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과철학

외로움.. 그것에 대한 두려움

아이루다 2013. 12. 1. 09:29

 
태어난 지 1년 정도 된 아이는 잠깐이라도 자신을 돌봐주던 사람이 보이지 않으면,(보통은 엄마) 그것을 인지하는 순간 울음을 터뜨린다. 이럴 땐 주변에서 아무리 아이를 달래려고 해도 아이의 울음을 좀처럼 그치지 않는데 여기에서 해결 할 수 있는 단 하나의 방법은 아이가 엄마가 없다는 인식을 하지 못하게 막아주는 것이다.
 
예를 들어 아이가 관심을 가질만한 행동, 소리, 물건 등을 이용해서 열심히 아이의 흥미를 끌고 그것이 성공하게 되면 아이는 잠시 동안 그것에 빠져 울음을 멈추기도 한다. 하지만 알다시피 아이의 주의력의 몇 초에 불과하기 때문에 아이는 또 다시 울음을 터뜨린다. 결국 이 상황은 엄마가 와서 아이를 안아 줘야 끝이 난다.
 
그런데 이 아이는 왜 울었을까? 물론 단순히 상황적으로만 보면 엄마의 부재가 가져 온 결과이다. 그런데 아이는 엄마가 없으면 왜 울음을 터뜨릴까? 오래 생각할 필요도 없을 만큼 그 이유는 매우 단순하다. 바로 두려움 때문이다. 엄마의 입장에서는 좋은 의미에서 해석되어 아이가 자신에게 매달리는 듯한 모습으로 비춰질 수 있지만 실제로는 우는 아이는 자신을 돌봐주는 사람이 없어진 것을 아는 순간 제어 불가능한 본능적 두려움에 빠져든 것이다.
 
그런데 우리 성인이 보기엔 전혀 두려움을 느끼지 말아야 할 상황, 비록 엄마는 없지만 아빠, 할아버지, 할머니, 이모 등이 있는 매우 선한 의도만 존재하는 공간에서 아이는 왜 두려움을 느끼는 것일까? 이 역시 매우 단순한 이유이다. 그것은 인지력 부족에 의해 주변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즉, 두뇌 발달이 제대로 되지 못하여 그 결과로 주변 환경이나 사람들에 대한 정확한 정보 파악이 되지 못함으로써 막연한 두려움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이 아이에겐 엄마의 존재만이 유일한 안도감의 대상이 된다.
 
그리고 이 아이가 점점 크면, 어린 시절에 나타났던 그런 막연한 두려움은 서서히 사라져간다. 왜냐하면 이젠 엄마, 아빠, 할머니, 할아버지, 자신의 친구, 유치원 선생님 등등에 대한 인지 능력이 발달하고 거기에 더해 오랜 시간 안정적인 생활을 반복적으로 보낸 탓에 인간의 두려움에 대한 본능이 거의 발현되지 못하는 상황에 놓이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 인간이 성인이 되면 어떨까? 우리의 인지 능력이 거의 발달하지 못한 어린아이의 시절과는 완전히 달라져 있을까? 정말 그럴까?
 
나는 개인적으로 이 부분에 대해 전혀 그렇지 않다고 말하고 싶다. 실제로 우리 인간은 그 어린 시절에 느낀 두려움을 일으킨 본능을 평생 가지고 살아가게 된다. 왜냐하면 그것은 바로 생존에 대한 본능이기 때문이며 우리가 평소 이것에 대해 심각하게 느끼지 않는 이유는 바로 현대 문명사회가 우리를 그렇게 살 수 있도록 잘 지켜주기 때문이다. 실제로 현대사회에서 우리 인간의 생명을 위협하는 자연 환경은 거의 없다.
 
운이 좋았든지 혹은 운이 없었던지 판단은 개인적인 몫이지만 아무튼 현대 사회를 살아가는 이들은 특별한 환경이 아니라면 곰이나 호랑이처럼 우리 인간을 먹이감 삼을 수 있는 맹수 류로부터 거의 분리된 환경에서 살아가기 때문에 실제로 이런 대상들에 대한 생각은 호기심과 재미 이상을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우린 동물원에 가서 그들을 바라보면서 즐거워한다.
 
결론적으로 우린 이젠 어린 시절에 보여줬던 두려움을 거의 표현하지 않고도 평생을 살아갈 수 있다. 그렇지만 우리가 이것을 이겨낸 것은 아니다. 단지 오래동안 안정화 된 생활로 인해 잊어버린 것이다.
 
하지만 운 좋게 이것에 대해서 잊어먹긴 했지만 그 뿌리로부터 생겨난 다른 두려움들은 그 뿌리인 생존에 대한 두려움처럼 쉽게 망각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이것은 상당히 복잡하게 얽혀서 우리가 잘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도 많고 그것들이 이어져 있다는 사실 자체를 인지하기도 쉽지 않기 때문이다.
 
그 중 하나가 바로 우리가 느끼는 외로움이다. 우리는 보통 외로움을 심심함이나 따분함 등으로 해석하기도 하는데, 그것이 틀린 것은 아니지만 어떤 의미에서는 그것은 해석 자체를 잘못한 경우이다. 실제로 심심함이나 따분함은 외로움이라기 보다는 그저 시간을 보낼 수 있는 재미있는 수단이 없어서 나타나는 현상일 뿐이란 뜻이다. 실제로 좀 더 생각해보면 외로움은 이것과는 약간 성질이 다르다.
 
외로움의 본질은 자연스럽게 생존과 연결이 된다. 우리 인간은 실제로 매우 약한 종이기 때문에 그렇다. 그래서 우리 인간은 스스로를 지키고자 오래 전부터 무리 생활을 해왔다. 그런데 그렇게 살아온 사람 하나하나에게 그 무리로부터 멀어짐은 무엇을 의미하게 될까? 오래 생각하지 않아도 그것은 바로 죽음을 연결이 된다. 무리로부터 버려지는 순간 우린 바로 약하디 약한 인간 중 하나일 뿐이다. 그래서 극심한 생존에 대한 두려움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왕따의 문제점이 얼마나 심각한지 생각해보라)
 
이 원리로 우리가 어떤 다른 사람들과 같이 있으며 거기에 더해 그들과 평화로운 입장에 놓인다면 우린 혼자 있을 때 보다 훨씬 안정감을 느끼게 된다. 즉 우리 몸은 긴장 상태를 벗어나 좀 더 다른 일을 할 수 있도록 해준다. 그리고 이때 우린 단순한 생존을 위한 역할에서 벗어나 미래를 위해 다른 일들을 해낼 수 있다.
 
결국 우리가 타인들과 있을때, 혹은 누군가 자신이 믿고 신뢰하는 이와 함께 할 때 느끼는 편안함과 안도감을 느끼게 되고 이것들이 모두 하나로 묶어서 표현할 때 행복하다는 표현법을 쓴다. 즉 우리는 이것을 다르게 해석하여 처음부터 행복이라고 표현하지만 실제로 그 본질은 혼자 있지 않아 생존에 대한 위협이 사라진 상황에 대한 안도감으로 보는 것이 더 정확하다.
 
실제로 우리 인간은 어려서는 부모님과, 나이를 먹게 되면 자신이 꾸린 가정 속에서 그렇게 살아 갈 수 있다. 문제는 우리가 좀 더 나이를 먹어서 어떤 경로를 통하든 혼자 살게 되는 상황에서 생긴다면 벌어진다. 그것은 성인이 된 아이들과의 가정적 분리, 평생을 함께 한 배우자의 죽음 등으로 인해 벌어지는데 이런 식으로 혼자 사는 노인을 '독거노인' 이라고 말한다.
 
우리가 생각하는 보통의 미래에 대한 두려움은 무엇일까? 아마도 가장 큰 문제는 먹고 사는 문제, 즉 경제력에 대한 걱정일 것이다. 그래서 우린 평생 현재를 위해 살기도 하지만 미래를 위해 현재의 자신이 벌어들인 모든 가치를 다 소모하지 않고 남겨두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늙어서는 그것을 조금씩 소비하면서 살아가게 되는데 솔직히 힘들 수 있지만 또 그리 어려운 문제만은 아니다.
 
그래서 많은 이들이 이런 경제적 문제는 꽤나 준비를 하고 살아가는 편인데 정작 문제는 노후에 나타날 외로움이 된다. 그래서 결국 우린 자신의 가족과 별도로 다양한 경로로 이 문제에 대한 우회적 해결책을 마련하게 되는데 그것이 바로 우리가 친구라고 말하는 사람들이고 또한 어떤 식으로든 같은 인간이라면 어울리려고 하는 본능적 욕구로 나타난다.
 
하지만 아까도 말했듯 우리의 외로움은 생각보다 그리 단순하게 혼자 있음으로써 나타나는 심심함이 아니다. 이것은 복합적으로 동작되어 생명에 대한 본질적 욕구가 충족되지 않음으로써 나타난 꽤나 다양한 요소가 뒤섞인 상태인 것이다. 이것엔 심심함도 있고, 안도감이 부재도 있고, 감당하기 힘든 시간도 있을 수 있다. 그래서 결국 우린 이것을 몽땅 해결하기 위한 유일한 방법으로 사람을 찾게 된다.
 
물론 경제적 문제가 어느 정도 해결된 사람일 경우 다른 경로를 통해 생존에 대한 본능을 잊을 수 있기 때문에 그땐 따분함과 같은 문제가 주로 나타난다. 그리고 여기엔 또 다른 해결책이 있다. 그것은 온전히 혼자 즐기는 어떤 삶이 있다면 가능하다. 그리고 이것들은 어떤 의미에서는 꽤나 괜찮은 편이다. 하지만 그것을 제대로 하기 위해서는 젊어서 꽤나 많은 노력을 해놨어야 하는 문제는 있다.
 
그래서 보통 사람들은 일반적인 해결책을 찾게 된다. 그것은 가정, 친구, 소소한 취미생활, 주변과의 교류 등으로 나타나지만 결국 부족하기 때문에 그 틈을 TV 등과 같은 것으로 채우게 된다. 그리고 이것이 우리 인간의 가장 보편적 삶으로 알려져 있다.
 
그리고 결국 이것은 우리 인간에게 있어서 나이를 어느 정도 먹은 시절부터 죽는 그 날까지 어떤 운명의 사슬처럼 우릴 얽매이게 된다. 즉 우린 어느 정도 먹고 살만하다면 그때부터는 외롭지 않게 사는 삶에 대해 평생을 노력하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앞에서 나온 용어 '독거노인' 은 우리 개개인에 있어서는 꽤나 부정적으로 인식되는 단어가 된다. 젊은 시절에 혼자 사는 것은 외로움에 대한 걱정도 있지만 또 다른 의미에서 책임의 의무에 대해 벗어난 자유로움을 상징하지만 늙은 시절에 혼자 사는 것은 자유로움에 대한 동경은 모두 사라지고 오직 혼자 살아야 하기 때문에 감당해야 할 깊은 본능적 두려움만이 남겨져 있는 상황이 된다.
 
결국 그 영향으로 인해 우린 독거노인의 삶을 살지 않으려고 노력을 하게 된다. 즉 독거노인이란 용어는 현대의 상태에서 실패한 삶을 표현하는 것으로 인식되어지고 있다. 그리고 미래에도 아마 당분간 그럴 것이다. 이것은 그 오래 전 무리로부터 쫓겨난 늙은 우두머리와 같은 상황이 된다. 그것은 '버려짐', '홀로됨', '위험한 상황에 놓임' 등과 같은 감당하기 힘들 정도의 스트레스가 되어 그 상황에 놓인 이들을 죽음과도 같은 공포 속으로 밀어 넣게 된다.
 
어린 시절 안락함을 경험하지 못한 불우한 시절을 보낸 아이와 늙어서 외로움을 벗어나지 못하는 삶을 살아가야 하는 노인은 모두 동일하게 한가지 단어의 부재로 표현이 된다. 그것이 바로 '행복' 이다.
 
흔히 우리 인간을 행복하기 위해서 살아가는 존재라고 표현하는데 우리에게 가장 큰 행복은 바로 우리가 가진 본능적 두려움을 완전히 잊어버리고 살아가는 삶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리고 실제로 우리가 정말 행복한 순간엔 그 어떤 두려움도 거의 느끼지 못한다. 먹을 것, 쉴 곳, 잘 곳, 할 것 등등에 대해 걱정을 하지 않는 상태가 바로 행복인 것이다.
 
어린 시절의 삶은 우리가 선택하긴 불가능하다. 하지만 늙어서 보낼 여생은 우리가 살아가는 과정에 의해 결정이 된다. 물론 이것에는 많은 운이 작용하겠지만 어떤 식으로든 의도가 있다면 같은 환경에 놓였더라도 다른 결과가 나타날 수 있다. 그리고 적어도 온갖 불운이 모두 닥쳐서 혼자 살아가야 할 처지가 되었을 때 조차도 스스로 행복하게 살아 갈 수 있는 능력을 갖추게 되었다면 그것이야 말로 가장 현명한 노후 준비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이것은 매우 힘들다.
 
그리고 이런 관점에서 현재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면 실제로 우리가 평소에 느끼는 욕망이나 타인에 대한 질투와 같은 것들은 정말로 하찮아 질 수 밖에 없다. 이런 것들은 어떤 의미에서는 우리가 가질 필요가 없는 감정이고 행동이다. 우리가 정말로 신경 써야 할 것들은 우리가 갖지 못한 것에 대한 욕망이나 혹은 타인이 가진 것에 대한 부러움이 아닌 늙어가는 자신의 삶이 가져올 불행함에 대한 대비가 되어야 한다.
 
우린 늙어감에 따라 점점 더 자유로움을 강제적으로 뺏기게 되고 이 문제는 결국 자신을 행복하지 않게 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모든 인간이 겪어야 하는 문제이다. 하지만 정작 이 문제의 심각성은 생각하지 않은 채 우린 현재 살아가는데 있어서 그리 중요하지도 않은 타인의 시선, 평가 등에 얽매어 자신의 삶을 낭비하면서 살아 가고 있다. 그리고 훗날 늙음이 가져 온 불행을 그저 자신의 삶이 왜이리 운이 따르지 않냐고 슬퍼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 조금이라도 젊은 시절 내가 아닌 존재들에 대한 관심을 거둬드리고 그 자신에 대해 좀 더 집중해보는 것은 어떨까? 앞에서 말했듯 최악의 상황에 놓였더라도 스스로 극복할 능력이나 혹은 그럴 자신이 없다면 주변 사람들과 적대적 관계를 맺기 보다는 조금이라도 우호적 관계를 맺어 보려고 노력하는 것이 더 낫지 않을까?
 
친구를 질투하기 보다는 부러워하고, 며느리를 구박하기 보다는 이해하려 하고, 시어머니를 적대적으로 보기 보다는 양보하려고 하고, 남편이나 아내를 다른 이들과 비교하고나 혹은 자신의 의지대로만 끌어가려고 할게 아니라 서로 더 사랑하려고 애쓰는 삶이 결국 우리의 의지가 되면서 또한 미래의 자신에게 닥칠 필연적 운명에 대한 약간의 대비책이 될 것이다.
 
그리고 여기에 더해 가진 것에 대해 감사하고, 갖지 못한 것에 대한 욕심을 버릴 수 있다면 그 사람이 느낄 수 있는 삶의 행복은 현재보다 훨씬 더 높아질 것이 틀림 없다. 이것은 단지 하기가 힘들 뿐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