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과철학

개인과 전체

아이루다 2013. 9. 19. 09:17

 

인간에게 치명적인 영향을 끼치는 독극물을 폐기하기 위해 그것을 화물로 적재한 상태에서 하늘을 날던 비행기가 급작스러운 고장으로 인해 어떤 마을에 불시착하게 된다. 하지만 마을 사람들은 먼 숲속에 불시착한 이 비행기의 존재를 모르는 상태에서 사고 비행기로부터 흘러나온 독극물이 수원지를 오염시키고, 그 물을 정수해서 마시는 마을 주민들은 하나 둘씩 폭력적인 성향을 보이면서 미쳐간다.

 

이 통제되지 않는 상황에서 마을 보안관은 자신의 가족을 지키기 위해 최선을 다하지만 미 정부는 군대를 파견시켜 이 문제를 해결하려고 한다. 결국 감염된 사람들은 모두 사살당하고 해당 지역에 대해 대규모 폭격까지 퍼부어서 해당 지역을 완전히 초토화 시킨다.

 

이 이야기는 얼마 전 본 어떤 영화의 주 스토리이다. 미국 헐리우드에서 생산되는 영화들 중 이런 형태로 특정한 한정적 지역의 재난을 소재로한 작품들이 그동안 쭉 있어왔다. 그런데 문득 생각해보니 우리나라에서는 이런 종류이 한 지역의 급작스러운 재난을 다룬 작품이 거의 없는 듯 하다. 나라가 작아서 그런지 아무튼 우리나라의 재난 영화들은 보통 나라 전체를 하는 경향이 있는 듯 하다.

 

아무튼 보통 이런 상황에서 그 자신이 희생자의 역할에 놓였을 때, 제대로 상황 파악을 하게 되었다면 이런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지게 된다. "왜 나에게 이런 일이 일어날까? 그리고 왜 저들은 우리를 죽이려고 할까?" 그리고는 자신을 위해, 가족을 위해 최선을 다해 살아나려고 애쓴다. 실제로 저 영화에서도 보안관과 그의 아내는 살아서 마을을 탈출하긴 했다.

 

보통 상태의 정부는 단 한명의 국민이라도 희생되지 않게 최선을 다해야 한다. 설령 그것이 불가능하여 영화처럼 대규모 폭탄을 써서 해당 지역을 초토화 시키는 과감한 결정을 하게 될지라도 기본적인 국민을 보호한다는 태도는 대외적으로는 절대로 버려서는 안되는 것이다. 하지만 현실적인 관점에서 어떤 소규모의 집단이 전체에 큰 해로움을 끼칠 수 있다는 판단이 된다면 그 소규모 집단의 희생에 대해 갈등하지 않아야 하는 과감함도 필요하다. 어떤 이들은 이런 경우에도 인간 생명에 대한 소중함을 이야기하며 그들의 생명을 살리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한다고 말하는 경우도 있다.

 

다수를 위한 소수의 희생이 불가피하다는 이론에 대해 정면으로 맞서 저항하는 이들의 이야기가 원론적으로 틀린 것은 아니다. 여기에서 옳고 그름은 없다. 단지 그것을 해야 하는 사람들과 그것을 막아야 하는 사람들이 존재한다. 그리고 이 둘 모두 각자의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만약 누구나 다수를 위한 소수의 희생을 당연시 여긴다면 여기에서는 도대체 브레이크가 없다. 그럴 경우 우린 사회에 해악을 끼친다는 이유로 모든 범죄자를 다 사형시켜 버릴 수도 있다. 왜냐하면 이들을 위한 교도소조차 국민의 세금이 쓰이고 있기 때문이다. 반대로 사람의 생명을 소중히 여긴다고 하더라도 모든 경우에서 사람을 살려 낼 수는 없다. 현실적으로 불가능하기도 하고 실제로 사람의 생명이 그리 소중한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 사람의 생명에 대한 잘못된 생각 중 하나가 바로 모든 생명이 동등한 가치를 갖는다고 믿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의 추상적이고 이론적인 사고방식 중 하나이다. 정말로 우리 인간 모두의 생명의 가치가 동등하다고 믿는가?  생명의 가치는 그 자신이 가장 소중하고 그 다음으로 자신이 목숨만큼 소중히 여기는 가족들이 중요하고 그리고 친구, 이웃, 같은 민족 등의 순을 거쳐 나중엔 나와 아무런 관련없는 이름 모를 나라의 이름 모르는 이의 생명이 가장 덜 소중한 것이다.

 

그런데 이런 종류의 갈등은 정말로 오랜 역사를 가져온 것도 사실이다. 즉 우리 인간은 모여서 사회를 만들고 문명을 발달시켜오면서 개인의 이득과 전체의 이득 사이에서 끝없는 갈등과 충돌을 겪어 온 것이다. 그리고 지금도 그것에 대해서는 그 어떤 인간도 명확히 결론을 내지 못한다. 단지 우린 전체를 위협하는 개인들의 위협에 대해서 개인들을 희생시키는데 암묵적으로 동의하고 있는 것일 뿐이다. 또한 소수를 향한 다수의 횡포에 대한 부분에 대해서도 또다른 활동등을 통해 최대한 방지하려고 애쓰고 있다.

 

이런 종류의 예는 공리주의 등을 설명할 때 자주 등장한다. 다수의 이득이 최고의 선이라고 가정하게 될 때 개인이 희생해야 하는 부분에 대한 입장이나, 반대로 개인의 자유의지가 최고의 선이라고 가정하게 될 때 전체에게 해를 끼칠 수 있는 부분에 대한 입장이 바로 그런 예에서 다루는 이익과 이익 충돌의 경우가 된다.

 

좀비와 같은 빠른 전염과 심각한 수준의 사망률을 보이는 질병이 발생했을 때 이것의 확대를 막기위해 감염자를 가두고 제거하는 것에 대해서는 많은 이들이 찬성할 것이다. 물론 그 질병의 실체를 모를 경우엔 치료할 수 있을 것이란 생각에 반대하는 이도 있지만 시간이 지나 그 실체가 치료 불가능하고 너무 위험하다는 판단을 하게 되면 결국 그 사람 역시도 생각이 바뀔 것이다. 그런데 그런 생각을 가진 이들도 자신의 소중한 가족이 그 입장이 되면 갈등이 생기게 된다. 즉 나의 가족이 아닌 사람들에 대해서는 사살 명령을 눈 감고 못본척 할 수는 있지만 내 가족을 향한 총구는 솔직히 개인이 감당하기 쉽지 않는 상황이 되는 것이다.

 

또한 그 상황이 그 자신일 때도 마찬가지다. 즉 자신의 세계와 타자들을 구분하는 보이지 않는 막을 기준으로 나와 연관된 사람들을 정의하고 그 후에 나머지는 모두 타인으로 정의하는데, 이 때 이 막의 안쪽에 있는 사람들과 밖에 있는 사람들 사이에서 그 자신의 입장이 크게 바뀌는 것이다. 당연히 안쪽엔 나와 나의 가족 그리고 어느정도 이득 공동체의 입장에 있을 수 있는 신뢰성 높은 친구 등이 있을 수 있다. 그리고 그런 입장이 되지 못한 나머지 전체는 모두 그 막 밖에 존재하게 된다.

 

그런데 이런 개인과 전체의 충돌이라는 인간의 공통된 행동양식을 생각해 볼 때 우리나라와 이런 형태의 사회 시스템의 원조격인 서양과는 근본적으로 미묘한 차이점이 하나가 있다. 아마도 이것은 우리나라의 민족 단일성, 폐쇄성, 획일화 된 성향 등의 이유가 만들어 낸 현상이라고 보여지는데 이 부분을 이야기 해보자.

 

사람들은 보통 이기적이지만 이타적이기도 하다. 즉 자신의 이득과 관련이 없는 상황에서 남을 위해 어떤 일을 하기도 하고 상황에 따라서 약간의 손해를 보기까지도 한다. 인간의 이런 성향은 이득을 근간으로 하는 우리 인간이 함께 모여서 사회를 이루고 살아가는데 큰 역할을 하게 되는데 이때 나타나는 이타주의를 '호혜적 이타주의' 라고 부른다.

 

실제로 우리가 믿는 이타주의의 실체는 바로 개인이 어떤 상대에게 베푼 선행이 훗날 다시 어떤 경로를 통해서건 돌아올 수 있다는 막연한 기대를 기반으로 하고 있다. 물론 어떤 상황에서는 그것이 매우 직접적으로 요구되기도 하는데 아무튼 우린 누군가를 돕고 살면 언젠가 자신이 힘들 때도 도움을 받을 수 있으리라고 믿는다. 그런데 이 돌아오는 이득의 특징은 그 규모가 작아질수록 그리고 자신과 친밀한 관계일수록 확실히 보장을 받는다는 점이 있다. 따라서 우린 자신과 이득관계가 명확히 얽힌 관계일수록 주고 받는 것이 많아지며 그래서 그 만큼 필요하다. 아니 그래서 소중하다고 스스로 여긴다.

 

인간의 관계 중 이것이 가장 확실한 예는 바로 부부이다. 원래는 완전한 남남이었던 부부는 결혼 후 일단 통장을 같이 쓰면서 거의 완벽하면서 그 어떤 관계도 따라오지 못할 이득 공유를 한다. 그래서 부부 사이는 그 혈연적 연계가 거의 없음을 특징으로 하면서도 인간간의 관계에 있어서 최고로 밀접한 특징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리고 그 다음으로는 부모와 자식간이다. 부모가 잘되면 자식은 자신에게 돌아올 더 많은 이득분들이 좋은 것이고 자식이 잘되는 것은 부모로서 뿌듯함과 또한 자신의 노후에 자신의 덕을 더 많이 볼 수 있는 이득까지 함께 하니 서로가 잘되는 것을 싫어할 필요가 없다. 그 다음으로 오는 형제 관계는 상황에 따라 좀 다르다. 만약 형제간의 우애가 좋아서 서로에 대한 신뢰가 높을 경우 꽤나 좋은 주고 받는 관계로 유지가 되지만 반대로 사이가 좋지 않을 경우 형제는 친한 친구보다도 훨씬 좋지 않는 경우도 많다.

 

보통 여기까지가 일반 대부분의 사람들 한계이다. 그렇지만 조금 특별한 관계를 더 맺은 사람들은 가족의 범위를 벗어나 아주 친한 친구나 공동체 활동등을 통해 가족만큼은 아니지만 어느 정도 선에서 이런 이득관계 공유를 맺기도 한다. 물론 가족에 비하면 한계가 있다. 우린 결국 통장을 합해야만 완벽한 이득 공유가 되기 때문이다. (이것을 억지로 전체로 확대하려고 한 것이 바로 공산주의이다. 그래서 망했다)

 

하지만 우리가 서로 공유하는 것 중에 돈(경제력)이 가장 중요하지만, 모든 이득과 손해가 단지 돈만을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니라서 돈을 제외한 나머지 부분은 꽤나 순조로운 공유가 가능하다. 즉 서로 집을 고치는데 도움을 주거나 동네 아주머니들이 김장때 모여서 한집씩 돌아가면서 하는 풍경도 그리 낯설은 것은 아닌 것이다. 여기에서 돈이 들어가는 것이 아니면서 노동력만 제공하는 어떤 종류의 일에 대해서 우린 꽤나 너그럽게 도와주는 편이라고 말할 수 있다.

 

오랫동안 공동체 문화가 발달해 온 대한민국의 사회는 이런 이타적 행동에 대한 범위가 거의 나라 전체로 퍼져 있다고 할 수 있다. 그것은 우리 사회가 아무리 서구화 되었어도 그들의 사회나 가치관과는 다른 모습을 보이는 매우 큰 이유로 작동하고 있다. 예를 들어 미국쪽에서 전체를 위한 개인의 희생은 매우 정의롭고 영웅으로 대접을 받는다면 우리나라에는 비슷하지만 어떤 면에서는 우린 누구나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하여 그들보다는 그런 행동에 대해 덜 평가 하는 것이다. 물론 그렇지 않는 사람들도 많이 있겠지만 우린 우리 민족 전체를 위한 개인별 희생에 대해 꽤나 자연스럽게 받아드리고 있는 편이다.

 

물론 이런 성향은 우리와 비슷한 일본 국민에서도 나타나는데 그들 역시 폐쇄된 공간에서 하나의 민족으로 살아가서 그럴지도 모른다. 그래서 2차대전 당시 자살공격이었던 카미가제에 대해 미군들이 받았던 정신적 충격은 우리가 상상하기 힘든 것이다. 그들에게 국가를 위해 자신의 목숨을 일부로 내 놓으라고 했다면 미군들은 과연 어떤 태도를 보였을까?

 

문제는 우리가 끊임없이 서양의 제도를 받아들이다 보니 그들의 가치관에 맞는 제도들이 우리 사회에 정착이 되는데 우리의 가치관은 그것과는 조금 다른 판단을 하고 있는 점에서 발생한다. 예를 들어 미국의 경우 자기의 직장의 업무 자체가 매우 위험한 소방관이나 군인들에 대한 사회적 대접 혹은 국가적 대접이 매우 좋은 반면 우린 일종의 서비스직으로 인식하는 경향이 있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가 너무도 이기주의라서 그럴 수 있을지도 모르지만 어떤 의미에서는 우린 전체를 위한 개인의 희생에 대해 그네들보다 훨씬 당연하게 받아들여서 그럴 것이란 생각도 든다.

 

이런 종류의 자연에서 나타나는 사회 생활에서 가장 개인의 희생을 당연시 여기는 현장이 바로 개미의 시스템이다. 개미의 삶을 다룬 다큐멘터리를 보고 있자면 개미들은 전체를 위한 개인의 희생을 완벽히 실현하고 있다. 그리고 개개의 개미들 역시 그것을 아무런 불만도 없고 또한 자발적으로 실행에 옮기고 있는 것이다. 물론 벌의 군집생활 역시 마찬가지다.

 

우리 인간은 그런 개미나 벌과는 달리 각자에 대한 주체의식이 있고 이득에 대한 명료한 선이 그어져 있기 때문에 그렇게 하긴 불가능하다. 그렇지만 사회 전체적으로 퍼져 있는 공통된 가치관의 영향으로 전체를 위해 얼만큼 까지를 희생할 수 있느냐에 대해서는 구성된 사회의 기본적 생각에 따라 미세한 차이를 보이고 있다.

 

문제는 현재 우리나라와 같은 상황인데, 시스템은 온통 서양의 개인적 삶에 맞춰져 있는데 우린 아직도 조선시대의 공동체 의식을 가지고 있어서 전체를 위한 개인의 희생에 대한 가치나 그 희생에 대해 사회 전체가 적극적인 보상을 시행하고 있지 않다는 점이다. 조금 이유는 다르지만 일제 강점기에 목숨을 바친 독립운동가들의 후손들이 몰락해서 살아가는 모습을 볼 때 우리가 만약 다음에 나라를 잃은 또 다른 그런 비참한 시절을 보낼 때 과연 누가 나서서 나라를 되찾기 위해 싸울 것인가를 의문스럽게 바라볼 수 밖에 없게 된다. 또한 현재 의무제로 시행되는 군에서 죽음을 당한 청년들에 대해 국가가 도대체 어느 정도의 보상을 해주고 있는지도 생각해 봐야 한다.

 

거기에 더해 현재 우리의 가장 큰 문제점은 사회가 점점 더 개인화되고 자기 이득만을 쫒는 극단적 이기주의가 퍼져나가면서 각자 스스로가 공동체를 위해 어느 정도를 희생하는 것을 자신이 유리할 때만 당연시 여기는 형태의 사고방식이 사회 전체적으로 퍼져 있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전통을 간직하지만 그것 조차도 개인적 이득에 맞춰서 자신에게 유리할 땐 공동체를 찾고 자신에게 불리할 땐 개인의 권리를 중요하게 여기는 형태의 비 논리적 주장을 하는 경우가 많다.

 

물론 거기엔 오랫동안 국가가 나서서 한 지역의 희생을 무조건적으로 강요한 형태의 사업이 진행된 전례가 있었다는 점도 크다. 즉 국가의 다수를 위한 소수 희생 정책이 마치 나라를 사랑하는 애국심과 같은 것으로 포장되어서 그들의 희생을 당연시 여긴 것이다. 이러니 이득을 얻은 다수는 손해를 본 소수에게 감사할 줄 모르고 모르면 당한다는 피해의식만 심어주는 꼴이 된 것이다.

 

결국 이런 형태의 압박이 오랫동안 사회에 누적되어 독극물처럼 쌓인 후, 이런 경험을 통해 우린 절대 손해를 보면 안된다는 생각과 함께 가만히 당하기만 해서는 안된다고 굳게 믿기 시작했다. 그래서 남들로 인해 자신이 손해를 볼 때는 개인의 권리를 주장하고, 반대로 자신이 다수가 되어 이득을 볼 땐 자신과는 다른 개인들의 손해를 당연시 여기는 엉뚱한 권리의식을 갖게 된 것이다.

 

하지만 이런 무대뽀적 이기주의는 절대로 우리가 처음에 받아들인 서양의 가치관이 아니다. 적어도 그들은 자신이 이득과 상대의 이득이 충돌이 날 때 그것을 인정하고 상대의 권리를 존중해주는 가치관을 가졌고, 그들의 제도에서 정신은 빼고 형식만을 가져 온 우린 잘못된 다수결의 원칙으로 인해 자신의 이득이 상대의 이득을 집어 삼켜 버려야 하는 것이 당연한 개인의 권리라고 믿게 되어 버린 것이다.

 

이런 상황이 되니 나라 전체가 극단적 이기주의의 충돌 현장이 되어 버렸다. 그래서 이젠 도심만 아니라 시골까지도 모두 내가 왜 널 위해 손해를 봐야 하냐에 대한 거대한 갈등의 시대가 열려버린 것이다. 그래서 우린 모두 이젠 나의 이득 범위가 되는 사람들에게만 마음을 열고 나머지는 모두 나의 적으로 규정하여 어떤 이득을 두고 나와 경쟁할 사람으로만 인식하고 있다.

 

하지만 이것은 결국 우리 스스로를 망치고 있는 일이다. 우린 현재 그렇게 심하게 자기것을 움켜쥐고  있지 않아도 충분히 살만 한 세상에서 살아가고 있다. 그런데 우린 늘 남이 잘되는 것을 질투하고 자신만 잘되려고 하고 정말 쥐꼬리만한 손해조차도 인정하기 못하여 끝없이 따지면서, 남이 자신으로 인해 생긴 손해에 대한 불만을 이야기하면 왜 이렇게 속이 좁냐고 비난하고 있는 형편이다.

 

손해가 단순히 손해로 보는 것이 아닌 자신을 무시하거나 기분이 나빠서라고 여기고 갈등만 생기면 일단 언성을 높이고 상대의 기분을 상하게 하는데 최선을 다한다. 그래서 결국 그냥 몇마디 말로 끝날 일조차 모두 큰 갈등으로 증폭되어서 해결하기가 어렵게 만들어 버린다.

 

그리고 이것은 모두 단 한가지 원리에서 시작하고 있다. 그것이 바로 다수를 위한 개인의 희생을 어떻게 받아 들여 주는 것인가 하는 것이다. 실제로 사람들은 쓸만한 어리석은 면을 가지고 있는데, 그것은 바로 어떤 손해를 입었더라도 사회 다수가 그것을 인정해주고 높이 평가해주면 어느 선에서 만족을 하여 그것으로 불만을 갖지 않는 특성이다. 이런 것을 명예라는 이름으로 포장하는데 근래에는 이 명예에 대한 가치조차도 땅 바닥에 추락하여 명예를 주느니 돈을 달라고 하고 있는 형편이다. 

 

그런데 우린 아직도 예전의 공동체 의식에 대한 형식적 기억만을 가지고 있어서 결국 그런 행동을 당연시 여겨버리니 당연히 손해를 본 사람에게는 명예도 주지 않고 줘도 받아들이지 않으며 그저 손해를 본 경우로만 남는 것이다. 그러니 누가 희생이란 단어를 자신이 감당하려고 할 것인가?

 

이런 형태의 형식만 남은 문화들이 우리의 각종 경조사에서 끝없이 등장하지만 아직도 우린 경조사에 오직 돈을 내러 가고 있는 형편이다. 서로가 좋은 일을 같이 축하하고 서로가 힘든 일을 같이 극복하고자 했던 우리 조상들의 품앗이 정신이 살아 있는 그런 행사들 중에서 이미 그 근간이 되었던 '돕기에 대한 의식'은 사라지고 오늘 돈을 내면 다음에 자신의 행사 때 그 사람이 되돌려 줘야 하는 일종의 적금 같은 형식만이 살아 남아 우리들 삶의 주요한 관계성 지속 방법론이 되어 있는 것이다.

 

이것을 그럴수도 있지라고 하면서 단순하게 생각할지도 모르겠지만, 아마도 이런 형태의 문제점들로 인해 우리가 겪는 갈등의 실제적이니 비용은 정말로 계산이 불가능할 정도로 막대하다. 하지만 우린 그 막대한 손해를 입더라도 이를 개선할 필요성을 못 느끼고 있다. 이것이 우리나라가 가진 근본적인 문제점이고 이 문제점은 아마도 정말로 오랜 시간동안 우리 곁에서 망령처럼 떠돌것이란 슬픈 예상도 된다.

 

정말 반 발자국만 서로 물러서서 서로를 배려해주고 보듬어주면 우린 훨씬 더 행복하고 좋은 세상을 살아갈 수 있는데 그것을 못하는 우리 다수의 어리석음이 씁쓸할 뿐이다. 다양함이 점점 사라지고 단 하나의 정답만이 자리를 잡아가는 우리 사회에서 미래에 대한 희망을 기대하는 것은 좀 무리란 생각도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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