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사회

피해자와 가해자

아이루다 2014. 3. 6. 10:04

 

요즘 중/고등학생들에게 있어서 가장 심각한 문제가 무엇일까? 여기에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나는 그것 중 가장 우선으로 '왕따' 문제를 꼽는다.

 

왕따 문제는 예전에 글에서 한 번 다룬 적이 있는데,아무튼 다른 문제들은 그나마 어떻게든 극복이 될 수 있는 것인데 반해서 왕따 문제는 심한 경우 극단적 선택인 자살까지 이르게 할 수 있으며 그렇지 않더라고 학창시절을 거의 지옥 같이 만들고 개인의 자아를 파괴할 수 있는 심각한 위험을 안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렇게 한 번 심하게 상처 입은 자아는 정말 평생을 걸쳐 당사자의 삶을 갉아 먹게 된다. 그리고 왕따를 한 아이들은 한 때 그 시절 재미있던 기억으로 남아 있다.

 

왕따를 하는 아이들은 그저 재미나 혹은 적은 이득을 얻어내기 위해 하는 짓일지 모르기만 당하는 아이에게는 아무 생각 없이 던진 돌에 맞은 개구리와 비슷하다. 아이들은 그저 재미로 돌을 던지지만 돌을 맞은 개구리는 죽음에 이를 수 있다.

 

하지만 왕따 문제를 접하게 된 사람들은 두 가지 관점에서 그것을 바라 본다. 첫 번째는 일단 왕따를 하는 아이들에 대한 문제점을 지적한다. 이것은 일반적으로 합리적인 판단이다. 그리고 두 번째는 바로 그 왕따를 당하는 아이를 책망하는 목소리가 있다. 왜 병신처럼 그렇게 당하고만 사는지에 대한 조언을 가장한 비난이다. 실제로 나 역시도 이 범주에서 벗어나지 못함을 스스로 인정한다.

 

그래서 그 왕따를 당하는 아이가 좀 더 세차게 그것에 대해 반항하거나 극복하려고 했다면 그렇게 되지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 아이에게 말한다. 왜 그 문제를 부모에게, 선생에게 아니면 경찰에게 말하지 않았는지 조언을 하는 척 하면서 책망한다. 왜 그렇게 사냐고.

 

이와 비슷한 문제로는 여자들이 당하는 성폭행에 대한 문제이다. 우리 사회에는 아직도 성폭행 문제에 있어서 여자들이 틈을 보이니 남자들이 달려 든다는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꽤 된다. 즉 성폭행을 저지른 인간도 문제지만 노출이 심한 치마를 입고 다니거나 늦은 시간에 다니거나 하는 등 처신이 부적절해서 당한 부분도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인 것이다.

 

 

이 논리를 그대로 다른 곳에 적용하면 집의 문을 제대로 잠그지 않아서 도둑이 들어왔다면 도둑도 문제이지만 문단속을 제대로 못한 그 집 주인도 문제가 있다는 의미가 된다물론 이것은 생각하기 나름이다.

 

이것을 좀 더 자세하게 들여다 보기 위해서 우린 가해자와 피해자의 입장을 생각해 보자. 과연 우리가 보통 생각하는 것이 상식적인지에 대한 생각이다.

 

피해자는 왕따 당하는 아이성폭행 당한 여자, 집을 도둑맞은 주인이고, 가해자는 왕따 시키는 아이, 성폭행한 범인 그리고 집을 훔친 도둑이다.

 

이 세 개의 경우 모두 피해자가 좀 더 적극적으로 노력했다면 그 피해를 당하지 않았을 것이란 논리가 있을 수 있다. 왕따를 당하지 않게, 성폭력을 당하지 않게, 집에 도둑이 들어오지 않게 더 노력했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생각이다. 물론 이것이 틀린 말은 아니다. 하지만 이것을 좀 더 깊게 생각해보면 왜 피해를 당해 손해를 본 사람의 불찰을 지적하고 있을까?

 

입장을 바꾸어서 당신이 혹은 당신의 가족이 이러한 일을 당했을 때도 같은 논리로서 그것에 대해 대응하겠는가? 당신이 혹은 당신의 아이가 잘못 행동해서 왕따를 당하고, 성폭행을 당하고, 집안에 도둑이 들었다고? 그러니 쌍방 과실이라서 그 범인을 잡아 재판을 할 때 처신을 제대로 못한 자신의 잘못도 있느니 상대의 형량을 감량 해주자고 말하겠는가?

 

실제로 이것은 꽤나 심각한 입장차이를 가지고 있다. 그 자신이 당했을 때와 내가 모르는 이들이 당했을 때 사람은 매우 다른 입장에서 이것을 접근하기도 한다. 기본적으로 살아가면서 범죄 행위에 당하지 않도록 조심하는 것은 틀린 행동이 아니다. 사람은 기본적으로 이기적이고 악한 존재이기에 인간이 존재하는 한 범죄는 일어날 수 밖에 없다.

 

하지만 문제가 발생하기 전에는 방지 차원에서 이 논리가 어느 정도 통용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어떻게 되었든 간에 이미 범죄가 이루어지고 난 후 피해자와 가해자가 명확하게 구분이 된 상황일 때 조차도 왜 피해자는 자신의 행동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는 조언을 가장한 비난을 받아야 할까?

 

피해자와 가해자가 동시에 비난 받고 특히 심각한 피해를 입은 피해자가 너는 왜 그렇게 살아서 그런 일을 당하느냐 라고 일부 책임을 전가 받는 상황을 우리는 보통 상식 수준에서 판단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다시 한번 생각해보자. 정말로 그 사람들이 그런 비난을 받아야 맞나?

 

요즘 대한민국에는 자살률이 계속 증가 중이다. 경제가 어렵다 보니 경제적 이유로 자신의 목숨을 끊는 이들이 점점 늘어나고 있다. 그리고 이들에 대한 사람들의 시선 중 하나 역시 죽을 용기가 있으면 그 힘으로 세상을 대항해서 살지 왜 죽냐는 객관적이고 현명한 판단인 듯 스스로 여기는 말을 한다.

 

또한 그 사람의 어려운 상황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도 더 어려운 사람들도 사는데 왜 그것을 못 참냐고 하면서 정말로 최선을 다해 삶을 살았는지 되 묻는다. 그런데 정말로 묻고 싶다. 그런 말을 하는 사람에게 당신이 그 입장에 되어도 그렇게 말할 수 있을지에 대해서.

 

운이 없게 정말로 하루 아침에 모든 것이 망하고 한 끼 먹는 것도 힘든 삶이 계속되어 스스로 죽고 싶을 만큼 힘들 때 누군가 당신보다 더 힘들게 사는 세상에서 가장 힘들게 사는 사람 이야기를 해주면서 그 사람보다 나으니 행복한 줄 알라고 말하면 순순히 그것을 받아 드릴 수 있는가?

 

내가 세상 그 어떤 사람보다 나으니 상대적으로 행복할 수 있다는 논리는 우리가 흔히 살면서 경험하는 비교 행복의 원리와 완전히 동일하다. 우리는 살면서 실제로 내 행복을 타인의 행복과 끝없이 비교하면서 살아가는 것이 매우 익숙해 그것이 절망의 레벨까지 떨어져도 결국 다시 비교 행복론을 들고 나오면서 그 사람에게 조언이란 이름의 비난을 한다.

 

손가락이 잘린 사람이 다리가 잘린 사람을 보고 '난 저 사람처럼 다리가 잘리지 않고 손가락이 잘려서 아프지 않아' 라고 말할 수 있을까? 도대체 이런 비교를 통한 상대의 불행함을 측정하는 사고 방식은 어디에서부터 와서 우리를 마치 합리적인 사람인 냥 포장해주고 있는 것일까?

 

살아가다가 도저히 감당이 안 되는 불행이 찾아오고 거기에 미래에 대한 희망마저 없어 스스로 그 삶을 놓아 버리는 사람들에게 우리는 왜 더 열심히 살지 그렇게 쉽게 포기하느냐고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 가해자는 우리 사회 전체이고 피해자는 그들인데 우린 피해자를 비난하고 있는 것이다.

 

 

학교를 졸업하고 취직을 하지 못해 전전긍긍하는 젊은이들에게 왜 아무데나 들어가서 열심히 일하지 않냐고 비난하는 어른들의 모습도 매 한가지다. 과연 그렇게 일을 해서 한 달에 백 만원을 손에 쥐었을 때 당장 먹고는 살겠지만 그들에게 미래라는 것은 무엇일까? 그 불안한 미래에 대한 개인의 절망을 도대체 어떻게 측량하는 것일까?

 

젊은이들이 취직을 못하는 것을 오직 그들이 열심히 살지 않아서 그렇다고 여기는 우리들의 고정적인 사고 방식은 실제로 우리 사회가 그들에게 일자리를 만들어 주지 못한 기성 세대의 잘못은 없다는 뜻인가? 우리나라가 한 때 매년 엄청난 경제 성장을 하던 시절, 일자리가 넘치고 다들 못살지만 열심히 살면 희망이 보이던 시대를 살던 사람들이, 그때 앞으로만 달려서 생겨난 수 많은 사회 문제가 사방에서 터지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이 힘든 시대에서 출발 점에 선 젊은이들에게 더 열심히 살아야 한다고 비난하고 있는 것이다.

 

이 역시도 가해자는 사회의 기성 세대들이고 피해자는 젊은이들이 된다. 그럼에도 우린 피해자에게 왜 너는 더 공부를 열심히 하지 않았니 라고 말하면서 공부를 잘하는 아이들이나 정말 열심히 한 아이들의 사례를 들고서는 상대적으로 비난을 하고 있다.

 

하지만 누가 자신의 삶을 왕따 당하고, 성폭행 당하고, 집에 도둑이 들고, 자살을 하고, 백수로 지내고 싶어 한다는 말인가?

 

어떤 문제를 대비하고 어떤 문제를 해결하는 것에 대해서 열심히 하라고 말하는 것은 틀린 말이 아니다. 하지만 모든 이가 다 그렇게만 살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누군가는 소심한 성격을 타고나고, 누군가는 밤 늦게 우범 지역을 걸어 다닐 수 밖에 없다. 또한 어떤 이는 자신의 의도와 상관없이 아프거나, 사기를 당하거나 해서 경제적으로 큰 위험에 처하기도 한다.

 

도대체 이런 문제들을 우린 언제까지 몽땅 개인적인 것으로만 몰아가고 그 문제를 일으킨 범인 중 하나가 그 자신이 아니라고 주장하면서 살아갈까? 그들의 삶을 대하는 방식을 비난하고 나면 얻어지는 아주 조그만 양심 세탁이 그리 중요 하다는 말인가?

 

나는 적어도 그런 삶을 살지 않도록 오늘 하루도 열심히 살았으니 너 역시 나처럼 그렇게 살아야 한다고 말하고 싶은가? 하지만 그런 말을 하는 그 사람 역시도 늘 언제나 자신이 그런 문제의 당사자가 될 수 있다는 두려움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살아가고 있으면서 말이다. 거기에 더해서 우리 자신과 그 사람은 절대 동일한 능력을 가진 존재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우기고 있는 것이다.

 

어떤 공동체이든 그 구성원 모두가 자기만 살겠다고 외치면 결국 무너지고 와해될 수 밖에 없다. 우린 과거 역사 속에서 그것을 경험했고 그것을 직접적으로 혹은 간접적으로 배웠기에 인간 사회에서 살아갈 때 무한 이기심에 대한 절제를 자신도 모르게 어려서부터 배우고 있다

 

그런데 우린 매우 불행하게도 자기만 살겠다고 능동적으로 나서지는 않지만 그냥 있다간 죽게 생겼으니 살려고 발버둥 치는 삶을 살아 갈 처지에 놓였다. 내가 잘 살기 위해 남을 밟는 것은 아니지만 내가 살기 위해 어쩔 수 없이 다른 이를 밟으면서 살아가야 하는 것이다. 우린 그래서 생계라는 단어만 들어가면 그 어떤 이기적이고 비도덕적인 행위도 일정량은 이해해 주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내가 잘 살기 위해 남을 밟는 것이나 내가 살아 남기 위해 남을 밟는 것에서 밟히는 사람 입장에서는 똑같이 밟힐 뿐이다. 그런데 거기에 대고 왜 너는 열심히 살아서 남을 밟아야지 병신같이 밟히고 사냐고 되 묻고 있다. 정말 많이 양보해서 내가 살기 위해 남을 밟은 것은 어쩔 수 없는 문제라고 이해해도 그 밟인 사람에게 왜 밟히냐고 비난하는 것은 너무도 심각한 비상식적인 행동이 아닐까?

 

왕따, 성폭행, 도둑, 자살, 취직 그리고 한참 더 있을 수 많은 사회 문제들은 모두 사회 구성원들의 생각이 모여서 만든 구조적인 문제점이다. 즉 시스템의 문제인데도 불구하고 우린 이것을 아직도 개인별로 해결해야 할 문제로만 여긴다. 그래서 누군가 자살을 하면 애도하거나 비난만 할 뿐 왜 그들이 자살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생각조차 안 한다.

 

이것이 우리의 자화상이고 더욱 나를 두렵게 하는 것인 우리 사회가 점점 더 방향을 심하게 틀고 있다는 점이다. 그리고 그 심하게 틀고 있다는 증거는 아마도 매년 늘어나는 자살자의 숫자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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