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요일 아침이다. 운이 좋은 것인지 아닌지 모르겠지만 보통 월요일 아침엔 나 혼자 사무실에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래서 나의 월요일은 다른 사람들의 월요일과는 조금 다른 느낌으로 다가온다. 나에게는 월요일이 그리 싫지 않은 시간으로 느껴진다.
토/일의 일정을 보내고 또 이렇게 새로운 한주를 시작하는 때가 되면 아침 출근길에 생각이 많아진다. 주말동안 있었던 일, 내 생각, 해야 했었던 일, 하지 못한 일, 깜빡하고 잊어버린 것들.. 이런 생각들은 또다른 생각을 불러오고 그러면서 내 머리속은 점차 생각만으로 가득차버린다. 물론 요즘 하고 있는 자기 인식에 대한 작은 훈련으로 인해 그 많은 생각이 머리속을 지나가면서도 내 스스로는 내가 지금 생각을 하고 있다는 것을 자주 까먹지는 않는다. 아주 가끔 깊게 들어간 생각때 말고는 곧잘 바로 의식 흐름을 감지한다.
며칠전 새로 산 책이 한권 있다. 물리학과 동양철학. 제목은 좀 다르지만 물리학을 전공한 과학자가 쓴 동양철학에 대한 이야기다. 물론 동양철학이라고 한마디로 표현했지만 책 내용은 인도, 중국, 일본 등에서 쓰여진 각종 경전이나 혹은 그곳에서 믿어지는 종교에 대한 철학을 다룬 내용이다. 이 책은 내가 자주가는 천문학 카페에 누군가 소개를 해줘서 지난주에 샀는데 내용이 꽤나 괜찮다. 아직 초입이라서 자세한 내용을 말하기는 그렇고 언젠가 완독하고 난 후 내 블로그에 한번 소개를 해야겠다.
갑자기 책 이야기를 한 이유는, 오늘 오면서 이 책에 나온 내용에 대해 좀 많이 생각을 했기 때문이다. 특히 인간의 명상에 대한 이야기가 인상 깊었는데 나는 그동안 명상이란 행위가 단순한 정신적 집중상태라고 여겼는데 책에 따르면 생각보다 매우 강렬한 의식흐름이라고 한다. 내가 경험하지 못해서 뭐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꽤나 새로운 생각이었다. 또한 그것으로 인해 내가 많이 답답해졌다.
이 책을 읽기 전에도 나는 내가 알고 있는 불교의 교리나 혹은 도사들이라고 칭해지던 분들이 표현한 우주와 인간에 대한 이야기와 내가 따로 대충 공부한 과학적 지식들이 어떤 면에서는 매우 유사한 것을 어렴풋이 느끼고 있었다. 그런데 이 책은 그것을 좀 더 명확히 설명하고 있다. 그런면에서 흥미롭기도 하다.
나의 몸을 구성하는 입자를 보면 일단 작은 단위로 세포가 있다. 그 세포 안에는 DNA가 있고 그 유명한 나선고리가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보다 더 작은 나노의 세계로 가면 원자의 구조가 보일 것이고 그 원자를 더 확대하면 이제 전자와 중앙에 묵직한 양성자와 중성자가 보일 것이다. 그리고 그 원자핵조차 쪼개면 그 안에 물리학에서 말하는 표준입자들이 나타날 것이라고 믿는다. 보손, 페르미온 등으로 이름 지어든 그 미립자들이 최종적으로 나타날 것이다. 물론 어떤 사람들은 그것들 역시 더 쪼개질 수 있다고 믿고 그 안에 작은 끈이 있다고 믿기도 한다. 아무튼 이건 아직까지는 이론일 뿐이다.
우리가 아는 세계는 매우 고정적이다. 내가 땅을 딛을 때마다 나는 의심하지 않는다. 내 신발이 콘트리트나 흙으로 된 바닥을 뚫고 들어가지 않는다는 것을 절대로 의심치 않는다. 하지만 미시 세계로 가면 이런 믿음은 모두 사라진다. 특히 이해하기 힘든 양자역학의 세계로 가면 우리가 아는 상식은 다 무너지고 우주를 지배하는 기본적인 원리인 확률이 나타난다. 우리는 컴퓨터가 모니터가 키보드가 모두 고정적이고 절대로 변형되지 않을 것들이라고 믿지만 실제로는 그 안을 이루는 모든 입자가 끝없이 생성되고 사라지고를 반복하고 있다. 너무 빠르고 너무 작아서 우리가 느끼지 못할 뿐.. 우주는 그렇게 우숩게 구조화 되어 있다.
바람의 흐름, 따스한 햇빛, 바다로 흘러가는 강물, 새롭게 돋아나는 봄의 새싹 들은 모두 우리가 자연이라고 칭하는 것들이면서 또한 우리이기도 하다. 우리 인간 역시 이런 자연속에서 태어나 그 안에서 살아가다가 결국 자연의 일부로 되돌아 간다. 지구라는 거대한 생태계에서 우리 존재 하나하나는 그저 일순간 스처가는 존재가 될 뿐이란 것이 진정한 과학적 사고방식의 결과이다. 그리고 이것은 바로 동양철학에서 말하는 것과 매우 유사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우리는 찰라의 삶을 사는 것이다. 우주의 영원한 시간에서 우리가 존재하는 시간은 정말로 짧은 시간이다. 그리고 내 몸을 이루는 그 모든 입자는 모두 우주을 이루는 물질과 전혀 다를바가 없다. 우리는 우리 스스로를 지구인, 이 행성 이외에서 형성된 모든 존재를 외계인이라고 부르지만.. 실제로 그들과 우리를 구성하는 입자는 전혀 다를바가 없다.
나는 결국 우주의 일부이고 내 존재는 오직 내 의식흐름에만 유일성이 있다. 내 몸을 이루는 모든 것이 재활용 되었고 그것으로 인해 나는 처음부터 물질적 유일성을 갖지 못한 존재이었다. 그렇다면 그 육체적 활동으로 부터 태어난 나의 의식흐름을 도대체 어떤 관점에서 봐야 할까?
내 의식은 정말로 무엇일까? 그리고 이 의식이 느끼는 내 존재 이유나 혹은 내가 살아가면서 소중히 여기는 그 모든 것들이 정말로 사실임을 내 스스로 어떻게 믿을 수 있나?
누군가 나에게 너의 생각이 틀렸다고 말하거나 혹은 반대로 내가 누군가의 생각이 틀렸다고 말할때 도대체 틀렸다고 말하는 그 중심에 담긴 생각은 과연 무엇일까?
내가 느끼고 내가 판단하고 내가 평가하고 내가 표현하는 그 모든 내 의식활동의 결과가 과연 정말로 내가 철석같이 믿고 의심치 않는 정말 그것일까? 나는 도대체 어떤 잘못된 정보를 가지고 이런 완전히 착각일지 모르는 삶에 대한 절대성을 부여하고 있을까?
도대체 아무것도 답을 찾을 수가 없다. 그리고 또한 내가 선험적인 분들의 글을 읽어봐도 인간의 의식에 좀 더 특별한 상황이 있을 뿐 더 이상은 없다는 것을 이해했다. 즉 높은 정신세계의 흐름에 도달한 이들 조차도 결국엔 인간이라는 그릇에서는 전혀 벗어나지 못하고 관계성에 대한 중요성을 역설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부처도, 예수도, 크리슈씨도 마찬가지다. 모든 정신세계의 스승이라고 일컬어지는 분들 역시 관계에서의 한계를 전혀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도대체 관계를 제외하면 즉 나에게서 인간인 부분을 제외하면 과연 아무것도 남는 것이 없을까?
물론 관계는 일차적으로 우리 스스로를 행복하게 해준다. 이것은 나 역시 너무도 공감하는 내용이다. 그런데 이 관계는 얼마나 진실하고 절대적인 것인가? 내가 절대적이고 진실해진다고 해서 관계 자체가 그렇게 될 수 있는가? 과연 내 스스로가 발전되어 높아진 의식세계에 도달한다고 해서 이것을 공감한다는 것이 그리 중요하고 대단한 일이 될 수 있는가?
물론 언어는 매우 한정적인 도구라는 점을 나 역시 충분히 공감한다. 아무리 훌륭한 언어도 자신의 생각을 100% 표현할 수는 없다. 우린 언어라는 추상화된 능력을 통해 타인의 생각을 약간 이해만 하는 것이 정확히 맞으니까 말이다. 그래서 결국 내가 얻어낸 지식이란 범주 역시 아주 일부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나 역시 확신을 가지고 있지 못하고 또한 미래의 희망을 버리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아직도 나는 그래서 작은 희망을 버리지 못하고 있다. 물론 오늘처럼 절망적인 날도 있지만 또 내가 전혀 알지 못하는 세계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한다. 물론 그것이 내가 경험하지도 못한 절정의 집중상태인 명상의 세계만 되더라도 나는 아마도 매우 다르게 느낄것 같고 또 거기만 가더라도 매우 행복해질것 같다는 생각도 한다.
하기야 행복하게 살면 되지 않는가? 어차피 내 삶이 이유도 없고 가치도 없다면 말이다. 그저 100년도 안되는 시간동안 내가 누릴 최고의 행복감으로 보낸다면 그저 좋지 않을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