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년 계절이 바뀔 무렵이 되면 의류계는 '신상품'으로 새롭게 디자인 된 제품을 선보인다. 그리고 1,2년쯤 지난 제품들은 재고라고 해서 세일을 해서 팔곤한다. 비슷한 현상으로 보통 남자들이 푹 빠져드는 전자제품 역시 매년 혹은 몇년마다 그 모습과 기능을 좀 더 발전시켜서 관심있는 이들의 호기심을 자극해 그들의 호주머니를 걱정케한다. 뭐 이것뿐이랴. 세상의 거의 모든 제품들은 매년 매해 그 기능의 발전을 거듭하면서 1년만 되도 구식이 되어버리는 빠름의 시대에 살고 있다보니 우린 늘 새로운 것에 노출되어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런데 정말 그렇게 나온 제품들이 진정한 의미에서 새것일까?
이 질문은 좀 더 근원적인 내용을 함축하고 있다. 말장난으로 느껴질지도 모르겠지만 이것은 어쩌면 우리가 늘 놓치고 있는 우리의 미인식 영역일수도 있다는 생각도 든다.
하다못해 내가 방금 산 어느 깊고 맑은 곳에서 퍼온 생수 한병에 담긴 이 물이 정말 진정한 의미의 새것일까?
이왕 물이 나온김에 물에 대한 새로운 것을 정의해보자. 물은 H2O로 이루어진 상온에서 액체상태를 유지하는 화합물이다. 불안정하고 폭발력 강한 수소 원자 두개와 산소 원자 하나가 결합하여 불을 끄는데 가장 흔하게 사용되는 액체가 되는 것이다. 물론 이 화합물은 열을 받으면 수증기가 되어 기체가 되고 온도가 0도 이상 낮아지면 얼음이 되어 고체가 된다. 하지만 역시 물의 고유 성질은 변함이 없다.
우리가 보통 먹는 물은 보통 얼마나 새것일까?
지구에서 물의 기원은 여러가지 설이 있다. 원래 물이 있었다는 설도 있고 외계에서 끊임없이 날라든 운석 조각에 담기 수분이 모이고 또 모여서 지금의 바다를 이루었다는 설도 있다. 아무튼 이 단순한 물만 봐도 우리 인간의 생명으로는 상상하기 힘든 시간을 존재해 온 것이다. 그 물은 단지 그 위치만을 바꾸어왔다. 하늘에서, 바다에서, 육지에서, 호수에서, 어떤 유기체의 몸속에서, 나무 속에서, 이슬에서, 지하수로 그리고 비로, 눈으로, 폭포로, 강물로, 개울물로.
결국 물은 순환될 뿐 새것은 없다 봐야 한다. 물론 지금 이순간에 어느 실험실에서 수소 원자 2개와 산소 1개를 결합시켜 물을 생성했다면 이 물 분자는 새 것일 수 있다. 하지만 역시 원자의 구성으로 이루어진 이 화합물에 투여된 총 세개의 원자는 이미 그 전에 존재했던 것이므로 역시 결론적으로 새 것이 아니다.
우주에 있는 대부분의 수소는 모두 빅뱅 초반에 그리고 초기 우주에 생성된 것들이라고 한다. 산소라면 수소보다는 꽤나 무거운 원자로 규모가 큰 별의 핵융합 반응이나 폭발에 의해 수소로부터 탄생된 원소인데 결국 이 두 원소 역시 내부로 들어가면 양성자,중성자, 전자라는 단순한 구성물로 되어 있다. 그리고 이 내부 미립자들은 또다시 세분화 되는데 너무 복잡하니 여기까지만 설명한다. 결론적으로 수소든 산소든 결국 그 내부적으로 구성하고 있는 물질 자체가 기성품이니 결국 새것이 아니다.
좀 억지같다고 말할 수 있다. 맞는 말이다. 하지만 나는 지금 좀 더 근본적인 관점에서 보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방금 산 멋진 고가의 스마트폰이나 명품백은 그 최초 포장을 뜯으면서 새것의 범주에 들어간다. 하지만 그 상품들을 이루는 수 많은 부품이나 가죽은 이미 그전에 존재했던 물질들이다. 그리고 더 들어가면 역시 그 제품들도 원자로 이루어져있을 뿐이다.
결국 따져보면 근본적인 새로운 것은 아무것도 없다. 오늘처럼 따사로운 봄날의 햇살을 전달해주는 태양빛은 시간적으로만 봐도 태양을 출발한지 이미 8분 30초가 지난 과거의 것이며, 이것도 태양으로 부터 생성되어 태양의 내부를 뚷고 표면까지 나오기 위해 이미 수백만년의 시간을 보낸 존재들이다. 그러니 내가 오늘 '따스하다' 라고 느끼게 해주는 그 광자 하나하나가 이미 내 나이에 비하면 비교도 안될 만큼 오래 존재해온 것들인 셈이다. 물론 우리가 매일 딛고 사는 지구 역시 그렇다.
우리의 눈이나 다른 신체감각은 그것을 감지하고 해석하는데까지 일정한 시간이 필요하다. 즉 우리는 늘 과거를 바라보고 있으며 그것으로 인해 늘 과거속에 살아가게 된다. 현재는 이미 내가 인식하는 순간동안 과거로 되어 버리고 미래가 성큼 현재로 다가와 있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살아가면서 이것에 대한 생각은 거의 하지 않는다. 하늘에 보이는 태양은 현재의 태양이며, 달도 2초전의 모습이란 생각을 안한다. 더 심하게 말하면 내가 보고 있는 거울속의 나 역시 이미 0.000000000000001 (대충 씀) 초 전의 나란 것을 인식하지 못하는 것이다. 빛이란 존재가 너무도 빨라 그것의 속도가 있다는 것을 아는데만 수천년이 걸렸던 우리다. 우린 과연 또 무엇을 오인식 하고 있을까?
아무튼 그렇다면 우리 인간에게서 새로운 것은 아무것도 없을까? 우리가 만든 그 모든 제품은 모두 과거의 재료를 이용했기에 근본적으로 새것이 아니기 때문에?
아니다. 있다. 예를 들어 내가 지금 하고 있는 생각은 새로운 것이다. 누군가가 만든 영화는 새로운 것이다. 재미있는 베스트셀러 책도 새로운 것이다. 즉 다시 말하면 소위 우리가 컨텐츠라고 표현하는 것들은 새롭다. 의도한 것은 아니지만 결국 물질적인 것인 새로운 것은 없고 정신적인 것만 새로운 것이 존재할 수 있다는 말이 되어 버렸다.
생각이나 영화내용이나 책 내용 역시 100% 창작은 있을 수 없으니 새로운 것은 결국 없다고 반론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전까지 존재하지 않았던 것이 만들어졌으니 새로운 것은 맞다. 또한 결국 이것이 우리의 동질성을 유지시키주기도 한다. 내가 남과 다른 이유가 우선 외모적 차이라고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그것은 반쯤 맞다. 우린 단순히 얼굴도 보지 않고 목소리도 듣지 않으면서 채팅이란 수단을 통해서 상대를 인식할 수 있다. 오직 글로서만도. 그러니 우리가 갖은 외모적 특성은 그것을 좀 더 편하게 해주는 보조적인 역할을 하게 된다. 내가 나인 이유는 나의 몸 보다는 내 정신이 더욱 중요하다는 의미이다. 그리고 그것이 세월에 따라 변해가는 나의 외모와 상관없이 사람들이 나를 나로 봐주는 정확한 이유도 된다.
인간의 몸은 거의 7년에 완전히 그 구성품을 바꾼다고 한다. 즉 세포가 7년마다 완전 새로운 것들로 채워지는 것이다. 그럼 7년전 나와 지금의 나는 물질적으로는 완전히 다른 구성을 한 존재인데 어떻게 그 연관성을 주장할 수 있을까? 답은 결국 인식이다. 나 자신을 규정하는 인식. 물론 세포가 모두 바뀌어도 모습이 모두 변화된 것은 아니지만 어린 시절의 나와 노년의 나는 도대체 닮은데가 없다. 하지만 그때도 나는 그냥 나이다. 물론 생각도 바뀌고 소화능력도 바뀌고 재산도 바뀌고 여러가지가 바뀌었겠지만 결국 과거의 어린시절의 나는 지금의 나와 100% 동일한 존재라고 해도 전혀 문제가 없다.
우린 살아가면서 섭취하는 수 많은 영양분을 재구성해 몸을 늘 새롭게 변화시킨다. 하지만 이것은 절대로 새로운 것이 아니다. 그것은 그저 재조합의 의미를 갖기만 할 뿐이다.
결국 이렇게 따져보면 우리 인간이 그 존재의 유일성을 찾거나 고유성에 대한 근거를 알고 싶을땐 결국 모두 정신적은 관점에서 밖에 따질 수 없다. 이것에 대한 영화적 관점은 일명 몸이 뒤바뀐 사람들이 이야기나 급속히 늙거나 거꾸로 젊어진 사람들이 같은 자아의식으로 가지고 살아가는 데에서 발생하는 해프닝에 대한 스토리를 가진 작품들이 있어왔다. 그리고 우린 늘 그럴때 그 변화전 상태의 사람과 변화 후 사람의 동질성을 의식한다.
하지만 문제가 하나 있다. 과연 정신은 도대체 어디에서 존재하는 영역일까 라는 질문이다. 물론 우린 인간을 정신적, 육체적 존재라고 표현한다. 육체야 너무 당연히 존재하니 있는 것이 분명하지만 도대체 정신은 어디에 있을까? 물론 생물학적으로 우리의 의식세계는 뇌에 존재한다. 뇌속에서 일어나는 엄청난 전기활동의 결과가 우리의 의식이다. 그 원리는 아직도 밝혀내지 못했지만 적어도 우리의 정신 영역이 외부에서 오는 것은 아니라는 것은 알고 있다. 그래도 지 전기적인 신호를 우리가 정신적이란 말로 표현하기는 좀 껄끄럽다. 아니 내가 껄끄럽다. 이것은 마치 컴퓨터와 비슷하다. 컴퓨터는 분명히 하드웨어이다. 하지만 컴퓨터를 통해 실행되고 보이는 것들은 마치 우리의 뇌와 비슷하다. 우린 키보드, 마우스를 통해 컴퓨터를 조작하고 컴퓨터는 그 조작된 결과를 모니터를 통해 보여준다.
인간으로 따지면 입력장치는 감각이 되고 모니터는 입을 통해 나오는 말, 표정, 행동등이 될 것이다. 그렇다면 컴퓨터에게도 정신이 있는 것인가? 아니 지금이야 멍청하기 짝이없어 보이니 그렇다고 쳐도 미래의 어느날 인공지능이 인간의 수준까지 발전한다면 그 로봇은 정신세계가 있는 것인가?
이 질문에 답을 하다가 보면 내 정신 세계에 대한 근원적인 믿음이 흔들릴 수도 있다. 그래서 문제점으로 지적을 한 것이다. 하지만 이것을 다루자면 너무 복잡해지니 이 문제는 이쯤에서 넘어가자.
내 몸은 이미 과거의 유기체를 기반으로 그것을 섭취한 보모님으로 부터 받은 것을 시작으로 태어나 자라면서 내 스스로 섭취한 영양분을 바탕으로 나를 키우고 자라고 커왔다. 그렇지만 여기에서 육체적 나는 그냥 재활용품에 지나지 않는다. 결국 내가 새로운 신품이 되려면 어쩔 수 없이 나는 나만의 정신적 새로움을 만들어 내야 한다. 이것이 만약 누군가 만들어 낸 것을 따라할 지경이 되면 나는 어쩔 수 없는 정신적 육체적 중고품이 되는 신세가 된다.
당신이 중고품입니다 라고 말하면 좋아할 사람이 있겠는가? 물론 몸을 오래썼으니 중고품 맞다. 하지만 그것은 자기가 그 자신이라는 확신이 있기 때문에 그렇게 말할 수 있는 것이고 실제로 당신은 모든 관점에서 중고품입니다. 당신은 50년 전 참나무의 일부와 30년전 개똥의 일부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라고 말할 땐 반응이 달라질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우리가 살아가는 순간들을 인지해보자. 우리가 추구하는 그 많은 가치에서 물질적인 것들을 빼고나면 어떤것들이 남을까? 물론 우린 최종적으로는 정신이 행복해야한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과정을 보면 정신의 행복을 채우기 위해 물질적 과정을 거친다. 돈을 벌어서 맛난것을 먹는다, 관광을 한다, 영화를 본다, 책을 본다, 멋진 장소에서 데이트를 한다 등등 모두 물질적 과정을 필요로 한다. 그런데 만약 이 물질적 과정을 패스하고서 바로 정신적 만족 영역으로 들어갈 방법은 없을까? 아니 그것까지는 바라지 않더라도 정신적 만족을 얻기위해 필요한 물질적 욕구에 심취해 결국 물질적 욕구단계에서 추구하는 가치점이 끝나버리고 있는 것은 아닐까 생각해본다. 말이 어려울지도 모르겠지만 목적과 수단이 전도되는 것이다.
이런 일이 많이 일어날수록 우린 불행할 수 밖에 없다. 왜냐면 결국 이것이 원래 목표이며 또한 원론적인 나 자신에 대한 미련한 망각이기 때문이다. 내가 나인 이유는 나의 정신이지 나의 육체가 아니다. 그것에 대해 잊는 순간 난 육체의 노예화가 될 뿐이다. 즉 육체가 원하는 것에 매몰되어 식욕, 성욕에 대한 끝없는 갈증에 시달리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결론을 내자고 시작한 이야기는 아니니 뭐 작은 생각의 단초라도 잡을 수 있었으면 좋겠다. 아침의 출근길에 봄 햇살을 느끼면서 산들바람에 흩날리는 벚꽃을 보니 나도 모르게 생각이 났다. 왜 난 그 좋은 시간에 이런 웃기는 문제를 생각하고 있었는지 지금 생각하면 꽤나 우숩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