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사회

양심 이야기

아이루다 2014. 3. 16. 15:01

 

인간의 특징을 정의하는 많은 것들 중 우리의 좋은 면을 말해 주는 단어들이 있다. 그 중에서 '양심'은 꽤나 중요하고 어떤 의미에서 우리가 우리를 왜 인간이라고 칭하며 또한 인간만이 가진 유일한 특징으로써 사용하기도 한다.


하지만 생각보다 양심은 매우 모호한 개념이긴 하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이 양심이 있다고 믿고 살며 또한 이 양심이 우리 인류의 보편적 성향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 것에 비해서 말이다. 그럼에도 실제로 나타나는 모습은 그 의미에 비해서 명확한 편이다. 그 덕분에 가끔 신문 기사들을 통해 전해지는 양심을 기반으로 한 감동적이거나 용기 있는 행동들은 우리에게 많은 영향을 끼치며 공감을 불러 일으키기도 한다.


그런데 이 양심이란 것은 과연 우리 인간이 원래부터 가진 본연의 성정일까? 이것은 양심이란 것이 인간 본질적인 가치인지 아니면 우리가 어디선가 주입 받은 가치인지를 묻는 질문이다. 오늘은 이것에 대한 답을 찾고 우리가 생각하고 있는 양심과 실제로 양심의 정의 그리고 이 양심의 가장 중요한 점인 양심의 역할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도록 하자.


가장 먼저 양심을 정의하라면 어떻게 말하는 것이 옳을까?  이것은 상당히 어렵지만 일단 이 양심이 우리 인간을 인간답게 해주는 가치라는 점에서는 다들 동의 할 것이다. 그리고 '인간답다' 라는 말의 쉬운 풀어쓰기는 우리가 동물이 아니라는 해석이 가능하다. 그렇다면 우리가 그리 구분하고 싶은 동물의 의미는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오직 자신만의 이득을 위해 판단하고 살아가는 삶을 의미하고 있다. 즉 우리가 극복하거나 외면하고 싶은 것은 바로 이기심에 가득 찬 존재인 것이다.


이로써 양심의 정의는 조금 명확해진다. 양심적 행동이란 어떤 이유이든 간에 자신의 이득을 포기하거나 줄이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그 어떠한 이유에는 사람마다 매우 다른 판단 기준을 가지고 있다.


어떤 이는 주변의 시선을 의식해서, 어떤 이는 아버지가 가르쳐준 가르침에 의해서, 어떤 이는 자신이 믿는 신념에 의해서, 어떤 이는 자신이 믿는 종교에 의해서 이것을 판단한다. 물론 대부분의 이런 가르침은 거의 비슷한 목적을 가지고 있기에 결과는 비슷하지만 실제로는 매우 다른 배경을 가지고 있는 셈이다.


그리고 우리는 이렇게 정의된 양심을 통해 그리고 어떤 이유이든 간에 이 양심의 소리를 따라 세상을 살아가면서 우리 자신이 개나 고양이와는 다른 고귀한 존재라는 믿음을 은연 중에 갖게 된다. 이것은 자신의 자존 감에 있어서 꽤나 근본적인 영향을 끼치게 된다. 즉 우리는 그 어떤 존재감이 없어도 단지 인간이라는 존재감만은 누구나 갖고 살아갈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야말로 존재론적 우월감의 근원 중 하나이다.


하지만 양심의 실제 모습은 이런 우리의 믿음과는 조금 다르다. 일단 그것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보통 양심적이다 라고 표현할 때 그 말이 가진 진정한 의미가 무엇인지를 생각해봐야 한다.


작은 예로써 여러 명이 같이 먹고 있는 먹거리가 있을 때 누군가 그것을 조절하지 않는 상황에서 개인별 의지대로 먹을 수 있다면 그 중에서 누군가 매우 많은 양을 가져가 버려 나머지 사람들이 먹지 못한 상황이 벌어졌을 때 우린 보통 '양심껏 퍼가라' 라는 표현을 쓴다.


여기에서 양심껏 이란 말의 의미는 어느 정도 상식 수준 말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사람들이 양심껏 퍼가기 위해서는 무엇이 선행되어야 할까? 그것은 바로 마음껏 퍼가고 싶은 욕망을 억눌러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의 욕망은 기본적으로 욕망 주체의 이득을 기반으로 한다. 즉 욕망을 품고 이것을 실현하는 과정은 그것을 하는 본인의 이득을 위해 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욕망을 줄인다는 의미는 바로 이득을 포기하거나 심지어 손해를 보는 행위까지를 모두 포함한다. 일단 이런 의미에서 보면 여기에서 쓰인 양심의 의미는 개인적 손해를 의미한다. 그렇다면 손해를 감수하는 것이 바로 인간다움의 예가 되는가? 아닐 것이다. 보통 사람은 이런 상황에서 인간다움을 느끼진 않는다.


양심을 인간다움의 예로써 활용하고자 한다면 좀 더 커다란 희생의 행동이 있어야 한다. 그래서 여기에는 보통 큰 자기 희생이 따른다. 예를 들어 침몰하는 배에서 자신에게 할당된 구명보트 자리를 타인에게 양보하는 행동이나 먹을 것이 부족한 상황에서 자신이 쥐고 있는 빵을 더 배고프고 약한 이들에게 양보하는 것들은 자신의 생명까지도 포기하는 고귀한 행동으로 여겨진다.


하지만 문제는 여기에도 앞에서 양심껏 퍼가는 것과 거의 동일한 원리가 동작하고 있음을 부정할 수 없다는 점이다. 물론 많은 이들이 양심껏 퍼가는 행동과 타인을 위해 자신의 목숨을 내 놓는 행동을 동일 선상에 두고 같은 일이라고 말하는 것을 그리 좋아하지 않을 것이다. 어떻게 먹을 것을 포기하는 것과 생명을 포기하는 행위가 같다는 말인가?


하지만 10원을 훔치든 1억을 훔치든 훔치면 도둑이란 점에서 다를 바가 없다. 즉 무엇을 포기하든 그 내용은 중요하지 않다. 여기에서 정말로 중요한 것은 자신의 이득을 포기하는 것이다. 혹은 자신의 손해를 감내해내는 것이다. 물론 그 포기해야 하는 희생의 정도가 얼마나 크냐에 따라 사람들이 그것을 받아들일 수 있는 한계치가 무척 달라짐은 사실이다. 즉 이것은 정도의 차이이지 개념의 차이가 아니란 뜻이다.


결국 이것을 적용해서 이 두 개의 상황을 원론적인 관점에서 보면 모두 생명체가 본질적으로 가진 이기심을 억누르는 행동이란 점에서 동일하다. 우리가 자신의 생명을 보전하려는 욕구 역시도 일종의 이기심이기 때문이다. 물론 생명 보전의 욕구를 이기심으로 표현한다고 해서 그것에 대해서 거부감을 느낄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왜 살고자 하는 것이 이기심이냐고.


하지만 모든 생명체는 존재하려는 본능을 가졌고 그것은 바로 어떤 식으로든 다른 존재의 희생을 기반으로 한다는 점에서 더 이상 물러설 수 없는 코너에 몰린다. 식물은 다르다고 말 할 수 있지만 만약 그 자리에 그 식물이 없다면 다른 식물이 그곳에 자랄 수 있었기 때문에 그 기회를 뺏었다는 점에서 이기적이다. 이타적인, 즉 다른 존재를 위해 모든 것을 양보하게 되면 결국 그 생명체는 죽음이란 최후를 맞이하게 된다.


이 이야기는 바로 우리 생명체는 이득을 얻고자 하는 이기심을 기반으로 한다는 점을 명확하게 해준다. 따라서 우리 인간이 자신의 생명을 포기하는 행위란 자기 이득의 포기를 의미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린 이 본질적으로 얻는 것이 아닌 이 양심을 도대체 어떤 과정을 통해 얻는 것일까? 그 대답은 생각보다 명료하고 쉽다. 우리의 삶 전체가 바로 이 양심의 교육장이 된다. 우리는 학교 생활을 통해 타인과 어울려 사는 예의 및 공중 도덕을 지키는 법 등을 배운다. 또한 집에서나 다른 또래의 아이들과 어울려 노는 과정에서도 욕심과 절제를 배우는 것이다. 그리고도 다양한 개인별 경험이나 부모의 가르침에 의해 자신만의 양심을 갖게 된다.


문제점은 이렇게 형성된 양심은 매우 불안하다는 점이다. 즉 우리의 양심은 보통 일관적이지 않다. 그래서 우린 자신의 처지에 따라 이 양심의 무게를 조절한다. 결국 자신이 충분히 만족스러우면 좀 더 양심적으로 살고 자신이 어려운 처지에 놓이면 덜 양심적으로 행동한다. 거기에 더해서 우리의 양심은 바로 주변의 상황에 크게 영향을 받는다. 그래서 도심지 어딘가에 누군가 쓰레기를 버려두면 그 후로 그곳에 수북하게 쓰레기가 쌓여서 어느새 쓰레기 장처럼 변하고 만다.


이런 이유로 인해서 우리 사회는 모든 구성원이 좀 더 높은 양심 수준을 갖길 바란다. 양심이 잘 지켜지는 사회는 안정적으로 운영되고 그럼으로 인해 사회 전체의 행복도가 올라 갈 수 있다. 따라서 우리 사회는 타인의 귀감이 되는 양심적 행동을 한 사례를 최대한 전파하여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치려고 노력하고 이런 노력들이 결국 영웅들을 만들어 내는 것이다. 특히 타인은 흉내내지 못할 수준의 용기 있는 신념이 느껴지는 인간의 희생은 많은 이들에게 귀감이 되기에 의도적으로 이용되기도 한다.


그렇지만 양심의 진정한 역할은 이것이 아니다. 놀랍게도 우리 양심의 진짜 본 모습은 바로 전체의 이득을 위한 것이다. 즉 우리 개개인이 좀 더 양심적으로 살아갈수록 우리 사회의 전체 이득은 더 높아진다. 그런 면에서 양심은 또 다른 이름의 인간 전체의 이기심이다.


이것이 무슨 소리인가 싶겠다. 하지만 냉정하게 판단해서 보면 양심적인 행동이란 바로 사회 구성원 개개인이 자신의 이득을 조금씩 포기함으로써 전체 이득을 높이는 행위이다. 폭탄이 설치된 버스에서 도대체 그것을 해체할 방법이 없을 때 단 한 명이 승객을 모두 내려준 후 그 버스를 타고 절벽으로 몰아 떨어져 자신만 죽음을 맞이하게 되었다면 이것은 냉정한 의미에서 이득이 된다.


다 죽을 수도 있던 상황을 단 한 명의 목숨으로 바꾼 것이다. 그리고 이런 영웅적인 행동을 한 사람은 현세에도 후세에도 널리 알려져 또 다른 이런 숭고한 희생자가 나오길 바라게 되는 것이다. 이것은 생각보다 매우 중요하며 이 원리가 결국 우리 인간 사회를 유지시켜주고 있는 것이다.


이렇듯 양심의 가장 큰 역할은 바로 우리 사회 전체의 이득을 원한다. 이런 이유로 인해서 양심적인 사회가 될수록 그 사회는 점점 더 살기 좋아지는 행복한 사회로 변해간다. 이것이 우리 사회가 개개인에게 양심을 교육시키고 양심적으로 살길 바라는 가장 큰 이유가 된다.  하지만 여기에서 개개인이 조금씩 양심적인 행동을 통해 자신의 이득을 포기해야 하는 과정은 필수적이다.


이것을 반대로 말하면 비양심적인 행동은 바로 개인의 이득을 가져다 준다. 그래서 전체의 이득보다는 개인의 이득을 원하는 단기적인 목표를 가진 사람이라면 덜 양심적으로 행동하면서 좀 더 양심적인 사람들의 이득을 빼앗고 살아간다. 그렇지만 보통 사람들은 비양심적인 사람들이 나중에 벌을 받을 것이라고 믿는 경향이 있지만 그렇지 않다. 실제로 이들이 벌을 받으려면 나머지 모든 사람이 모두 비양심적으로 행동해서 사회 전체가 불행하게 되는 수 밖에 없다. 하지만 보통 사람들은 그것을 선호하지 않으면서 비양심적인 사람들이 없어지길 바란다.


하지만 어떤 의미에서 보면 양심적인 삶이나 그렇지 않은 삶이나 모두 이득을 원한다는 의미에서 동일하다. 단지 그 이득이 바로 눈앞에서 자신에게 실현되길 바라는 사람과 자신과 관련이 없더라도 늦지만 어디선가 더 크게 나타나길 바라는 마음에서 행동하는 사람과의 차이가 날 뿐이다.


그러니 결국 우리가 양심을 동물과 우리를 구분하는 잣대로 쓰는 것은 매우 어리석은 생각이다. 그리고 동물들 중에서도 이런 양심적인 행동을 하는 존재들이 있다. 그것은 무리를 보호하려는 목적을 가진 동물들의 행동인데 적이 나타나면 경고의 소리를 내어 그 자신이 적의 표적이 되는 것을 마다하지 않는 것이다. 이것을 동료에 대한 희생으로 볼 수도 있지만 결국 자신이 속한 무리의 미래를 위해 그렇게 행동하는 것이 더 맞는 것이다.


결국 양심에 대한 우리의 태도는 그 양심의 행동에 대한 찬양이나 숭배가 아닌 전체 이득의 입장에서 접근해야 한다. 하지만 우린 지금도 인간 자체의 가치 성을 믿고 그것을 자발적으로 발현하길 원한다. 즉 개개인의 의지적인 양심적 태도가 나타날 거이라고 믿으면서 그것을 모두 개인적인 영역에 두고 있다.


하지만 실제로 양심은 우리의 믿음과는 달리 강압적인 방법으로 적용되어야 옳다. 그것이 바로 전체의 이득을 위한 가장 효율적인 방법인 것이다. 그렇지만 우리 인간의 자신이 인간이라는 타고난 우월의식에서 빠져 나오지 못하기에 어떤 강압에 대해 무조건적인 거부감을 보인다.


이런 인간다움에 대한 우리 스스로의 근거 없는 믿음이 계속 되는 한 우리의 양심에 대한 기대는 계속 될 것이며 그 기대감으로인 인해 우린 우리가 진정한 의미의 인간이 될 수 있는 기회를 그리 많이 갖지 못하게 될 것이다.


그 덕분에 인간들에게 인간다움의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는 존재들은 실제로 거의 없는 것이 현 시대의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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