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과철학

본질은 같지만 해석은 다르다

아이루다 2013. 12. 13. 11:21

 

사람의 성격을 긍정적이냐 혹은 부정적이냐를 구분하는 꽤나 유명한 예가 하나 있다. 그것은 바로 컵에 물이 반이 차있을 경우 이것을 어떻게 보느냐에 대한 것인데, 다 알고 있겠지만 답을 말하면 긍정적인 사람은 '물이 반이나 있네' 라고 답을 하고 부정적인 사람은 '물이 반밖에 없네' 라고 대답한다고 한다.

 

그런데 이 예는 사람의 성향을 분석하기 위한 질문으로 보통 알려져 있지만 이것 말고도 추가적으로 좀 더 다른 사고의 방향을 시도해 볼 수 있다. 그것은 바로 사실과 해석에 대한 방향인데, 이 예를 통해서 이것을 고려해보면 컵에 물이 반이 있다는 것은 확정적 사실이고 그것을 해석하는 것은 모든 해석 주체마다(보통은 사람) 성격이나 환경 그리고 현재의 상황등이 복합적으로 고려되어 결론 내어지고 있다는 점이다.

 

즉 이것을 좀 더 이해하기 쉽게 정리하면 컵에 물이 반이 있다는 것은 변하지 않는 본질이 되고 그것에 대해 생각하는 것은 모든 사람마다 각자에 맞는 결론을 내게 되는 것은 해석의 입장이란 뜻이다. 여기에서 어리석을 수 있는 질문을 하나 던져보자. 과연 우리에게는 본질이 중요할까 아니면 해석이 중요할까?

 

이것은 쉬운 것 같으면서도 쉽게 답을 내기 힘든 질문이다. 아니 실제로는 답을 내기가 불가능한 질문일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답을 찾는 과정 중에서 뭔가 도움이 될만한 힌트가 있을 것이니 이것에 대한 답을 찾아보도록 하자. 

 

가장 먼저 일단 먼저 본질과 해석에 대한 정의부터 해보자. 본질은 변하지 않는 사실이기 때문에 그것을 해석한 결과에 비해서 변하지 않으며 그럼으로 인해 그 어떤 상황적 논리에 상관없는 불변의 특징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이와 반대로 해석은 사람마다 다르며 또한 같은 사람이라도 처한 상황이나 시기에 따라 모두 다르게 나타날 수 있는 다변성이 가장 큰 특징이다.

 

하지만 본질은 변하지 않는다는 특징이 있을 뿐 실제로 본질 자체로는 우리에겐 어떤 의미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은 마치 하늘, 구름, 바람, 강과 같이 그냥 존재하는 하나의 객체일 뿐이며 이것은 우리가 오감을 통해 이것들을 인식한 후 우리 내부에서 아름다운 하늘, 파란 하늘, 뭉게구름, 시원한 바람, 더운 열풍 등으로 해석이 될 때 실제로 의미 있는 의미를 갖게 된다.

 

예를 들어 사람의 존재를 생각해보면, 우리 개개인 모두는 각자의 독특한 특징과 고유의 성질을 가지고 있지만 인간이라는 범주에서 보면 그저 우린 팔 두개, 다리 두개, 머리와 몸통을 가진 유기체일 뿐이다. 하지만 우리가 이름을 가지고 서로 불러주며 만나도 대화하면서 서로를 해석하는 순간 우리는 고유한 하나의 독립된 존재로서 의미를 갖게 되는 것이다.

 

이런 상황을 유추해 볼 때 본질과 해석의 중요성 여부에서는 일단 해석이 우선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이렇게 쉽게 답을 낼 것이었다면 질문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왜냐하면 결국 해석은 본질에 종속 될 수 밖에 없는 어쩔 수 없는 부차적인 결과이기 때문이다.

 

하늘이 없다면 파란 하늘, 흐린 하늘, 눈 오는 하늘, 어두운 하늘이 존재할 수 없다. 해석은 우리 각자가 마음대로 느끼는대로 할 수 있지만 하늘 자체가 없을 때 그것을 만들어 낼 수는 없다. 일단 하늘이 있어야 이후로 다양한 해석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래서 결국엔 우리가 하늘을 보지 못한 상태에서 그 아무리 많은 해석을 바라 본다고 해도 그 하늘은 내가 해석한 하늘이 아니기에 진정한 의미에서 하늘을 이해하지는 못한다.

 

즉 결국 본질을 스스로 경험을 할 때 진정한 의미의 해석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물론 이 해석은 내가 어떤 시상황에 어떤 시점에서 그것을 경험했느냐에 따라 매우 달라지는 경험적 종속성을 가진 것이지만, 어찌되었건 간에 그것이 타인들의 경험을 통한 해석을 받아들이는 것과는 근원적인 차이가 있게 된다.

 

그래서 결국 해석이 중요하지만 또다시 생각하면 그 본질이 더 중요하게 된다. 단지 여기에서는 본질 그 자체는 의미가 없고 그 본질이 나 자신, 우리 자신에게 어떻게 해석되느냐가 중요한 문제이다.

 

어쩌면 이 이야기는 너무도 뻔해서 왜 이런 이야기를 하나 싶기도 하겠다. 그런데 우린 이 뻔한 이야기를 알면서도 매일매일 그것에 대한 착각을 하고 있다는 것을 말해주고 싶다.

 

어느날 문득 찾아간 겨울 바다의 삭막함과 쓸쓸함은 마음을 쥐어 짤 수 있다. 그리고 근처 찻집에서 호호 불면서 마시던 따뜻한 커피 한잔에 대한 기억은 오랜 시간 동안 사라지지 않고 마음 속에서 추억으로 자리 잡을 수 있다. 겨울에 날씨가 춥다는 것이나 바닷가에 바람이 불어 더 춥다는 것은 계절적 본질이다. 그럼으로 인해 그 바다를 찾는 사람이 적은 것도 상황적 본질이다. 그런데 여기에서 이 차가움과 텅빈 공간에 대해 삭막함과 쓸쓸함을 느끼는 것은 온전히 우리 자신의 해석적 측면이다. 원래 바다는 겨울에 그랬는데 내가 찾은 바닷가여서 삭막하다고 느끼는 것이다.

 

하지만 우린 이 시점에서 본질에 대한 생각을 하지 못한다. 즉 이 시점에서는 오직 해석만이 남아 기억에서도 해석의 결과만 기록이 된다. 그리고 이런식으로 가공된 기억은 추억이란 이름으로 각자의 머리속에 적힌다.

 

이와 비슷한 또 다른 예를 보면, 남자들이 그리 고생했던 군대에서 먹었던 라면의 맛이 있다. 일명 뽀그리라고 불리우던 라면의 종류나 혹은 추운 겨울 외곽근무를 마친 후 먹었던 라면에 대한 추억은 조금 다를뿐 각자 마다 고유의 먹거리 추억을 간직되어 있으리라. 하지만 이 맛은 제대 후 아무리 노력을 해도 다시는 맛 볼 수 없다.

 

그 이유는 바로 이 추억의 본질은 우리가 기억하는 라면의 맛이 실제로는 배고픔과 부족함 등에서 출발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결국 이와 비슷한 맛을 느끼려면 하루 종일 굶다가 추운 겨울에 밖에 나가서 덜덜 떨면서 라면을 어렵게 끓여서 먹으면 되긴 한다. 하지만 누가 이런 궁상을 떨겠는가. 결국 이것으로 인해 우린 다시는 그 시절에 먹었던 라면에 대한 맛을 경험하지 못하게 된다. 본질은 배고픔과 추위인데 우리의 기억은 그것으로 인해 느꼈던 맛에 대한 해석만을 기억으로 남겨서 결국 추억으로 만들어 버린다.

 

이것은 그나마 괜찮은 과정이다. 정말 문제는 해석으로 모든 것을 판단하기 때문에 발생하는 본질에 대한 오해에서 발생한다. 즉 해석은 모두 개개인마다 다를 수 있는데 자신이 자신의 판단기준으로 한 결과를 절대 기준화 시킨 후 그것을 주변에 강요하거나 혹은 지위를 이용해서 강제화 시키는 경우가 발생한다.

 

우리나라에서 전통적으로 오래된 매우 잘못된 회사 문화 중 하나가 바로 회식 문화인데, 요즘은 조금 나아졌다고 해도 역시나 아직도 많은 조직에서는 회식을 일종의 업무 연장으로 보고 그것에 참가하고 그럼으로서 아주 늦은 시간까지 술을 먹어야 하는 것을 당연시 여긴다.

 

결국 이런 결과로 인해 술은, 특히 대한민국 사람들에게 술은 직장 생활의 필수품처럼 되어 버렸다. 원래 술의 본질은 인간의 정신을 마비시키는 효과를 가진 알코올 성분으로 인해 서로간의 격을 다소 완화시키고 그 결과로 인해 좀 더 부드러운 사교 문화를 이룰 수 있도록 돕는 도구인데, 직장에서의 회식 중 마시는 술은 일종의 조직에 대한 충성이며 능력으로 환산 되어 버리는 것이다.

 

우리가 투표를 통해 정치인을 뽑는 과정도 역시나 마찬가지다. 우린 민주주의 시스템 속에서 살아가기 때문에 개개인이 주권을 가지고 우리의 대표를 뽑을 수 있는 권리가 있다. 그리고 이런 것들의 본질에는 당연히 우리 전체 모두가 좀 더 나은 환경에서 행복하게 살아려는 욕구를 실현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린 우리 스스로 뽑은 존재들에 대해 일종의 주종의 관계처럼 그것을 받아 들인다.

 

우리를 대표해서 일을 잘 해달라고 뽑아 놓고서는 우리는 당신의 종입니다 라고 해석을 하는 것이다. 이것은 어떤 의미에서 우리의 오래된 관행, 즉 조선 시대부터 이어온 임금의 존재에 대한 아무런 근거 없는 해석인데도 불구하고 실제로 아직도 많은 이들은 대통령이나 국회의원이 마치 우리를 다스리는 존재인냥 착각을 한다. 그래서 그들을 떠받들고 성역화 시키는 정말로 웃기는 짓꺼리를 해대고 있다.

 

다 함께 행복하자고 투표를 해야 하는데 정작 그런 본질을 기억하는 사람은 너무도 적다. 실제로 우리가 왜 투표를 통해서 대표를 뽑는지 조차 알 지 못하는 사람들이 대다수일 것이란 생각도 든다. 그래서 사람들은 우리를 대표해서 일을 잘할 수 있는 일꾼을 뽑는게 아니라 뭔가 잘나 보이는 사람, 뭔가 해낼 것 같은 사람, 영향력이 커 보이는 사람, 학벌이 좋은 사람, 명함에 각종 직함이 즐비한 한 사람, 같은 지역 사람, 같은학교 출신, 사돈의 팔촌관계라고 해도 친분관계가 조금이라도 있는 사람을 뽑는다.

 

그런 후 나중에 일을 잘 못하거나 문제가 발생해도 끝없이 비호를 하거나 혹은 비난만 할 뿐이다. 그렇지만 그 후 또 다시 투표장에서는 같은 일을 반복하여 저지른다. 이것은 우리 전체는 망치는 일이지만 본질을 보지 못하는 사고력 부재로 인해 우리는 발전하지 못하고 늘 같은 자리를 멤돌게 된다.

 

좀 더 원론적인 이야기로 들어가서 우리가 살아가는 것 자체를 대상으로 놓고 보자. 우리 모두는 행복하기 위해서 세상을 살아가고 있다. 이 세상 그 누구도 이 가정에서 벗어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현재가 행복해도 살아가고 미래가 행복할 것 같아도 살아간다. 현재도 행복하지 않은데 미래도 희망이 없으면 자살을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즉 우리의 삶에서의 본질은 행복이다.

 

그런데 정말로 우린 행복을 위해 사는 걸까? 오늘 자신의 행동 하나하나를 잘 살펴보면 생각보다 그렇지 않다는 점을 알 수 있다. 회사에 출근하기 위해 바쁘게 일어난 아침, 사람이 미어터지는 버스, 재미없고 지루한 회사 생활, 겨우 야근을 마치고 집에 돌아 온 후 짧은 저녁 시간. 이것이 우리 대다수 사람들의 삶이다.

 

결국 이런 절차를 수 없이 반복한 후 한 달마다 통장에 들어오는 돈은 스치듯 사라지고 우린 또 새로운 달을 맞이하여 일을 한다. 이것이 년 단위로 반복이 되고 우린 그렇게 늙어간다. 결국 이런 모습은 우리가 개개인에게 주어진 한정된 시간을 어떻게 잘 쓰는냐를 고민하는 것이 아닌, 어떻게 하면 하루를 빠르게 소모해버릴 것인가를 걱정한다. 그래서 누구나 시간을 잊게 만든 일을 좋아하게 된다.

 

이것이 잘못되었다는 것이 아니라 정말로 우리가 행복하기 위해서 삶을 이렇게 살아가야 하는지에 대한 질문을 던지는 것이다. 아마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렇게 말을 할 것이다.

 

'그렇다면 그렇지 않게 살아갈 수 있는 방법이 있나?'

 

방법이 있을지 없을지 모른다. 그런데 현재의 우리 개인들의 삶이 원래 본질인 행복을 잘 찾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만큼은 명백하다. 그렇다면 우린 과연 어디에서부터 해석을 잘못하고 있는 것일까?

 

우리가 타인과의 관계에서 느끼는 열등감이나 우월감 등의 감정을 느끼는 기반이 무엇일것 같은가? 우월감을 느낀다면 내가 잘나서 그럴 수 있고 열등감을 느낀다면 상대가 돈이 많거나 운이 좋거나 능력이 뛰어나서 그럴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정말로 누군가에게 부러움을 갖거나 아니면 반대로 부러움을 사는 경우가 있다면 그것은 바로 상대가 나보다 더 행복하거나 혹은 반대로 내가 더 행복한 경우이다.

 

우린 돈이 부러운게 아니라, 능력이 부러운게 아니라, 그들이 먹는 A++ 등급 고기가 부러운 것이 아니라, 공부를 잘하는 자녀를 둔 사람이 부러운 것이 아니라, 명품이 부러운 것이 아니라, 넓은 평수의 집이 부러운 것이 아니라, 좋은 차가 부러운 것이 아니라 그들이 그것으로 인해 얻을 행복감이 부러운 것이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매일 느끼는 부러움이나 질투, 시기심의 본질이다.

 

그런데 이것을 해결하는 방법을 더 좋은 차, 더 좋은 가방, 더 좋은 집, 더 공부 잘하는 아이, 더 맛난 고기, 더 많은 돈으로 해결을 하려고 하니 아무리 해도 해결이 안되는 것이다. 이것을 해결하는 유일한 방법은 오직 어떤 식으로든 간에 더 행복해져야 한다. 그런데 문제는 이 행복을 느끼는 과정이 개개인마다 천차만별로 다르다는 것이다. 이것은 누가 가르쳐주는 것도 배울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그저 타고난 대로 느끼는 능력인데 이것을 어찌 노력하고 훈련으로 극복하겠다는 것인가?

 

누군가는 높은 산에 오르는 도전이 행복하고 누군가는 집에서 TV를 보는 것이 행복하다. 그런데 집에서 TV를 보던 사람이 어느날 TV에 나온 높은 산에 도전하는 사람의 행복해하는 모습을 보고 따라하다간 돈은 돈대로 깨지고 고생은 고생대로 하는 상황이 연출되게 되는 것이다. 좋은 차를 타야 행복한 사람이 있고 맛난 음식을 먹을 때 행복한 사람이 있다. 물론 인간은 보편적 행복을 가지고 있긴 하지만 같은 행동을 해도 사람마다 너무도 다른 행복감을 얻는다.

 

그런데 타인이 행복해 하는 모습을 보고 마냥 그것을 따라한다는 뜻은 바로 남의 기준에서 내 행복을 결정하는 어리석음을 저지르고 있는 모습이 된다. 물론 운이 좋게 그것이 나에게 잘 맞을 수도 있지만 아무튼 내 행복은 내 기준에서 만들여져야 하는 것이다. 아무리 세계 여행이 좋아 보여도 본인이 싫으면 아무것도 아닌 것이다.

 

왜 타인들이 하는 일들을 따라하면서 결국 어떤 곳을 다녀왔다는 증거만을 남기려고 하는가? 과정을 제대로 즐기고 행복해하지 못했다면 자랑스럽게 SNS 상에 올려진 세계 각지에서 찍은 사진들은 그저 남들에게 혹시나 내가 행복했을지도 모를 가능성을 자랑하는 꼴이 된다.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진에 찍힌 연출된 밝은 사진은 또다른 사람의 행복 기준점을 자극하게 된다.

 

해석이 중요하기에 해석만으로 세상을 살아가다보니 이젠 본질은 까마득히 잊혀지고 해석만이 남아 있는 세상이 되어가고 있다. 지금 사람들은 누구도 그 본질에 대해 이야기 하지도 또한 본질을 알려고도 하지 않는다. 이젠 남은 것은 그것을 타인들이 어떻게 해석해냈냐의 결과와 나 자신의 해석이 틀리냐 옳으냐 하는 것을 증명 받으려는 욕구 뿐이다.

 

하지만 이런 과정에서 본질을 망각한 댓가는 늘 혹독하게 나타난다. 그래서 결국 아무리 좋은 해석을 얻어내려 노력해도 늘 그 자리에서 맴돌게 된다.

 

본질을 망각한 우리는 결국엔 해석에 메달리며 평생을 보내게 되고 그것은 효율성 관점에서 보면 가장 낮은 수준을 유지하게 된다. 해석은 목표가 될 수 없다. 해석은 과정이고 우리의 목표는 늘 본질을 향해야 하는 것이다. 이것이 현명한 자가 세상을 사는 법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