혹시 '기도' 란 용어를 듣고 우리나라 기독교를 떠올렸다면 자신의 종교에 대한 기본지식에 대해 조금 의심해 볼 필요가 있다. 혹은 이 현상은 우리나라에서 기독교가 얼마나 나대어왔는지를 증명하는 증거이기도 하다.
지금부터 말하는 기도는 기독교에서만 통용되는 고유단어처럼 여겨지는 기도가 아닌, 모든 종교에서 이루어지는 일종의 신과의 소통수단이라고 여겨지는 행위, 즉 기도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자 한다.
'기도' 의 한자적 의미는 우숩게도 기도할 기, 기도할 도 이다. 그러니 이것을 딱히 한자적 의미로 해석해 원래의 뜻을 유추하는 것도 어렵다. 단, 한자의 경우엔 글자 자체를 더 분해할 수 있는 일종의 조합어이므로 더 세밀하게 분리해서 유추하면 제사상에 비는 집중된 소원 정도의 의미가 되겠다.
나는 근본적으로 신이란 존재를 믿지 않기 때문에 구체적으로 어떤 대상을 향해 기도를 하지 않는다. 하지만 전통적으로 우리 한민족의 어머님들은 보름달에 정안수를 떠놓고 자식의 입신양명을 빌었고 아이를 낳게 해달라고 삼신할멈에게도 빌었다. 새로운 새해가 되었음을 축하하는 의미나 풍요로운 수확을 거둘 수 있게 해준 그 대상이 누군지도 확실하게 모를 조상신을 향해 정성스러운 제사상을 차려 한해의 안녕과 수확에 대한 감사를 표했다.
또 부모나 조모 등등 자신의 뿌리가 되었으나 고인이 된 분들을 기리는 제사의 문화가 아직도 명확히 우리나라에 남아있기도 하다. 나 역시 올해도 제사에 참석을 해야하기 때문에 딱히 증명할 필요도 없이 이 문화를 자연스럽게 느끼고 있다. 그리고 이 모든 행위가 일종의 '기도' 가 된다.
기도란 용어를 가장 많이 쓰는 기독교에서도 기도는 매우 중요한 개인적, 단체적 의식행위로 간주된다. 그래서 이들의 예배절차를 보면 기도로 시작해서 기도로 끝나며 매일 삼시 세끼를 먹을때도 밥을 준 신에게 감사를 드리며 좀 심하게 빠진 사람들은 하루 종일 기도를 하면서 보내기도 한다. 심지어 기도를 위한 장소도 마련하는데 가본적은 없지만 뭔가 이상한 사건이 일어날 것 같은 이름을 가진 수많은 기도원이 우리나라 깊숙한 곳에 숨겨져 있다.
보통 기도는 조용히 혼자의 생각으로 신과 대화를 하려고 하는데 그치지만 거기에 더해 통성기도 라는 절차도 있는데 말그대로 기도 내용을 남들에게 이야기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에 익숙치 않은 이들이 가장 견뎌하기 힘든 상황을 연출하기도 한다. 보통 통성기도를 하면 우는 사람들이 생겨서 일종의 광신도처럼 보이기 때문에 일반인이 보기엔 매우 불쾌하기 때문이다.
그냥 곁가지로 이야기 하자면 기도를 남 앞에서 소리내어 하는것은 꽤나 현명한 행동이다. 보통 사람은 자신이 원하는 바를 대놓고 말하기 힘들다. 하지만 기도를 통한다면 자신이 원하는 바를 앞이나 혹은 옆에 앉은 사람에게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신에게 이야기하는 형식이 되므로 듣는 사람도 말하는 사람도 부담이 없다. 하지만 여기에서 매우 중요한 교환 행위가 일어난다. 즉, 내가 딱히 손해보거나 혹은 약간의 손해를 보더라도 상대에게 큰 이득을 주어 인간적인 거래가 이루어질 수 있다면 그것을 함으로서 서로 인덕을 쌓는다. 이것은 매우 교묘하면서도 효과적인 수단이다.
예를 들어 우리 회사에 필요한 무슨 물품이 있을때 나와 같은 교회에 다니는 누군가 그런 종류의 제품을 납품하여 살아가는 사람인데 요즘 사업이 힘들어서 그것에 대해 기도를 했다면 그것을 듣고 마치 기도가 이루어진 것처럼 자신의 교회에 다니는 사람의 회사로 거래처를 바꾸는 것이다. 그렇게 되었을 때 회사 구매 담당자는 그 사람에게 인덕을 쌓아 언젠가 도움을 받을 수 있게되고 납품업자는 새로운 판매처를 뚫었으니 좋다. 하지만 여기에서 손해보는 사람이 하나 생긴다. 그것은 멀쩡하게 해당 제품을 납품해왔던 사장이다. 이런 사례는 교회내에서 비일비재하게 일어난다. 그래서 사람들은 영업을 위해, 출세를 위해, 사업을 위해 교회에 나간다. 이건 명백한 사실이다.
다시 원래 이야기로 돌아와 계속 이야기를 해보자. 우리나라에서 꽤 많은 신도를 거느린 불교에서도 기도를 한다. 염불을 외우는 과정도 불경을 읽는 독경의 과정에서도 늘 기도는 이루어진다. 고대로부터 전해온 불교는 전통적으로 우리나라의 기복신앙이었다. 민초들은 부처님의 은덕을 기원하면서 작은 쌀뭉치나 보릿자루를 절이나 중에게 시주를 하면서 자신과 자신의 가족의 안녕을 기원했다.
비록 내가 경험하지 못한 것이지만 흰두교나 이슬람교 역시 이 패턴은 동일하다. 모두 각자의 절차에 따른 기도가 있으나 그 내용은 대동소이하다. 대부분의 기도는 개인과 가족의 안녕, 건강, 미래에 대한 희망, 바라는 것에 대한 성취, 죽음 후의 세계에 대한 안정적 지위, 많은 부를 성취하기 등등이다.
이 종교들 역시 그 정도가 다를 뿐 기독교와 다를바가 거의 없다. 종교가 수천년을 거쳐서 버텨오는 가장 큰 힘은 바로 돈과 관련이 되기 때문이다. 돈이 흐르면 그 사업은 절대 망하지 않는다. 그리고 천주교는 앞으로 수천년을 먹고 살 부를 축척해놨을 것이며 심심유곡의 좋은 땅을 모조리 차지한 절은 아예 입장료까지 받으면서 원래 목적인 돈벌이에 충실하고 있다. 천주교에 비해 돈이 부족한 기독교 역시 수 많은 종류의 헌금제도를 만들어 사람들로 하여금 계속 돈을 내도록 한다.
내가 예전에 한 2년간 다녔던 기독교를 기본으로 하는 회사가 하나 있었는데 그 회사는 따로 종교에 대한 시간을 가졌으며 그때마다 자신의 기도제목을 적고 내용을 써서 남들 앞에서 읽었어야 했다. 그때 내가 들었던 거의 대부분의 기도내용은 자신과 자신 가족에 대한 희망, 그리고 더해서 회사의 미래에 대한 밝은 전망을 적었던 것으로 기억난다. 나는 딱히 내가 믿는 존재도 아니여서 그때 내 차례가 되면 '북한 주민의 건강을 위해' 기도했던 기억이 난다. 그리고 그때 사람들 반응이 꽤나 흥미로웠다.
지금까지 종교와 기도에 대한 대략적인 기본적인 누구나 알고 있는 것을 살펴봤다면 이젠 좀 더 집중해서 이 기도의 본질에 대해 좀 더 알아보기로 하자.
기도를 쉽게 다시 정의하자면 나와 나의 이득범위 내에 있는 사람들의(주로 가족) 이득을 보장해 달라고 비는 행위이다. 즉 말은 기원이나 소원이라고 치장했지만 결국 보면 내 자신과 이득범위가 밀접하게 연결된 사람들만 대상으로 하여 그 범위를 매우 축소시킨 개인적 이기심의 결과이다.
물론 세계 평화를 위해 기도하는 사람들도 있다. 하지만 보통의 사람들은 그런 기도를 하지 않는다. 사람들의 기도를 유심히 들어보라. 도대체 어떤 기도를 하고 있는지. 만약 가족을 위해 한다면 자신과 잘 지내는 가족을 위해 한다. 얼마전 유산문제로 심하게 다툰 형제에 대해서는 기도하지 않는다. 물론 한다고 해도 자신이 그들을 용서함으로서 포기를 하여 마음이 편해지기를 기원하거나 혹은 그들이 회개해서 나에게 잘못했다고 빌길 기도한다.
그래서 기도의 가장 중요한 본질은 그 범위가 된다. 과연 내가 어떤 존재들을 위해 기도를 할까에 대한 부분을 말하는 것이다. 어떤이가 지구를 위해, 우주를 위해 기도를 한다면 그 사람은 매우 넓은 세상을 생각하면서 살아가는 사람이다. 또 다른이가 한반도의 평화와 국제 평화에 대해 이야기 한다면 이 사람은 인간의 범주에서 기도를 하는 사람이 되지만 실제로 이런 이들은 매우 적다. 물론 국제 봉사단을 꾸리는 대형교회들이 있긴 하지만.. 그들이 도대체 어떤 목적으로 그런 일을 하고 있을지는 좀 더 깊게 생각해 봐야 한다.
이 본질이 중요한 이유는 바로 기도 그 자체의 본성이 바로 개인 이기심의 극단적 발로라고 나는 판단하기 때문이다. 왜 기도가 극단적 이기심인지 생각해보자. 그리고 그것을 기도란 용어를 가장 많이 사용하는 기독교의 예로서 보자.
어느 작은 나라가 있고 모든 국민이 하나의 기독교를 믿는 나라가 있다가 치자. 그리고 그 나라에 매우 중요한 시험이 있었는데 개인들의 취직시험이었고 여기에 합격하면 믿나는 미래가 펼쳐진다고 가정해보자. 그렇다면 모든 수험생과 그 부모들은 그들의 자식이 이 시험에 합격하게 기도를 할 것이 뻔하다. 그런데 경쟁률이 2:1이라면 도대체 어떻게 되든 반은 떨어지게 된다. 그리고 여기에서 신이 있다고 가정하면 도대체 신은 어떻게 이 50%를 갈라낼 것인가?
이 상황은 가정상 매우 특수하기도 하지만 실제로는 매우 일반적인 상황이다. 우리 인간세상은 늘 모자란 자원에 비해 원하는 이들이 많기에 경쟁은 쉼 없이 일어난다. 실제로는 남아서 넘쳐도 더 가지려고 경쟁이 일어나고 있는 세상이다. 그런데 여기에서 내가 더 갖게 해달라고 기도하는 행위는 바로 다른 말로 남들이 갖지 못하도록 비는 행위로 연결이 된다. 내 자신이 취직을 하면 내 옆집 자식이 떨어지는 것이다. 그런데 이 둘은 같은 교회에 가서 같은 내용을 기도한다.
물론 이들의 말을 들으면 내 자식이 잘되기만 기도했지 옆집 자식이 잘못되길 기도한 건 아니라고 항변한다. 하지만 내가 의도하지 않게 사람을 죽였든 의도하게 죽였던 간에 그 사람이 죽었다는 사실은 다른 사건일까?
하지만 세상은 우숩게도 늘 기도를 권한다. 즉 날이면 날마다 더 이기적으로 살아라라고 말한다. 그렇지만 내가 아는 기독교의 부흥자였던 예수란 사람은 절대로 이런 것을 말한 것이 아니다. 그는 분명히 사랑을 말했다. 나 이외의 다른 존재 대한 무한한 사랑. 그 사람이 살아 생전 주장한 가장 강력하고 아름다운 이론이었다. 누구나 평등하고 누구나 사랑받는 삶. 물론 인간세상에서는 불가능한 목표이지만 그는 그것을 위해 설교를 했었다. 그리고 그것에 감동한 제자들이 열심히 그 분의 말씀을 적어서 신약이란 이름으로 책을 내고 기독교를 창시했다. 그로인해 유대인만 믿었던 유대신이 갑자기 지구의 신으로 변모를 하게 된다.
그런데 그때부터도 그랬고 지금도 사람들은 자신의 욕심을 소원이나 기원이란 말로 바꿔서 이루게 해달라고 신에게 요구한다. 그리고 같은 노력을 했다면 신에게 기도하여 더 이룰 가능성이 크다고 믿기에 그렇게 절실하게 기도를 한다.
물론 인간이 자신의 이득을 위해 최선을 다하는 것은 매우 당연한 현상이다. 하지만 그것은 당연히 신을 믿지 않는 존재들이 몫인 것이고 그들이 믿는 그 신을 제대로 믿는다면 지금이라도 자신의 콩팥을 떼서 남에게 나눠어 줘야 한다. 그것이 그 믿음이 강해진 사람들이 해야 할 중요한 일이다.
기도 역시 내가 하면 할수록 내가 더 이득을 얻어가기에 믿음이 깊어질 수록 해서는 안될 금지된 행위이다. 기도를 하여 정말로 다 이루어진다고 믿는다면 정말로 하면 안된다. 그렇게 되면 나는 절대적으로 이득을 보는 사람이 되어버리기 때문이다.
기도는 믿음이 약한 사람이나 해야 할 행위이다. 될지 안될지 모르지만 그냥 해보는 수준으로 되어야 한다. 그것이 종교를 가진 사람들이 갖추어야 할 가장 기본적인 덕목이 된다. 내가 경쟁의 사회에서 경쟁을 이길 기본적인 행위(공부나 연습 같은 행위) 이외에 추가적으로 남들이 하지 않는 것을 하는 것은 공정경쟁의 원칙에서 벗어나게 된다. 왜 인간의 경쟁에서 신의 힘을 끌어들이려고 하는가? 그리고 그 신은 절대로 그것을 가르친 것이 아니다. 그 신은 우리에게 남들을 사랑하고 연민하고 자비롭게 보듬어 안아주라고 가르쳤다.
나는 신을 믿지 않기에 기도를 하지 않는다. 하지만 나 역시 뭔가 절실하게 원하는 것이 생기면 스스로 이것이 정말 잘되길 원하는 내 자신에 향한 기도를 한다. 내 자신은 그냥 이기심에 꽉찬 존재니 당연하다. 이기심으로 이기심의 존재를 향해 기도하니 그 무슨 상관이랴. 그냥 이루어지면 좋은것이고 아니면 좌절할 밖에.
하지만 신을 제대로 믿는 사람들이라면 오늘이라도 바로 기도를 끊어야 한다. 그리고 만약 하더라도 나와 나의 가족이 아닌 더 큰 그림으로 기도를 해야한다. 인간 모두가 잘되라고. 하지만 인간 모두가 잘되면 자연이 피해를 보니, 지구를 위해 기도를 해야한다. 인간 수를 좀 줄여 달라고. 나중에 더 미래가 되어 우주시대가 개막되면 태양계를 위해 기도하고 또 은하계를 위해 기도를 해야 할 것이다.
그것이 진정으로 섬기는 신이 원하는 기도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