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사회

남에게 피해가 없다면 해도 괜찮은 것이 아닌가?

아이루다 2013. 4. 28. 10:50

 

과거 우리나라, 특히 유교가 지배했던 조선의 사회에서 씨족에 대한 맹목적인 충성이나 나이에 따른 존대문화 등은 어쩌면 너무도 절대적이어서 그 누구도 반론을 펴지 못하는 관습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이 문제를 현대의 관점으로 보면 이제 씨족은 4촌만 넘어도 평생 얼굴 한번 보기가 쉽지 않는 경우가 많고 존대문화 역시 존댓말 속에 남아 있긴 하지만 서서히 잊혀져가는 문화로 보여진다. 직장에서는 이미 적은 나이의 상사와 많은 나이의  직원이 많이 일반화 되어 있는데 이것은 당연히 나이보다는 능력 위주로 사람을 쓰는 기업문화가 많이 확산된 까닭이다. 물론 그렇다고 쳐도 우리나라의 연장자 우대 관습은 꽤나 오래 이땅에 남아 있을 것 같다는 생각도 든다.

 

이런 것중에 예전엔 매우 도덕적으로나 혹은 사회적으로 지탄을 받고 지적질을 당했을 행위들이 요즘엔 그냥 개인의 개성이나 혹은 선택으로 판단되어서 용납되는 경우도 비일비재하다. 예를들어 예전에 여자들의 미니스커트는 단속을 받기도 했고, 남자들의 장발 역시 그랬다. 물론 군사정권의 문제이긴 했지만 적어도 어떤 이들은 이것을 지지했을 것이 아닌가?

 

동성애 역시 그런 맥락 중 하나이다. 예전 같으면 아예 징그럽고 하면 안되는 것이지만 우리나라만 해도 이제 커밍아웃을 한 연예인이 TV를 통해 나오기도 하고 있으니 얼마나 달라진 세상이랴?

 

시대의 변화에 따라 또는 그 시대의 주류적 사상에 따라 그 잣대가 오락가락해서 누군가를 판단하고 재단하고 결론을 내는 그 과정 자체가 매우 불규칙적인 것이 바로 인간의 사회이며 또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현대의 모습이다. 위에 언급한 것들은 결국엔 속한 문화와 시대에 따라 무한히 변화될 상대적 판단기준들인 것이다.

 

따져보면 이런 종류에는 너무 많은 예가 있는데 개인적인 부분까지 들어가보면, 취미에 수천에서 수억까지의 돈을 들이는 것이나 수십억이 넘는 스포츠 카를 사는 사람이나 아주 독특히 취미생활을 하는 사람들이나 '화성이 바이러스' 에 나왔던 정말 그럴지는 모르지만 우리가 좀 비상식적으로 여기는 특성을 가진 사람들까지 모두 그런 것들의 일부가 될 것이다.

 

왜 이런 것들을 고려해야 하는지를 알아보자면, 우리는 늘 누군가를 칭찬하고, 비난하고, 심지어 욕하면서 판단하는 경향이 있는데 이런 사람과 사람사이의 판단에 깔린 기본적인 중심점이 바로 그 시대, 그 민족, 그 사회에서 가진 보편적 가치관이기 때문이다. 물론 앞서 말했듯 이것은 매 순간 변화가 이루어지지만 아무튼 그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에게는 마치 멈춰 선 듯 고정되어져 느껴진다. 특히 나이가 먹어간 후의 가치관은 거의 움직이지 않아서 좀 심하게 일그러지기도 한다.

 

기준점은 속한 시간대에 따라 달라지는데 우린 늘 나와 같이 속한 시대에 살아가는 사람을 따르고, 칭찬하고, 욕하고, 비난하면서 살아가는 것이다. 그리고 여기에서 중요하게 여겨야 할 한가지가 있는데 바로 그것이 제목에서 말한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다' 에 대한 정의이다. 우린 어떤식으로 또 무엇을 근거로 남에게 혹은 나에게 피해를 주지 않았다고 판단하는 것일까?

 

예를 들어 예전에 만화에 빠져 사는 성인을 보고 누군가 '철 없는 놈' 이라고 비난을 했다면 요즘은 이것을 '매니아' 혹은 '오타쿠' 라고 칭하면서 어느정도 인정은 해주는 것이다. 즉 그 행위가 나에게 어떤 피해는 주지 않으니 이해는 안가도 혹은 보기는 싫어도 비난하지는 않는 것이다. 일종의 정신적 관용이라고 할까?

 

하지만 여기에서도 미성년이 출연하는 일본의 야한 만화들을 좋아하는 이들에 대한 평가는 그리 좋지 않을 것이다. 설령 만화를 좋아하는 성인에 대한 비난을 하지 않는 사람들이라도 이런 사람들에 대해서는 그리 좋지 않는 평가를 할 것이다. 마치 사람이 할 짓이 있고 안할 짓이 있다는 식으로 말이다. 하지만 만화를 좋아하는 사람으로서 그 둘의 차이가 무엇일까? 그들이 만화만 좋아하고 만다면 말이다.

 

강도나 도둑놈이 나쁜 이유는 당연히 그 사람이 나쁜게 아니고 그사람의 행동으로 인해 누군가 목숨을 잃거나 재산을 강탈당했기 때문이다. 그러니 누군가 명백히 손해를 입었기에 재판을 받고 감방에 가는 것인 것이다. 하지만 이와 다르게 눈에 보이지 않는 정신적인 강탈과 손해는 어떤 식으로 판단해야 할까? 너무도 어렵지만 또 매우 중요한 항목이 남은 것이다.

 

초등학교 다니는 딸을 가진 아빠가 어느날 우연히 자신의 딸이 다니는 학교 주변에서 쌍안경을 들고 아이들의 모습을 관찰하는 변태같은 모습을 가진 사람을 봤다고 치자. 그는 그 순간 그 존재에 대해 매우 불쾌함을 느끼고 이 사람을 경찰에 신고를 했다. 하지만 경찰은 이렇게 말한다.

 

"이 사람은 구체적으로 뭔가 행동을 한 것도 아니고 아이들을 어떤 의도로 봤는지도 모르는데 그를 체포할 수는 없다. 또한 그 사람과 대화를 해 봤는데 그는 아이들을 본 것이 아니고 그 주변의 나무에 있는 새를 관찰하는 중이라고 했다. 우리는 이 사람을 어떻게 할 방법이 없다"

 

아빠는 분노하여 이를 인터넷이 올린다. 그리고 이 이야기는 삽시간에 퍼져 어느 초등학교에 있는 변태 관찰자와 무능하고 불친절한 경찰이야기로 퍼져 나간다.

 

자세한 이후 이야기는 생략한다. 내가 지금 말하고 싶은 포인트는 우리는 도대체 무엇을 기준으로 남에게 피해를 주느냐 마느냐를 알 수 있으며 또한 그것을 기준으로 타인의 행동을 비난할 수 있는 절대적 판단 기준으로 가치가 있는가? 에 대한 물음이다.

 

부동산 투기에 대한 전 국민적 시선은 그리 좋지 않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또 많은 이들이 부동산을 통해 돈을 모으길 꺼려하지 않는다. 그것을 적극적으로 하는지, 혹은 소극적으로 하는지 여부에 차이가 있을 뿐 자신이 소유한 집의 집값이 오르는 것을 싫어 할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부동산을 통해 수익을 올리려는 사람은 당연히 오를것 같이 보이는 집을 산다. 그리고 오르면 당연히 판다. 잘 생각해보라. 이사람이 이 행동을 할 때 도덕적으로 비난 받을 짓을 했는가? 이 사람이 집을 사서 팔지 않았더라도 다른 누군가가 사서 팔아 결국 올랐을 것이다. 결국 이 사람이 그 행동을 해서 집 값이 더 오른 것이 아니다. 그러니 누구나 돈을 벌기 위해 한 일이니 돈 번 것이 배 아프긴 해도 비난해서는 안된다 라고 말할 것인가? 아니면 어떤식으로든 불로소득은 사회의 부정적 영향을 끼치게 되니 아무리 돈을 벌고 싶다고 해도 해야 할 행동과 자제해야 할 행위가 있다. 그런 점에서 부동산을 투기 목적으로 사고 파는 행위는 매우 잘못된 행동이다.. 라고 말하면서 비난할 것인가? 

 

비난하는 입장에서도 나는 개인적으로 후자적 입장이지만 실제로 내 생각에 대다수의 사람들은 후자적 입장의 비난보다는 그냥 막연한 비난이나 혹은 내가 그리 되지 못해서 불만섞인 비난 정도로 그칠것 같다. 이렇듯 같은 입장의 사람이라도 그 기준점과 지적하는 포인트가 다른 것이 인간이다.

 

또 다른 예를 들어보자면, 나는 상품가치에 비해 고가로 형성된 거의 모든 생산품에 대해 거부감을 갖는다. 한끼에 수만원이 훌쩍 넘는 요리나 수백만원이 넘어가는 패션 아이템들, 가구들, 차, 집까지.

 

이 거부감에는 내 나름대로의 판단기준이 있다. 결국 어떤 상품이 말도 안되는 가격을 통해 팔리는 이유는 바로 그것을 그 말도 안되는 이유로 팔아도 사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다. 물론 명품에 대한 것을 의심하는 것은 아니다. 단지 과연 그 소비자들 중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진정 그 명품을 볼 수 있는 눈을 가졌겠는가?

 

세계적으로 매우 유명한 미술작품을 봐도 소위 일반 사람은 그 진정한 가치를 알 수 있을까? 나는 지금 피카소 작품을 봐도 그냥 아무런 느낌도 없는데 말이다.

 

세상에는 명품을 볼 수 있는 지식과 감각기관을 가진 이들이 분명히 존재한다. 더 좋은 소리를 듣고, 더 좋은 냄새를 맡을 수 있으며, 그 미세한 혀의 감각을 느낄 수 있으며, 남들은 절대 알 수 없는 촉각과, 전혀 다른 시각의 세계를 가진 이들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런 이들이 과연 얼마나 될까?

 

내가 취미로 하는 망원경 분야도 매우 고가의 제품이 있는데, 별 관측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가 뭘까? 결론은  바로 우리 인간의 눈이다. 사출동공이라고 불리는 이 기관의 지름에 따라 볼 수 있는 대상의 한계가 극명하게 나뉘는데 이것은 나이가 들수록 점점 작아져 간다. 나 역시 그 감각이 매우 무딘 편이라서 같은 하늘을 봐도 눈 감각이 훨씬 뛰어난 내 지인에 비해 너무 적은 것을 보게 된다. 이것은 정말로 절대적인 한계이기도 하다. 그런 나에게 더 좋고 더 뛰어난 장비는? 그저 무의미한 도구가 될 뿐인 것이다.

 

하지만 어떤 분야이든지 남들보다 좋아야 하는, 최고를 향한 사람들의 끊없는 탐심은 시속 300km를 낼 수도 또 내봐야 운전도 못할 이들에게 수십억대의 스포츠카를 사게 하고 평생 살면서 그 집안을 다 돌아다기도 힘들어 보이는 수백평 대 집을 지어 살기도 한다. 음식의 맛의 차이를 제대로 느끼지도 못하면서 소위 명품 음식이라고 알려진 집에서 한끼 식사에 10만원에 다다른 돈을 지불하는 사람들이 모습 역시 마찬가지다.

 

하지만 어떤 의미에서는 이들을 도대체 왜 비난 하는가? 라고 생각할 것이다. 자기가 번 돈을 가지고 자기가 쓰고 싶은데 쓰는데, 아니 강도짓을 한것도 아닌데 왜 비난하는가?

 

비슷한 예로서 명품백에 집요한 관심을 가진 대한민국 여인들의 습성에서도 비슷한 맥락이 보인다. 물론 사회적으로 아직은 이런 사람들에 대해 좀 비난섞인 여론이 많은 편이지만 역시나 자기가 모은 돈을 가지고 사는데 무슨 문제인가 말이다. 물론 어떤 이들은 선별적으로 비난하기도 한다. 자기가 산 사람은 괜찮다. 하지만 남자친구에게 사달라고 하는것은 비난받을만 한다. 그렇지만 내가 보기에 그것이 무슨 차이일까 싶다.

 

반대로 남자들 역시 이것과 비슷한 소비 패턴을 가지고 있다. 수 없이 쏟아져 나오는 소비심리를 자극하는 전자제품들, 자동차 등등.. 남자의 로망이라고 치장되어서 끝없이 시장으로 밀려 나온다. 그나마 전자제품이 나은 이유는 아마도 가격이 그래도 합리적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남자들의 전자제품이 여자들의 가방보다는 좀 더 사회적으로 덜 비난 받는 것이다.

 

내가 이들을 비난하고 싶은 단 하나의 이유는 결국 사는 사람들이 있어서 가격이 내려오지 않는 현상때문이다. 물건의 값은 늘 수요와 연동된다. 너무 단순한 경제학 원론이다. 수요와 공급의 법칙에 의한 가격결정론.

 

좋은 물건이라도 해도 수요가 없으면 가격이 내려온다. 물론 어느 정도까지만 적정하게 내려오다 멈추겠지만 말이다. 그럼 소비자는 좋은 가격에 사고 파는 사람은 적정한 이윤을 본다. 이것이 좋은 현상인 것이다. 하지만 가격이 오를 것 같다고 필요하지도 않은 아파트를 사두는 사람들, 너무 비싸지만 명품이니 내가 살만하다고 느끼고 사는 사람들, 내 혀끝에 녹아내리는 이 맛의 가치는 충분히 10만원어치를 할 수 있다고 믿는 사람들이 있으면 그 가격은 절대로 적정가격으로 내려오지를 못하는 것이다.

 

결국 나는 이들로 인해 내가 더 좋은 곳에 살 수 있는 가능성과, 다 좋은 제품을 살 수 있는 가능성과, 더 맛난 것을 먹어 볼 수 있는 기회를 뺏긴 것이다. 그래서 나에게 이들은 손해를 입혔고 그러니 나는 이들을 비난하는 것이다. 여기에서 예상을 해보자면 남에게 피해가 없다면 괜찮은 것이라고 말한 사람들은 아마도 그 정도의 피해까지 고려해서 세상을 살아가야 한다면 세상에 할 수 있는 것이 과연 무엇인가 라고 반문할 것 같다. 그렇다면 본인들이 생각했을 때 그 피해는 과연 어느정도에서 스스로 인정할지 나는 되 묻고 싶다. 과연 그것이 어떤 원칙이 있을까? 아니다.. 이건 그냥 개인적 가치관이며 그들이 물들어 있는 사회적 판단 기준일 뿐이다. 혹은 그냥 단순히 어려서부터 접한 소비환경일 수도 있다. 그냥 늘 그렇게 살아온 사람에게 명품 구입은 그냥 실생활이 되는 것이다.

 

그런데 생각보다 이런 상황이 꽤나 많다. 특히 우리나라의 쏠림 현상은 매우 심한데 유행이란 이름으로 개개인의 삶에 깊이 침투하는 것은 가계에 커다란 위험요소가 되기도 한다.

 

'노스페이스' 같은 브랜드화 된 고가의 바람막이 제품이 바로 이런 예이다. 결국 우린 양파값이 4천원인것에 대해서는 분노하면서 수십만원짜리 옷은 그냥 산다. 양파 100망을 살 돈이다. 이것을 다 먹으려면 내 경우엔 5년은 족히 걸릴 것이다.

 

타인의 노동에 대한 가치는 잘 인정해주지 않으면서 사회적으로 비춰질 나의 모습에 목메여 고가의 소비를 하는 우리나라의 대부분의 사람들. 등산을 하면 고가의 아웃도어를 입고 자전거를 타면 수백만원대 초경량을 사야 하며 또 다른 종류의 취미를 즐길 땐 그 취미보다 그 취미를 위한 장비에 목숨을 거는 문화가 팽배한 이 사회에서 내가 말한 이야기는 늘 존재하고 있다.

 

내가 좋아서 산 고가의 아웃도어는 결국 타인의 자극시킨다. 그리고 그 자극된 사람들은 나보다 비슷하거나 혹은 더 좋은 것을 사야만 만족한다. 이것은 정말로 미친짓 중 하나다.

 

그리고 다들 이렇게 말한다. 내가 좋아서 한 것인데 이것이 왜 문제나 되지? 라고. 물론 근본적으로 틀림이 하나도 없다. 하지만 정말로 남에게 아무런 피해를 주지 않았다고 어떻게 그렇게 자신하는가? 내 아들이 시험에서 1등을 했다고 자랑하는 순간 그 모임의 다른 가장의 자녀들은 학원 하나를 더 가야할 형편이 되며 또 그 중 하나는 자살을 했을지도 모른다. 그 죽음에 당신은 아무런 책임이 없는가?

 

우리 사회에서 일어나는 그 모든 것은 하나도 빼지 않고 연관되어 있다. 강력범위가 늘어나는 것은 모두의 책임이며, 청소년 자살, 일가족 자살 역시 우리의 공통 책임이다. 도대체 내가 하는 행동이 남에게 피해가 없다는 것을 어떻게 그리 확신하는가?

 

내가 아이에게 사준 고가의 예쁜 패딩 잠바는 학교를 통해 다른 아이의 집 가정의 불화를 일으킬 수 있는 것이다. 물론 신이 아니기에 예측 불가능하다. 하지만 같이 사는 사회라면.. 좀 자제하고 절제하고 조심하고 배려하고 사는 것이 그리 힘든가?

 

그리고 그 무엇보다도 좀 겸손해지는 것이 어떨까? 나는 남에게 법적인 잘못을 한적이 거의 없으니 나는 착한 사람이라고 그리고 충분히 잘 살아왔다고 착각하는 그 모습에서 벗어나 내가 의식도 못하게 저지른 수 많은 불합리한 죄들과 내가 잘못된 영향을 미친 과거의 행적에 대해 부끄러워 하면서 나는 참으로 왜 이렇게 이기적으로 살아 왔을까 하는 죄책감을 가지고 말이다.

 

처음부터 계속 말해왔던 것인데, 남에게 피해를 준다, 안준다를 결정하는 것은 너무 주관적이고 또 시대적 상황에 종속된다. 그러니 이것을 절대화 시킬 수는 없다. 그래서 우린 자신에 대해 주제파악을 해야 하는 것이다. 우리 인간은 선하지 않다. 그것은 자연의 섭리이며, 우리의 운명이다. 엄격하게 말해 선하다는 기준으로 우리를 판단하면 우린 그냥 죽어야 한다. 사는 것 자체가 다른 존재에게 피해를 주기 때문이다. 너무 판단 기준을 인간의 테두리로만 보지 말자. 우린 자연속에서 함께 살아가는 존재이고 그들의 힘에 빌붙어서 살아간다.

 

누가 그 권리를 준 것도 아닌데 우린 땅에 금을 그어 내땅, 니땅을 나누고, 태양으로 부터 무한대의 에너지를 공급받고, 식물의 광합성 결과를 무상으로 얻어내면서, 땅에서는 석유와 각종 자원을 캐고, 바다에서는 어마어마한 물고기를 잡아먹고, 경제적으로 가능성이 있다면 세상 어느 곳에 심지어 미래의 어느날엔 우주의 어느곳에든 달려갈 우리 인간의 자화상을 보자. 과연 우리가 스스로 만들어 낸 것은 단 하나라도 있는가?

 

주어진 해택에 감사하고 나와 함께 동시대에 살아가는 존재들에 대한 배려로 미안해 하면서 살아가보는 것은 어떨까? 그저 내가 누리는 그 모든 것이 내 능력껏 내것인데 내 마음대로 하는 것이 어때서 라는 심정보다 나에게 주어진 축복같은 선물이라고 느끼는 것은 불가능 한 일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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