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제목과 비슷한 이름을 가진 꽤나 오래된 영화 한편이 있다. 지금은 할아버지, 할머니가 다 된 페트릭 스테이지와 데미 무어가 출연한 영화 '사랑과 영혼'이 바로 그것이다 (글 제목은 사람과 영혼이다). 내 기억으로 이 영화는 90년대 초반에 개봉했던 것 같은데 아무튼 그때 꽤나 사람들의 입에 많이 오르내렸다. 특히 둘이 도자기를 만드는 그 에로틱한 장면은 그 후 여러 곳에서 패러디 되었던 기억도 떠오른다.
뜻하지 않은 사고로 목숨을 잃은 남자와 그 남자를 그리워하는 여자, 그리고 여자 주변을 맴도는 남자의 영혼이 가끔 보여주는 물리적인 현상. 거기에 더해 중간부터 나오는 우피 골드버그의 접신 역할,우리나라로 따지면 무당과 같은 역할이 코믹적인 재미를 주면서 이 작품은 꽤나 흥미롭고, 안타깝고, 아름답고, 즐거운 영화가 된다. 이 영화를 통해 생각해보면 우린 한번도 본적도 없는 영혼의 존재를 참 쉽고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영혼의 존재는 아주 넓은 지역에 또한 인종과 시대에 상관없이 인간이 문명을 이루거나 혹은 어떤 식으로든 무리를 지어 사는 곳에는 빠지지않고 그 개념이 자리 잡고 있다. 물론 이 영혼은 그 무리의 특성에 따라 매우 다른 형태나 현상으로 규정되고 있는데 예를 들어 인디언은 세상의 모든 자연에 영혼이 깃들여져 있다고 믿었다. 그래서 결국 자연이 일부이면서 또다른 형태의 영혼인 인간 역시 자연과 함께 어울려져서 살아가야 한다고 믿은 것이다. 이런 개념은 몇년 전 개봉해서 크게 성공한 상업영화 '아바타'에서 나오는 행성 판도라에서 살아가고 있는 그들에게서도 엿보인다.
우리나라의 예를 들어도 역시 비슷하다. 우리는 고대로부터 토속신앙의 입장에서 영혼의 개념을 믿어왔다. 영혼이라고 하니 꼭 이것이 외국에서나 나올 법한 개념으로 생각 할 수도 있지만, 잘 생각해보면 우리가 어린 시절부터 두려워 해 온 '귀신' 이란 존재가 바로 이 영혼과 동등한 개념임을 알 수 있다. 우리나라의 귀신은 말 그대로 육신을 떠난 영혼이다. 물론 우리 조상들은 공식적으로 현생에 있어서 자신의 몸에 영혼이 깃들여져 있다고 명확하게 믿진 않았지만 죽은 후에는 귀신이 되어 후손을 돌보고 가끔 제삿날 찾아와 그들이 차린 음식을 먹는다고 믿은 것이다.
우리나라 사람에게 귀신은 매우 익숙한 존재이다. 특히 많은 사람들이 두려워하는 처녀귀신이 가장 큰 공포의 대상인데 아무래도 시집가지 못하고 죽은 귀신이 가장 큰 후회가 남는 일이였던 듯 하다. 거기에 더해서 각종 사고로 죽은 원혼이라고 부르는 존재들은 많은 전설같은 이야기나 영화 등을 통해 표현되면서 우리들에게 한여름 밤의 서늘함을 제공하곤 했다.
무당과 같은 존재는 죽은 이들과의 소통이나, 나쁜 의도를 가진 악령을 퇴치하는 역할을 맡아 왔는데 요즘도 그 명맥을 이어가고 있는 것을 보면 이런 믿음은 정말로 오래가기도 하고 또한 사람들의 생각이나 마음이 아무리 기술이 발전하고 과학적으로 설명이 된다고 해도 절대로 우리가 가진 불안함을 해소해주지는 못한다는 생각이 든다.
아프리카에 있는 이름도 알 수 없는 소수 부족들 역시 자신들만의 논리와 생각으로 영혼과 비슷한 개념을 거의 다 가지고 있고 좀 더 발전된 문명을 이룬 고대의 4대 문명 지역 역시 모두 각자만의 개념으로 영혼을 정의하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 인간은 왜 이렇게 그 어느 곳이든 상관없이 '영혼' 의 존재를 정의한 것일까? 물론 질문을 던졌지만 설명을 하면 아마도 왜 영혼을 정의한 것이 궁금한게 아니라 영혼의 존재를 정의하지 않았다면 우리가 과연 존재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도 들 수 있을 것 같다.
영혼의 존재를 정의한 가장 첫 번째 이유는 바로 죽음이다. 우리는 태어나고 자라서 결국 죽는다. 물론 그 죽음의 원인과 시기는 사람마다 모두 다르다. 누군가는 태어나자 마자 죽고 누군가는 100년을 살다 죽는다. 하지만 죽는다는 것은 현재까지는 누구도 피해갈 수 없는 일이다. 누구도 죽음을 피해 갈 수 없다면 과연 죽은 후 우린 어떻게 되는 것일까 하는 두려움이 필연적으로 따라온다. 특히 우린 살아 생전에도 자신의 육체와 정신을 나눠 버릇 했기에 죽은 후 육체는 눈으로 보기에도 명확히 소멸되지만 남아 있는 정신은?
이것은 매우 큰 두려움을 준다. 죽음 자체는 생명체로서 가장 치명적인 두려움인데, 거기에 더해서 존재의 소멸이라는, 인간처럼 스스로 존재를 각성한 생명체에게는 또 다른 의미의 강한 두려움이 더해진다. 즉 우린 지구상의 그 어떤 생명체보다도 더 죽음을 두렵게 여기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육체적인 죽음은 막을 수 없는 운명이니 여기에서 존재의 소멸이란 것을 막아보려고 하게 된다. 그리고 여기에서 출발하여 발전 된 개념이 바로 영혼의 존재와 그 존재의 불멸성이다.
여기에서는 반드시 육신과 영혼이 분리가 되어야 했다. 즉 영혼이 육신을 떠나 존재 할 수 있어야 한다는 개념이 필요했다. 그리고 그러다보니 그 영혼이 다른 사람의 육신에도 들어갈 수 있고, 인간 중에 악당이 있듯 나쁜 영혼도 존재하고 착한 영혼도 존재하는 일종의 선악 개념까지 발전하게 된다. 놀라운 것은 이 역시 지역이나 시대에 상관없이 거의 모든 인간의 영역에서 나타나고 있다는 점이다.
두 번째 영혼의 정의는 사후세계의 필요성을 통해 나타난다. 어떠한 이유로 인해 우리가 영혼의 존재를 정의했다면 필연적으로 따르는 것이 바로 영혼이 머무를 공간이 된다. 실제로 사후세계는 영혼의 정의를 했다기 보다는 사후세계에 대한 필요성을 느꼈기에 영혼을 정의하게 된 상황이라고 보는 것이 더 옳다. 그렇다면 왜 사후세계가 필요했을까? 그것은 바로 다음으로 이어지는 종교적 믿음과 연결이 된다. 물론 사후세계가 오직 종교의 필요성에 의해 정의되지는 않는다. 처음에 말했듯 우리가 정신과 육체를 분리하여 정신의 영생에 대한 필요성을 느끼는 순간 우린 이 정신, 즉 영혼이 가야 할 곳이 생겼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것을 세계에 존재하는 무수한 종류의 많은 종교에서 아주 자연스럽게 이어나간다.
종교는 궁극적으로 영혼의 존재가 절대적으로 필요한 세번째 개념이다. 그것은 바로 현생에 대한 상벌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우리 인간은 기본적으로 살아 생전에 자신의 자유의지에 의해 산다. 인간의 자유의지는 생명체 본연의 특징인 존재 연장에 대한 의무 및 권리에 대한 행동을 의미한다. 즉 이것은 인간의 이기심을 의미하여 우리가 사회를 구성하여 다수의 존재가 함께 어울려서 사는데 있어서 매우 치명적인 악영향을 주게 된다.
이 부분은 나의 자유의지가 타인의 권리를 뺏는 상황에서 매우 빈번하게 발생하며 실제로 우리 인간이 발생시키는 거의 모든 종류 갈등의 원인이 된다. 즉 서로 가지려 하기에, 서로 누리려 하기에 충돌이 일어나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우린 같이 살아가기 위해 특단의 조치가 필요했다. 그리고 우린 결국 공동체의 삶을 위해 정말 많은 종류의 개념들을 만들어낸 결실을 거두었다. 그리고 이런 개념들이 바로 서로의 이득만을 추구하는 본성을 가진 우리 인간을 같이 살 수 있도록 해주는 강한 접착제 역할을 한다.
관용, 배려, 동정심, 보살핌, 공감 등의 서로 어울려 살기를 위한 개념들이 바로 그것들인데 문제는 이런 것들은 강제성이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분명히 도덕적으로는 비난받아도 법적인 처벌을 받지 않는 상황이 무수히 벌어진다. 힘든 상황에 놓인 남을 돕지 않는다고 해서 우리가 비난을 받을수는 있어도 감방에 가지는 않는 것이다.
그래서 세상은 생각보다 이런 인간의 고귀함을 무시하고 이 덕목을 갖지 않는 이들이 물질적으로 성공하는 일이 비일비재하게 일어난다. 즉 성공하는 사람들이 모두 그런 것은 아니지만 실제로 성공하고자 한다면 우린 자신의 이득을 극대화 시키려는 노력이 필요하고, 그 노력에서 우리가 가진 상대와 함께 살아가야 한다는 우리 스스로 만들어 낸 고귀한 개념들을 무시해야 할 것들이 분명해진다. 실제로 나 이외의 모든 상대는 이용해야 할 존재이지 결코 같이 어울려서 살아 갈 존재가 아닌 것이다.
이 문제는 우리가 암묵적을 맺은 사회적 계약에서 매우 큰 해악을 끼친다. 실제로 우린 우리가 가진 이런 좋은 종류의 개념을 마치 인간이 추구해야 할 진리와 같이 믿거나 아니면 이것이야 말로 우리 인간을 정말 인간답게 만들어주는 것이라고 믿지만 조금만 더 생각해보면 이것이야 말로 인간이 이렇게 거대한 규모의 사회를 구성할 수 있게 해주는 거의 유일한 힘이란 것을 알 수 있다. 만약 우리가 이런 어울림의 능력이 부족하다면 우린 결코 이렇게 거대한 사회를 건설 할 수 없다.
그것은 마치 수십마리가 무리를 이루는 늑대와 같다. 일정 수를 넘어선 그 숫자로 무리가 늘어나면 이 늑대무리는 그것을 감당을 할 수 없다. 우두머리 늑대에 의한 절대적인 복종을 통해 이루어지는 사회는 어떻게든 숫자적 한계가 있기 마련이다. 물론 개미처럼 모든 구성원이 한 형제이며 또한 조직에 대한 절대적 희생을 기반으로 하는 존재들로 구성되었다면 그 숫자는 좀 더 늘어날 수 있겠지만.
우리 인간은 현실적으로 모여야 힘을 내는 존재이다. 그냥 자연계에서 우리 개개인은 그저 원숭이 정도의 힘이다. 그렇지만 우리는 강력한 지능을 통해서 발생한 생각하는 힘을 이용해 이 치열한 생태계의 경쟁에서 이겨서 최상위 포식자로 군림하고 있다. 이 힘의 근원이 바로 사회이며, 이 사회을 구성하는 각자의 구성원들의 끊임없는 이기심 충돌을 막아야 했기에 우린 바로 인간을 인간답게 해주는 가치들을 자연스럽게 마련해 온 것이다. 그래서 실제로 미래의 재난을 예상하는 영화를 보면 꼭 이런 가치를 완전히 상실한 악의 무리들이 나오게 된다.
그런데 문제는 아까 처음에 말했듯 우린 실제로는 악당이 성공하는 사회에 살고 있다. 악당이 성공할 수 밖에 없는 이유가 바로 또한 인간의 고귀한 가치 때문이기도 하다. 어떤 악당이 천명의 만원만 가진 사람들에게 나쁜 마음을 먹고 모든 사람들을 속여 100원씩 공짜로 얻어냈다면 나중엔 그는 십만원을 가진 부자가 되는 원리다. 사람들은 작은 베품을 해주지만 그것이 다수가 되면서 한 군데로 모여 큰 이득을 만들어 내는 것이다. 결국 우리 사회에서 성공하는 사람들은 모두 이 원리를 잘 알고 있는 것이다.
물론 방금 말한 것은 너무 단순한 계획이라서 이젠 사람들은 좀 처럼 100원을 쉽게 내놓지 않을 뿐이지만 결국 기분만 좀 좋게 해주면 언제든 100원을 내 놓게 되어 있다. 이것이 바로 연예인들이 발벌이를 하는 힘이기도 하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연예인들이 다 악당이란 뜻은 아니다.
결국 악당이 성공하는 사회, 이 현상이 사회 시스템을 붕괴시킨다. 누구나 이득을 추가하는데에서 겨우 우리가 만들어 낸 더불어 사는 삶에 대한 좋은 개념을 지키면 지킬수록 손해라는 것이 알려진다면 과연 누가 그것을 지키려고 하겠는가? 하지만 결국 우린 이것을 해결할 수 없었다. 그리고 이 이유로 인해 우린 현생에서 해결되지 못한 것을 생후에 해결해야 할 필요성이 생겼다. 그리고 여기에서 영혼의 존재와 상벌의 개념이 아주 조화롭게 어울려져 간다. 거기에 더해 또다른 이득을 창출하는 종교 사업까지 더해지면서 소위 말하는 대박 현상이 일어나게 된다. 즉 우린 이 삼박자의 조화에서 좀처럼 빠져나오기가 힘든 것이다.
현생에서 어떤 풍족한 삶을 살았건 간에 죽으면 그 현생에서 저지른 죄를 평가받고 그것을 통해 천국과 지옥을 가는 시스템이 있다고 말하고 믿기 시작한 것이다. 이것은 매우 좋은 효과를 준다. 일단 사람들인 현생에서 다른 사람의 풍족함을 좀 덜 부러워 하게 된다. 자신이 가난하고 구차하게 살아도 현생에서 착하고 좋은 일을 많이 하면 죽은 후 천국에 가 행복한 영생을 보낼 수 있다고 믿게 해주는 것이다. 그래서 현생도 좀 더 행복해지며 죽음 후의 삶도 크게 두려워 하지 않는다. 반대로 현생에서 나쁜 짓이란 나쁜 짓을 다 한 어떤 사람은 죽은 후 자신이 지옥이 갈 것에 대해 두려워하게 된다. 그래서 죽기 전에 회개를 하거나 다른 이들의 용서를 구하면서 자신의 영혼이 정화되길 원한다.
그리고 여기에서 신의 존재가 필요해졌다. 누군가 현생에 대한 삶을 심판해야 한다면 누구나 그것을 인정하고 받아드릴 수 있는 절대적 존재가 필요한데 과연 그 역할을 누가 해야 한단 말인가? 현대 사회의 사법부도 믿지 못한 상황에 과거에 재판을 담당했던 지역 유지들이나 국왕등의 객관성은 도대체 어떻게 담보할 수 있다는 말인가. 그래서 결국 사람들은 신의 존재를 정의하기 시작하게 되었다.
신은 모든 것을 다 알고 있어야 하고, 신은 공정해야 하며, 신은 누구에게도 편견을 가지고 대하면 안되며, 신은 절대적 판단기준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그리고 신은 우리 인간을 사랑해야 한다.
현대사회에서 사용하는 '서기' 라는 연호는 바로 현시대에 가장 강한 힘을 가진 신인 예수의 탄생을 기준으로 한다. BC(Before Christ : 예수 전)/AD(Anno Domini : 그리스도의 기원) 가 바로 그 단위인데, 우리의 문명이 현재 유럽을 기반으로 하기 때문에 그렇다. 하지만 실제로 신의 존재는 그 전의 BC 수 천년 전부터 만들어져서 내려왔다. 특히 이집트 문명은 신과 왕을 하나의 존재로 정의하여 태양신 '라' 의 아들로서 파라오를 규정했다. 즉 파라오는 신의 대리인인 셈이다. 이집트 인들 역시 신의 존재와 사후 세계에 대한 확고한 믿음이 있었고 그 후 거의 모든 종교에는 영혼과 신의 존재가 복잡하게 결합된 형태로 표현되고 있다.
영혼의 존재에 대한 믿음은 인간의 거의 마지막 희망이다. 우린 죽으면서 필연적으로 존재의 종말을 맞이하게 되는데, 그때 우리를 영속하는 존재로서 믿을 수 있게 해주는 것이 바로 영혼이다. 우리가 믿는 종교나 믿음에 따르면 육신은 썩어 자연으로 돌아가지만 영혼만은 남아서 천국에 가든, 또 다른 육신으로 태어나서 부활하든 한다. 물론 나는 개인적으로 이런 것을 믿지는 않지만 영혼의 존재에 대한 믿음이 우리의 삶을 매우 풍요롭게 해준다는 것은 인정한다. 만약 이런 개념이 없었다면 누가 과연 현생에서 소위 말하는 착한 일을 하려고 할까?
영혼은 일종의 보상을 위한 필수 개념이다. 그래서 영혼은 우리가 현 사회를 스스로 붕괴시키지 않고 버텨나갈 수 있는 힘을 준다. 물론 우린 이런 것을 잘 인식하지 못하지만 누구나 자신에 대해 조금만 더 생각해보면 과연 우리가 그냥 하는 말인 '천벌을 받을 것이다' 라는 말처럼 누군가 우리를 대신해서 우리가 살아 온 삶을 평가해주지 않을까 하는 믿음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게 된다. 그래서 내가 오늘 타인에게 친절을 베풀고 그런 친절을 베풀 때 우린 행복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인간의 진화는 어쩌면 이런 사회생활을 좀 더 잘할 수 있게 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가장 큰 방향성으로 되어 있는지도 모른다. 물론 문명이 점점 더 발달할수록 우리는 제도를 만들어 그것을 좀 더 규칙적인 방향으로 이끌고 있다. 즉 우리의 본성보다는 우리 사회를 지배하는 제도의 보완을 통해 그것을 이룩해나가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어쩌면 먼 미래가 될 때 우린 더이상 사회 시스템을 유지하기 위해 영혼의 개념이 필요없을지도 모른다. 실제로 완벽한 공정함이 이룩된 사회라면 그럴 것이다. 물론 그런 사회가 인간의 시대에 올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인간, 사회, 영혼, 종교는 아직까지는 매우 강력한 접착제이다. 물론 나처럼 무교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실제로 우리가 무교일수는 없다. 그것이 제도화 된 종교가 아닐 뿐, 나 역시 인간의 가치를 믿는 인간교의 교인이다. 단지 좀 아쉬운 점은 종교가 이 영혼의 존재를 이용하여 장사를 하기 시작한 이래 우리의 영혼이 일종의 평가를 받는 상벌의 대상이 되어 버린 점이다. 물론 그것 역시 장점이 있지만 우리의 삶의 목표가 마치 사후의 평가를 위해 살아가는 마냥 규정되어 버린다는 점이 아쉽다. 설령 천국과 지옥이 존재한다고 해도 그것은 우리가 현생을 자신의 의지대로 삶을 산 후 우리가 모르게 결정되어야 할 영역이다.
그것이 각 종교에서 자신의 주장하는 신을 믿어야 한다는 교리를 펴는 순간 우리 영혼의 순수성은 사라지게 되는 것이다. 나는 일반적인 개념으로 영혼의 존재는 믿지 않지만 우리 인간이 가장 인간답게 표현되는 순간들을 바로 영혼개념의 힘이라고 믿고 싶다. 그리고 그것들이 가치가 바로 나와 남들이 함께 살아가는 힘이 된다.
그 오랜 시간동안 그 많은 인간의 무리에서 다양한 형태로 믿어왔고 믿어진 영혼이 존재할 지 존재하지 않을지는 그 누구도 모른다. 아직까지는 죽었다가 살아나서 영혼이 있다고 주장한 예가 없다. 많은 다양한 전설이나 사례들이 있지만 그 어떤 것도 정확하게 증명해내지 못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그래도 우리에게는 영혼의 존재를 믿는 것이 그렇지 않는 것보다 훨신 좋은 가치들을 추구하면서 살아가는데 도움이 된다. 그리고 이 좋은 가치들을 우리 자신을 행복하게 해주고 같이 살아가는 이들에게도 행복을 준다.
하지만 문제는 이것을 정확히 이해하고 철저하게 이용하여 자신의 현생의 삶을 풍족하게 만드는 소위 말하는 거대한 음모의 주체가 있다는 점이다. 우린 그래서 자신도 모르게 권선징악의 원리를 믿고, 사후엔 나쁜 놈들을 벌을 받는다고 믿고, 착하게 살면 복을 받는다고 믿게 된다. 물론 이런 것들이 우리에게 행복을 주긴 하지만 이것은 어떤 의미에서는 정말 자의적 해석일 뿐이다. 현대 사회는 자본이 지배하는 사회이다. 그래서 자본을 가진 사람들은 끝없이 이것을 우리에게 주입하고 있다. 이것은 좀 슬픈 일이며 우리가 그 많은 불의와 불공정한 것들에게서 반항하지 않고 순종하고 살아가는 방향으로 가게끔 근본적인 영향을 끼친다.
어떤 의미에서 영혼의 개념은 매우 좋은 것이지만 어떤 의미에서는 우리 스스로를 바보로 만들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특히 우리를 지배하는 거대한 음모의 주체는 정말로 영혼의 개념에 대해 많은 감사를 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모르는 것이 약이라고 하지 않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