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리학

세상을 지배하는 원리, 두려움과 행복

아이루다 2013. 2. 11. 09:52

 

일반적으로 사람에게 동기를 부여하는 그 근원적 감정에 대해 잠시만 생각해보자. 우리는 보통 인간은 행복을 위해 살아간다고 여기는 경향이 있지만 그 생각을 좀 더 집중해서 생각해보면 우리를 움직이는 힘이 단순한 행복에 관한 욕구만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아니 실제로 행복이 맞긴 하지만 그 행복을 주는 조건 자체가 매우 우울하다는 것을 자각할 가능성이 있는 것이다.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어하는지 좀 헷갈리 수 있는 말이지만 쉽게 예를 들어보자. 우리는 주사 맞는 것을 대부분 매우 싫어한다. 하지만 예방주사는 우리가 미래에 걸릴 수 있는 어떤 질병에 대비해 주사의 공포를 무릅쓰고서 팔뚝이든 엉덩이든 주사를 맞곤 한다. 그 당시는 좀 아플 수 있지만 그로 인해 우린 미래에 닥칠 두려운 상황 하나를 해결했다.

 

여기에서 우리를 움직이게 하는 힘은(주사를 맞게 하는 힘) 과연 행복일까 두려움일까?

 

일단 주사를 맞고 나면 뭔가 해야할 일을 했다는 생각에 잠시 안도감을 느낄 것이고 이후로는 그 질병에 대해 걱정없이 살아갈 행복감을 얻게 된다. 즉 우리는 두려움을 짧은 아픔과 불쾌한 감정을 통해 해결한 후 행복을 얻게 된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서 한가지 문제가 생긴다. 이 병이 걸릴 확률이 바로 그것이다. 만약 병에 걸릴 확률이 10%정도라면 이 정도 불쾌한 주사맞기는 충분히 감당할만 하다. 그렇다면 1/10,000,000 이라면? 즉 천만명에 한명의 확률이라면? 감당할 만 한가?

 

아마도 이정도 확률이라면 우리는 이 병의 존재도 모르고 예방주사조차 개발되지 않았을 가능성이 크다. 왜냐면 너무 가능성이 낮아서 개개인이 걸린다고 해도 정말 드물기 때문에 누구도 이것을 위해 예방주사를 맞는 불쾌함과 돈을 지불하지 것이기에 이런 예방학을 연구하는 박사들도 이 병을 무시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오늘 이 글은 두려움을 이용한 인간을 몰아대는 존재의 숨겨진 의도에 의해 갈대처럼 흔들리는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 즉 개의 짖는 소리에 몰려 다니는 양떼와 같은 사람들의 쏠림 현상에 대해 그리고 그것을 수행하는 주체들에 대해 이야기 해보려고 한다.

 

 

 

보험이란 사업을 누구나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아마도 인간의 아주 오래된 자본주의적 사업 중 하나이다. 보험은 말 그대로 미래의 어떤 사고를 대비해 오늘 내가 작은 돈을 투자해 놓는 것이다. 이것은 바로 전체적으로는 사고율이 적다는 통계를 바탕으로 하여 대부분의 사람들은 돈을 버리고 소수는 사고가 나서 돈을 받는 것을 의미하며 이 중간에 이를 처리해주는 이들이 수수료를 떼가는 사업이 바로 보험업이다.


보험의 근본은 무엇일까? 그렇다 그것은 바로 두려움이다. 미래에 나에게 닥칠 어떤 것에 대한 두려움. 그렇다면 사람들로 하여금 보험에 많이 가입하게 만들려면 어떻게 해야할까? 당연히 우리들의 미래에 닥칠 수 많은 두려움의 종류에 대한 정보를 끊임없이 미디어에 노출시키는 것이다. 그것도 가능하면 전문 지식인의 입을 통해서나 국가나 혹은 신뢰할 만한 통계정보를 생산하는 곳을 통해서.

 

그래도 보험은 사람의 두려움을 그나마 신사적으로 이용하는 분야이다. 사람들의 두려움을 본격적으로 이용하는 분야는 바로 우리 바로 옆에 있다.

 

원래 정치는 바르게 다스리는 것이다. 하지만 실제로 정치는 사람들을 지배하는 것이며 이것의 근간에는 바로 사람들의 두려움이 존재하고 있다. 두려움은 사람들을 줄서게 만들고 단일화 된 의견을 창출하게 만든다. 물론 모든 나라가 그런 정치를 하는 것은 아니다. 정치 후진국들이 주로 쓰는 방법이다.


50년대 미국,소련의 심각한 대립시기에 미국은 공산주의에 대한 공포심으로 미국민을 통치했고 그 후 소련이 망한 후 완전 단일 강대국으로 발돋움한 미국은 이제 중동지방의 석유국들을 겨냥하여 공포심을 자극했다. 그것을 제대로 이용한 대통령이 현 미국 대통령인 오바마가 들어서기 전 미국의 대통령이었던 부시였다.


9.11테러는 아마도 미국 역사상 몇 순위안에 들어갈 사건으로 기억될 것으로 보인다. 그만큼 그 사건이 미치는 영향은 컸고 그로 인해 많은 미국민은 자신의 사생활 정보를 아낌없이 포기하기 이르렀다. 공포심이 그들의 오래된 개인에 대한 보호벽을 깨어버린 것이다. 그들은 스스로 자신을 오픈시켜버렸다.


우리나라의 경우는 어떤가? 우리는 더 심하다. 우린 해방 후 지금껏 북한이라는 실제적 공포가 있었고 이것을 정치 위정자들이 너무도 현란하게 이용해왔다. 지금도 북한에 대한 두려움은(그들은 그것을 적개심으로 표현하는데 내가 보기엔 시끄럽게 짖는 개와 비슷해 보인다. 두려워서 적개심을 보인다) 대한민국 국민을 바보로 만들면서 현 기득권의 유지를 자발적으로 돕고 있다. 두려움이 최악으로 이용되는 현장이다.


그렇다면 정치분야만 그럴까? 아니다. 아주 오래된 사업영역이 하나 있다. 바로 그것은 종교사업이다.


종교는 사람들의 미래에 대한 불안함, 죽음 후 세계에 대한 두려움을 기반으로 하는 사업이다. 과거 우리 인류의 문명이 가진 지식이 아직 많이 척박했던 시절, 우린 번개가 치는 원리도 이해를 못하고 비가 오는 밤에 커다란 벼락이 치는 소리를 들으면서 공포에 떨어야 했다. 그리고 그것을 기반으로 각 부족엔 그것을 하늘의 뜻이라고 말하는 거짓말쟁이 달변가가 생겨나기 시작했다. 그들은 그런 공포심을 자극해 자신의 사적인 이득을 취했는데 물론 그것을 강요한건 아니다. 하늘에 바칠 재물이나 혹은 정성이 부족해서 라고 지적했을 뿐이다.


그것이 체계화 되고 근거있는 문서를 갖춘 상태가 현대의 종교이다. 현재의 종교 역시 형태만 좀 세련되었을 뿐(교회같은 경우는 온라인 입금, 카드 결제도 가능하다) 그 근간은 과거의 원시시대와 완전히 동일하다.


종교는 진정한 두려움을 기반으로 하는 영역이다. 그리고 사람들은 조난자들의 행복과 같은 종류의 행복을 누리면서 산다. 즉 이 세상을 만든 신과 나와의 관계를 상상하면서 구조되었다는 안도감을 느끼는 것이다.


실제 산업분야에서도 이 공포는 매우 중요한 마케팅 포인트가 된다. 각종 보험업을 비롯해서 안전도구를 파는 분야, 먹거리를 파는 분야, 좀 더 확실한 총기류 거래 등이 직접적인 분야이고 전혀 관계없을 것 같은 분야도 역시 마찬가지다.


아이들의 학원을 열심히 보내고 있는 대한민국의 부모들. 물론 자신의 자식들이 잘되길 바라는 마음으로 보내는 것이겠지만 그들 중 꽤 많은 사람들은 바로 두려움 때문에 학원을 보내는 결정을 한다. 자신들의 자식들이 남들보다 뒤쳐질까 두려워 한다. 그리고 학원을 이것을 아주 잘 이용해 먹는다.


사람들의 관계는 또 어떤가? 우린 관계에서 떨어지면 두려움을 느낀다. 내가 마치 남들과 같이 잘 어울리지 못하면 미래의 나의 이득을 놓치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사람들은 끊임없이 어울리려고 노력을 하게된다. 명절때가 되면 수 많은 선물이 오가고 평소에도 각종 연결 수단을 통해 서로에게 자신의 존재를 각인시키려 한다. 혹시 내 이득이 줄어들까? 혹은 내가 늙은 후 내가 고독해지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이 사람들로 하여금 끊임없는 교류를 만들어 낸다.


하지만 이런 것은 어쩌면 우리 사회만 갖는 슬픈 자화상인지 모른다. 우리가 진정 행복한 사회에 살고 있다면 우린 자식들을 학원에 보내지 못해 안절부절 하지도 또한 사람들과 관계를 맺기 위해 바쁘게 살지 않을지도 모른다. 이런 것들은 우리가 이미 불안하고 두려운 상황에 처해있기 때문에 더 두렵지 않기 위해 하는 일종의 몸부림일지도 모른다.


두려움은 분명히 대한민국을 지배하는 힘이다. 정치도 기업도 종교계도 모두 하나같이 공포를 이용한다. 개개인도 모두 이 공포에서 벗어나고자 하루하루를 산다. 연금을 들고 친구를 만나고 아이들을 학원에 보낸다. 하지만 아무리 노력해도 문득 문득 두려움이 드는건 어쩔 수 없다.


그런데 우린 왜 이렇게 두려움 속에서 살아가게 되었을까? 이것이  인간이 만든 모든 나라의 어쩔 수 없는 운명일까?


아니다. 이렇게 살지 않는 나라도 꽤 된다. 그들은 그냥 행복하기 위해 살아간다. 우리와 차이는 우리는 두려움을 극복해서 행복하기 위해 살고 그들을 그냥 행복하기 위해서 산다.

 

사회 시스템이 덜 발달하고 또한 개개인의 사고가 깨어있지 못한 사회일 수록 이런 짖는 개의 소리가 커지고 대다수의 양떼에 속한 사람들은 그 짖는 소리에 두려움을 느끼면서 방향을 못잡고 쉼없이 뛰어다닌다. 그러 인해 우린 하나 둘씩 우리가 가진 것을 잃어가는데도 불구하고 그것이 무엇인지조차 가늠하지 못하고 있으며 거기에서 잃어가는 것은 모두 짖는 개들이 차지한다.

 

모두가 자신의 자리에서 자기만의 원칙과 규칙을 가지고 세상을 대하면 개가 짖어도 그냥 무시하면서 살 수 있는데 우리는 그냥 오늘도 개가 그만 짖기를 바라며 또한 그 개들이 무리 중 양 한마리를 재빨리 선택해서 저녁 식사꺼리로 삼기를 바란다. 그래야 개들이 조용해질 테니까. 그리고 우리는 그로 인해 하루의 추가적인 생명을 보장받은 것이 되니까.

 

도대체 언제까지 이런 두려움의 세상에서 살아가야 할까? 우린 태어나면서 죽는 순간까지 걱정 뿐이다. 그리고 이 걱정의 본질은 두려움이다.

 

학교에 들어가면 성격을 걱정하고, 졸업하면 취업을 걱정하고, 취업하면 벌 수 있는 돈을 걱정하고, 배우자를 걱정하고, 내가 직장에서 인정받을지를 걱정하고, 자식을 잘 키울지 걱정하고, 내 집 마련을 걱정하고, 오래 일할지 걱정하고, 노후를 걱정하고, 뭐 하면서 노후를 보낼지 걱정하고, 내가 죽은 후 내 장례식을 걱정한다.

 

그리고 이런 걱정을 하나씩 없애면서 공포로 부터 해방되는 행복을 느낀다. 그리고 아직도 그런 공포에 싸여 사는 다른 사람들보고 상대적으로 더 행복해한다. 나는 해방되었다고.

 

이것이 과연 우리가 꿈꾸는 세상인가? 걱정을 공포를 두려움을 없애려고 평생을 노력하는 삶이?

 

슬프지만.. 21세기 초반 대한민국의 사회는 공포가 지배하는 사회이다. 그리고 앞으로도 한참 그럴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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