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과철학

좀비 이야기

아이루다 2013. 2. 1. 10:15

 

Zombie. 아마도 이 스펠링이 맞을 것 같다. 이 괴 생물체(?)에 대한 첫번째 단서는 전설이 게임 디아블로 1에서 얻었다. 물론 그 게임에 출몰을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좀비가 그 게임에서 큰 역할을 한 중요한 몹은 아니었다. 좀 느리고 이상한 소리를 내며 두 손을 앞으로 뻗어 천천히 게임 속의 내 캐릭터에게 다가오다가 몇대 치면 죽었던 기억이 난다.

 

그 후 좀비에 대한 이야기는 한 동안 들을 수 없었다. 하지만 콘솔 게임류에서는 좀비가 매우 큰 역할을 한 모양이었다. 우리나라는 주로 PC를 이용한 게임이 주로 이루어지는 반면 미국이나 일본과 같은 나라에서는 PC보다 콘솔, 즉 소니의 플레이스테이션, 닌텐도의 위, 마이크로소프트사의 XBox 등과 같은 전문 게임용 컴퓨터가 훨씬 큰 시장을 장악하고 있는데 아마도 불법 복제에 대한 인식문제도 어느 정도 영향을 줬으리라. 아무튼 그 중에서 꽤 유명하고 인기를 많이 끈 타이틀이 바로 '바이오 하자드' 란 게임이었다.

 

나 역시 콘솔 게임은 거의 해보지 않았고 2년 전쯤 XBox 를 산 계기로 바이오 하자드 5를 해본 기억은 있다. 아무튼 그 게임은 너무 유명해서 영화화까지 되었는데 그 영화가 바로 유명한 '레지던트 이블' 이다. 밀라 요요비치라는 배우가 연기한 이 영화는 T바이러스라는 치명적 생체무기를 개발한 엄브렐러사의 비도덕적인 연구에 따른 인류 멸망을 다루고 있는데 최근 4편까지 나온 것으로 알고 있다.

 

아무튼 이 영화를 계기로 '새벽의 저주' , '새벽의 황당한 저주' , '28시간 후', '28일 후' 등등 좀비가 나오는 영화는 끝없이 만들어지고 있고 꽤 호평을 받고 있기도 하다. 물론 너무 황당한 3류영화도 있지만.

 

이쯤해서 좀비에 대해 정의를 하자면 이 이상한 존재는 일단 몸은 살아 있지만 정신은 없는, 즉 무뇌상태의 인간을 말한다. 거기에 오직 본능적인 식욕에 대한 욕구만 존재하는데 살아 있는 사람만 보면 마구 달려들어서 뜯어 먹는다. 난 좀비가 어떻게 살아 있는 인간과 자신과 같은 좀비가 된 인간을 구분하는지 그 원리는 잘 모르겠다. 좀비를 한마디로 정의하면 움직이는 시체이다.

 

나는 이 좀비에 대한 이야기의 분류를 인간과 철학의 카테고리에 넣었다. 보통 대부분이 관심이 없겠지만 난 내가 쓰는 글에 대한 분류를 좀 신경써서 하는 편인데 이 인간과 철학 카텍고리는 내가 쓰는 글 중에 제일 무거운 주제를 주로 다루는 편이다. 그래서 이 분류에 들어가는 글은 별로 없는 것도 사실이다.

 

그렇다면 왜 나는 이 좀비 이야기를 이 분류에 넣었을까? 지금부터 그 이야기를 하려고 한다.

 

몸은 움직이면서 생각이 없는 존재. 물론 좀비를 말하는 것이다. 하지만 좀 더 생각해보자. 이게 과연 정말 좀비만을 말하는 것인가? 지금이라도 잠시 밖을 보고 혹시 지나다니는 사람들을 바라봐보자. 그들은 분명히 몸을 움직이고는 있다. 그러다면 생각을 하고 있을까?

 

지금 이 시점에 그럴 환경이 되지 않는다면 지난 며칠간 기억속에 지하철 속 사람들을 떠올려보자. 대부분 오른손에 자신의 스마트폰을 쥐고 뭔가를 열심히 조작하고나 읽거나 쓰고나 하고 있고 또 다른 부류는 눈을 감고 죽은 시체처럼 잠을 자고 있을 것이다. 그들은 분명히 살아 있긴하다. 그렇다면 생각은 하고 있을까?

 

물론 인간이니 생각은 할 것이다. 그런데 그것이 좀비가 살아 있는 인간과 자신과 같은 좀비가 된 인간을 구분할 수준의 생각과 다를까? 그 본능적인 식욕에 대한 욕구로 인해 자연 발생되는 생각과?

 

우리가 보통 생각이라고 하는 것은 대부분 자동 발생을 한다. 내가 어떤 사물을 보거가 듣거나 할 때 나는 연쇄적으로 이것에 관련된 나의 기억이나 혹은 내가 할 일에 대한 생각을 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니 내 생각은 기본적으로 수동적으로 이루어진다. 배가 고프면 빵집 앞을 지날 때 나는 달콤한 빵 굽는 냄새에 따라 더 빵에 대한 많은 생각을 하게 되는 것이다. 그때 내가 내가 배가 고프니 빵을 생각해야지라고 생각하면서 연쇄적으로 빵을 떠올리는 것이 아니다. 그냥 냄새가 나는 즉시 우린 빵을 떠올린다. 이것이 바로 자극에 의한 생각 발생이다. 그리고 좀비가 사람을 보면 식욕을 느끼는 것과 마찬가지 원리이다.

 

이런 수동적인 생각은 끝없이 이루어진다. 그리고 이런 종류의 생각은 대부분 외부의 자극에 의해 발생되는 경향이 있고 그 주체에 속하는 것들은 바로 우리에게 정보를 전달해주는 인터넷,TV 와 같은 매체이다.

 

결국 결론적으로 우리가 생각한다고 말하는 거의 대부분의 것들은 스스로 생각해낸 것이 아니라 어떤 자극에 의한 일방적인 의식 흐름이라고 말해질 수 있는 것이다. 즉 우리는 좀비의 생각 범주와 크게 다르지 않는 범위에서 스스로 생각을 한다고 하면서 좀비와 우리를 구분하고 있다.

 

나는 여기에서 다시 한번 좀비의 능력이 놀랍다. 실제로 세상은 이런 상황인데 어떻게 좀비와 인간을 구분하여 인간만을 공격할까? 물론 누구도 대답해 줄 이는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중요한 질문 하나를 던져본다. 우리가 진정 이런 좀비의 상태에서 벗어나고자 한다면 어떻게 해야할까?

 

답은 놀랍도록 단순하다. 그것은 바로 능동적인 생각을 하는 능력을 갖추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위해서는 제일 먼저 해야할 행동이 바로 나에게 자극을 주는 많은 매체들로부터 독립이다. 나의 두뇌는 그리 생각보다 똑똑하지 못하다. 그래서 이것이 외부의 자극에 의한 생각인지 아니면 나 스스로 만들어내는 생각인지 전혀 인식하지 못한다. 결국 이런 두뇌의 한계 문제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외부 자극을 최대한 줄이는 수단을 써야 하는 것이다.

 

외부 자극이 뭐냐고? 그것 역시 뻔하다. 당신이 읽고 보는 그 수많은 정보들이다. 인터넷, 스마트폰, 채팅, TV 등등.

 

외부 자극이 줄어들면 어떠한 일이 벌어질까? 일단 두뇌가 쉴 시간을 번다. 들어오는 정보가 없으니 뇌가 놀게 되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이제 본격적으로 자생적 생각이 머리속을 지배하기 시작한다. 그런데 거기엔 즐거운 주제보다 걱정꺼리가 훨씬 많다. 나의 현재, 미래, 능력, 직장, 결혼, 연애, 가족 등등 인간 세상을 살아가는데 어쩔 수 없이 짊어지고 가야할 수 많은 것들이 머리속에서 마구 뛰논다. 그것은 바로 우리가 걱정꺼리는 나의 기분을 좋게해주는데 전혀 도움이 되지 않기에 오랜 시간동안 그것들을 한쪽 구석에 몰아만 두고 청소하고 있지 않아서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래서 다시 TV를 본다. 그렇게 되면 머리는 다시 내가 힘들고 고민해야 할 대상들을 싹 날려주면서 나의 머리속 생각을 다시금 수동화 시킨다. 그러면서 나는 기분이 좋아질 수 있다.

 

여기까지가 세상의 많은 사람들이 외부자극에 의지해서 살아가는 이유이며 좀비와 다를바 없는 삶을 살면서도 좀비를 자신과 다른 존재로 인식하는 상황이다. 그것은 좀비와 자신과 다를바 없을 것이란 생각조차도 해보지 않기 때문이다.

 

아무튼 다시 원래 이야기로 돌아가서 그렇다면 기분이 다운되는 그 수많은 나를 괴롭히는 생각들을 도대체 어떻게 할 것인가 하는 걱정에 대해 또 생각해보자.

 

그 걱정이 어디에서 출발할까?

 

나의 미래, 직장, 가족, 결혼..

 

왜 나는 나의 미래를 걱정할까? 왜 나는 나의 결혼생활에 대해 걱정할까? 왜 나는 나의 건강에 대해 걱정할까?

 

이유는 하나다. 그 걱정에 대해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건강이 걱정되면 오늘 운동을 해야한다. 나의 미래가 걱정되면 나의 미래를 위해 현재를 투자해야 한다. 나의 결혼생활 유지가 걱정되면 오늘이라도 일찍 들어가 아내를 위해 남편을 위해 뭔가를 해줘야 한다. 자녀의 미래가 걱정되면 오늘이라도 자녀와 맛있는 식사를 하면서 대화를 나누어줘야 한다.

 

결국 그 모든것은 시간을 투자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생기는 걱정이다. 그리고 그로 인해 발생되는 수 많은 걱정을 잊고자 TV를 보면서, 스마트폰을 보면서 시간을 소비하고 있다. 이 얼마나 아이러니한 상황인가?

 

시간을 투자하지 않아서 생긴 걱정꺼리들을 잊고자 시간을 낭비하고 있다.

 

왜? 하려면 귀찮고 힘드니까. 그리고 TV보면 잊혀지니까. 유재석, 강호동이 나와서 한번 웃겨주면 인생 즐거우니까.

 

처음 능동적 사고를 하기 시작하면 정말 우울해진다. 그것은 마치 자신을 벌거벗긴 채 모두 앞에 노출되는 듯한 느낌일 수 있다. 나 자신의 실제 상태를 제대로 본다는 것 그 자체는 매우 힘든 일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실체를 알아야 해결의 단초가 생긴다. 내가 어떤 문제를 가지고 있는지 알야야 해결을 할 수 있다는 말이다. 이것은 비단 나의 생각만이 아니고 실제로 수 많은 문제 해결에서도 동일한 매우 중요한 해결방식이다.

 

문제를 인식하고 인정하는 것.

 

오랜 시간 힘든 시간이 지속될 수 있다는 점은 나 역시 충분히 걱정스러운 부분이다. 하지만 내가 좀비와 다르게 산다는 것은 결국 이런 과정을 통해 나를 극복하고 능동적 사고를 하는 방식의 삶을 받아드릴 때가 아닌가 싶다.

 

물론 평생 좀비로 사는 사람이 이 세상에 존재하는 비율로 따지면 거의 대부분이라고 볼 수 있으니 좀비로 살아가도 큰 문제는 없다. 어떤 좀비영화에서는 좀비들끼리 단순한 의사소통을 하기도 하니까 말이다.

 

어떤 삶을 살아갈지는 누구나 그 스스로 선택해야 한다. 나 역시 스스로 좀비가 되지않기 위해 발악하고 있지만 실제로 좀비일지도 모른다. 그것은 누가 인정해주는 것도 아니고 어떤 기관에서 인증을 해주는 것도 아니다. 우린 외모만 사람처럼 생겼고 그 부모가 사람이면 보통 좀비가 아닌 사람으로 대접을 해주니까 말이다.

 

 

* 좀비에 대한 추가적인 상식

 

좀비는 원래 부두교에서 나온 존재로 인간에게서 영혼을 빼낸 후 모습을 말한다. 즉 사람의 지성을 잃은 존재로서 그 주체인 '보커'라는 부두교 사제에게 절대 복종하는 존재라고 한다. 나는 보지 못했지만 1968년 로메로 감독이 살아있는 시체들의 밤이란 영화를 통해 현재까지 내려오는 좀비의 틀을 결정했고 그 후로는 모두 이 영화의 영향력 아래서 좀비에 대한 정의가 이루어지고 있다고 보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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