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과철학

양심세탁

아이루다 2013. 8. 15. 07:59

 

예전에 자본주의란 제도의 속성에 대해 어떤 이가 설명한 글을 읽은 적이 있었는데 그것은 누구나 풍족하고 누구나 행복한 그런 사회가 존재하는 지상과 그 지하엔 굶주리고 창살에 갇혀 자유를 잃은 단 한명의 소녀가 있다. 여기에서 지상의 행복한 사람들은 모두 이 지하의 소녀에 대해 알고는 있지만 그 누구도 이 소녀에 대해 언급하려 하지 않으며 또한 꺼내려고 노력하지도 않고 살아간다. 실제로 이 소녀를 해방시키는 순간 지상의 모든 이들의 행복은 한순간에 사라지게 된다. 이것이 바로 자본주의 속성이다 라고 표현한 글이었다.

 

접한지가 오래되서 이 문맥의 정확한 글귀가 기억은 나지 않지만 아마 대충 이런 내용이었을 것이다. 그럼 이 글이 표현하고자 하는 것이 바로 무엇일까를 생각해보자. 여기에서 지상의 사람들은 우리들 보통 사람을 말하는 것이고 소녀는 아마도 우리가 행복하기 위해 착취하고 이용하지만 그들의 존재를 알아서는 절대로 기분이 좋지 않을 사람들을 뜻할 것이다.

 

오늘 내가 매우 맛있고 기분이 좋은 커피 한잔을 마셨다고 치자. 그런데 이 커피를 재배하는 농가의 실상이 아프리가 이디오피아의 어느 마을에서 정말로 하루 천원을 벌어서 먹고 사는 사람들의 손에서 재배된, 거대 커피 기업으로부터 착취를 당하는 사람들이 생산한 산물이란 것을 인지하고 나면 썩 기분이 좋을리가 없다. 아니 처음엔 기분이 좀 착찹했다가도 반복되면 아마도 좀 짜증을 내거나 혹은 무시하게 될 것이다. 이것이 바로 지상의 사람들이 소녀에 대한 이야기를 금기시 하는 것이며, 소녀를 감옥으로부터 탈출시켜 해방시키지 않는 이유이다.

 

현실의 소녀 격인 이디오피아 커피 재배 농가를 해방시키기 위해서는 대단한 자금과 노력이 필요하고 그 경우 우리가 맛보는 맛있는 커피는 엄청난 가격으로 상승하게 될 것이다. (물론 실제로 시중에서 파는 커피 한잔 중 실제로 커피가 차지하는 비중은 매우 작다. 하지만 커피 판매 매장은 원두 값이 오르면 아마도 원가 상승을 빌미로 커피값을 올릴 것이 거의 확실하다. 자본주의는 늘 그런 식으로 동작한다)

 

내가 산 너무도 멋진 명품 가방이나 신발이 어느 못사는 나라의 15세도 되지 않은 어린 노동자들의 지치고 갈라진 손에서 매일 힘겹게 만들어지고 있다는 것을 알면 솔직히 많은 이들은 자연스럽게 자신의 양심이 내는 소리를 듣게 된다. 이것은 우리가 보통은 대부분 일반적인 동정심이나 공감능력을 가지고 태어났으며 살아오면서 공생에 대해 자신도 모르게 끊임없는 교육을 받았다는 증거이다. 인간은 원래 본능적으로도 후천적 교육의 결과로도 공감 능력을 가지고 있다.

 

현실적으로 우리 인류가 지금처럼 공존하기 위해서는 이 공감과 상대를 배려하는 능력은 너무도 중요한 요소이다. 우린 이런 능력을 마치 선택적 능력으로 여길지 모르지만 만약 이 능력을 잃어버리면 우린 정말로 금새 약육강식이 지배하는 야생의 존재처럼 살아가게 될 것이다. 즉 우린 이런 능력을 잃어버리는 순간 이런 대규모의 사회는 금새 균형을 잃고 각자의 극도에 이르른 이기심 추구로 인해 분해되버릴 것이다.

 

그래서 특별한 정신적 문제가 없는 보통의 사람들은 일명 '양심' 이란 것을 가지고 살아가게 되며 이 덕분에 우리가 현재 문제가 있는, 고생을 하는, 밑바닥에서 살아가는 이들을 배려하고 도와줄 수 있는 사회적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는 기반이 된다.

 

문제는 옛말처럼 '가난는 나랏님도 구제 못한다' 라는 말처럼 이것이 매우 힘든 과정이란 점이다. 여기엔 다수의 공감대도 매우 중요하며, 현실적으로도 이것을 위한 돈 자체를 마련하는 것도 큰 문제이다. 즉 이런 행위를 통 털어서 복지라고 말하는데 복지에는 많은 돈이 들어간다. 그래서 어느 정도에서 한계가 있기 마련이다.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유럽 국가들의 복지제도는 우리에 비하면 그야말로 환상적이긴 하다.

 

아무튼 현실적으로 우리나라는 지하에 소녀를 감추고 있으며 어떤 이들은 이 소녀에 대해 가끔 언급하긴 하지만 실제로 많은 이들은 이 소녀에 대해 생각도 하지 않으려 하고 그것보다도 더 심하게 아예 존재 자체를 모르고 사는 이들도 꽤 된다. 물론 더 심한 경우엔 이 소녀가 반드시 있어야 한다고 믿는 사람들도 있는데 이들은 그래야 사회가 유지될 수 있다고 말하면서 소녀가 지상으로 나오게 되면 모든 비용이 상승할 것이라고 사람들을 협박한다. 그리고 그것은 아주 잘 통한다.

 

그 어떤 사회든 그 안에서 사람들의 삶을 위해 존재하는 직업에는 당연히 차별이 있다. 어떤 직업은 많은 보수를 받고 어떤 직업은 적은 보수를 받는다. 그런데 문제는 돈의 액수와 상관없이 일의 힘듬은 별도의 상황이란 것이다. 즉 힘든 일을 한다고 해서 더 많은 돈을 받지 못한다. 현재는 돈을 많이 버는 일은 따로 정해져 있는데 그것은 누구나 갖고자 하는 직업이 된다. 그리고 대부분의 그런 일들은 두뇌능력이 뛰어난 이들이 선점한다. 즉 똑똑한 이들이 경쟁에서 이겨서 그 자리에 가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어떤 직업을 갖든 누구나 자신이 그만큼의 능력과 노력을 통해 얻은 산물로 여기지 그것을 감사하는 이들은 매우 드물다. 왜냐하면 처음부터 다수가 원한 좋은 직업을 공개적이고 나름 투명한 경쟁을(실제 상황이 어떻든 간에 본인은 그렇게 느낀다) 통해 얻어 냈으니 당연히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맞다. 그리고 가정을 꾸리고 행복하게 살아간다. 그런데 가끔 경쟁에서 뒤진, 그래서 불행한 사람들의 삶을 보게 되는 경우가 있다. 아마도 자신이 경쟁에서 졌다면 살아가야 할 삶처럼 느껴지기도 하면서 동정심 등을 느끼게 된다.

 

결국 그들은 불우이웃 돕기 성금 등을 내거나 혹은 국가적으로 운영되는 복지 시스템에 자신의 세금이 쓰이는 것을 그다지 반대하지 않으면서 자신이 느낀 양심적 압박감에서 벗어나고자 한다. 물론 우린 이것을 매우 선한 의도로 표현하며 살아간다. 하지만 아무리 양심적 행동을 열심히 해도 세상은 그다지 변화가 없다. 그렇다고 내가 지하에 있는 소녀를 탈출시켜 커피 한잔에 십만원 하는 세상에서는 살아갈 수 없다.

 

우린 그래서 가끔 그 소녀를 찾아가 죽지 않게끔 빵 쪼가리를 주곤 한다. 하지만 이것도 일정기간이다. 어느정도 됐다 싶으면 '아니, 안하는 이들이 많은데 나 정도면 많이 한 것이 아닌가?' 라고 생각하면서 자신이 느끼는 양심적 압박감을 스스로 해방시킬 수 있다. 그래서 언제부터인가는 그런 것을 알면서도 무시할 수 있는 경지에 올라간다. 그리고 어떤 이들은 자신에게 명백히 이득이 되는 기부를 하기도 하고 어떤 이들은 이 모든 것을 무시할 수 있는 튼튼한 정신 세계를 갖게 된다.

 

특히 종교를 가진 사람들에서 이 현상은 젊은 시절부터 나타난다. 그들은 헌금을 내고 그 헌금이 교회를 통해 세계로 봉사활동을 나가는 이들을 통해 쓰인다는 생각에 아주 쉽게 양심적 압박에서 벗어난다. 그리고 자신은 꾸준히 그 지하의 소녀에게 뭔가를 주고 있다는 생각과 함께 자신의 삶, 그 자체를 매우 긍정적으로 보면서 행복하게 살아간다. 뭐 틀린 것은 아니다.

 

나는 이런 사람들의 모든 양심적 압박을 벗어나는 행위를 '양심 세탁' 이라고 부르고 싶다. 왜 이런 용어를 쓰냐고 묻는다면 실제로 우린 양심의 소리를 제대로 들은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 양심은 그 소녀에게 빵쪼가리를 주라고 하는 것이 아니다. 그 소녀를 그 감옥으로부터 꺼내어 씻기고, 재우고, 맛있는 음식을 주어야 한다고 말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린 매일매일 그 소녀를 죽이지 않았음에 안도하면서 살아간다.

 

내 양심은 구출인데 내 행동은 빵을 주는 것이다. 이 차이는 참으로 큰데도 불구하고 우린 내가 내 양심의 소리를 들어서 행동을 했다고 스스로 자부하면서 양심이 말하는 소리를 더이상 듣지 않는다. 물론 여기엔 매우 그럴듯한 이유가 있다. 실제로 이 소녀를 구하는 것이 참으로 힘든 과정이란 점이다. 그리고 이 소녀를 밖으로 꺼내는 순간 다수의 불행이 시작될 수 있다는 점도 간과해서는 안된다.

 

그렇다면 어차피 불가능 하니 이 소녀의 존재를 잊고 살거나 혹은 가끔 생각날 때 빵 한조각을 주는 것이 적절한 행동일까? 맞다. 적절한 행동이다. 어쩌면 이 시스템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가장 현명한 방법이기도 하다. 그런데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그렇게 했다고 해서 내 양심이 깨끗해지는 것이 아니란 점이다. 그리고 다수의 사람들은 그것을 인지하지 못한다.

 

내가 교회에 헌금을 냈다고, 내가 매달 어딘가에 정기적으로 후원을 한다고 해서, 내가 재난이 난 지역에 성금을 냈다고 해서, 내가 매년 크리스마스에 익명의 이름으로 큰 기부를 했다고 해서 내가 양심의 소리를 제대로 들은 것이 아니란 뜻이다. 물론 이런 행위 자체가 문제 있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당연히 하지 않는 사람들보다야 훨씬 낫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행동이 우리의 양심을 편하게 만들어서는 안된다.

 

양심이 말하는 소리를 완전히 실천할 수는 없다. 이것은 불가능 하다. 하지만 우린 늘 우리의 양심이 말하는 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물론 이것을 듣지 않을 때 우린 더 행복하기 때문에 우린 본능적으로 이것을 듣지 않으려고 한다. 그리고 좀 많이 들린다 싶으면 기부를 한다. 거기에 더해서 꾸준히 기부를 하는 사람인 경우 더 귀가 막히는 경우가 생긴다.

 

하지만 이런 행위가 우리 양심을 약간 씻어줄 수 있는 수준이지 우리가 우리 스스로를 평가 하는 수준처럼 그렇게 멀쩡한 인간까지를 만들어 주는 것이 아니다. 아마도 기부 행위를 하는 많은 이들은 자신이 남들은 안하는 기부를 하고 있다는 생각에 스스로 어느 정도 자부심을 가지고 살아 갈 것이다. 하지만 결국 기부를 든 안하든 하의 소녀를 탈출시키지 못하고 있다는 점은 동일하다.

 

인간의 행복이란 관점에서 보면 우리 사회가 가진 어두운 면은 보지 않을수록 좋다. 어디에선가 반지하 공장에서 미싱질로 옷을 만드는 힘들고 불결한 작업환경에서 12시간 일하는 사람들이 하루 일당으로 오만원을 받아가는 세상은, 하루 종일 서 있는 편의점 알바생이 하루 12시간 일해서 5만원을 받아가는 세상이, 내가 하루 8시간을 일하고 수십만원에서 수백만원을 받아가는 세상과 같이 있으면 안된다.

 

우리는 그런 우리 사회의 어두운 면을 보면서 살아가면 행복하지 않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알고 그곳을 보라고 말하는 이들의 목소리를 서서히 무시한다. 그리고 좀 더 지나면 그렇게 말하는 이들 조차도 싫어진다. 거기에 누군가 그렇게 말하는 이들의 문제점을 지적한 글을 읽거나 말을 들으면서 자신도 모르게 동조해서 같은 논리로서 그들을 공격한다. 왜 나에게 그것들을 보라고 강요하냐고 따진다.

 

우리 사회엔 가끔 그런 불편한 영화들도 나오고 불편한 사고 소식도 나오고 불편한 사건도 생긴다. 어쩌면 우리가 접하는 그 모든 뉴스들이 아마도 그런 것들인지 모른다. 수 많은 자살소식, 사고소식, 뇌물, 상납, 부당거래 등등. 하지만 이런 것들을 근본적으로 고쳐야 한다고 말하는 이들의 주장을 보면서 다른 면에서 또 부담스러워 한다. 그것은 바로 행동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런 부조리가 가득찬 세상을 위한 행동은 절대 우리를 더 행복하게 해주지 못한다. 우린 아주 맛있는 음식과 별 생각없이 볼 수 있는 영화와 깔끔한 잠자리 그리고 가끔 가는 해외여행이 중요하다. 누군가의 자살 소식을 들어도 내 자식이 아니면 되고, 법정 시급이 오천원으로 정해졌다는 뉴스를 들어도 내가 받을 돈이 아니니 그리 개의치 않는다. 그런 것들은 모두 내가 딱히나 신경써야 할 것들이 아닌 것이다.

 

하지만 가끔 어떤 사람들은 그것을 봐야 한다고 말한다. 그런데 정면으로 보려니 너무 힘들다. 내 행복이 깨지고 나의 머리가 복잡해진다. 내가 맛있게 먹는 이 음식에 숨겨진 비참한 진실을 인식하려니 도저히 음식을 맛있게 먹지 못한다. 그래서 점점 무시하려 하고 무시하려는데 있어서는 기득권들이 이미 만들어 놓은 이미 너무도 훌륭한 이론들이 있다. 낙수론, 파이를 키워야 한다, 가난한 이들은 게으르다, 노력하는 자에게만 기회를 줘야 한다, 나는 이미 충분히 힘들다, 왜 내가 힘들게 얻은 것을 그렇지 않은 사람들과 놔눠야 하는가 등등의 논리가 이미 충분히 우리의 양심을 마비시키는데 사용 가능하다.

 

그래서 사람들은 나이를 먹어갈 수록 점점 더 보수화된다. 아니 보수화라고 믿지만 실제로는 기득권이 된다. 그래서 자신의 양심이 내는 소리를 꽉 틀어먹고 살아오면서 들어 온 각종 현실론에 근거한 기득권 논리를 앞세우고 다른 양심의 소리를 하는 사람들을 아직 어리다고 평가하거나 심지어는 공격하기도 한다.

 

나는 우리가 해결하지 못하는 양심의 요구에 사로잡혀 평생을 힘들게 살아가라고 말하고 싶은 것이 아니다. 나는 우리는 늘 양심의 요구에 합당하게 대응하지 못함을 부끄럽게 여기고 살아가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지하에 있는 그 소녀를 잊는 것이 아니라, 지하에 있는 그 소녀에게 한번쯤 빵조각을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그 소녀의 존재를 절대로 잊이 말고 늘 마음속 한켠에 두고 살아가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현재 가지고 누리는 이 삶이 얼마나 감사한지를 생각해야 하며 기회만 된다면 그 소녀에게 맛잇는 먹거리를 가져다 주고 또한 그런 행동을 했다고 해서 나 스스로 어떤 양심세탁을 했다고 여기는 것이 아니라 늘 평생을 그렇게 양심의 소리로부터 부끄러워 하면서 살아가야 한다고 말하고 싶은 것이다.

 

왜 우리가 늙을수록 탐욕스러워지고 앞뒤 꽉 막힌 존재로서 변해갈지 잘 생각해보자. 결국 세상이 변한 것이 아니라 우리 스스로가 그렇게 변해버렸다. 평생을 양심이 하는 이야기를 듣지 않으려 귀를 꽉 막고 살아가니 당연히 언젠가 시청앞에서 양심의 소리에 따라 시위를 하는 이들로 인해 교통이 막힐 때, 아 저 놈들은 왜 시위를 해서 교통을 막히게 하지' 라고 욕을 하게 되는 것이다.

 

이런 생각을 해보자. 오늘 내가 얻은 행운이나 오늘 내가 받은 내 월급이 정말로 내 것일까?  나는 내가 보지 못하는 이들이 받지 못하는 이득을 내가 추가로 뺏고 있는 것은 아닐까? 나는 내 월급이 부족하고 나는 내가 사는 환경이 마음에 안들고 나는 큰 욕심도 없는데 라고 생각하지만 정말로 내가 누리는 이 모든 것이 온전히 내가 누려야 할 것들일까? 그리고 나보다 훨씬 못한 삶을 살아가는 많은 이들 앞에서도 그렇게 자신에게 주어진 것을 당연히 받아들이거나 불평을 하면서 살아가는 것이 과연 적절한지를.

 

아마도 나는 내가 누릴 수 있는 정도를 누리고 있다고 생각한다면 당신은 이미 양심세탁이 끝난 사람이니 이제부터는 행복하게만 살아가면 된다. 물론 가끔 교회에 가서 헌금을 하거나 정기적으로 기부를 하는 정도의 행동을 하면 더욱 양심이 내는 소리는 줄어들 것이고 그 덕분에 더 행복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그저 우리들의 단순한 선택일 뿐이다. 당신이 어떤 삶을 살든지 그것에는 옳고 그름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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