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사회

관용과 응징에 대한 짧은 생각

아이루다 2013. 2. 17. 11:34

 

이 글이 쓰여지는 시점으로 부터 얼마 전쯤 '정글의 법칙' 이란 리얼리티를 중심으로 한 일종의 생존 쑈 프로그램이 조작 논란에 휩싸였다. TV를 안본지가 꽤 되어 이제 TV에 관한 내용은 거의 인터넷 기사를 통해서만 듣는 내게 그 프로그램이 구체적으로 어떤 진행을 가지고 있는지 자세히는 모르겠다. 단지 김병만이란 인물로 포장된 그 프로그램이 대충 어떤 내용일지만 짐작한다.

 

과거로부터 무한도전 이후 리얼리티를 내세운 다수의 프로그램들이 방송 3사의 대표적 방송 컨텐츠가 된지는 꽤 되었다. 내 기억으로도 무한도전, 1박2일, 페밀리가 떴다, 남자의 자격 등등 사라진 프로그램도 있고 지금도 넉넉하게 그 인기를 유지하고 있는 프로그램도 있다.

 

이런 류의 프로그램들의 공통적이면서도 치명적인 단점이 하나 있는데 그것이 바로 이 '조작'에 대한 논란이다. 실제로 일어날법한 일이란 가정하에 일종의 연봉 50억짜리들이 만원을 놓고 싸우는 서툴고 찌질한 싸움에서 나는 사람들이 어떤 재미를 느끼는지 잘 모르겠지만 아무튼 그것에서 실제로 그들은 그렇지 않았다는 루머가 도는 순간 해당 프로그램은 사람들의 집중포화를 맞는 비운의 주인공이 되어 버린다.

 

과거에 페밀리가 떴다 라는 프로그램이 결국 이런 이유로 폐지의 수순을 밟은 것으로 알고 있고 대표격인 무한도전이나 1박2일도 한번쯤은 그런 논란에 오르내리적이 있었던듯 하다.

 

일단 그 사실여부와 상관없이 조작논란이 이슈화되면 우리나라에 있는 다수의 잉여집단이 집단지능의 무한한 힘을 보여준다. 그것이 바로 일명 네티즌 수사대라는 실체가 없는 수사기관의 출현이다.

 

이들의 힘은 매우 대단하다. 출연진들의 과거 수년전, 혹은 수십년전의 자료를 토대로 이번 사태가 이미 예견되었음을 증명하기도 하고 과거 장면들을 캡쳐해서 조작의 실체를 구체적으로 확증하기도 한다. 또한 각종 페러디가 작성되어 다수의 커뮤니티에 재밌는 컨텐츠화 되어 사람들이 이 문제에 계속 관심을 갖도록 유도하기도 한다. 물론 빅 브라더 같은 존재가 이를 유도하는 것은 아니다. 그냥 요즘은 공식처럼 흘러간다.

 

아무튼 어떤 문제가 이슈화되면 이제 사람들의 반응은 두가지로 나뉜다. 하나는 이런 X같은 놈들이라고 욕하면서 해당 프로그램을 많이 비난하고 심하면 분노와 적개심까지 들어낸다. 그리고 그들과는 대척점에 서 있는 다른 한 부류는 그 사정을 이해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들도 또 다시 갈리는데 이런 리얼리티 프로그램 같은 경우에 만약 정말로 그들이 그들 말대로 했다가는 죽을지도 모른다는 의견을 말하면서 이해하는 스타일과 어차피 방송은 모두 조작인데 왜 조작했다고 욕을 하느냐 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TV 프로그램이 재밌으면됐지 그런 것이 무슨 문제냐고 되묻는 스타일이다.

 

나는 여기에서 사람들이 관용과 응징에 대한 생각을 읽는다.

 

그 어떤 상대든, TV 프로그램이건 간에 상관없이 상대의 문제점이 도출되었을 때 그것에 대하는 자세, 즉 이해하거나 이해하려고 하는 노력을 하는 관용의 그룹과 나를 속였으니, 나에게 피해를 주었으니, 나와 관계는 없지만 공공성에 나쁜 영향을 미쳤으니 용서할 수 없다 라고 말하는 응징의 그룹이 있다.

 

그런에 우린 늘 관용적이고 늘 응징적일까? 당연히 아니다. 우린 사안에 따라, 나와의 관계에 따라, 나에게 미치는 영향에 따라 매우 다양하게 그 입장을 고수하게 된다.

 

만약 정글의 법칙이란 동일한 사건에 대해 당신이 매우 비난적인 입장이라고 하자. 그런데 당신의 아버지는 그 프로그램 제작에 참여한 스텝 중 하나이고 그로 인해 당신의 아버지는 수입이 생겨서 당신의 가족이 먹고 살고 있다고 치자. 당신의 조작의 사실을 알고 아버지가 그런 프로그램에 참여한 사실을 매우 수치스럽게 여기다가 어느날 아버지와 술한잔을 하면서 그 스텝들의 애환에 대해 듣게 되었다고 치자.

 

누군가는 뱀에 물리고, 누군가는 그 험난한 곳에서 촬영을 하기 위해 목숨을 걸고, 거기에 나오는 연기자 중 하나는 정말 인간성이 좋고, 그 사례에 대해 듣고.

 

아마도 당신이 보통 사람이라면 이쯤해서 분노가 많이 줄어들었음을 느낄 것이다. 왜냐면 그들의 입장에서 들어봤기 때문에 그들을 조금 이해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사람들은 잘 못느끼지만 이것은 실제로 매우 중요한 사건이다.

 

이런 일이 있은 후 당신은 이제 해당 프로그램에 대해 비판적이긴 하지만 그래도 비판만은 하지 않는 애정이 듬뿍 담긴 사람이 되어 어디선가는 그들을 비판하고 대안을 쓰기도 하고 어디선가는 너무도 되먹지 않는 태도로 프로그램을 마구 비난하는 어떤 익명의 사람들과 치열한 논리싸움을 하게 될지도 모른다.

 

어쩌면 이런 과정을 통해 당신은 응징의 그룹에서 나와 관용의 그룹으로 옮겨간 것이다. 그것을 가른 단 하나의 사건은 바로 아버지로 부터 그들의 입장에 대해 들었던 것이다.

 

상대의 결과만 보지 않고 상대의 결과가 나오기까지 과정을 이해하는 것은 관용에게 있어서 매우 중요한 과정이 된다. 실제로 어린 시절 그 자신이 매우 고생했던 사람이 가난한 이들을 이해하는 수준이 매우 깊다. 그래서 우린 사람의 과거를 어떤 의미에서 중요한 요소로 보는 것이다.

 

최근에 한 유명한 작품 '레미제라블' 역시 관용과 응징을 배경으로 한 매우 뛰어난 작품 중 하나이다. 배가고파 빵을 훔친죄로 감옥에 간 장발장은 그 후 성당에서 촛대를 훔치고 난 후 잡혀서 신부에게 관용을 배우게 되는 장면이 있다. 그리고 이 영화는 마지막 자벨의 자살을 통해 관용의 실체를 보여준다.

 

누군가를 이해한다는 것, 힘든 일이다. 우리가 어떤 사람들을 비난할 때 그들의 입장을 다 들어볼 수는 없다. 우리는 보통은 그들을 침 핥기 식으로 취재해 온 기자들의 일명 '팩트' 라고 불리는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을 본다. 그리고 아주 가끔 심층취재라는 이름으로 그 사건들의 과정에 대한 이야기를 보기도 한다.

 

사람들은 보통 누가 누구를 죽였다고 하면 살인범은 나쁜놈, 죽은 사람은 불쌍한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어쩌면 그 많은 사건들 중 단순히 그렇게만 분류할 수 없는 죽음이 꽤 많을것이란 생각도 든다. 또한 그 사정을 알고서도 비난하는 사람들 중에 실제로 자신이 그 입장이 되었다고 해서 다른 행동을 할지도 의문이 든다.

 

치매에 걸린 병든 어머니를 살해한 패륜이라고 불리는 어떤 사건에서 범죄자 역할을 한 자식이 과연 단순하게 부모를 죽였으니 넌 살아서는 안될 존재라고 단정한다는 것이 얼마나 우수운가라고 나는 묻는 것이다.

 

실제로 우린 관용을 베풀어선 안될 곳엔 매우 쉽게 관용을 베푼다. 그것이 바로 자신의 이득과 얼마나 많이 관련되었냐 하는 관점에서 해당 사건을 판단하는 것이다.

 

이제 그 임기가 다 되어가는 현 이명박 대통령에 대한 전 국민적 관용은 정말 대단했다. 경제를 살려야 한다는 것이나, 내 집값이 떨어져서는 안되며 또 내 집값이 올라야 한다는 그 대단한 이기주의를 통해 이 대통령이 가진 그 수 많은 범죄적 과거를 모두 용서하고 그를 한나라의 대통령으로 만들어준 것이다. 이 얼마나 뜨거운 관용의 현장인가?

 

우린 길을 지나다가, 식당에서 밥을 먹다가, 어딘가를 차를 몰고 가다가 끝없이 타인들과 관계를 맺는다. 그것이 비록 아주 짧은 시간이거나 혹은 1시간 이상되는 시간이 될지 모르지만 아주 작은 피해만 자신에게 입혀도 그것을 참지 못하고 화를 내는 응징을 하거나 혹은 남에게 피해를 주는 것에 대해 자신이나 자신의 일행에 대해서 매우 뛰어난 관용을 보여준다.

 

하지만 실제로는 그것이 반대가 되어야 한다. 식당에서 떠드는 아이들은 그 아이들의 부모에 의해 혼나야 하는 응징이 있어야 하고 식당안의 다른 사람들은 아이들이 떠드는 것을 아이이기 때문에 이해해주는 관용이 있어야 함에도 우리 사회은 반대로 아이들의 부모들은 아이의 기를 죽이지 않는다는 아주 과도한 관용의 정신으로 아이들을 바라보고 그 주변인들은 그 아이의 떠드는 소리에 응징을 하는 모습을 보인다.

 

결국 우린 관용을 베풀곳엔 응징을 응징을 해야할 곳엔 관용을 하고 있는 셈이 되는 것이다.

 

이것은 어떤 문제를 야기할까?

 

나와 타인인의 경계지점에서 자신에겐 관용을 타인에게 응징을 베푸는 사람들로 구성된 사회.

 

인간은 필연적으로 사회속에서 살아간다. 그리고 그 안에서 우린 다른 존재들과 끝없이 관계를 맺는 일상을 하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여기에서 나와 혹은 나의 가족에겐 관용적이고 그 외의 사람들에겐 응징을 하게 되면 우린 결국 끝없이 싸우는 결과가 초래되는 것이다.

 

내 아이가 떠드는데 내 아이가 떠든다고 내 아이에게 큰 소리 치는 사람과 싸우고, 내가 지지하는 정치인의적절치 못한 처신에 대해 관용적으로 대하지만 그것을 비난하는 다른 당에 속한 정치인을 지지하거나 혹은 그 입장도 아니고 그냥 잘못한 것을 잘못했다고 말하는 이들의 비난에 대해 싸우고, 내가 보는 TV 프로그램이 조작논란에 휩싸여도 내가 재밌게 보니 왜 비난하여 그 프로그램을 없애려 하는지에 대해 싸운다. 혹은 반대로 그 프로그램은 없어저야 한다고 생각하면서 무조건 비난한다.

 

최근에 정부에서 일한 총리나 혹은 헌법재판소 소장을 뽑는 자리에 후보로 올라온 이들이 두명이나 낙마하는 사건이 있었다. 그들을 거의 공통적으로 가진 '위장전입', '부동산 투기', 좀 심하게는 '공금횡령' 과 같은 부적절한 문제를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웃기게도 이들이 실제로 포기한 것은 그 자신의 의지나 혹은 그들을 추천한 이들의 의지가 아닌 국민 여론에 떠밀려서 결정된 것이다.

 

법을 집행하고 나라를 위히 정치를 할 사람들이 가진 아주 최소하한 도덕심마져 없고 심지어는 공금횡령까지도 뻔뻔하게 한 그들을 우리나라 국민 중 꽤 많은 사람들이 관용의 정신으로 바라봐 주는 것이다. 그리고 이들에게 과연 공정하고 투명한 정무를 기대할 수 있을까?

 

우린 도대체 왜 이런 스스로를 망쳐먹는 관용과 응징의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을까?

 

각 나라의 사회가 가진 이 관용과 응징의 경계지점은 그 사회의 건강함을 결정하는 요소가 됨은 따로 말하지 않아도 매우 중요한 것임을 우린 알고 있다. 잘못한 것에 대해 얼만큼의 강도로 그것을 강력하게 응징하느냐 혹은 명확히 잘못을 했더라도 그것을 관용의 정신으로 감싸고 비록 완전한 용서는 아니지만 그를 위해 최대한의 배려를 해줄 수 있는 사회는 과연 우리에겐 사치인가?

 

앞으로도 우린 계속 관용과 응징의 사이에서 관용적이기도 응징적이기도 혹은 아예 무관심한 태도로 우리 주변이나 나라 전체를 뒤흔드는 사건들을 접하게 될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가 얼마나 합리적인 태도로 그것을 바라보느냐가 우리의 미래를 결정하리라고 본다. 그리고 그것은 내가 갖지 못한 지금의 자라나고 있는 다음 세대에게 물려줄 사회가 될 것이다.

 

희망이 별로 없음은 잘 알고 있지만 그래도 작은 기대는 하고 살아가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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