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과철학

입자와 파동

아이루다 2013. 9. 4. 14:57

 

세상의 단일 원리를 설명하는 주장 중에 '끈 이론' 이라는 아주 난해한 물리학 이론이 있다. 아인슈타인에 의해 증명된 상대성 이론과 그 후 미시세계를 지배하는 양자론의 불협화음을 해소할 가능성을 지닌 이론으로서 가능성을 가진 이 약간은 웃긴 이름을 가진 이론은 세상의 모든 물질은 진동하는 끈이라는 단일 구성 물질로부터 출발한다고 설명하고 있다.

 

이 이론에서 가장 중요하게 봐야 할 것은, 과거 원자의 존재를 발견하고 거기에 더해서 원자 자체를 구성하는 전자, 중성자, 양성자의 존재들이 발견된 후 또한 그것들 조차 쪼개져서 다시 쿼크와 같은 미립자의 존재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된 후 도대체 얼마나 더 잘게 쪼개질 것인가에 대한 의구심이 들 때 그것에 대한 근본적 한계를 정했다는 점이다. 즉 물질이 아무리 쪼개지고 또 쪼개져도 결국 진동하는 끈이 마지막이란 생각은 기술의 발전에 따라 가장 기본 구성물질이라고 믿었던 존재들을 구성하는 더 작은 존재들의 발견으로부터 오는 물리학계의 공포심을 해소하는 듯 보인다.

 

100년 전만 해도 우리 인류는 원자의 존재에 대해 그리 확신을 하지 못했다. 그리고 빛의 존재가 파장인지 입자인지 조차 명확히 설명하지 못했다. 물론 지금은 빛이 파장이면서 입자란 것을 알고 있다. 그리고 그것이 가능하게 하는데 있어서 양자론이 절대적인 역할을 하고 있다. 그렇다면 왜 과거에 파장과 입자설 두개가 그리 상충되는 관점이 되었을까?

 

이것은 매우 중요한 두가지 입장의 차이에서 발생한다. 파장의 특성은 연속성이다. 그리고 입자는 불연속성이다. 파장은 최소 단위라는 개념 자체가 필요하지 않다. 그것은 그냥 단순히 파장이니 연속된 존재일 뿐이다. 하지만 입자는 앞서 말했듯 그 한계가 필요하다. 즉 최소 단위가 필요하다는 뜻이다.

 

파장은 연속적이라서 단일체로 구분이 되지 않는다. 하지만 입자는 각각에게 이름을 붙일수도 있고 분리해 낼 수도 있다. 빛이 파장의 성질과 입자의 성질이 동시에 나타난다면 이것은 절대 불가능한 일이다. 세상에 어떤 존재가 연속적이면서 불연속적일 수 있겠는가?

 

하지만 우리 인류는 사회 시스템과 과학 기술 발전에 힘입어 연속적인 개체를 불연속적인 정보화 시키는데 성공을 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빛처럼 연속적이면서 불연속적인 두가지 성질을 동시에 갖는 것이 아니다. 우린 단지 우리의 원칙으로 연속적인 상태를 불연속적인 정보화 시킨 것 뿐이다.

 

물론 빛조차 입자와 파동상태를 동시에 가질 수 있다는 물리학적 근거만 있을 뿐 우리가 이것을 확인하는 순간 빛의 파동 성질은 사라지고 입자의 성질만이 남는다. 즉 이것을 조금 확장하면 우리가 그 어떤 대상의 상태를 명확하게 확인하는 순간 그 모든 것의 연속적인 특징은 사라지고 불연속적인 것만이 남아서 존재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과정을 우린 보통 정보화라고 부른다. 즉 어떤 대상의 본질을 파악하려 하면 자연은 우리에게 확률로 존재하는 연속적인 부분을 없애고 수치화 되어 명백해진 불연속적인 모습만 보여주는 놀라운 특징이 있다.

 

현대 사회에 들어서 인간은 스스로 개발한 기술을 통해 파장을 입자로 변환되는 경우가 있다. 이것은 매우 복잡해 보이나 실제로 우리가 늘 사용하고 있는 전화기에서 발생하는 일이다. 소리는 공기의 진동을 통한 파장으로 전달된다. 우리가 전화기에서 나는 소리를 듣는 것은 바로 이런 파장의 힘이다. 하지만 이 소리가 전화기 안에 있는 스피커를 통하기 전에는 바로 입자였다. 우리가 0 이나 1의 값을 갖는다고 믿는 디지털 신호가 바로 그것이다. 물론 그 디지털 신호조차도 전달될 때는 바로 파장으로 전달이 된다. 휴대폰 주파수가 바로 그 역할을 하는데 우리가 전화기에 대고 말을 하면 이 파장은 내부적으로 입자화 되어 디지털 신호로 변경된 후 다시 긴 구간을 거쳐 최종적으로 상대에게 도착한 후 다시 소리 파장으로 변경되어 전달되는 것이다. 이런 종류의 변환은 우리가 매일 보는 TV, 컴퓨터등에서도 늘 발생하는 일이다.

 

결국 우리가 흔히 말하는 아날로그와 디지털의 차이도 역시나 이렇게 발생한다. 아날로그는 연속성을 가지고 있다. 반대로 디지털은 불연속적인 정보이다. 0,1 두가지 형태의 값을 갖는 디지털은 말 그대로 스위치처럼 꺼지거나 켜질 뿐 불빛이 밝아지거나 어두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것의 상태는 그저 밝거나 어둡거나만 할 수 있다.

 

우리가 살아가는 자연과 우주는 기본적으로 아날로그의 세상이다. 하지만 아날로그는 인간의 기준으로 보면 우리가 그대로 사용하기엔 너무 모호한 경계를 가지고 있다. 아니 실제로 경계가 없이 모두 연속되어 있기에 나눌 수가 없다. 하루를 나누는데 도대체 어떤 기준으로 하루를 나눌 것인가? 어두워지면 밤이고 밝아지면 낮이지만 밤과 낮이 낮과 밤이 바뀌는 그 시점은 디지털처럼 0이나 1로 표현 할 수 없다.

 

그런데 우린 자연계에서 살아가면서도 우리의 삶을 좀 더 낫게 하기 위해 제도란 것을 만들어야만 했기에 어쩔 수 없는 불연속 개념을 만들어야 했다. 2013년 9월 4일 오후 2시 18분 11초는 딱 한번 존재한다. 만약 이 시간에 우리가 누군가와 만나기로 약속을 했다면 연속성을 갖는 시간이라도 정확히 한순간의 점으로서 고정된다. 무리를 하자면 11.1초 11.2 초 같은 것도 가능하긴 한데 우리는 보통 그런단위까지도 시간을 사용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너무 빨리 지나가서 그것 자체를 인식하는 것이 불필요한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100M 달리기에서는 그렇지 않다. 컴퓨터를 구동시키는 CPU의 클럭 신호도 그렇지 않지만 결국 그 소숫점에는 한계가 있다.

 

문제는 이렇듯 아날로그가 디지털화 된, 즉 연속된 것들이 불연속된 개념으로 바뀔 때 우리에게 많은 문제가 따라 일어나는 부작용이 발생한다. 예를 들어 남에게 해를 끼치지 말아야 한다는 말은 단순히 듣기엔 너무도 당연한 말이지만 도대체 남에게 해를 끼친다는 것을 어떻게 그 구간을 규정할 수 있단 말인가? 더욱이 어떤 심한 해를 끼친 행동, 즉 범죄의 행동은 우리 사회가 정해진 규칙을 위반했기에 법적인 절차를 밟아 재판을 받지만 실제로 그 판결은 죄가 있다와 없다는 두가지로 결론이 나야 한다. 즉 여기에서도 연속적인 개념이 유죄나 무죄로 평가되어야 하는 것이다.

 

문제는 연속된 존재를 중간에 끊어서 여기부터는 1, 저기부터는 0 이라고 말하려 한다면 이 기준은 인구수 만큼이나 다양하게 되는 상황이 발생한다. 물론 우린 아주 어려운 사법시험이란 제도를 통해 또다른 불연속적인 상황, 즉 합격과 불합격이라는 절차를 걸쳐 우리의 판결을 내려줄 재판부를 구성하는데 그렇다고 해서 그들이 생각하고 판단하는 것이 항상 옳을 순 없다. 물론 그것의 폐해를 막기 위해 3심제도를 운영하고 있긴 하지만 그 역시 조금 낫다 뿐이다.

 

이런 문제를 잘 인식한 상태에서 우리 삶에서 일어나는 참 많은 것들을 다 생각해보면 언제나 우린 자신이 생각은 분명히 0이나 1의 상태만을 갖는데 반해서 우리가 판단하는 그 대상들은 모두 연속체란 사실을 알게된다. 나쁜 놈이란 기준은 나에겐 나쁜 놈과 나쁘지 않은 놈 두 가지로 불연속적인 구분이 가능하지만 실제로 나쁘다는 말은 철저하게 연속된 아날로그적인 관점인 것이다. 나쁜 것은 덜 나쁜 것과 나쁜 것과 더 나쁜 것으로 나뉘어지고 다시 덜 나쁜 것은 조금 덜 나쁜 것과 그냥 덜 나쁜 것과 많이 덜 나쁜 것으로 나뉘게 된다. 이런식으로 연속된 것을 우린 중간에 딱 잘라서 불연속적인 상태로 변경하여 나눈 후 왼 편은 착한 놈, 오른 편은 나쁜 놈이라고 말하곤 한다. 하지만 둘 사이엔 분명히 나쁘지도 착하지도 않는 놈이 있다.

 

정보를 전달하는 목적으로 이용되는 인간이 사용하는 언어도 이런 현상에서 큰 영향을 준다. 특히 명사로 알려진 단어들은 연속적인 정보 표현에 좋은 적합한 형용사에 비해 훨씬 불연속적인 정보를 포함한다. 우리가  흔히 쓰는 단위 역시도 이런 불연속 정보의 일종이다. 이렇듯 우린 의사소통에서 있어서 정보의 전달을 할 때 확실한 불연속적인 정보를 전달하는 것에 익숙하다. 체중이나 키를 물을 때 우린 60kg 이라고 말하는 것에 익숙하지 결코 60.121312131...(무한대)kg 이라고 말하지 않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모든 종류의 정보가 모여서 우리 사회의 근간이 되어지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세상은 우리가 아무리 정보화 시키고 추상화 시켜도 결국 빛처럼 그 본질은 변함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린 오래된 정보 전달법 방식에 익숙해져서 생각이나 주장, 사고, 신념, 믿음, 가치 등을 판단할 때 말 그대로 불연속적인 판단을 하고 또한 주장한다. 예를 들어 종교를 가졌다면 '신을 믿느냐' 에 대한 불연속적인 판단을 기대하는 것이다. 믿으면 신자이고 안 믿으면 불신자이다. 거기에 더해서 믿으면 천국, 안 믿으면 지옥이란 개념까지 확대되는데 문제는 이것의 판단 기준이 바로 연속적인 개념이란 것이다. 어떻게 믿는다는 것을 정량적 단위로서 측정할 수가 있겠나? (예전에 다니던 기독교를 기반으로 하는 어느 회사에서 '영성'이란 단어로서 믿음을 정량화시킨 경우를 본적이 있긴 하다. 생각해보면 이 얼마나 웃기는 상황이란 말인가)

 

여기에서 믿는다는 것은 앞서 분리한 방법처럼 덜 믿는다, 믿는다, 많이 믿는다는 식으로 분리되는 아날로그적인 생각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린 언어적 특징으로 구분되는 '믿는다' 라는 말 하나를 가지고 양 극단의 선택을 하도록 하는 것이다. 실제로 이 괴리감은 비단 이런 종교에서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정말 우리 인간 세상의 모든 상황에서 벌어지고 있다. 연인끼리 사랑한다, 사랑하지 않는다 역시 매우 흔한 예이다. 우린 이 사랑한다는 아날로그적 판단을 기준으로 결혼이란 제도를 시행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결혼의 제도권 안에 들어가는 순간 우린 법적으로 정해진 상대 이외의 이성이나 동성과 완전히 분리되어야 한다.

 

사상 역시 마찬가지다. 공산주의나 자본주의나 혹은 민주주의나 교조주의나 상관없이 뭔가를 믿는다면 그 가치는 불연속으로 존재한다. 그래서 수 많은 사건들을 통해 판단을 할 때 그것이 옳다 그르다라는 것을 이야기 해야 하는 것이다. 그것을 공식용어로 입장표명이라고 하는데 과연 세상에 일어나는 그 많은 아날로그적 사건들을 불연속적인 디지털화 시킬 수 있는 것이 가능하다고 믿는 것인가?

 

하지만 사람들은 자신의 생각에 매우 강한 확신을 가지고 있다. 그 자신이 믿는 사랑, 믿음, 사상, 신념등을 고정화 된 불연속된 것으로 변환시킨 후 그것을 믿는 것이다.  하지만 이것이 우리가 늘 잘못할 가능성을 가진 가장 큰 이유가 된다. 세상에서 일어나는 그 모든 일은 상대적이고 연속된 일인데 우리는 그것을 절대적으로 판단하여 불연속적인 결론을 이끌어 낸다.

 

연속적인 파장의 흔한 예인 소리를 전달하는 매체 중 CD는 꽤나 고급화 된 기술이다. 요즘은 mp3 가 나오면서 더 용량이 작으면서도 거의 CD급에 근접한 음질을 전달하지만 CD 든 mp3 든 아무리 용량을 크게 해봐야 결국 우리는 절대로 오케스트라의 연주를 현장에서 듣는 소리를 담지 못한다. 실제로 99.999999999% 는 담아 내더라도 결국 남은 아주 작은 것이 있다.

 

이런 연유로 인해 우린 CD 플레이어를 통해 현장에 있는 듯한 소리를 듣긴 하지만 결국 0.000000001%가 빠진 것을 듣게 된다. (물론 현장에서 듣는 것과 녹음된 것을 듣는 것은 음질 차이보다는 다른 것들의 차이가 커서 이런 음질 자체의 차이는 실제로 잘 느끼지 못한다)

 

하지만 우리의 귀는 그 차이를 느낄 민감함이 없기에 그것을 무시할 수 있으며 그 덕분에 이 음악이 절대적으로 원음과 같다고 인정할 수 있는 것이다. 우리가 생각하는 그 모든 연속적인 사건에 대한 불연속적인 판단이 바로 이와 같다.

 

절대 원음을 못내는 CD이지만 우리가 이것을 절대 원음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면 그것은 바로 절대 원음이 되는 것이다. 우리가 생각하고 고민하고 주장하는 그 모든 것들 역시 우리가 의심치 않는다면 원래 모두 절대적 가치를 가지고 있다. 하지만 어느날 너무도 탁월한 귀를 가진 사람이 와서 이 음과 원음이 다르다고 말해준다면 그때는 무엇이라고 말할 것인가?

 

* 아날로그 소리를 디지털화 된 정보로 바꾸기 위해서는 샘플링이란 개념이 필요하다. 이것은 각 대역의 음을 어떻게 정량화 시키는지에 대한 방법론으로 한 음의 높이당 많은 비트수가 할당될 수록 정밀한 음의 표현이 되지만 그럴 경우 데이터 량이 많이 늘어나서 파일의 크기가 커진다. 그리고 이런 개념은 영화에서도 동일하게 나타난다. 영화는 다량의 정지화면을 빠르게 바꾸어서 사람들로 하여금 그것이 움직이는 것처럼 보이는 기술이다. 즉 정지된(불연속적인) 화면이 빠르게 바뀌어 우리의 눈을 속여서 마치 그것이 움직이는(연속적인) 것처럼 보인다. 우리의 감각기관은 자연계에서 진화하여서 현재로서는 오직 아날로그 정보만을 받아 드릴 수 있기 때문에 이런 변환이 반드시 필요하다.

 

물론 현실세계에서는 이런 말을 해줄 이가 없어서 우린 결국 자신이 믿는 것을 자신이 아는 이들에게 이야기하고 동의를 얻고 그렇지 못하면 논쟁을 하고 설득하려 하면서 스스로 절대화 시킨 불연속적 판단을 계속 유지하려고 한다. 심지어 그것이 잘못되었다고 느끼면 이것을 버리고 다른 입장을 취하는 또 다른 불연속적 판단을 하게 되는 것이다.

 

이런 과정은 우리가 제도화 된 사회를 살아가기엔 기본적으로 필요한 요소이기에 이것 자체를 버릴 수는 없다. 재판이 열릴 때마다 연속적인 개념으로 죄가 어느 정도 있다고 말하는 판단은 할 수는 없지 않는가? 하지만 정작 문제는 이것을 스스로 절대화시켜서 남들에게 주입을 하려고 할 때 일어난다. 그리고 그것이 실제로 절대로 불연속적인 입장으로 판단할 수 없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억지로 강요를 하는 것이다.

 

결국 이것으로 인해 우리 사회는 정말 엄청난 갈등을 겪는다. 연속된 존재를 각자의 입장에 따라 불연속화 시킨 후 서로 그것이 절대적 판단이라고 주장하면서 내가 옳게 되니 상대가 틀리게 되는 끝없는 갈등이 일어나는 것이다. 내가 옳을 가능성이 높고 상대가 틀릴 가능성이 높다는 가능성에 기초하여 생각을 한다면 우린 좀 더 이런 문제에 대해 연속적인 개념을 가지고 상대의 입장과 나의 입장을 좁혀 갈 수 있지만 무조건 한쪽편에 서서 나만 옳다는 불연속적인 개념으로 접근하면 이건 도대체 답이 없는 것이다. 어떻게 0과 1이 협의가 가능하겠는가?

 

크게는 사회 전체에 작용하는 원칙이나 우리가 공통으로 추구하는 가치들에 대해서도 이런 경우는 흔히 일어나며 그것들에 관련된 어떤 사건들이 발생할 때 우린 명확한 입장을 보이라고 서로에게 강요를 한다. 사형제도, 낙태, 원자력, 사상 등등 우리가 그 입장을 명확히 해야 할 것들은 넘치고 넘친다. 작게봐도 개개인의 갈등에 있어서도 우린 늘 주변에게 편을 들길 강요한다. 싸움이 일어나면 내편과 상대편으로 주변인들을 가르고 나누면서 마치 동서로 나뉘어 이 좁은 나라에서 지역감정을 따지듯 그렇게 갈등을 조장하게 된다.

 

하지만 어떻게 이런 것들을 불연속적인 가치로 정의할 수 있을까? 거기에 더해서 내가 정의한 불연속적인 가치가 옳으려면 분단된 연속적인 아날로그 정보에서 나머지 옳은 부분에 속한 영역은 도대체 어떻게 정의되어야 옳을까? 옳은 것이 아니면 그냥 다 틀린 것이 되는가? 마치 행복하지 않는 것이 불행이듯 말이다.

 

그렇지만 잘 생각해보면 옳지 않는 것이 바로 틀린 것이 되는 것이 아니다. 또한 행복하지 않는 것도 불행이 아니다. 행복과 불행은 두가지로 불연속적인 단어로 정의가 되지만 우린 그 사이에 무수히 많은 상태가 있음을 알고 있다. 행복 역시 연속적인 존재인 것이다. 그럼에도 우린 늘 행복을 이야기한다. 그리고 행복하지 못한 것을 못견뎌 하면서 행복하기 위해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시간과 에너지를 투여한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불연속으로 정의된 것의 문제점의 좋은 예가 된다.

 

시계가 없던 시절 우리 조상들은 해가 뜨면 나와서 일하고 해가 지면 집에 들어가 쉬었다. 하지만 해는 계절에 따라 뜨고 지는 시간이 달라지니 결국 여름엔 일찍 나와서 늦게 들어가고 겨울엔 늦게 나와서 일찍 들어가게 되는 셈이 된 것이다. 현대 사회와 비교하면 말도 안되는 출퇴근 시간이다.  우리가 시계를 만든지 몇백년이고 세계 표준시를 정한지 백년 안팍의 시간이 흘렀다. 지구는 45억년 간 시계가 없이 태양을 돌았고 지구에서 살아온 생명체들도 수 십억년을 시계없이 살아왔다. 심지어 우리 인간조차도 시계가 없이 살아온 시간이 시계를 보면서 살아온 시간보다 길다.

 

이 세상의 모든 것이 이렇듯 연속적인 특성이 있다는 것만을 인식해도 우리 스스로 가진 근본적인 갈등을 어느정도 해결 할 수 있지 않을까? 물론 이것은 상상하기 힘들 정도로 힘든 일이란 점은 충분히 사전에 예측 가능하다. 그래도 이런 생각을 머리속에 넣고 다니며 생각을 하다보면 우리의 사고는 훨씬 더 유연하고 부드러운 반응을 보일 수 있을 것이란 기대도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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