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과철학

인간의 이성에 대한 마지막 정리

아이루다 2013. 10. 19. 09:12

지구상에는 살아가고 있는 모든 생명체를 두 가지로 나눈다면 어떻게 나누는 것이 좋을까? 간단히 그 답을 내어 본다면 일단 동물과 식물도 하나의 답일 것이고 육지 생물과 수생 생물도 또 하나의 분류가 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현재 지구상의 생명체를 정말 냉정한 의미로 두 개로 나눈다면 나는 인간과 그 외의 동물로 나누고 싶다.
 
이것은 그만큼이나 우리 인간이 모든 생명체에서 중에서 매우 특별한 존재라는 것을 의미한다. 특히 우리가 이룩한 현재 수준의 문명과 미래에 이룩할 가능성이 높은 문명 수준은 다른 동물이 이룩한 수준에 비하면 너무도 대단하고 놀랍기 그지 없다.
 
그럼 이쯤에서 우리 인간과 그 외 동물의 가장 큰 차이점이 무엇일까? 물론 이런 종류의 질문은 꽤나 흔한 편이어서 대답이 그리 어렵진 않다.  직립보행, 뛰어난 두뇌 능력, 언어 능력, 사회성, 도구사용 능력 등이 이것에 대한 대답으로서 충분한 후보 군들이긴 한데 문제는 자연계의 다른 동물군을 잘 살펴보고 연구해보면 이것들은 단지 인간만의 특징은 아니라는 점이다.
 
캥거루나 펭귄도 직립보행을 하며 돌고래, 범고래 등은 우리 인간에 비해서도 꽤나 뛰어난 지능을 가진 동물들이다. 그리고 역시나 침팬지와 같은 영장류 등은 우리 인간만큼 많은 종류의 단어를 사용하지는 않아도 의사 소통을 하며 우리와 같은 대단위 사회를 이룬 것은 아니지만 소규모의 사회성 역시 자연계에서 흔하게 발견 된다. 도구사용 능력 역시도 그 단순성과 복잡성의 차이일 뿐 도구를 사용한 동물은 원숭이나 침팬지와 같은 상대적으로 뛰어난 두뇌를 가진 동물군 말고도 우리가 '새대가리' 라고 비웃는 하늘을 나는 새 종류에서도 존재하고 있다. 심지어 단순한 곤충에 불과한 개미는 진딧물을 키우는 축산업과 버섯 포자를 키우는 농사도 짓는다.
 
이렇게 하나 하나 제거해 가다 보면 과연 무엇이 인간 고유의 특징인가에 대한 의구심이 남긴 하지만 우리에게는 영원히 비빌 언덕이 하나 있다. 그것은 바로 영혼이나 이성과 같은 인간만이 가지고 있을 같은 그런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서 영혼은 실제로 증명도 안되었고 또한 혹시나 있다고 해도 동물이 영혼이 없다는 증거도 없으니 제외하도록 하고 유일하게 남은 이성만이 인간의 고유 특성이라고 가정해보도록 하자. 이것은 딱히 틀린 가정은 아니다.
 
그런데 이쯤에서 질문 하나를 던지고 싶다. 과연 이성은 존재하는 실체인가?
 
물론 인간에게 이성은 분명하게 존재하는 단어라는 것은 사실이다. 사전적 정의 상 우리는 본능이나 감정을 조절하는 능력을 보통 이성이라고 칭하는데 실제로 이건 맞다. 만약 우리 인간에게 이성적인 면이 없다면 우린 우리가 흔히 보는 동물들과 그리 다를 바 없는 삶을 보내고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 이성은 과연 어떻게 해서 우리에게 생성된 것일까? 이것에 대해 알아가기 위해 우선 인간이 어린아이 일 때를 바라 볼 필요가 있다. 그런데 대충 1~2세의 어린아이들에게 이성이 있다고 말하기 조금 애매하다. 물론 그들도 분명 인식을 하고 판단을 하고 싫고 좋고 에 대한 표현도 하지만 아직은 부정확한 언어 능력과 인지 능력 부족으로 인해 거의 동물 수준의 삶을 살아간다. 심지어 똥 오줌 조차 못 가려서 기저귀를 채워놔야 하는 것이다.
 
그럼 이 이런 나이의 아이들은 이성이 있다고 판단해야 하는가? 아니면 이성이 존재하지만 발달하지 못했다고 판단해야 할까? 이것도 저것도 아니면 아예 이성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해야 할까? 이것은 확실하게 뭐라고 단정하기 힘든 질문이다.
 
그럼 이제 두 번째로 이것과는 조금 다른, 다른 환경에서 자란 성인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자. 그리고 그 예로 인간의 사회에서 자라지 못한 성인을 생각해보자. 물론 실제로는 힘들겠지만 자연 속에서 인간 사회의 보살핌을 받지 못한 채 온전히 그 스스로의 힘으로만 살아온 아이는 도대체 성인이 되었을 때 그에게 이성이란 것이 존재할까?
 
혼자 살아가는 인간에 대한 이야기는 실제보다는 소설 속에서 몇 번 등장한 적이 있다. 그것은 누구나 많이 알고 있는 '타잔', '로빈슨 크로스' , '정글북 의 모글리' 등이 그 주인공이다. 그런데 일단 로빈슨은 인간 사회에서 교육을 받은 사람임으로 제외시키고 타잔과 모글리 만을 생각해보자. 타잔은 아주 어린 시절 그를 데리고 아프리카를 방문한 부모가 모두 죽어서 유인원 품에서 자란 아이이다. 그리고 그 자신이 유인원이라고 믿고 살다가 우연히 부모의 유품을 발견하고는 거기에 있는 책을 이용해 스스로 공부를 하여 일명 '지성' 을 깨닫게 된 사람이다.
 
그는 약간 알게 된 지성을 통해 이성적인 판단을 하고 나서 훗날 자신의 짝인 '제인' 을 만나 문명 사회로 돌아갔다가 환멸을 느끼고는 제인과 함께 다시 아프리카로 떠나면서 이야기가 마무리 된다. 그렇다면 이 이야기 속에서 타잔은 스스로 이성을 만들어 냈으니 이성은 인간이 가진 본질적 가치가 아닌가 라고 생각 할 수 있을까?
 
두 번째 이야기 모글리에서는 좀 환상적인 이야기가 펼쳐진다. 거기에 나오는 곰과 표범 바루, 비키라는 아예 사람처럼 말을 한다. 그래서 모글리는 어려서부터 늑대 무리와 함께 자라지만 정글 속의 동물들과 함께 어울리면서 인간처럼 생각하고 말하는 동물들 틈에서 자라 온전히 인간으로 자라란다. 물론 정글북은 완전히 소설이니 이것이 가능하다.
 
여기에서 타잔이 이성을 갖게 된 동기를 보자. 그는 스스로 유인원이라고 믿고 살다가 우연히 부모의 유품을 발견하고는 거기에 나오는 그림 책을 통해 자신도 모르게 공부를 한다. 이것은 물론 일어나기 매우 힘든 상황이긴 한데 이것을 용납하더라도 만약 그가 그 부모의 유품을 발견하지 못했다면 과연 스스로 지성을 통해 이성이란 것을 만들어 낼 수 있을까? 설령 그렇다고 쳐도 제인이란 존재를 만나 인간으로 가질 기초적 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했다면 그는 과연 어떤 존재로 남게 되었을까? 뭐 정글북은 동물들이 말을 하는 말도 안 되는 상황이니 더 이상 이야기 할 필요가 없다.
 
이제 다시 어린 아이 이야기로 돌아가보자. 만약 어떤 아이가 인간의 사회 속에서 자라더라도 갇힌 채 인간으로서 교육을 전혀 받지 못했다면 이 아이는 과연 인간의 이성을 가질 수 있을까? 나는 개인적으로 이 부분에 대해 어느 정도 회의적이다. 그렇다면 정상적으로 이성을 갖게 된 아이는 어떤 과정을 거친 것일까?
 
인간의 아이는 어린 시절 매우 오랜 훈련을 한다. 아이들은 아무것도 모른 채 먹고 자기만 하는 신생아 시절을 거쳐, 일 이년의 시간이 흐른 후 기거나 걷는 동작을 할 때도 하루 이틀 만에 해내지 못한다. 실제로 아이들이 어떤 동작을 제대로 배우기 위해서는 몇 달을 반복적으로 노력해야 한다. 그리고 거기엔 정말 많은 반복적인 실패가 함께한다. 만약 성인 어른이라면 진작에 포기할 정도의 노력이지만 인식 능력이 느린 아이는 그것에 대해 크게 좌절하거나 우쭐해 하거나 하지 않는다. 그 덕분에 아이는 포기하지 않고 수년에 걸친 노력의 결과로 걷고 달리고 숟가락과 젓가락으로 써서 밥을 먹을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언어를 배우는 과정은 훨씬 힘들다. 언어는 거의 수 년간에 걸친 따라 하기를 통한 방법으로 익힌다. 하지만 성인이 되면 평균적으로 그보다 훨씬 더 많은 시간이 필요해진다. 물론 쉽게 배우는 사람들도 있지만 많은 사람들은 그 힘듦 때문에 중간에 포기하고 만다. 그래서 부모들은 아이들에게 어릴 때 외국어 교육을 시키려고 노력하고 있는 것이다. 그 외에 배변이나 의사표현, 장난감 가지고 놀기 등등은 모두 이런 식으로 몇 달에서 수 년까지의 절대적 교육의 시간이 필요하다.
 
이런 초보 과정을 거친 아이는 다시 정규 교육 과정을 통해 적어도 10년 가까이 교육을 받은 후 사회에 진출하게 되는데 결국 우린 20년 정도의 시간을 보낸 후에나 비로소 한 명의 정상적인 인간으로서 이 사회 속에 진입을 하게 되는 것이다. 물론 그 후에도 우린 거의 평생을 배우게 된다. 물론 잊는 것도 많지만.
 
이 전체 과정이 매우 오랫동안 그리고 우리가 그것을 잘 인식하지 못하지 못하고 지나가서 그렇지 우린 한 명의 이성적인 인간으로 자라나기 위해 꽤나 오랫동안 사회로부터 명시된 교육과정이나 암시적인 교육을 받는다. 그 덕분에 우리가 일정한 나이를 먹었을 때 소위 말하는 이성에 대한 개념이 생겨나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교육 과정을 거치지 못한다고 해도 단지 지식이나 인간 고유 능력이 부족할 뿐 사고 자체는 우리가 이성적이라고 믿고 싶은 그런 절차를 밟을 수 있을 것인가?
 
오랫동안 교육을 받고 그것을 활용 할 수 있는 인간의 가장 큰 능력 배경은 역시나 뛰어난 지능이다. 우린 다른 동물에 비해 커다란 용량을 가진 뇌 속에 많은 것을 기록해두고 필요에 따라 그것들을 응용해서 기존의 것을 모방하거나 아주 새로운 생각을 해내기도 한다. 살아 가면서 오랜 시간을 통해 쌓은 다양한 지식은 많은 용도로 사용되는데 그 중에서 가장 크게 쓰임새를 보이는 곳이 바로 ‘계산능력’으로 활용되는 영역이다.
 
우린 혼자 살지 못하는 동물이다. 특히 어린 시절은 혼자 사는 것 자체가 단순한 외로움의 문제가 아닌 생존과 인간다움에 대한 기회를 뺏기는 것이다. 인간은 그래서 늘 누군가와 함께 해야 하며 그 필요에 의해 어떤 식으로든 다양한 관계를 맺는다. 그 관계는 부모와 자식, 형제와 같은 선택 불가능한 관계도 있지만 어린 시절부터 교육과정이나 그 후 사회에 진출하게 되면 많은 관계는 다른 사람들 간에 주고 받는 거래의 관계로 맺어진다.
 
그리고 이 거래에서 가장 중요한 능력은 바로 손익을 계산해 내는 능력이다. 어린 아이들도 소위 말하는 눈치를 본다. 이것은 동물들도 그렇다. 이 눈치를 보는 행위 자체가 상대에 대한 가늠을 하는 행위이고 이것을 통해 우린 내가 얻을 수 있는 이익의 한계치를 계산하거나 혹은 내가 가진 것을 뺏길 수 있는 가능성을 타진한다. 우리가 순수하다고 믿는 많은 관계들 역시도 이런 계산은 기본적으로 깔린다. 단지 그것이 단순하게 나 자신의 물질적 이득만을 쫓지 않기 때문에 그것에 대해 잘 느끼지 못하는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 인간은 감정적 동물이며 식욕, 성욕, 수면욕 등 기본적인 본능을 가진 존재란 점을 생각해야 한다. 그런데 이런 것들이 우리를 생존하게 해주기도 하지만 많고 다양하고 복잡한 관계에 있어서 잘못 표현이 되면 관계를 망치는 결과를 초래 할 수 있다. 너무 감정적으로 기복이 커서 주변 사람들이 감당이 안되거나 극도의 이기심을 보여주는 사람이나 아무데서나 방구를 뿡뿡 끼는 사람은 주변 사람들을 불편하게 하거나 경계심을 갖게 해서 결국 그 자신의 관계에 있어서 문제를 일으킬 수 있다.
 
어린 아이들은 화가 나면 화를 내고 슬프면 운다. 이것은 매우 감정에 솔직한 반응을 보인다는 뜻이며 성인이 되어 갈수록 감정을 쉽사리 드러내면 어떤 경우에 난처할 수 있다는 것을 자연스럽게 배운다. 그것은 누군가를 싫어한다고 해서 싫은 척을 대 놓고 냈다가는 나중에 혹시나 그 사람에게 어떤 부탁할 일이 생겨 곤란함을 느낀 경험을 해보면 쉽게 이해가 된다.
 
그래서 결국 우린 성인이 되어 가는 과정에서 바로 이 본능과 감정에 대한 적절한 제어 능력을 배운다. 물론 완전한 제어는 불가능 하다. 그래도 최선을 다해 각자가 할 수 있는 노력을 한다. 그리고 거기에 담긴 의미는 바로 우리가 자신의 이득을 최대화 시키기 위해 미래에 손해가 될 가능성이 높은 행동이나 말 등을 최대한 조심하고 또한 이득이 되는 방향으로 생각하고 행동한다는 것이다.
 
결국 이것을 하나로 연결해보면 우린 본래 감정적이고 본능적인 존재이다. 그리고 이 본능은 무한한 개인적 이득을 추구하는 본성을 가졌다. 하지만 우린 오랫동안 사회 속에서 교육을 받고 자라서 그렇게 무한한 개인적 이득만을 추구했다간 실제로는 손해를 볼 수 있다는 것을 배운다. 이것은 기본적으로 관계에 있어서의 계산 능력을 기본으로 한 이성이라는 이름의 조절력을 통해 적절하게 제어한다. 그럼으로써 우린 감정이나 본능에 의해 살아가는 존재가 아닌 이성적으로 조절되는 존재로 인식된다.
 
만약 우리에게 이성의 조절력 혹은 계산 능력이 없으면 어떻게 될까? 어렵게 생각할 필요가 없이 우리의 문명이 발전하지 못했던 시절, 즉 원시인의 삶처럼 거의 동물 수준인 약육강식 형태의 삶을 살게 됨을 충분히 예상해 볼 수 있다. 실제로 현대에 들어서도 어떤 커다란 문제로 인해 국가 공권력이 마비된 사회에서는 약탈, 폭행 등이 흔하게 발생하는 이유가 바로 이것 때문이다. 공정한 규칙에 의한 일반적인 계산이 제대로 동작하지 못하면 인간은 각자의 극대화된 이득 추구로 인한 심한 혼란이 발생한다.
 
또한 남에게 아쉬운 것이 없는 사람에게도 이런 비 이성적 행동이 나타난다. 충분히 많은 돈과 무소불위의 권력을 가진 사람은 남에게 아쉬운 소리를 할 필요가 없어서 매우 강압적이고 권위주의 적이며 심지어는 완전히 다른 존재처럼 행동하기도 하는데 이것 역시나 살아가면서 계산조차 할 필요가 없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
 
손해와 이득을 위해 열심히 계산하는 것은 행복한 일은 아니다. 심지어 꽤나 피곤한 일이다. 눈치를 보고 상황을 판단해야 하며 의도하지 않은 실수를 후회하기도 한다. 우린 최종적인 이득을 얻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이 계산을 할 수 밖에 없다. 하지만 이것이 필요 없는 단계에 있는 사람이라면 이런 피곤함을 느끼기 싫어한다. 감정에 대한 조절이나 본능에 대한 조절을 할 필요가 없다면 얼마나 자유롭고 행복할 것인가? 어쩌면 우린 모두 이런 삶을 꿈꾸고 있을지도 모른다. 먹고 싶은 것을 언제든 먹고, 가고 싶은 곳을 언제든 가고, 하고 싶은 것을 마음껏 하고 그래서 결국 우리 모두는 돈을 많이 벌거나 권력을 갖길 원한다.
 
 
이성에 있어서 기본이 되는 계산이 포함하는 범위는 보통 개인의 영역에 머무른다. 우린 나의 이득과 손해에 대해 생각하고 고민하고 결정하지 남의 이득과 손해를 가지고 고민하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우린 어떤 경우에 그것의 대상을 확장한다. 그것은 바로 결혼과 같은 제도를 통해 서로에 대한 신뢰가 높아진 부부간에 나타날 수도 있고 자식이나 부모간의 관계까지도 가능해진다. 그리고 어떤 가족은 형제들이나 더 먼 관계까지도 확장되기도 한다. 물론 여기까지도 확대하지 못하고 개인 영역에 머무는 이들도 꽤나 있다.
 
그리고 여기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다. 어떤 사람들은 타고난 성향과 교육의 효과로 인해 이것이 친구나 심지어 자신이 알지도 못하는 공동체 구성원까지도 확대 된다. 그래서 상황에 따라 우린 자신이 소속된 학교의 이득이나 지역의 이득, 국가의 이득까지도 계산 대상에 넣는다. 그리고 우린 이것들을 위해 애교심, 애향심, 애국심 등의 개념을 만들어서 확대 되기를 원한다.
 
여기에 더 특별한 사람들은 그것이 인간 그 자체로 확대된다. 국가, 인종, 성별을 떠난 보편적 인간 가치에 대한 추구가 바로 그것이다. 이들은 단체를 이루고 지구적인 단위의 지원이나 인간을 둘러싼 환경을 지키기 위해 노력하기도 한다. 이것을 단순화 시키면 이들은 그들의 이득 계산 범위를 인간 그 자체까지 넓혔다는 뜻이다.
 
이것이 마지막이 아니다. 또 어떤 이들은 생명체 그 자체로 확대한다. 즉 우리가 속한 생태계를 지키고 자연의 보존을 위해 평생을 바치기도 한다. 이들의 계산법에서 이득 대상은 생명체 전체가 된다. 물론 아직까지 우리 은하나 우주까지 확대한 사람은 보지 못했지만.
 
하지만 대상이 넓어질수록 개인이 할 수 있는 한계는 명확해진다. 그리고 또한 그럼으로써 얻어지는 전체의 이득은 매우 미미하다. 내가 오늘 지나가는 개에게 먹이를 줬다고 해서 동물 전체의 권리엔 큰 변화가 없다. 하지만 내가 키우는 개에게 먹이를 주면 이것은 확실히 그 개에게 이득이 되고 이후 나에게 꼬리를 더욱 힘차게 흔든다. 그래서 보통 사람들은 그 계산 범위가 명확한 개인이나 혹은 가족 정도로 한정 짓고 살아가게 된다. 적어도 이 계산 범위는 확실하게 이득과 손해를 구분해주기 때문이다.
 
물론 국가가 어려울 땐 이 계산 범위는 국가로 급속히 확대된다. 그래서 그렇게 싸우던 사람들도 전쟁이 나면 같이 뭉쳐서 적국과 목숨까지 버릴 각오로 싸운다. 혹시나 외계인이 쳐들어 오면 우린 범 지구적인 연합을 만들어서 싸울 것이다. 그것은 지구를 지킨다는 것보다 나와 내 가족을 지킨다는 개념이 더 크겠지만 아무튼 기회가 된다면 많은 이들이 지구의 승리를 위해 목숨을 바칠 각오로 지구 연합군에 입대를 할 것이다.
 
 
이야기가 좀 많이 장황해졌는데 이제 다시 이성에 대한 질문으로 돌아가보자. 이성은 진정한 의미에서 존재하는 실제적 개념인가? 나는 글에서 이성을 계산 능력을 통한 조절력이라고 단순하게 표현했는데 아마도 많은 이들은 이것에 대해 부정을 할지도 모르겠다. 왜냐하면 이성을 그리 단순하게 정의 하기엔 좀 뭔가 부족한 느낌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렇다면 이성은 또 어떤 개념을 가지고 있을까? 이 계산 능력을 통한 조절력 부분을 뺀다면. 우리는 사고력 또한 이성의 범주로 넣기도 한다. 학문적 사고나 철학적 사고 등 역시도 일종의 이성 능력으로 보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은 단지 이성에 대한 정의가 다른 것이다. 만약 이렇게 규정을 하게 되면 생각하지 않고 살아가는 사람들은 (학문적이거나 철학적 사고) 그럼 비 이성적 존재라는 뜻이 될 수 있다. 거기에 이런 사람들이 꽤나 많은 것도 사실이다.
 
아주 오래된 인간의 역사 초반부터 우리 인간은 생각을 하고 있는 주체라고 여긴 이성에 대해 많이 궁금해 했다. 왜냐하면 그것이 우리가 동물과 구분되는 매우 큰 이유가 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요즘도 왕성히 믿어지고 있는 종교를 통한 영혼에 대한 믿음도 그런 것들 중 하나였다.
 
우리는 누구나 자신이 잘나고 싶어 한다. 좀 더 나은 존재 이길 원한다. 하지만 우린 같은 인간끼리는 그것에 대해 확실히 보장 받지 못하기 때문에 적어도 우리가 이 지구상의 생태계에서 가장 위대한 동물 이길 원하게 된 것이다. 그 덕분에 지금은 인간으로서 자부심이 정말 보편적으로 깔려 있다. 사실상 우리 인간은 우리 스스로 느끼지도 못한 채 타고난 존재에 대한 절대적인 자부심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누구도 '개'새끼 라는 말을 욕으로 알아 듣는다. 우린 인간이기에 개와 같은 동물 취급을 받는 것은 매우 심한 욕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여기엔 우리가 믿는 이성의 개념이 든든하게 함께 한다. 거기에 더해 어떤 사람들은 종교를 통해 영혼, 불멸의 삶 까지도 믿는다. 그 덕분에 우린 정말로 위대한 생명체로 스스로 인정하고 있다.
 
하지만 인간의 지식이 쌓이고 과학기술이 발전되면서 우리 인간은 자꾸 변두리로 밀려나게 되었다. 처음 믿었던 대로 지구가 우주의 중심도 아니었고, 우리가 절대적으로 믿은 태양도 그 흔한 별 중에 하나였으며, 위대하고 완전히 다른 존재라고 스스로를 믿었던 것과는 달리 우리는 진화의 결과물이란 것이 거의 사실로 들어나고 있으며, 우리의 DNA는 우리와 그리 무시하는 동물과 1~2%의 차이만 보일 뿐이다. 심지어 우리가 정신이라고 믿는 것조차도 단순한 뇌의 전기 화학 작용일 가능성이 높아지고 있다.
 
아마도 점점 우리가 자연에 대한 진실을 파헤쳐 갈수록 우린 이것에 대해 점점 더 많이 느끼게 될 것이다.
 
물론 인간의 지성은 지구 상에서는 매우 위대하긴 하다. 우린 이 지구상에서는 유일하게 문명을 만들어 냈다. 그것은 발달된 뇌와 그것의 응용을 통한 놀라운 창조성의 결과이다. 또한 우린 지식의 전달에 대한 멋진 방법론을 개발하여 후대가 전대의 지식을 통해 더욱 빨리 나갈 수 있도록 한다. 지식과 그것을 전달하는 수 많은 방법론이 개발되면서 우린 이젠 거의 빛의 속도로 서로의 생각을 전달할 수 있는 기술력을 갖추게 되었다. 그리고 우린 꽤나 오래 전부터 이런 집단 지능을 통해 우리를 발전시켜 나가고 있다.
 
하지만 이것은 우리가 이성적 존재라는 명제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그저 머리가 조금 더 좋은 동물이 해낸 결과물일 뿐이다. 마치 돌고래가 무리 지어 사냥을 하듯 우린 그것보다 더 뛰어나게 사냥을 할 뿐이다.
 
이 모든 것을 고려하더라도 인간에게 이성이 있다고도 할 수도 있을 것이다. 뭐 이것은 개인별 판단 영역이다. 나는 단지 이 글을 통해 우리가 절대적으로 믿고 있는 이성에 대한 다른 관점의 생각이 있었으면 한다. 우리는 이런 생각을 통해 좀 더 겸손해질 수 있다. 우리와 함께하고 우리를 살려주는 우리 환경 그 자체와 함께 살아갈 수 있는 지혜를 얻을 수도 있다.
 
 

'인간과철학' 카테고리의 다른 글

본질은 같지만 해석은 다르다  (0) 2013.12.13
외로움.. 그것에 대한 두려움  (0) 2013.12.01
인공지능이 가져올 철학적 의미  (0) 2013.10.06
본질과 가치  (0) 2013.09.27
개인과 전체  (0) 2013.09.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