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인간을 학술적으로 정의하는 분야에서는, 인간의 어떤 한 면을 강조해서 '호모 XXXX' 이런 식으로 부르는 것을 꽤나 좋아한다. 생각하고 지혜로운 존재를 뜻하면서 또한 현생 인류 전체를 표현하는 '호모 사피엔스', 인간의 정치적 특성을 뜻하는 '호모 폴리틱스', 경제적 특성을 뜻하는 '호모 이코노미쿠스', 놀 줄 안다는 뜻의 '호모 루덴스', 도구를 사용한다는 뜻의 '호모 파베르' 등등 솔직히 말을 만들기 나름일 정도로 이런 종류의 표현은 다양하다.
* 조금 웃긴말로 '호모 찌질로탁탁쿠스' : 찌질한 정신세계를 가진 사람이란 뜻의 신조어도 있다고 한다. 물론 농담이다.
이것은 바로 우리 인간이 그 만큼이나 복잡한 사고체계와 다양한 가치관과 방향성을 가지고 살아간다는 뜻과 함께 또한 그것들이 다르면서도 어떤 동일한 흐름을 가지고 있다는 의미도 된다. 즉 우리가 풍선 속에 있는 공기처럼 중구난방으로 움직이지만 그 움직임을 전체로 보면 기하학적으로 아름다운 '구'를 만들어 내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런 수 많은 인간의 특성과 다양한 방향성을 만들어내는 우리의 가장 근원적인 특성은 과연 무엇일까? 마치 이것은 백여종이 겨우 넘는 원자들이 각종 조합에 의해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물질을 만들어내듯 우리의 숨겨진 근원적인 몇가지 특성이 우리의 그 많은 다양함을 표출해 내는 것과 비슷한 원리라고 생각된다. 그리고 나는 이 원리를 단 두가지로 생각하고 있다. 그것은 바로 제목에서 말한 이성과 감정이다.
인간은 이성적 존재이다. 또한 인간은 감정의 동물이다. 이성과 감정은 어떤 면에서는 절대로 섞일 수 없는 물과 기름과 같은 것이지만 우린 놀랍게도 이 둘을 모두 가지고 있고 우리의 사고체계 안에서 언제나 이 둘간의 힘겨루기에 의한 결과로 우리의 행동을 결정한다. 즉 감정은 우리가 가진 거의 본능적 특성이고 이것을 인간의 지식과 그것을 바탕으로 한 판단으로 제어하는 것이 바로 이성이다. 즉 단순하게만 보면 이성은 감정을 제어하는 특성을 보인다. 우리가 울지 말아야 할 자리에서 울음을 참는 것, 우리가 웃지 말아할 자리에서 웃음을 참는 것, 우리가 먹고 싶다고 해서 남이 먹을 것을 빼앗아 먹지 않는 것은 바로 우리 스스로가 이성으로 우리의 근원적 감정과 욕구를 제어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그렇게 믿고 있다. 이성이 감정과 본능적 욕구를 제어하고 있다고. 하지만 정말 과연 그럴까?
우리는 이성이란 말을 만들어 인간이 동물과 다른 가장 큰 차이점으로 강조한다. 개와 고양이는 우리와 같은 동물이긴 하지만 그들에겐 이성이 없으니 동물에 불과하다 라고 말한다. 실제로 그렇다. 개와 고양이는 좋으면 좋고, 싫으면 싫고, 배가 고프면 옆에 있는 고양이와 개의 밥을 뺏어 먹거나 훔쳐 먹는다. 즉 감정과 본능이 요구하는 방향으로 살아간다.
그런데 인간은 그렇지 않기 때문에 이성이란 것이 정말로 존재하는 것일까?
자 앞에서 예를 들었던 웃지 말아야 할 곳에서 웃지 않는 상황의 예를 통해 이것을 생각해보기로 하자.
어떤 사람이 상가집에 갔다. 솔직히 상가집에 가면 좀 심심하긴 하다. 그래서 한쪽 구석에서 밥을 먹으면서 스마트폰으로 인터넷 검색을 하다가 너무 웃긴 장면을 우연히 보게 되었다. 정말 입에서 웃음이 터져나오려고 하는데 그때 마침 친구인 상주가 와서 와줘서 고맙다고 술을 한잔 따라 주었다. 그런데 이 사람은 너무 웃겨서 참기가 힘들 지경이다. 하지만 웃으면 이 불행을 당한 상주에게 예의가 아니므로 정말 힘들게 힘들게 웃음을 참고 겉모습으로는 침통한 표정으로 술잔을 받아서 마셨다.
웃지 말아야 한다는 것은 어떤 상가집에서의 예의이다. 그리고 이것을 인지하는 것은 지식과 오랜 사회생활에서 오는 상식이다. 이것이 지식이냐 상식이냐는 물론 경험적인 차이로 구분된다. 그래서 그리 중요한 차이는 아니다. 중요한 것은 어떤 경로를 통해 알았던간에 그 순간 웃으면 안된다는 예의의 중요함이다. 이것은 인간의 사회생활에서 매우 중요한 요소이며 이것들을 간과했을 때 그는 많은 사람들을 잃을 수 있다. 만약 그런 상황에서 웃음을 참지 못하고 크게 웃어버리면 그는 그 상주와 인연이 끊길 수도 있다.
그는 그런 사실을 정확하게 계산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는 본능적으로 계산하고 있다. 그리고 이것을 자신을 제어하는 힘으로, 즉 이성의 힘으로 감정의 변화를 억누른다. 실제로 사람들은 너무 힘든 상황이나 너무 마음이 아픈 이별을 했을 때도 비슷한 짓을 한다. 술을 마구 먹어 이성의 제어를 없애버리고 감정의 폭발을 통해 풀어버리기도 하고, 철저하게 이성적으로 판단해서 자신이 가진 아픔이나 슬픔을 없애버리기도 한다. 후자를 보통 냉정한 사람이라고 칭하는 경우가 많은데, 실제로는 매우 이성적인 것이다.
그럼 이 부분에서 이 사람의 이성적 제어력을 좀 살펴보자. 그는 정말로 우리가 믿는 그런 '이성'의 힘을 발휘한 것인가? 물론 이것을 이성이라고 칭할 수 있다. 그런데 내가 보기엔 이 사람은 계산을 해낸 것이다. 자신의 감정이 표출이 가져 올 자신의 손해에 대한 계산. 물론 내가 웃어서 상대가 기분이 나빠짐을 배려한 것이지만 결론은 그로 인해 그가 자신에게 좋지 않은 감정을 갖게 됨이 싫은 것이다. 그것이 명백히 들어나는 손해는 아니지만 아무튼 사람을 하나 잃는 것은 미래에 생길 어떤 종류의 이득을 없애는 행위라고 인식되기 때문이다. 그것은 단지 돈과 같은 물질적 이득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술친구, 여행을 같이 갈 친구, 자신에게 좋은 조언과 깊은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존재의 상실도 같은 의미이다.
이런 식으로 이성에 대한 접근을 해보면 우리가 이성이라고 믿는 그 모든 것은 지식과 경험을 기반으로 한 계산 행위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우린 감정이 끄는대로 살다가는 세상에서 막대한 손해를 입거나 혹은 사람들에게 따돌림을 당해 삶을 지속하기가 힘들다는 것을 알기에 어려서부터 오랜 시간에 걸쳐 감정을 억누르는 법을 배우게 된다. 그래서 젊을수록, 어릴수록 감정적인 특성이 잘 나타나는 것이다. 또한 반대로 나이를 먹을수록 감정을 잘 숨기기도 하는데 이러다가 뇌의 지식을 제대로 활용 못하게 되어 그 능력이 퇴화되는 노년기에 들어서면 다시 아이처럼 감정과 본능의 욕구에 지배되기도 하는 경우도 실제로 많이 발생하고 있다.
우리 인간에게 있어서 이런 이성적 능력은 솔직히 절대적으로 필요한 요소이다. 그것은 본능이나 감정을 제대로 제어하지 못하면 개인간의 갈등, 사회로부터의 격리, 심한 경우 사법처리에 의한 생의 종말까지도 초래하는 결과를 가져오기 때문이다. 내가 기분 좋고 싶어서 앞에 걸어가는 여자의 치마를 들추는 것은 잘못된 행동이다. 이것은 이성을 잃은 행동이라고도 한다. 물론 많은 남자들은 그런 생각을 마음 속으로만 할 것이다. 행동을 하는 순간 우린 사회적으로 '격리' 되어 버릴 수 있으니까 말이다.
이것은 철저한 계산에 의해 미래의 나의 손해를 막는 행위이다. 사람과 사람사이의 관계는 절대적 이기심의 충돌임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이렇게 사회를 이루고 군집생활을 할 수 있는 이유는 바로 이 계산법이 누구나에게 주입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계산법의 공통된 방정식을 우린 '상식' 이라고 부르고 또한 이것들 중 누가 봐도 그럴법한 것들을 모아서 '법률' 이라고 지정하여 강제성을 가지고 실행한다.
그래서 지나가는 여자의 다리를 보고 입을 헤 벌리는 남자는 그의 부인에게 있어서는 비상식적인 행동을 하는 남자이지만, 남자 입장에서는 또한 그것이 남자의 본능이라고 우길 수 있는 면도 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그 남자가 사법적인 처벌을 받진 않는다. 이혼은 당할 수 있을지 몰라도. 하지만 그 남자가 실제로 손을 뻗어 다리를 만졌다면 이것은 바로 법률을 위반하는 행위로 바로 사법처리가 된다.
자신의 출세를 위해 상관에게 아부하는 것도 매우 이성적인 행동이다. 책을 너무 읽고 싶어서 먹을 것을 살 돈으로 책을 사서 배고픔을 참고 책을 읽는 것도 이성적인 행동이다. 열심히 일을 해서 수입을 올리는 것도, 남을 돕는 것도 원리상으로는 모두 동일한 흐름을 따른다. 즉 어떤 식으로든 자신의 이득을 기반으로 한 제어 행위라고 보면 된다.
물론 이런 관점에서 보면 우리 인간이 숭고하게 여기는 그 모든 가치들이 한꺼번에 싸잡아서 도매급처리가 될 수 있음을 알고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상상속에서 만들어 낸 '이성' 이란 단어가 가진 우리들의 착각을 그냥 인정하기가 쉽지가 않다. 이성은 마치 우리가 만들어 낸 신처럼 우리 스스로가 동물과 달라야 한다는 절박함에서 나오는 우리의 마지막 자존심이기도 하다.
하지만 개나 고양이도 눈치를 보고 행동을 하는 이성적인 모습이 있다. 그들은 자신에게 밥을 주고, 자신을 보살펴주는 존재에 대해 꽤나 확실한 친근감을 표시한다. 물론 고양이는 좀 다르지만. 그 존재들이 그런 모습을 보이는 것은 왜일까? 주인이 좋고 사랑스러워서? 맞다. 주인을 좋아한다. 왜냐면 자신에게 밥을 주고 자신과 놀아주고 자신에게 잘 잠자리를 제고해줘서 그렇다. 단지 그들이 우리 인간과 다른면이라면 그 먹을 것이 어떻게 생겼고, 내 잠자리가 다른 개나 고양이에 비해 얼마나 좋으며, 왜 이 인간들은 그 자신에게 이런 호의를 보낼까에 대한 인식을 못한다는 점이 다르다.
그런데 과연 이 동물들만 그럴까? 아니다. 인간의 아이들도 완전히 똑같다. 어리면 어릴수록 전혀 인식을 못한다. 자신의 부모가 자신을 위해 얼마나 비싼 분유를 먹이는지, 얼마나 비싼 유모차를 샀는지 전혀 알길이 없다. 지식도 없고 상식도 없고 거기에 비교대상도 없기 때문이다. 실제로 아이가 이것들을 인식할 때는 이미 그 시기를 다 지난 후이다. 그래서 그런 이야기는 나중에 사진으로 보거나 부모의 이야기로만 듣게 된다.
사람은 나이를 먹을수록 이성적으로 변하는데 그것이 바로 우리가 그동안 책이나 학교로부터 지식을 쌓았고 거기에 경험을 더하면서 알게된 각종 정보를 잘 활용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린 실수를 최소화하고 그 덕분에 자신이 입을 손해를 최소화 하는 현명한 삶을 살 수 있는 것이다.
우리의 모든 이성적 판단은 자신이 가진 자원, 즉 시간, 육체적, 정신적 능력, 사고의 흐름 등등을 과연 어떤 것을 위해 써야 나에게 가장 이득인가를 결정하는 과정이다. 여기엔 사람마다 살아오면서 모두 다르게 정의된 상식과 지식이 사용되어 결국 그만큼이나 다양한 결정이 나타나게 된다. 즉 우리가 이런 다양한 판단체계를 갖게 된 것인 사람이 가진 지식의 범위가 그만큼이나 다양하다는 뜻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목표가 되는 이 이득 또한 꽤나 복잡한 결론이다. 당장 나에게 이득이 된다고 해서 장기적으로 미래까지 되는 경우도 드물고 또 반대로 당장 손해를 본다고 해도 미래까지 모두 손해인 경우도 드물다. 물론 어떤 것들은 매우 단순히 결정된다. 내가 줄을 서 있는데 누군가 끼어드는 것은 거의 변동없는 손해가 된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런 경우엔 대부분 그것에 대해 따진다. 하지만 우리 삶에서의 이득과 손해는 너무도 복잡하게 나타난다. 실제로 손해임에도 불구하고 그 당사자는 이득이라도 느끼는 경우도 많고 반대로 손해라고 생각했는데 이득인 경우도 많다. 이 모든 것은 그 만큼의 시간이 흘러봐야 안다.
그래서 세상은 인간들에게 당장 손해를 입더라도 그것이 좋은 의도라면 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이것이 이성적인 행동이라고 한다. 이 말은 맞다. 개개인의 이득이 바로바로 충돌하게 되면 이 세상은 너무 험악해지고 살기 어려워지면 결국 우리 인간 전체에 있어서 손해가 되어 버린다. 즉 우린 인간종 전체의 이득을 위해 서로가 서로에게 양보하고 배려하며 살아가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서 우리의 착각이 일어나는 것이다. 우린 분명히 개인의 이득이나 혹은 좀 더 넓은 범위인 인간을 위한 절대적 이득을 추구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서로가 서로에게 선한 행동을 했다는 이유로 우리를 스스로 이성적인 존재나 혹은 더 높은 이상을 추구하는 아주 높은 정신세계를 가진 동물로 서로가 서로를 칭찬하고 떠 받들어 준다.
이 착각은 너무도 대단해서 솔직히 아무리 설명을 하고 설령 그것을 이해해도 버리지 못한다. 나 역시 인간의 범주에서 단 한발자국도 벗어나지 못하는 존재이어서 이것에 대해 전혀 자유롭지 못하다.
인간의 이성에 대한 상상력은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들로부터 이야기 되었을만큼이나 오래된 생각이다. 우린 문명을 이룩한 후 우리가 다른 지구상의 모든 동물과는 다르다는 어떤식으로든지 증거를 필요로 했지만 과학이 밝혀준 진실은 우리가 전혀 의도한 바가 아니었다. 모든 천체가 지구를 중심으로 돌아야 해서 우리가 특별해야 했고, 신이 인간을 만들어야 했는데 그것은 허구적 신화에 불과했다. 우리와 우리가 같이 살아가는 자연은 거의 유사한 연관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밝혀지고, 우리는 정말로 거대한 우주의 변방에서 살아가는 그저 한 행성에서 최고로 머리가 좋은 동물 뿐이라는 점이 우리의 현실이다.
그럼에도 우린 아직 이성을 믿는다. 그리고 그 이성은 매우 인간을 인간답게 해주는 능력으로 생각되어진다. 물론 이성을 '이득과 손해를 계산하는 치밀한 능력' 이라고 정의한다면 이 말은 완벽하게 맞다. 하지만 그 누구도 이성을 이렇게 정의하고 싶어하지는 않는다. 우리는 우리가 이기적인 동물인 것을 그리 좋아하지 않으며 적어도 이타적인 면이 있다고 믿고 싶어 한다. 그래야 무엇을 하든 사회가 끝없이 강요하는 서로 어울리기 위한 이타적인 삶에 대한 압력으로부터 조금이라도 자유로울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사회적 현상은 아마도 인간 사회에 거대한 변화가 있지 않는 한 유지될 것이며 우리는 아주 먼 미래까지도 우리의 이성적 능력을 의심하지 않을 것이다. 합리적 사고라는 명분으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