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리학

사람들의 말에 화가 나는 이유

아이루다 2013. 2. 9. 11:02

 

우선, 글을 쓰기 앞서 제목은 사람들의 말이라고 범위를 매우 넓게 잡았지만 실제로 내가 대상으로 하는 말은 보통 사람들이 하는 말이 아니고 어떤 주제나 사건에 대해 개개인이 펼치는 각종 논리들로 축소를 하고 시작한다. 현실적으로 사람들의 말에 짜증나는 이유는 그 내용에 상관없이 욕이나 기분나쁜 몸동작등에 의해서도 충분히 화가 나는 경우가 다분하기 때문에 거기까지 확장하면 이 글에서 다루어야 할 내용이 너무 많아 내가 쓰고자 하는 의도를 벗어날 것 같다.

 

글을 시작해보자.

 

가끔 인터넷 상에서 글을 읽다보면 특정 사건에 대해 당파적 해석이나 혹은 종교적 입장에서 매우 진지하게 혹은 확고하게 의견을 쓰는 사람들이 있다. 그런데 그 의견의 방향이 틀렸다고 느끼거나 궤변이라는 생각이 들 때 답답함과 함께 짜증 혹은 화가 난다. 거기에 더해 심각한 비약과 비아냥과 욕설 혹은 상대를 심하게 매도하는 듯한 글을 접할 땐 정말 심한 분노가 생기기도 한다. 이런 감정적 변화는 왜 그럴까?

 

예를 들어보자. 정치쪽에서 보면 최근 국정원녀 사건이라고 통칭되는 국가기관 선거 개입 사건이 있었다. 말 그대로 국정원 소속 여직원 하나가 개인 오피스텔에서 인터넷 커뮤니티 사이트에 주기적으로 들어가 새누리당의 입장에 매우 동조하는 의견을 쓰고 또 각종 현안에 대해 찬반 표시를 한 사건이다. 물론 스스로 국정원 소속 임을 밝히지도 않았고  쓴 글을 읽어보니 매우 일반인들처럼 포장해서 썼다.

 

이것을 국정원에서는 공식적으로 대북 심리전이라고 표현했다. 그리고 이 사건에 대해 사람들은 두가지 입장으로 나뉜다. 첫번째는 국가기관의 명백한 선거개입이란 입장이 있고 다른 하나는 그녀가 한 행동은 국정원 소속 직원으로서 충분히 할 만한 대북 심리전이라고 편들기 해주는 입장이다. 그리고 거기엔 대한민국에 얼마나 많은 간첩들이 상주하고 있으며 또한 북한의 각종 현안 문제에 대해 보조적으로 덧붙인다. 여기에 논리가 확대되면 일명 빨갱이론이란 그들의 단골메뉴가 등장한다.

 

또 다른 예를 보자. 얼마전 교과서에서 '시조새' 에 대한 내용을 빼기로 했다는 기사가 났다. 시조새는 새의 조상이 공룡으로부터 왔다는 것을 밝혀주는 일종의 징검다리 과정인데 이것은 과학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화석중 하나다. 대한민국에서는 창조론과 진화론을 마치 동등한 이론처럼 대접하는 경향이 있어서 진화론이 부정되면 창조론이 맞다라는 식의 논쟁이 진행되기도 하기 때문에 (물론 이것이 빠진 어떤 다른 이유가 있을지 모르지만) 마치 이것은 진화론에 문제가 있고 그래서 창조론이 맞을 수 있다 라고 말하는 것과 유사하다.

 

이 기사에도 역시 기존 진화론을 인정하는 사람들과 진화론의 허구성을 주장하는 사람들로 나뉘에 논리를 전개하는데 결국 창조론 자체는 증명될수도 없기에 진화론의 문제점에 대해서만 서로 싸우게 된다. 이때도 말도 안되는 논리를 해대는 사람들을 보면 짜증과 화가 밀려온다.

 

이런 논쟁들의 대상에 대해 진위여부는 일단 접어두자. 여기에 대해 어느 누가 맞다는 내용을 쓰기 시작하면 아마도 수백페이지를 써도 모자랄 것이다. 내가 궁금한것은 나와 다른 의견을 가진 이들의 맹목적인 주장을 보면(반대 입장에서 보면 내가 맹목적으로 주장하는 것으로 보일 것이다) '왜 화가 나는가' 이다.

 

솔직히 말해서 국정원녀가 어디에서 무엇을 하든, 시조새가 빠지든 말든 혹은 진화론이 맞든지 틀리든지 정말로 창조론이 맞을지 아니면 아직도 밝히지 못한 제삼의 이론이 미래에 나타날지 내가 살아가는 것 하고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현 정권의 수장이 사대강이란 토목공사를 시작해서 우리나라 강을 다 뒤집어 놓든 말든 나하고 그것이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물론 내가 낸 세금이 그런 쓸데없는 곳에 쓰였다는 것 자체는 좀 마음에 안들지만 실제로 그것이 거기에 쓰이지 않았다고 해서 나한테 이득될 다른 곳에서 쓰일 가능성도 매우 낮은 것도 사실이다.

 

그렇다면 대부분 그런 현안이나 사건들이 나의 생활과 크게 연관이 없어서 나에게 유불리함 그 자체와 아무런 관계가 없는데도 불구하고 나는 왜 그런 논쟁을 볼때 특정 집단을 대변하는 사람들의 의견속을 보면서 답답하고 화가 나는지가 의문이다. 도대체 왜?

 

사람들의 어리석은 믿음에 대해 답답함을 느끼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감정의 반응인가? 물론 내가 하려는 일을 반대하는 사람들이 주장하는 터무니없는 근거에 대해 화가 나는건 당연한 것이다. 그것으로 인해 내가 하려고 하는 일이 제대로 추진 안될 수도 있고 또한 되더라도 망가질 수 있는 여지가 충분히 다분하기 때문에 그렇다.

 

하지만 누군가가 이명박 대통령이 기독교의 장로라는 이유로 아직도 그분이 하시는 일이 믿을만 하고 미래엔 반드시 재평가 될 것이라고 믿는 모습을 보면서 답답함을 느끼는 것은 과연 무엇때문일까? 그리고 아직도 대구/경북 지역에 깔린 박정희에 대한 무한한 존경심과 선거때마다 나타나는 맹목적인 추종을 보면서 답답함을 넘어선 분노까지 일어나는 이유가 나는 정말 궁금하다. 반대로 내가 가진 노무현 대통령에 대한 평가나 호남지역의 몰표성향을(이것은 실제로 호남이 영남보다 더 심하다)  보면서 나의 반대 입장을 가진 사람들 역시 나에게 답답함과 분노를 느낄것이 분명하긴 하다. 그들 역시 왜 분노를 느끼는가?

 

정말 희미한 이유를 하나 찾아내자면 훌륭한 리더를 뽑는 대통령 선거와 같은 행위는 국가의 미래를 결정하는 매우 중요한 행동인데 실제로 그 리더를 잘못뽑았을 경우 그 나라의 미래가 매우 암담해질 수 있음이 있다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것은 절대로 단 몇년 사이에 들어나지 않는다는 것도 실제적인 현실이다.

 

대한민국 초창기 대통령을 지낸 이승만의 문제는 그 후 오랜시간 동안 이 사회속에 머물면서 끝없는 불행함을 야기시켜왔고 박정희 역시 마찬가지 맥락으로 우리 사회를 좀먹고 있는 것은 현실이다. 아마도 우리나라의 초반이 남북으로 갈리지 않고 좀 제대로 된 대통령이 우리의 시작을 잘 장식했다면 우린 정말 매우 괜찮은 나라가 되어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런건 모두 가정일 뿐이다.

 

지금 현실을 그대로 인정한 상태에서 이번 대선처럼 문재인,박근혜 두 후보의 경합에서 솔직히 누가 대통령이 되든지 나하곤 큰 상관이 없다. 아마도 그나마 나에게 영향을 미칠 부분이라면 직업을 포함한 경제적인 부분인데 40대 중반을 향해 가고 있는 내가 앞으로 직업을 가지고 일을 할 시간이 과연 얼마나 있을까? 기껏해야 10년이라고 치고 지금 행정수반의 정책이 미래에 영향을 미치려면 아마도 20년은 걸릴 것 같으니 실제로 나하곤 거의 관련없는 것이다. 이번 대선에 쟁점이 되었던 의료복지, 노인복지 등이 지난 10년간 병원간 회수가 열번도 되지 않는 나에게 무슨 관련이 있겠는가 말이다.

 

실제로 앞으로 남은 나의 삶과 대한민국의 중대한 결정들이 연관될 가능성은 매무 미비하다. 하지만 웃기게도 선거를 보면 나이가 많은 층의 투표율이 높은것이 아이러니 하다. 실제로 모두들 내가 느끼는 이 원인을 알 수 없는 걱정이나 분노가 자리잡고 있는 듯 보인다.

 

아마도 50대 이상의 국민들 중 꽤 많은 사람들이 바로 부동산에 대한 관심때문에 박근혜를 지지했을지 모른다. 이명박 정부들어서 급격히 꺼지기 시작한 부동산 거품은 이제 바햐흐로 앞으로 향후 약 20년 이상 꼬라박힐 것이 분명한데도 그들은 혹시나 하는 마음에 여당의 손을 들어줬다. 이 현상은 과거 5년 전 이명박 정부가 들어설 무렵에 나타났던 뉴타운 정책과 매우 비슷한 경향을 보여준다. 하지만 그로부터 5년 후 뉴타운은 도대체 어디로 가고 있단 말인가? 뉴스는 온통 뉴타운 출구전략에 대한 이야기 뿐이다.

 

어쩌면 나는 사람들의 어리석음에 답답함을 느끼고 그것으로 인한 부수적이면서 간접적인 피해에 대해 분노를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간접적인 피해는 그것을 느끼기 매우 힘들다. 세상은 만약이라고 가정할 수 없기 때문에 그런데 만약 내가 앞서 말한 제대로 된 대한민국에 살다가 갑자기 현재로 이동했다면 정말 분노하겠지만 그럴 방법이 없기에 나는 이것이 전부라고 밖에 생각할 수 없다.

 

또하나의 이유를 찾자면 이런 어리석은 사람들의 어리석은 선택과 논리가 특정 계층에게 많은 이득을 몰아주는 결과를 낳기 때문일 것이다.

 

예를 들어서 이명박 정부가 취했던 종합 부동산세 감면은 실제로 상위 5%에게 많은 이득을 주었고 하위 95%에게는 거의 관련 자체가 없었다. 우리나라에서 누가 6억 이상, 9억 이상의 집을 소유하고 있단 말인가. 그것이 보통 그 정권을 지지하는 많은 사람들의 입장은 아닐텐데 말이다. 환률조작에 의한 대기업 수출정책 지원 역시 그와 같은 맥락이다. 이득은 기업이 그리고 그것을 소유한 기업가족이 다가져가고 손해는 물가상승에 허덕이는 다수의 국민들이 본다.  또 다른 예를 들면 순복음 교회 같은 집단이 벌어들이는 천문학적인 헌금액과 그것이 조용기 목사 가족에 의해 어찌 사용되고 있고 또 그런 무리들이 모여서 집단을 구성하고 대한민국의 정치에 사회에 관여하려는 모습을 보면서 느끼는 분노도 있다.

 

어리석은 다수의 사람들의 선택에 의해 소수의 탐욕적인 인간들은 다수의 사람들이 상상도 못할 이득을 챙겨서 결국 경제적인 빈부격차가 매우 심해지고 그로 인해 돈 지상주의에 찌든 다수의 사람들은 자신의 삶을 훨씬 더 행복하게 할 수 있는 기회를 스스로 박차고 있는 형편으로 보면 된다.

 

그래서 나는 그런 모습에 화가 나는 것일까? 다수의 사람들이 더 행복할 수 있는데 못해서? 내가 그렇게 타인들의 행복에 관심이 많은 존재인가? 아무리 생각해도 아닌것 같은데.

 

물론 방금 언급한 이 이유는 어느정도 나와 관련이 있는 듯 보인다. 실제로 환률상승에 의해 기름값이 무척 올랐고 각종 생필품 가격 역시 엄청 상승했다. 거기에 내가 취미로 하는 천문장비들은 모두 외국에서 들여오기에 원화 가치가 떨어지면 가격이 많이 상승하는 구조이기에 결국 나는 손해를 볼 수 밖에 없다.

 

하지만 그것이 내가 느끼는 분노의 전체라고 말하기엔 의문이 있다. 나는 아직도 내가 느끼는 이 분노의 직접적인 원인이 뭔지 정확히 모르겠다. 근데 조금 의심쩍은 것은 하나 있다.

 

그것은 오래된 관행이나 관습 혹은 습관이란 것이다. 어려서 부터 옳다는 것에 대한 교육을 받고 살아 자라오면서 '정의' , '공공성' , '애국심' , '민족주의' 와 같은 주제들에 대한 끝없는 영향을 받아와서 마치 '독도는 일본땅' 이라고 우기는 일본 정치인들의 모습을 보면서 느끼는 분노와 같은 형국이다. 잘 생각해보면 독도가 일본땅이든 우리땅이든 실제로 무슨 상관이랴. 어떤 이들은 독도의 경제적 가치에 대해 주장하는데 그 경제적 가치가 있다고 해서 나에게 어떤 이득이 있단 말인가?

 

그냥 어려서부터 그것은 내꺼니까 남들이 건들면 안된다는 심리가 작용하는 것 같기도 하다. 마치 지금도 내가 10년간 입지 않거나 쓰지 않는 옷이나 기계가 있는데 앞으로도 사용할 가능성이 거의 없다고 봤을 때 누군가 그것을 달라고 하면 아까운 경우가 있다. 물론 버리지 못해 쳐박아둔것은 그냥 주면 맘이 편하겠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라면 혹시나 미래에 내가 이것을 쓸 수 있을지 모른다는 정말 희미한 가능성에 마음을 두고 그것을 주는 행위를 망설이는 것처럼 말이다.

 

이것이 정말 진정한 나의 분노의 원천이라면 나는 정말 어리석은 분노에 사로잡혀 있는 것이다. 물론 이 분노에는 제법 그럴법한 사상적 근거가 이미 충분히 나와있다. 그것은 나와 같은 분노를 느낀 사람들이 매우 자세하고 현실적으로 그리고 사실에 근거해서 열거해 놓은 훌륭한 논리들이다.

 

그래서 내가 느끼는 분노 그 자체는 충분히 근거가 있다. 하지만 근거가 있다고 해서 그것이 과연 옳은 것인가? 내가 별로 좋아하지 않는 기독교도 성경이라는 얼마나 강력한 근거가 있는가?

 

절대 옮음 그 자체가 없는 세상이기에 그 어떤 논리를 펼쳐도 100% 동의하지 않는 세상이다. 심지어 단 한사람하고도 완전히 100% 일치시키는 것 조차 불가능한 세상이다. 세상 모든 사람들은 각자의 정의가 있고 각자의 정의를 옳다고 믿는 근거가 있다. 그것은 너무도 다양해서 우린 오직 몇가지 항목으로 정해서 시험할 뿐이다.

 

어쩌면 내가 좀 더 의지적으로 나의 정신세계를 끌어올리면 내 예상으로 나는 세상의 정의에 대해 지금보다 훨씬 덜 관심을 기울일것이라는 상상도 해본다. 물론 그 경지에 단 한발자국도 못 딛고 있기 때문에 지금 상태에서 뭔가를 예상하는 것은 우숩긴 하지만.

 

난 여기서 혼란스러움을 느낀다. 과연 그래서 온전히 나에게 집중하고 나의 삶을 잘 살아갈수록 노력하는 과정이 과연 서툴고 쓸데없는 일에 관심을 갖고 분노하면서 살아가고 있는 현재보다 더 나은 것일까? 남들과 같이 사는 삶에 대해 무관심해지고 오직 나 자신과 아주 소수의 사람들에게만 깊은 관심을 가지고 살아갈 내 미래가 과연 옳은 방향일까.

 

부처가 말한 깨달음은 바로 희노애락의 존재인 인간의 감정을 벗어나는 길이다. 이렇게 되면 슬픔도 노여움도 없다. 하지만 그것으로 인해 기쁨도 즐거움도 없다. 아무런 감정이 없는 인간이라면 결국 우리가 만드는 로봇과 뭐가 다른가? 물론 해탈이란 결과가 희노애락 중 오직 하나의 좋은 감정인 기쁨과 행복만 존재하는 상태라면 이야기는 다를지 모른다. 하지만 예전에도 몇번 말했듯 5일간의 직장생활이 없다면 어찌 주말의 행복함을 알 수 있겠는가?

 

어찌되었건 아직은 아무것도 경험해보지 못했으니 일단 가는데까지는 가봐야 하는게 옿다고 생각한다.

 

나는 이제 사람들의 말에 최대한 화를 내지 않으려고 한다. 그냥 그려러니 하는 것이 실제로 맞는 것 같다. 물론 내가 아는 이들은 이런 나의 태도를 보고 또 화를 낼지 모르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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