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글에서 양심에 대한 검색을 해보면 최상위에 위키의 내용이 나타나며 거기엔 이렇게 정의가 되어 있다.
"양심(良心)은 선악을 판단하고 선을 명령하며 악을 물리치는 도덕 의식이다"
위키는 원래 어떤 의도된 그룹에 의해 정의하는 원리를 가진 형태의 고전적 정의를 하는 방식을 택하지 않기에 누가 양심에 대해 이런 정의를 했는지 알 길은 없다. 인터넷 이용자 중 어떤 이가 어떤 사전이나 혹은 누군가 한 말이 마음에 들어서 기록해 놓았을 수도 있고 혹은 완전히 자신의 생각일 수도 있는 노릇이다.
뭐 물론 그 출처가 중요한 것보다는 그 말의 의미가 제대로 맞는지가 훨씬 중요하니 단순히 이 말뜻을 음미해보자. 여기에서 말하는 선악을 판단하는 도덕 의식이란 말은 개인적인 입장에서 꽤나 맞는 말로 판단된다.
양심은 매우 인간적인 특징이다. 즉 동물과 인간의 다른 점에 대해 열거를 해볼 때 꽤나 상위에 위치할 수 있는 인간 고유의 것이란 뜻이다. 물론 개나 고양이가 되어 본적이 없어서 개와 고양이가 양심이 있는지는 솔직히 모르겠지만 결론적으로 말하면 개나 고양이가 양심을 갖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왜냐하면 앞에서 설명을 했듯이 선악을 판단해야 하는데 상식적으로 도대체 개와 고양이가 어떻게 선악을 판단하겠는가?
선악을 판단하는 것은 오직 인간만이 하는 일이다. 그런데 왜 인간만이 선악을 판단할 수 있는 것일까? 개나 고양이 보다도 훨씬 뛰어난 지능을 가져서? 아니면 고도화된 사회로부터 교육을 받아서? 혹은 그 선악이란 것이 원래 존재하는데 우리가 그것을 발견해서?
이것을 설명하기 위해 양심에 대한 설명에 앞서 잠시만 선악에 간단히 집고 넘어가자. 물론 이 글은 선악에 대한 글이 아니기에 이부분에 대해 딱히 설명은 필요하지 않지만 양심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근거가 되는 선악을 정의해야 할 것 같아서 그렇다.
단어적으로 선악은 좋은 것과 나쁜 것을 말한다. 그럼 좋다는 것은 무엇일까? 누군가 곤경에 빠져 있고 그 사람을 돕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의 행동은 보통 선하다고 해석된다. 장애인을 돕거나 어려운 환경에 놓인 아이들에게 기부를 하는 사람들은 선한 행동의 대표적인 예이다. 반대로 나쁜 것은 남을 속이거나 다치게 만들어서 손해를 입히는 경우를 들 수 있다. 물론 인간이 하는 선하고 악한 행동의 예는 셀 수 없이 많다.
문제는 선하다는 것은 상대적이란 점이다. 누군가에겐 선한 행동이 될 수 있지만 누군가에게 그 선함이 악함으로 다가오기도 하는 것이다. 간단한 예를 들어보면 길을 가다가 매우 힘들게 길거리의 노점에서 물건을 팔고 있는 아줌마를 안타깝게 여겨서 거기에서 어떤 상품을 샀다면 보통은 선한 행동으로 인식 될 수 있다. 그런데 그 바로 뒤에 그 아줌마가 파는 상품과 동일한 것을 파는 가게가 있었다고 치자. 이 가게는 갑자기 앞에 나타난 노점상 아줌마 때문에 그날 매출에 타격을 입을 수 있다. 왜냐하면 사람들이 자신의 가게에 와서 사야 하는데 노점상 아줌마를 안타깝게 여겨서 자꾸 거기에서 구입을 하는 것이다.
여기에는 두가지 좋지 않는 점이 있다. 일단 첫 번째는 가게 주인은 매달 가게세를 내고 거기에 입점해 있다. 즉 매달 상가 주인에게 돈을 줘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 가게 주인은 매달 적당한 이윤을 얻어야 한다. 두 번째 이 상가 주인은 또한 매달 자신이 번 돈에 대한 세금을 국가에 내게 된다. 물론 우리나라에서 세금은 워낙 개판으로 쓰여서 돈이 아깝긴 하지만 결국 세금은 누구나 내야 하는 것은 맞다. 그런데 그 돈이 노점상으로 가면 세금이 탈루되는 문제가 발생한다.
선의를 가지고 한 선한 행동이 실제로 늘 절대적으로 선할 수는 없다. 그리고 이런 사례가 생각보다 많이 일어나고 있다. 우리는 분명히 선한 의도로 누군가를 도울지는 몰라도 늘 그 결과가 선한 의도대로 진행되는 것은 아니다. 물론 이 부분은 선한 일을 한 사람의 의도가 아니니 그 행동에 대한 책임은 그 사람이 질 필요는 없다. 그렇다고 해서 그 결과가 악하게 흘러갔다면 자신의 선함에 대해 그리 자랑스럽게 생각할 수만은 없을 것이다.
문제는 양심은 바로 여기에서 출발한다는 점이다. 우리는 자신의 양심을 지키거나 양심적 행동을 하기 위해 꽤나 많은 노력을 한다. 그리고 오랜 된 옛날 이야기에는 양심을 지킨 사람이 복을 받는다는 매우 그럴듯한 내용의 설화들이 전해내려 온다. 우리가 익히 아는 금도끼 은도끼 역시 자신의 쇠도끼를 정확히 원한 양심적인 나무꾼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또한 미국에서 전해오는 어린 시절 사고를 친 워싱턴이 그것을 고백하는 매우 양심적인 아이였던 모습에 대한 이야기를 위인전에 기록해 놓았다. (실제로 이건 꾸며낸 이야기라고 한다)
이런 식으로 인간은 인간 사회에서 태어나 자라면서 자신도 모르게 끝없이 양심에 대한 교육을 받는다. 언제 그런 교육을 받는지 그 스스로 인식도 하기 힘들지만 우리는 나무꾼과 같은 이야기나 각종 권선징악을 주제로 한 만화, 소설, 드라마, 영화 등을 통해서 자신도 모르게 정의에 대한 스스로의 판단을 하고 거기에서 정의로움과 같은 것을 배우게 된다. 그리고 이렇게 정의된 정의로움은 우리가 양심적 판단을 할 때 기준이 되는 선악에 대해 기본적 바탕이 되어 준다.
아이들의 교육은 그래서 중요하긴 하다. 어린 시절에 이런 선악에 대한 명확한 교육을 받지 못했거나 혹은 받았더라도 집안 환경에 의해 무시되는 경우라면 도덕적 기준점이 매우 크게 후퇴하여 소위 우리가 말하는 비 양심적 사람이 되기 쉽다. 그리고 더해서 평범한 수준의 가정과 적절한 교육을 받았더라도 사회의 시스템에 어느 정도 적응하는 나이가 되면 (보통 중학생 이상이면 가능하다) 우린 교육과 현실의 가장 큰 차이점에 대해 눈을 뜨게 된다.
우린 학교에서, 집에서 파란불일 때 신호를 건너고 건널목에서만 길을 건너야 한다고 배우지만 세상에 나와보면 그런 신호나 표시를 무시하는 사람을 매일 매일 관찰할 수 있다. 그리고 그런 이들이 실제로 다른 사람들보다 더 빨리 원하는 목적지에 도달하는 현장을 목격할 수 있다. 또한 나이를 더 먹으면 조직내에서도 양심적인 사람보다는 비 양심적이라도 진급을 위해 온갖 비겁한 짓을 서슴치 않는 이들이 결국 성공하는 것을 보게 된다. 그러니 교육은 이론일 뿐이고 세상은 현실이 된다.
세상이 이렇게 비 양심적으로 돌아가니 반대로 밝혀진 양심적인 행동들은 언론등을 통해 크게 부각되는 현상도 발생한다. 단 하루의 신문만 천천히 기사를 살펴보면 살인, 사기 등의 각종 범죄에 관한 뉴스가 10개라면 어떤 사람들의 양심적인 행동을 다룬 기사는 1개도 채 안되는 것이 현실이다. 그래서 실제로 양심의 기준인 선악에 대한 상대적 평가기준에 대한 문제점은 고사하고라도 그 양심조차도 지키는 사람이 그리 많지 않은 것이 현실인 셈이다.
그렇다면 우린 왜 비 양심적으로 행동을 하게 될까? 분명히 우린 양심적으로 살아야 한다고 수십년에 걸쳐서 교육을 받음에도 불구하고 왜 그런 선택을 하게 되는 것일까?
가장 큰 이유는 당연히 양심적 행동은 보통 자신의 손해를 불러오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어떤 상점에 들어가서 상품을 살펴보다가 실수로 떨어뜨려서(과일 같은 경우) 그 제품을 상하게 했다면 상식적으로 그것에 대해 점원에게 이야기 하고 제품 가격을 지불해야 한다. 물론 그 제품은 폐기 처분해야겠지만. 하지만 그것을 누구도 보지 못했을 경우 그냥 슬며서 한쪽에 놔두면 지불할 필요가 없게 되는 것이다. 아주 단순하게 양심적으로 자신의 잘못을 말한 사람은 지 제품 가격을 지불해야 하는 손해를 본 것이다.
보통 사람들은 양심적으로 행동을 하는 방향으로 살아간다. 요즘 같아서는 작은 가게를 열어두고 무인 지불 시스템으로 운영을 해도 할 만할 정도로 양심적인 사람들이 많다. 그 이유 중 가장 큰 것은 바로 그 지불에 대한 부담을 들 수 있다. 우린 보통 천원, 만원에 자신의 양심을 팔지 않는다. 심지어 수 천만원의 돈을 주어서 경찰에 갖다 준 훈훈한 사례도 있듯이 어떤 사람들은 매우 양심적이기 까지 하다. 문제는 이 돈의 액수가 커지고 또한 그 돈에 대한 필요성이 커지면 우리의 양심은 크게 요동을 치게 되는 것이다.
무인가게에서 파는 물건이 수 천만원짜리이고 누구도 그것을 가져갈 때 지켜보지 않는다면 우린 이것을 그냥 가져 갈 유혹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또한 수 백만원을 주운 양심적인 사람이라고 해도 그때 자신의 목숨보다 아끼는 딸의 수술비가 없아서 전전긍긍하던 사람이라면 이 돈을 경찰서에 가져다 주기란 참으로 힘들 것이다.
즉 이런 예를 확대시키면 우리가 스스로 믿어 의심치 않고 자신을 양심적으로 살아간다고 믿는 사람들은 단지 그럴만한 상황이 되어서 그렇다는 점을 유추해볼 수 있다. 그래서 돈에 대한 양심적인 부분은 실제로 부자들이 가난한 사람에 비해서 좀 더 나은 경향이 있다. 일단 돈이 그리 부족하지 않는 사람들이니 돈에 대해 그리 많은 필요성을 느끼지 않기에 적당하게 양심적으로 살아가는 것이다. 하지만 이들이 실제로 큰 돈을 벌 땐 절대 그렇지 않는 것도 공공연한 비밀이다. 왜냐하면 이 세상에서 돈을 벌려면 양심적이기 보다는 비 양심적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왜 비 양심적인 사람이 돈을 더 잘 버는지를 모르겠다면 아직도 세상에 대해 긍정적인 평가를 하는 사람일 것이다. 그런데 이 부분에 대해서는 더 이상 설명을 하고 싶지는 않다. 이해를 못하겠다면 세상을 참 편하게 살아온 사람이거나 혹은 양심이 있다고 믿지만 실제로는 양심이 없는 사람일 것이다.
양심에 대해서 좀 더 깊이 들어가보면 이 양심이 참 오묘한 판단기준이란 것을 생각해 볼 수 있다. 이 오묘하다는 말의 의미는 바로 우리 양심이란 것이 정의된 대로 도덕적 판단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 도덕적 판단이란 말의 뜻은 무엇일까? 단순히 생각하면 바로 법적인, 그러니까 국가 시스템에 의해 강요되지 않는 지극히 개인적인 영역에서의 판단이란 뜻이다. 즉 비 양심적인 행동을 했다고 해서 그것에 대한 공적인 법적 처벌을 받지는 않는 다는 뜻이다.
가게에서 제품에 상해를 입힌채 도망치다 걸렸다면 도망치다 걸린것에 대한 처벌을 받는 것이 아니다. 그땐 물건 값을 변상해야 하는 책임이 있는 것이다. 뺑소니를 친 운전자는 도망을 쳤다는 것에 대해 벌을 받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상해를 입힌 사람에 대한 그 어떤 구호행위도 하지 않았기에 처벌을 받는 것이다. 실제로 양심적 행동에 유무 여부를 국가 시스템이 처벌을 하려면 그 사람의 심적 의도를 파악해야 하는 매우 커다란 난제에 맞딱뜨리게 된다.
그래서 양심은 개개인의 영역에 머무른다. 물론 이것이 모여서 집단적 양심화로 확대되기도 하는데 그 안에서 일단은 개개인의 양심이 우선이다. 그래서 사회 시스템이 잘 돌아가기 위해서는 이 개개인의 양심적인 판단 기준점이 잘 정의되어 있어야 한다. 그렇지 못할 경우 우리는 많은 비용을 지불하고 공권력에 이 양심적 행동 여부에 대한 끝없는 감시를 맡겨야 한다.
하지만 이 양심은 근본적으로 문제를 안고 있다. 그것이 처음 정의에서 나온 선악에 대한 판단이며 그 선악의 판단이 바로 상대적이란 문제가 존재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양심은 그 불분명한 판단기준과 더불어 그것조차도 지키지 않는 사람들이나 혹은 그 잣대를 마음대로 편하게 적용하는 사람들로 인해서 큰 혼란을 가져오게 된다. 즉 누군가는 그것을 비 양심적이라고 비난하기도 하는 것을 다른 어떤 사람들은 양심적인 행동이라고 해서 지지를 하는 경우가 있는 것이다.
조직의 비리를 고발한 내부 직원은 대외적으로는 양심적인 행동을 한 사람이라고 칭송되지만 내부 조직에서는 조직을 배신한 배신자로 여겨지는 경우가 바로 그에 적합한 예이다. 또한 그로인한 파장으로 조직 내의 다수의 직원이 어떤 경제적인 손해를 입게 되었다면 그 조직원들 뿐만 아니라 그 조직원들의 가족들까지 모두 그 사람을 비난하게 될지도 모르는 일이다.
물론 이런 경우 많은 사람들은 단순하게 판단해서 내부 비리를 고발한 용기있는 사람에 대해 칭송을 보내고 그 썩은 조직문화에 대해 비난을 하게 될 것이다. 하지만 여기엔 또 다른 문제가 있을 수 있다. 좀 무리해서 상황을 악화시키면, 결국 이 문제로 인해 조직의 역할이 축소되고 대규모의 검찰 조사가 이루어져서 조직의 역할이 크게 혼란이 오게 되었다면, 만일 이 조직이 맡은 역할이 소득 하위층에 대한 복지 업무였을 때 과연 이 상황은 어떻게 흘러가게 되겠는가?
물론 썩은 살을 도려내는 것은 틀리지 않다. 하지만 문제는 그로 인해 생살도 같이 잘려나가는 것이다. 그리고 그 살이 바로 내 살이 아닐땐 우린 쉽게 그렇게 해야 한다고 말을 하지만 바로 그 자신의 것일 땐 매우 다르다. 다리가 썩어서 잘라내야 한다는 의사 말에 다른 사람의 경우에 대해서는 당연히 그래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자신의 다리를 자른다면 이건 정말로 다른 것이란 의미이다. 그렇다고 해서 부패한 조직을 옹호하려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정말로 그것이 너무도 옳고 당연한 일이라고 해도 뒤집어 생각해야 할 부분은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여기에서 문제는 우리는 이런 상대적이고 복잡한 인과관계를 가진 것들을 모두 파악해서 선악을 구분할 능력도 없고 거기에 더해 설령 그랬다고 쳐도 그 선악조차도 상대적인 가치만을 가졌기에 우리가 양심이라고 칭하는 그 자체가 혼란스럽기 그지 없다는 점이다.
우린 양심을 어기면 자신도 모르게 자신에 대한 자책을 하게 된다. 그리고 대부분은 그것을 망각하고 살아가고 매우 소수는 그것을 인정하여 어떤 식으로든 용서를 비는 행동을 한다. 그리고 이 양심적 가책은 생각보다 강력해서 어떤 경우엔 그것으로 인해 수 십년을 고통 받기도 한다. 그래서 이것과 여러가지 현실적인 문제로 인해 모든 범죄는 유효기간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즉 공소시효라는 것이 그래서 존재하는 것이다.
또한 그래서 양심은 우리 사회를 안정적으로 유지시키는데 매우 큰 역할을 한다. 왜냐하면 양심을 저버린 행위는 우리 개개인의 정신을 심하게 괴롭히기 때문에 우린 보통 특별한 일이 없을 경우에는 양심을 따른다. 물론 큰 이득이 걸린 일에는 보통 다 양심을 버리지만 작은 이득 분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는 양심에 따르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의 양심적 태도란 것의 기본에는 법적인 처벌에 대한 두려움이 자리 잡고 있다. 인간이 인간을 해치면 안된다는 보편화된 양심적 태도는 전쟁이 났을 때 너무도 쉽게 무너져 버린다. 우린 내가 살기 위해 상대를 죽이는 것이 아니고 그들이 나의 적군이기에 사람을 죽이는 것을 쉽게 결정한다. 살인을 인간 최고의 범죄라고 말하는 이 조차도 이런 상황에서는 적군을 많이 죽인 사람을 나라의 영웅으로 손꼽는 것을 주저하지 않는 것이다.
그렇지만 우린 우리의 이런 양심이 꽤나 자발적이고 절대적인 것이라고 믿는다. 물론 어느정도 선에서는 이 말도 틀리지 않다. 하지만 결국 우리가 어느 시점에 가서 커다란 이득을 두고 이 양심이 흔들리는 경험을 했다면 그것이 바로 우리가 양심이 자발적인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는 순간이 된다. 정말로 양심이 우리 내부에서 자발적으로 발생한 인간의 기본적 가치라면 우리의 그것이 상황에 따라 흔들린다는 것 자체가 말이 안된다. 그것은 마치 우리가 배가 고프지 않는 것과 같다. 우리에게 식욕은 기본적 욕구이기 때문에 우린 어떤 상황이 되어도 때가 되면 배가 고픈 것이다. 하지만 양심은 그것과는 달리 오랜시간 사회로부터 받은 판단기준이기 때문에 다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린 우리의 양심에 꽤나 자신 있어 하면서 자신이 양심적으로 살아간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 양심에 대한 판단기준은 주변인물에 의해 끝없이 흔들리고 있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된다. 그래서 주변에서 누구나 그렇게 한다면 나 역시 그렇게 해도 큰 문제가 아니라고 믿으면서 집단적 비 양심적 행동을 하는 것이다. 그리고 더 무서운 것은 그렇게 된 자신에 대해 매우 떳떳해 하는 것이다. 즉 자신을 절대 비 양심적인 행동을 하는 사람이 아니라 적당한 요구를 하는 사람으로 묘사하는 것이다.
이것이 양심이 가진 최악의 단점이 된다. 그리고 여러차례 말했던 선악에 대한 상대적 판단기준이 바로 이런 결과를 만들어 낸다. 우린 그래서 우릭 기준으로 봐 왜 기득원에 속한 사람들이 그리 비 양심적으로 살아가는지를 비난할지 모르지만 실제로 그들은 그 스스로는 상당히 양심적인 사람들이다. 그리고 그것에 대해서 그 자신들은 매우 떳떳하게 말하는 것이다.
결국 이세상에 자기 기준으로 비 양심적인 사람은 단 하나도 없다. 과거의 비 양심적 행동을 가끔 떠올리고는 부끄러워 하거나 이것을 바로 잡으려는 사람들은 존재할 지 모르지만 사람 그 자체가 비 양심적인 사람은 없다. 우린 모두 양심적인 사람들이며 단지 그 안에 있는 선악에 대한 구분법만 다를 뿐이다.
그래서 누군가를 비 양심적이라고 비난하는 행위만큼 어리석은 행동이 없다. 왜냐하면 그들은 절대 비 양심적인 사람들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 기준이 내가 되었을 때 그들이 그런 것이지 그들 스스로의 양심에는 꺼리낌이 없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오늘도 버릇처럼 자신의 양심 기준에 맞춰 상대를 판단하고 그들의 행동을 욕한다.
이것이 우리가 그리 철석 같이 믿는 양심의 현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