 능력 등의 종이에 적을 수 있고 수치화 되어 있으며 그로 인해 순위를 매길 수 있는 객관적 데이터인 것들이다. 또한 연봉, 재산, 부동산 가격, 대기업 등의 또 다른 수치화된 것들이 자신의 배우자 능력 스펙으로 사용이 된다

 

하지만 이런 수치화 가능하다는 스펙의 특성 때문에 우리는 우리가 가진 것들 중에서 매우 중요함에도 불구하고 그곳에 하나의 항목으로서 합당한 대접을 받지 못하는 것들이 존재한다. 그리고 이런 것들은 보통 매우 주관적인 판단으로 평가되기에 당연히 수치화가 불가능 한 것이다.

 

그것은 보통 인간성, , 자상함, 배려심, 신뢰, 가치 등의 우리 인간을 인간답게 해주는 것들이 대부분인데 요즘 사회가 워낙 '' 중심으로 흘러가다 보니 누군가를 평가할 때 그 사람이 얼마나 괜찮은지를 말하는 것이 아닌 그 사람이 어떤 회사에 다니고 어떤 직업을 가졌으며 연봉이 얼마나 되는지 또한 어떤 대학을 나왔는지가 주된 관심사가 되고 있다.

 

이 현상은 남녀 친구 사이에서도 빈번하게 일어나는데, 친구의 남자친구나 여자친구를 소개 받을 때, 그 사람이 얼마나 좋고 그 사람을 얼마나 사랑하고 또한 사랑해주는지에 대해서는 별로 궁금해 하지 않고 그 사람의 직업, 연봉, 집안, 사는 곳, 자동차 유무 등의 물질적 스펙과  , 얼굴, 몸매 등의 외모적 스펙을 구체적으로 따져서 보지도 않는 사람을 미리 판단한다.

 

그래서 실제로 그 사람을 직접 봐야 아는 것들인 인간성, 따뜻함, 정직함, 신뢰 등의 가치는 보기도 전에 미리 머리 속에서 재단되어 버린 것들로 인해 별로 궁금해 하지도 않는다. 그래고 이런 이유로 인해 많은 사람들은 그 자신의 감정 보다는 보다 현실적인 스펙에 좀 더 많은 중심을 두고 사람을 만나게 되는 것이다.

 

물론 이런 풍조가 만연하더라도 그렇지 않은 사람들도 꽤 많다. 하지만 그런 사람들 조차도 역시나 사회 전반적인 풍토가 가지고 있는 이 스펙 중심의 한계를 벗어나긴 힘들다. 특히 그 자신은 어떻게든 그것으로부터 자유롭게 살았을지 모르겠지만, 이 땅에서 아이를 키우다 보면 그 자신과는 좀 많이 다르게 느껴지게 된다. , 보통 부모는 나는 김치에 밥만 먹고 살아도 아이는 고기를 먹여야 마음이 편한 것이다.

 

그러다 보니 부모가 자식에게 요구하는 스펙은 꽤나 광범위하게 고정적으로 정해져 있는 형편이다. 그래서 사위에게 요구하는 스펙, 며느리에게 요구하는 스펙이 참 좁은 구간에 밀집되어져 있어서 이것에 맞추기 위해 결혼 당사자들이 받는 스트레스는 대단하다.

 

사람은, 같으면서도 참 다양한 신체적, 정신적 능력을 가진 존재들이다. 그리고 누구나 장점과 단점을 동시에 가지고 있으며 장점은 상황에 따라서 단점으로 반대로 단점 역시도 어떤 특정 상황이 되면 장점이 되는 것이다. 그런데 우린 이 장점과 단점을 완전히 하나의 고정된 상태로 정해 놓고는 이것을 가지지 못하면 단점이 있는 사람이라든가 어떤 것을 가졌으면 장점이 충분한 사람이라고 못을 박아 버리고 있다.

 

설상가상으로 우리나라의 경우 혼인은 집안과 집안의 결합이라고 다들 말하기 때문에 결혼 문제에 있어서 부모들의 상대편 자녀에 대한 스펙과 그것을 기반으로 한 기 싸움 참으로 볼만할 지경이다. 그리고 이런 문제를 다룬 드라마는 매일 TV를 통해 쏟아지고 결국 그 드라마를 본 사람들에게 이런 사회 분위기가 마치 우리의 본질인 냥 설득을 하고 있다.

 

기업이 개인의 능력을 보고 합격 여부를 가리는 것은 원래 기업이 돈을 벌기 위한 조직이니 어떤 의미에서 당연하다. 단지 살아가면서 계속 느끼지만 고 스펙자가 일을 잘할지는 모르겠지만 늘 조직에 이득을 주는 것은 아니라는 점과 어떤 조직이든지 조화가 매우 중요하다는 것이다.

 

조직은 반드시 조직의 미래를 위해 앞서 나가야 할 사람과 그 앞서 나간 사람이 흘리고 간 것들을 주워서 꼼꼼히 잘 담을 사람과 정말 필요 없어 보이지만 다양한 형태의 잡일을 모두 해내는 능력을 가진 사람이 적절하게 조화가 되어야 한다. 그래서 누구나 앞서 나가기만 하고 누구나 뒤에서 줍기만 하고 누구나 잡일만 하려고 하면 그 조직은 망한다.

 

결국 돈을 벌 목적인 기업의 스펙에 대한 요구는 어느 정도 선에서 이해할 수 있다. 그런데 우리가 결혼을 하는 이유는 돈을 벌 목적은 아니다. 물론 결혼을 하고 가정을 꾸릴 땐 돈이 반드시 필요하다. 그런데 이 돈은 필요한 것이지 기업의 목적처럼 돈을 벌려고 하는 것은 아니란 뜻이다.

 

사람들은 그 가진 가치관과 성격에 따라 매우 다른 형태의 삶의 길을 간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돈만 있어서 충분히 행복한 삶을 살고 어떤 이들은 돈으로는 채울 수 없는 빈 공간을 안고 산다. 또 다른 이들은 정말로 많은 일을 하고 살아야 행복해서 늘 바쁘게 살고, 그런 사람들과 별개로 정말 게으르지만 충분히 행복하게 살아가는 사람도 많다.

 

그래서 막말로 돈과 결혼해도 평생 돈만 떨어지지 않는다면 정말로 행복하게 사는 이들이 있는 반면, 아무리 많은 돈이 있어도 행복하지 못해서 헤매는 사람도 존재한다. 이것은 정말로 같은 인간이지만 어떤 의미에서 다른 종류의 인간이다.

 

그래서 우린 모두 각자 자신에게 맞는 다른 형태의 행복을 찾을 수 밖에 없다. 그런데 우리의 행복함에 대한 평가가 한쪽으로 급격히 쏠리게 되면 그런 것으로부터 행복을 찾을 수 없는 이들은 매우 당황스럽게 된다. 분명히 어떤 일을 하거나 어떤 존재에 호감을 갖게 되는 것은 자신이 원해서 했음에도 불구하고 주변에서 왜 그런 일을 하느냐.. 왜 그런 사람을 만나느냐 라고 계속 훈수를 둔다. 사랑이 밥 먹여 주냐고 하면서 말이다.

 

특히 이런 행복에 대한 기준점을 부모의 시선에서 일명 '스펙' 중심의 가치관에 따라 주입 받게 되면 현재 자신이 하는 일과 앞으로 살아가야 할 것들이 과연 정말로 그 자신이 가고자 한 미래인지조차 스스로 판단하기 어려워진다.

 

아마도 여기에서 가장 큰 문제는 바로 행복을 자랑하는 풍조일 것이다. 물론 우린 어떤 행복함을 남에게 이야기 함으로서 더 큰 행복을 얻고자 하는데 여기엔 나를 제발 부러워 해달라는 보이지 않는 요구가 숨어 있다. 그런데 우리가 느끼는 행복 수치에 대한 계량은 도대체 표현하기가 힘들다는 문제가 있다.

 

이러다 보니 결국 우린 행복함의 수치화를 어떻게든 하려고 한다. 그리고 이것은 결국 비싼 음식, 멋진 해외 여행, 비싼 제품들의 소비 등의 타인의 욕망을 자극하는 것들이 주로 그 후보가 된다. 그리고 이런 것들에는 반드시 많은 비용이 소모되며 결국엔 돈이 모든 행복의 기준이 되어 버린다.

 

한달 동안 정말로 열심히 만든 인형과 수 천 만원을 들여서 산 인형을 서로 꺼내놨을 때 사람들은 반응은 급격히 비싼 인형으로 쏠린다. 이것은 어떤 의미에서 우리의 천박한 인식으로 인한 결과이다. 우리는 여기에서 시간과 노력과 정성이라는 계량하기 불가능해서 스펙에 들어갈 수 없는 가치를 무시하고 있다.

 

결국 스펙의 사회에서 측정 불가능한 가치들은 모두 한 뭉터기로 싸잡아져서 '그래 그것이 좋긴 한데, 그것이 밥 먹여 주는 것은 아니 자나.. 돈을 벌게 해주는 것도 아니고' 라고 서로에게 말한다. 그런데 정말로 그것이 그 자신이 생각하는 가치관일까?

 

아주 불편한 자리에서 먹는 한끼에 수 십 만원 하는 밥과 엄마가 차려준 소박하지만 맛난 한끼 중 도대체 우리가 정말 먹고 싶은 것은 무엇일까? 물론 수 십 만원 하는 밥을 사진 찍어서 SNS에 올리면 수 많은 지인들이 그것에 반응하면서 부러워하겠지만 정말로 우리는 그 식사를 원하는 것일까? 아니면 타인의 욕망을 부추기면서 부러움만을 원하는 것일까?

 

생각보다 이 문제는 근원적인 문제를 가지고 있다. 스펙이 우선시 되는 사회에서 우리는 자기가 진정 무엇을 원하는지를 생각하고 고민하기 보다는 어떻게 하면 남들에게 보일 수 있는 수치화 된 항목을 하나 더 늘리지를 생각하게 된다. 그러다 보니 늘어난 스펙 항목이 정말로 자신을 행복하게 해주는 지는 둘째 문제다.

 

물론 어떤  이들은 사회가 이미 이렇게 되어 있으니 여기에서 벗어나기란 너무 힘들다 라고 표현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개인이 그런 마음으로 서로에게 조금만 더 스펙에 나와있지 않은 가치를 소중하게 느끼려고 노력한다면 우리가 언젠간 한달 간 만든 소중한 인형을 부끄럽지 않게 어딘가에 내 놓고 사람들이 이것을 돈의 가치가 아닌 시간과 노력과 정성의 가치로 봐 주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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