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과철학

인공지능이 가져올 철학적 의미

아이루다 2013. 10. 6. 09:26

 

21세기에 가장 호황을 누리고 있는 자동차 회사 중 하나인 토요타의 일본 공장에 방문 하면, 사람의 흔적을 거의 볼 수 없다고 한다. 수 만평에 이르는 거대한 생산 공장은, 생산되고 있는 수 많은 자동차들의 조립 공정으로 인한 소음이 가득한데 놀랍게도 이 소음의 주체는 100% 생산 로봇에 의해 발생되고 있다. 하지만 이렇게 정규화 되고 자동화가 이루어진 공장 조차도 최종 마무리 공정, 즉 제대로 조립이 잘 되었는지에 대한 품질 검사 만큼은 숙련된 기술 인력의 힘을 통해 이루어지고 있다고 한다.

 

결국 이 말은 현재의 기술 수준에서는 아무리 정교하고 정밀한 기계를 쓰더라도 아직까지는 인간의 최종 판단을 거치지 않으면 완성품에 대한 신뢰를 할 수 없다는 뜻을 의미한다. 특히 자동차 처럼 문제가 생겼을 경우 인간의 생명을 위협 할 수 있는 종류의 제품이라면 더욱 더 그런 경향이 크다. 최종적으로 이것으로 인해 토요타의 자동화 공정률은 95%에서 한계를 보이고 있다.

 

하지만 인간은 이런 불완전한 로봇 말고 인간과 거의 동등한 완벽한 로봇을 꿈꾸어 왔다. 그 덕분에 과거로부터 로봇이나 인공지능에 대한 이야기는 영화의 주된 단골 소재 중 하나 였다. SF의 명작이라고 일컬어지는 '블레이드 러너', 사랑에 대한 주제를 통해 많은 이들에게 생각할 꺼리를 던져 준 'A.I', 로봇을 싫어하는 형사와 어떤 비밀 임무를 띈 똑똑한 로봇과의 이야기를 다룬 '아이 로봇' 그리고 심지어는 한국 영화에서는 '인류 종말 보고서' 에서 나온 부처의 깨달음을 얻은 로봇까지 등장 했었다.

 

그렇다면 왜 냉장고나 세탁기와 같은 가전제품을 주제로 한 영화는 없는데 인공지능을 주제로 한 작품들은 존재할까? 그것은 바로 로봇과 인공지능이 하나의 세트로서 우리 인간에게 있어서 있다고 믿어지는 몸과 영혼의 존재로서 대비되기 때문이다.

 

아주 오래 전부터 인간은 우리 자신을 몸과 마음 혹은 영혼을 지닌 존재로 여겨왔다. 이것은 단순히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존재이면서 또한 명확하게 세상과 분리된 신경계를 가진 몸을 지닌 존재로서의 막연한 상상이 아니고 실제로 꽤나 유명하다는 철학자들은 그들의 철학적 세계에서 인간에 대한 본질적 성찰을 통해 우리가 과연 어떤 존재인지에 대해 설명을 했었다.

 

수 천년 전 그리스 철학자 플라톤의 영혼에 대한 언급, 그의 제자인 아리스토텔레스의 개념 확장을 통해 인간은 당연히 몸과 마음(영혼)을 지닌 존재로 여겨졌고 이후 서양 철학을 온통 한가지로 묶어버린 기독교의 힘으로 인해 철학적 암흑기를 맞은 중세 유럽은 당연히 몸과 영혼을 존재를 현실화 시켜 버렸다. 이것은 그 종교의 교리에서 나오는 천국이나 지옥에 가려면 일단 죽은 후 썩어가는 몸의 존재를 대신할 영원 불멸한 그 무엇인가가 필요했다는 것을 의미하고 결국 이것은 최종적으로 '영혼'으로 정의 되어졌다.

 

하지만 이 중세의 철학적, 문학적, 과학적 암흑기가 끝나갈 무렵 우리 인간과 자연에 대한 과학적 업적은 우리의 어리석은 인간 중심의 사고 방식에서 조금씩 틈을 벌리기 시작한다. 아마도 가장 그것의 첫번째 신호탄은 지동설일 것이다. 솔직히 말해서 천동설, 지동설로 표현하는 것 자체가 지금은 너무도 우수운 일이지만 프롤레마이오스 이후 천년을 넘게 유럽의 우주관을 지배한 지구를 중심으로 우주가 돈다고 믿은 천동설은 코페르니쿠스와 갈릴레오의 업적을 통해 서서히 무너지기 시작한다.

 

우리 인간은 우리 자신을 너무도 특별하게 여겼기에 마치 어린 아이처럼 세상은 나를 중심으로 돈다고 믿었던 것이다. 이것을 처음부터 지동설을 배우고 자란 사람들이라면 단순히 과거 사람들의 착각으로 간주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실제로 천동설과 지동설의 차이는 매우 커다란 인식적 차이를 보이게 된다. 내가 살고 있는 공간이 우주의 중심이였는데 내가 살고 있는 공간이 단지 주변에 불과하다는 것을 인식하게 되었을 때 그것을 통해 얻어지는 존재 인식의 뒤틀림은 인정하기가 쉽지 않은 내용이다.

 

천동설의 퇴출에 이은 두 번째 과학적 발전은 바로 현재까지도 논쟁이 계속 진행중인 다윈의 진화론이다. 지동설이 지구의 특별한 지위를 내려놓게 했다면 진화론은 지구에서 살아가는 우리 인간 자신을 특별한 지위에서 내려오게 했다. 즉 우린 자연 속에서 살아가는 수 많은 다른 종류의 동물과 곤충을 보면서 우리의 우월한 문명적 특징과 자이를 의식할 수 있는 특별함에 대해 아주 놀라울 정도로 강한 우월감을 가지고 살아 왔는데, 진화론에 의하면 우린 그저 단순히 유전자적 선택의 우연한 결과로 인해 탄생한 약간 운 좋은 머리 좋은 동물에 불과하다는 것을 사람들이 처음에 받아들이기가 쉬웠겠는가?

 

이 두 개의 과학적 이론은 당연히 그 당시를 지배한 종교와 큰 마찰을 빚게 되고 결국 완전히 증명된 지동설은 공식적으로 인정 받게 되었지만 완벽한 증명이 불가능한 진화론은 아직도 말도 안되는 종교적 설화에서 나오는 이야기와 격이 안 맞는 논쟁을 하고 있는 형편이다.

 

또한 여기에 달과 사과가 지구를 향해 떨어지고 있다는 뉴튼의 만유 인력에 대한 발견이 있었고 이것은 이 우주 전체가 아주 보편적인 몇가지 원리에 의해 유지되고 있다는 것을 우리에게 알려 주었다. 그리고 그 후 또 많은 시간이 흐른 후 스위스 특허국에서 근무하던 한 청년이 발표한 특수 상대성이론과 10년 후 또 다시 발표한 일반 상대성 이론, 이 두권의 논문은 우리가 절대적이라고 느낀 그 모든 것들 - 공간, 시간 등등이 모두 우리의 착각에서 비롯된 것이란 점을 일깨워 줬다. 즉 세상은 모두 상대적이라고 그리고 누구나 각자만의 다른 시계를 가지고 있다는 점을 알려 준 것이다.

 

우리 인간은 매일 아침에 해가 뜬다는 것을 '절대적 진리'로 믿었으며 1년은 봄,여름,가을,겨울이 있음을 절대 의심하지 않았다. 우리 자신은 내가 느끼는 '붉은색'과 타인이 느끼는 '붉은색'이 완전히 동일하다고 믿었으며 그래서 우린 모두 같은 경험을 하고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하지만 상대론적 세계관에 들어오는 순간 이 모든 믿음에 대한 절대적인 신뢰는 단지 사실에 근접한 근사값이란 것을 알게 된다. 상대성 이론은 단순한 과학기술적인 이론에 불과한 것이 아니다. 이것은 진정한 의미의 인식체계에 대한 혁명이었다.

 

이후 계속된 기술의 발전은 결국 DNA 나선 고리를 발견한 왓슨과 크릭을 거쳐 현대에 이르러서는 이젠 우리 인간이 좀 발전된 동물이란 점에서 많은 과학자들이 의견을 함께 하고 있으며 우리 지구가 아주 거대한 우주의 일부로서 존재한다는 발견도 해 내었다. 그리고 그 덕분에 우린 우리처럼 발전한 다른 외계 문명에 대한 꿈을 꾸고 있으며 설령 우리처럼 진화하진 못했더라도 외계 생명체의 발견을 무엇보다도 기다리고 있다.

 

하지만 이 가파른 과학적 발전과 별도로 우리 인간의 의식 수준의 발달과 그에 따른 철학적 고찰은 너무도 느리게 진행되고 있다. 물론 이 자연 과학적 발전이 철학적 사고에 확실한 영향을 준 것은 명확하나 우리가 우리 스스로를 객관적으로 인식하는 우리의 사고 체계는 매우 느리게 변화되고 있는 것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과연 우리 자신이 좀 발전된 동물이란 점을 아는 과학자들 조차도 우리 스스로가 이 거대한 자연의 일부이면서 그저 단순히 잠시 머물다가 가는 존재라는 점을 완전히 받아드릴 수 있을까? 이것이 바로 아는 것과 받아 들이는 것에 대한 극명한 차이를 보여주는 부분이다.

 

아무튼 모든 사물에 깃들여진 영혼의 존재를 믿어 의심치 않던 서양 철학은 중세에 이르러서 데카르트의 이원론에 의해 한번 다시 몸과 마음(영혼)으로 이루어진 존재로 규정되었으나 그의 이원론에서 영혼은 오직 인간만이 가질 수 있는 유일한 존재라고 규정함으로서 우리 인간을 더욱 특별하게 만들어 주는 근거가 되었다. 그리고 이것으로부터 일어난 아주 고약한 문제는 그 오만한 서양 철학자들이 거의 동물과 다름없는 흑인들의 존재들에게 그들이 과연 고통을 느끼거나 영혼이 있는지를 의심했다는 것이다. 즉 그들은 이 논리를 통해 흑인을 마음껏 짐승처럼 다룰 수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원론은 오래 가지 못했다. 그것은 앞서 말한 과학적 발전에 따른 결과이기도 한데 아무튼 이 후로 서양 철학은 방향을 튼다. 그것이 바로 관념론과 유물론이다. 관념론은 우리 인간이 오직 정신적 측면만으로 구성된 존재라고 여기는 것으로 마치 동양의 철학과 유사한 면이 조금 있다. 즉 세상은 내가 봄으로서 존재하는 것이란 뜻으로도 확장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은 어쪄면 현대 과학에서 한참 연구가 진행 중인 너무도 터무니 없는 이론 중 하나인 양자역학과 유사한 면도 있다. 물론 내 개인적인 근거 없는 확장이다.

 

이 후 나타난 유물론은 말 그대로 우리의 존재는 오직 물질적인 것으로 부터 정의 될 수 있다는 철학이었다. 즉 우린 그저 반응하는 기계이며 이것에 대한 실증적인 발견은 이후 수 많은 과학적 업적을 통해 증명되고 있다. 심지어 우리가 생각이라고 믿는 그 현상 조차도 우리 뇌의 기계적 작용에 의해 발생되고 있다는 것도 서서히 증명되고 있다. 아니, 실제로 이론적으로는 완전히 증명되었다. 우리는 현재 그것을 잘 인식하지 못할 뿐이다.

 

예를 들어 외부의 모습이 똑같이 생긴 두개의 물체가 있다고 치자. 두 물체는 외부의 모습도 똑같고 하는 일도 똑같아서 사람들인 이 두개의 물체를 서로 구분하기가 불가능 하다. 그리고 이 물체는 사람들이 와서 돈을 넣고 어떤 버튼을 누르면 그 버튼에 해당하는 물건을 밑의 구멍으로 내려보내 준다. 즉 이 물체는 자판기라고 부르는 존재였다.

 

이 자판기는 특이하게 왼쪽의 자판기엔 사람이 들어가 있고, 오른쪽 자판기엔 기계로 운영이 된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 한대 중 내부에 기계가 없이 사람이 근무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늘 두 기계 중 그날의 컨디션에 따라 한대를 선택하고 돈을 넣고 음료수나 차를 뽑아서 마신다. 하지만 . 하지만 누구도 그 둘의 차이점을 인식하지 못한다.

 

이것을 확장하여 인간과 완전히 닮은 로봇과 인간 수준에 이른 인공지능을 생각해보자. 우린 이 존재가 로봇이란 것을 알 수 있을까? 물론 아주 강한 힘과 인간은 도저히 흉내낼 수 없는 정교하고 뛰어난 육체능력이 발휘될 때 이 존재가 인간이 아님은 알 수 있다고 해도 평소에 대화를 나눌 때 그것을 인지할 수 있을까? 마치 자판기에 들어 있는 사람의 존재처럼?

 

인공 지능에 대한 흉내는 지금 이 순간에도 발전에 발전을 거듭하고 있다. 이미 이 인공지능은 체스 국제 챔피언을 꺽었으며 우린 조그만 스마트폰을 통해 조악한 인공지능에게 명령을 내리기도 한다. 아이폰에 장착된 '시리' 는 음성 서비스가 아니라 일종의 덜 떨어진 인공지능인 것이다.

 

물론 인간의 뇌 작동 방식과 이런 인공지능의 작동 방식은 매우 크게 차이가 난다. 하지만 우리가 자판기에서 겪은 경험으로 보면 자판기 내부가 사람을 통해 이루어지든, 기계에 의해 이루어지든 돈을 넣고 음료를 뽑는 그 입력과 출력에 대한 결과는 완전히 동일하다는 시점에서 과연 이것이 차이라고 인식할 수 있을까?

 

단지 그 내부가 인간처럼 작동하지 않는다는 이유 하나로 우리가 우리 스스로 만들어 낸 인공지능과 구분이 되어질 수 있다고 믿는 것인가? 그렇다면 유전공학 발전에 의해 만들어진 인공 생명에 대한 부분은 어떤가? 이들 존재의 생김새와 내부 구조는 정말로 똑같지만 생 후 경험의 차이로 인해 완전히 다른 사람일 텐데. 그렇다면 과연 하드웨어만 동일하면 같은 존재라고 우길 수 있을까? 차라리 하드웨어가 다르더라도 그 정신적 세계, 즉 자극과 반응이 동일하게 이루어진다면 우린 그 사람을 같은 존재로서 인식할 수 있지 않을까?

 

유전공학으로 만들어진 다른 성격을 가진 나와,  동일한 외모의 로봇으로 만들어지고 완전히 동일한 성격을 구현한 인공지능을 가진 존재가 있다면 과연 누가 진정한 나의 후보가 될까? 그리고 나를 아는 주변 사람들은 과연 누구를 '나' 로 인식해 줄까?

 

완벽한 인공지능은 물론 현재의 기술 수준에서는 머나먼 미래의 이야기이다. 하지만 인간의 기술 발전에 의하면 (개인적인 의견으로 양자 컴퓨터 기술이 사용화 될 때쯤 아마도 인간을 뛰어넘는 인공지능이 가능하리라고 본다) 언젠가는 우리는 아주 뛰어난 인공지능 기술을 갖게 될 것이다. 하지만 우린 아직 이것에 대한 정확한 의미를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

 

인공지능은 우리 인간의 마지막 특별함에 대한 종말을 고하고 있다. 즉 우린 지동설, 진화론, 상대성 이론, 유전공학 등을 거쳐 계속 우리 자신이 그리 특별함을 가지지 못한 존재란 점을 깨달게 되었으나 아직도 사고력, 상상력, 창의력, 감정의 역할을 통해 끝없이 우리와 만들어 낸 우리와 닮은 존재와의 간격을 벌리려고 애쓴다. (이런 것은 영화에 단골 소재이다 - 로봇은 감정이 없다) 하지만 결국 언젠간 사고력, 상상력, 창의력, 감정을 모두 지닌, 아니 흉내내는 인공지능이 나올 것이고 그것이 탑재 된 우리의 외모를 완벽히 흉내 낸 로봇을 보면서 우리가 그것이 다름을 인지해 낼 수 있을까? 자판기도 구분 못하는데.

 

우린 그때 조차도 우리의 유일성을 보존하기 위해 그 로봇들의 팔에, 머리에 공장 시리얼 번호를 적어 낙인처럼 활용 하려고 하겠지만 그것은 과거 우리 조상들이 그들의 노예에게 남긴 불로 지진 낙인에 불과하다. 그 낙인은 분별력으로서 의미는 갖지만, 그리고 그들을 나와 다른 존재로서 인식하면서 스스로에 대한 자만감을 유지시키고 분리를 해냄으로서 거짓된 평화로움을 얻을 수는 있겠지만, 실제로 그 노예들은 온전히 인간이란 사실이 변함이 없다는 것은 늘 진실이 된다.

 

하지만 지금도 그렇듯 그 시대가 와도 사람들은 종교를 믿고 영혼의 존재를 믿을 것이다. 설령 외계인과 접촉이 이루어지고 우리가 그들이 믿는 신의 존재를 알게 될 지라도 현재에 지구에 퍼져 있는 다양한 형태의 종교는 영속될 것이라고 믿는다. 만약 지구상에서 종교가 사라지는 날이 온다면 그것은 오직 우리 스스로가 완벽히 안전한 존재가 되는, 즉 절대 죽거나 다치지 않는 존재가 되는 그런 기술이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그것은 현재 나오는 온라인 게임의 요소 중 종교가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인간이 그 자신에 대한 자존감을 갖는 것 그 자체는 절대 나쁜 일이 아니다. 실제로 우린 이 자존감을 통해 많은 일들을 해내기도 하고 행복도 느낀다. 하지만 존재에 대한 근거 없는 자부심과 자만감은 그 존재가 아닌 존재들에 대해서 커다란 피해를 입힐 수 있는 점에서 매우 경계해야 한다. 이것은 쉽게 말하면 나와 함께 살아가는 존재로 받아들이느냐 내가 가지고 다스리고 조절할 수 있는 존재로서 받아들이느냐의 차이가 된다.

 

나와 함께 한다면 그것은 동반자가 되는 것이고 내가 다스린다면 그것은 노예가 된다. 우리가 자연을, 우주를 어떤 시각으로 바라보느냐에 따라 우리 자신은 다르게 정의될 수 있다. 내 자신이 우주의 중심이 되는 순간 전 우주는 지구를 돌고 우리 인간만이 오직 영혼을 가진 존재로 정의 된다. 그리고 그 나머지 모두는 나와 다른, 완전히 다른 존재로서 나를 위해 존재해야 한다. 그러니 마음껏 사용하면 된다.

 

우린 지금까지 지구를 그렇게 써왔다. 지구에서 퍼내고 있는 석유를 비롯한 엄청난 수준의 자원들과 누가 그 권리를 주었는지 모르지만 땅에 금을 긋고 국경선을 만들고 각자가 소유한 땅을 가지고 있다. 과연 우리는 왜 이런 것들에 대한 권리를 가지고 있을까? 바로 거기에 우리가 이것들과 함께하는 것이 아닌 우리가 이것들을 소유하고 있다는 인간들 집단적 우월적 지위를 이용한 이기심이 작동하고 있는 것이다.

 

그만큼 우린 아직도 우리 자신에 대한 특별한 지위를 내려 놓지 못하고 있다. 특히 거기에서 종교와 무지의 힘은 막강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 하지만 인간과 같은 아니 더 뛰어난 인공지능이 구현되거나 가능성은 낮지만 우리보다 엄청난 수준의 발전된 문명을 가진 외계인과의 접촉이 이루어질 때 그들이 우리를 우리가 과거의 거느렸던 노예나 개와 고양이처럼 애완인으로서 다룬다면 과연 우린 어떤 기분을 느끼게 될까?

 

꼭 그런 시대가 오기 전이라고 해도 이정도 예상이 된다면 지금쯤이면 한번쯤 내가 그리 특별한 존재가 아닐지도 몰라.. 그리고 세상은 나를 중심으로 도는 것이 아니라 라고 생각해 보면 어떨까? 종교가 주는 행복감과 무지함으로부터 오는 행복에서 조금 벗어나 약간 불행하더라도 자신을 제대로 알고 인식하고 살아가는 것은 그리도 힘든 일일까?

 

물론 힘들 것이다. 그리고 그 자신은 이미 나는 나를 그리 특별한 존재로 여기고 있지 않다고 생각하거나 혹은 이것에 대해 단 한번도 생각해 보지 않는 사람이 거의 대부분이라고 예상한다. 이것이 바로 운동하는 물제에 대해 작용하는 관성의 법칙과 유사한 인간의 법칙이다. 속도를 줄이거나 방향을 바꿀때가 아니라면 관성으로 움직이고 있는 물체는 그 스스로가 움직이고 있다는 사실 조차도 망각하고 존재한다.

 

인간으로서 엄마의 자궁에서 태어나 인간으로서 키워지고 자라고 생각하며 살아온 대부분에게 주어진 수십년의 시간은 우리 스스로를 의식하지 못하게 늘 인간을 최고의 가치라고 주입 받고 살아왔다. 그래서 누구나 개와 인간이 물에 빠지면 개보다는 인간을 구해야 한다고 말한다. 뛰어난 성현들이나 과거의 위대한 철학자들 조차도 인간의 가치에서 대해서 만큼은 절대적인 가치를 빼내지 못했다. 그것은 그것을 하는 순간 자기 부정이 되며 또한 사람들 역시 그런 생각에 행복을 느끼지 못했기 때문이다.

 

우리들 생각에 우린 위대한 존재일 수 있다. 이것은 그 자신의 착각이니 딱히 말릴 필요는 없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분명히 그런 존재가 아닌데도 불구하고 그것을 남들에게 우기고 강요하는 것은 잘못된 일이다. 관성으로 움직이고 있는 것이 분명한데 모두 같은 속도로 움직이고 있다고 해서 너와 나는 움직이지 않고 있다고 우기는 것과 같다.

 

수 많은 시간 학교에서 가정에서 친구에게 사회에서 자신도 모르게 습득된 인간 제일주의를 벗어나기란 불가능 하다. 단지 가끔만 생각하자. 우리가 이 자연과 이 지구와 이 우주와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지를. 우린 그들 중 하나이지 그들의 지배자가 아님을 밤하늘 초롱초롱한 별을 보면서 느껴보자. 우리와 같은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그 존재들에 대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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