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과철학

각성을 생각해본다

아이루다 2013. 2. 2. 09:37

 

우리나라는 꽤 오랜시간 동안 불교라는 종교가 그 영향력을 발휘해 온 국가이다. 역사적으로 봐도 신라시대부터 불교에 관한 이야기는 원효대사나와 같은 고승들의 일화로 전해 내려오며 그 후 고려시대를 거쳐 타락한 불교를 억제한 조선시대엔 민초들의 삶속에서 이어져 현대 대한민국에까지 전해온 그 종교에 관한 수 많은 자료나 문화재들이 이 땅에 존재하고 있다.

 

현대에 있어서도 불교는 그 신자 수 부분에 있어서 국내에서 최대의 분포를 가진 대한민국 대표종교이기도 하다. 내가 알기로 불교신자로 분류된 우리나라 사람이 전체 인구 중 대략 23%정도 되는 것으로 알고 있다.

(참고로 도심에서 그 많이 보이는 십자가의 주인공인 개신교는 18% 정도 된다. 그런데 요즘 더 줄고 있다고 한다)

 

글의 제목은 각성에 대한 이야기인데 왜 갑자기 종교 얘기를 하는가 하는 의문도 들겠다. 실제로는 종교 얘기가 아니라 불교에 나오는 이야기를 조금 하고 싶어서 꺼낸 이야기이다. 물론 난 불교에 대해 논할 만큼 불교의 교리를 이해하는 수준의 지식을 가진 사람은 아니다. 나 역시 그냥 여기저기서 들어주운 수준의 지식만을 가지고 있을 뿐이다.

 

불교의 기본 교리는 누구나 부처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즉 그들이 신적인 존재로 믿고 따르는 그 대상을 스스로 도달할 수 있다고 설법하고 있다. 물론 그 과정은 매우 힘들다. 불교에서 실제적으로 수행하는 수행법은 매우 다양하지만 결론적으로 일반적인 수준으로는 생각하고 했다간 금새 그 힘듬을 참지 못할 수 있다.

 

아무튼 이런 힘든 수행을 하는 이유는 바로 깨달음을 얻기 위한 매우 중대한 목표가 있다. 그리고 이 깨달음이 각성의 또다른 말이다.

 

물론 나는 지금 불교에서 말하는 커다란 깨달음, 즉 해탈의 경지에 대해 말하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그 깊이의 차이에 상관없이 우리가 왜 불교에서 말하는 깨달음이나 혹은 그보다 더 작은 규모의 각성에 대해 알아야 하는지를 차분히 설명해보도록 하겠다.

 

 

 

내가 지금 현시점에 돈을 벌기 위해, 힘들지만 열심히 직장생활을 하고 있다고 생각해보자. 물론 나에겐 딸린 처자식이 있고 그들을 부양해야 하고 또 작은 돈이지만 나를 낳아주고 길러주신 부모님에게도 매달 일정액의 용돈을 드려야 하는 입장이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나와 나의 가족과 나의 부모님을 위해 새벽에 일어나 일터로 향한다.

 

여기에서 나는 과연 왜 직장을 다닐까?

 

많은 남자들은 이런 이야기를 한다. 내가 가족을 위해 30년을 쉬지 않고 일하여 그들을 먹고 입혔는데 나이를 먹으니 그 고마움도 모른다. 혹은 현재 진행형으로 그렇게 힘든 나를 좀 이해해달라 라는 식으로 말한다.

 

좀 과하게 대놓고 물어보자. 너는 왜 직장에 다니는가? 진정 가족을 위해서 다녔는가? 혹은 다니는가?

 

가족을 위한다는 것. 물론 가장으로서 경제적인 문제를 해결해주는 능력 중요하다. 하지만 돈을 주면 그가 가진 가족에 대한 모든 책임은 완료된 것인가?

 

당연히 아니다. 만약 돈으로 남자의 가정에서의 모든 책임이 완료된다면 세상은 이혼이 존재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정말이다.

 

정확히 말하면 남자는 자신을 위해서 직장을 다닌다. 그가 스스로 가족을 위해서라고 말할지라도 실제로는 조금만 깊이 생각해보면 자신을 위해 다닌다. 물론 가족의 존재에 모든 의미를 두고 세상을 사는 이도 있기에 이말이 어느정도 맞는 사람도 있다. 그래서 자신의 가족이 어느날 사고로 갑자기 죽어버리면 직장도 인생의 산다는 것 자체도 포기하는 사람도 있을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사람이 가족을 위해 산다는 의미는 아니다. 그냥 그는 가족에게서 그 삶의 의미를 찾았던 사람이다. 그 비슷한 예로서 가족이 아닌 취미를 통해 삶의 의미를 찾은 사람은 어느날 가족이 몽땅 없어져도 그 취미만 유지되면 충분히 세상을 살아간다.

 

물론 이런 실제적인 가치에 대한 부분을 충분히 깨닳고 사는 사람들도 꽤 된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작은 '각성' 이다. 우리가 스스로 생각하는 착각에서 깨어나 그 실제적 가치에 대한 숨겨진 진실을 바라보는 것. 그것이 바로 각성인 것이다.

 

이런 인간의 어이없는 착각은 열거하면 정말 끝이없다.

 

보통의 인간이 갖은 대표적인 착각은 바로 스스로 주장하는 인간이라고 믿는 것이다. 우린 이족 보행을 하고 그 어떤 종족보다도 우월한 뇌 용량을 가졌으며 그로 인해 수 많은 정보를 기억하고 응용함으로서 지구란 행성의 절대적 지배자로 군림하고 있는 영장류에 속한 인간이다.

 

그래서 우린 우리 스스로 누리는 권리, 지구란 땅에 선을 긋고 내땅이라고 서로 증명하고 세금을 낸다는 이유로 그것을 지극히 당연히 내껏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물론 전쟁나서 나라가 망하는 순간 다 날라가버릴 의미없는 것이긴 하지만 적어도 나라가 망하지 않는다면 유지될 가치이기는 하다.

 

인간이기에 갖는 지구상 생태계에서 누리는 우월적 지위에 대해서는 정말 너무도 당연하게 받아들여서 단 한점의 의구심조차 없다. 하지만 과연 그것이 나의 능력일까?

 

우리 인간은 실제로 보면 지구상의 모든 자원을 독점하려는 욕심에 가득찬 탐욕스러운 독재자라고 볼 수 있다. 우린 그동안 우리에게 대항 할만한 그 모든 도전자를 굴복시켰고 정말 유일하게 문명을 만들어내어 지구 전체를 지배하고 있다고 믿고 있다. 그리고 실제로 생태계에서는 거의 그렇다. 물론 아직도 여름밤의 모기나 음식물에 꼬인 파리의 공격을 받고 있지만 좀 조심하면 충분히 극복해 낼 수 있다.

 

하지만 좀 더 세밀하게 들어가보면 우리는 늘 하나의 세포만도 못한 크기를 가진 바이러스란 존재에 끝없이 공격을 당하고 있어서 늘 감기나 기타 질병에 노출되어 있으며 스스로 만들어 낸 환경 호르몬에 의해 내부 시스템 붕괴가 일어나 암이나 기타 수 많은 질병에 걸려 겨우겨우 그 목숨을 연명하고 있다.

 

과연 우린 우리 스스로가 전혀 자신의 존재에 대해 의심의 눈초리를 가질 필요가 없는 이미 충분히 완성된 존재인가?

 

이정도 착각은 그나마 괜찮다. 더욱 커다란 실제적 문제는 그 다음부터 일어난다. 내가 인간이기에 라는 절대적 가정은 이후 우리를 대단한 착각속으로 밀어넣는다.

 

우리는 우리가 가진 가치의 착각속에 살아간다. 애국심, 정의, 충성, 사랑, 존경, 믿음 등과 같은 단어는 우리가 매우 긍정적으로 보는 가치를 가진 것들이다. 하지만 잘 생각해보자.

 

쉽게 말해서 애국심, 이것은 타국에 대한 적개심이다.  정의는 반대입장의 사람들에게는 거짓이 된다. 충성역시 자신과 같은 입장에 속한 이들에게만 가치 있는 개념이다. 사랑은 미움이나 질투의 대상이 된다. 그나마 그 반대가 존재할 것 같지 않은 존경은 과연 무엇을 기준으로 한 것일까? 우리가 누군가를 존경한다고 할때 정말 그 사람이 존경 받을 만한 사람이었는지 실제로 많은 의문이 있다.

 

하지만 문제는 우리는 이런 가치들에 대해 절대적 지위를 부여하고 이것을 갖고 살지 못하는 이들을 심하게 비난하거나 혹은 제대로 살지 못한다고 여기기도 한다. 특히 애국심과 같은 종류의 것들은 매우 위험한 우리의 착각이다. 그렇지만 애국심을 강조하는 대다수의 사람들은 왜 자신이 애국심을 갖고 있는지 또한 자신에게 반대하는 이들을 왜 비난하고 있는지 그 밑에 깔린 진정한 의미를 알지 못한다.

 

이것이 바로 각성이 없는 사람들이 특징이다. 자신이 인간이라는 착각에서 시작해서 그 인간이기에 갖는 가치에 매몰되고 거기에서 단 한번의 의심도 없이 그 의미를 절대적으로 믿어 자신과 다른 생각을 가진 이들에게 본능적인 적개심을 들어낸다.

 

실제로 왜 사는지에 대한 조금만 생각해본 이라면 과연 우리가 절대적 가치라고 믿고 사는 그 모든 것이 얼마나 자기 주관적이며 또한 서로 서로가 모여서 결국엔 다수의 의견에 의해 결정되고 있는지를 알 수 있다. 만약 지금 일부다처제가 인정된 사회라면 능력있는 남자가 여러 여자를 거느리고 살고 반대로 일처다부제의 사회라면 한 여자가 여러 남편을 거느리고 사는 것이 진리가 될 수 있다.

 

우린 단지 일부일처제를 가장 합리적인 결혼 방식이라고 믿기에 그렇게 정하고 살아간다. 하지만 우리 사회는 사랑의 유일성이나 바람 피는 배우자에 대한 절대적 분노를 당연하게 받아들인다. 단지 그것들이 우리가 경험적으로 정한 국가적 규칙이거나 혹은 관습적으로 통용되는 다수의 의견일 뿐인데 말이다.

 

이 예는 빙산의 일각이다. 우리가 스스로 인간이라고 정의 한 후 의심없이 받아드리는 순간 우린 우리가 가진 거의 모든 생각에서 착각을 일으킨다. 그리고 그 착각속에서 평생을 살아가면서 의심없는 행복감을 느낀다. 그것이 인생이라고 믿는 것이다.

 

스스로 소중하다고 믿는 가치관, 소유한 물건, 행복의 대상, 좋아하는 것들 등등

 

내가 먹는 나를 행복하게 해주는 양념치킨은 바로 닭 사육장에서 몇달 자란 영계들이다. 실제 그 닭들은 50년을 살 수 있는데 내 양념통닭이 되어야 했기에 인간으로 보면 첫 돌이 오기 전에 나의 입으로 들어간 것이다. 내가 지킨 나만의 사랑은 누군가에게 절망적인 실연의 고통을 주었을 수 있다. 나라에 전쟁이 나서 전장에서 쏜 내 총알에 맞은 그 누군가는 또 어떤 집의 소중한 자식이고 아빠였을 것이다.

 

행복을 절대 선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겠지만 그 행복뒤엔 누군가의 불행이 존재하고 있는 것이 우리가 잊은 진실이다.

 

물론 실제가 그렇다고 해서 그런 가치들을 깡그리 무시하라는 말이 아니다.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자신이 믿는 그 절대성에 대해 의심을 하고 그 반대편에 서 있는 사람들에 대해 배려를 하라는 말이고 그런 행동의 결과로 결국 스스로 산다는 것 자체를 각성하라는 의미이다.

 

착각속에 살아가는 것도 좋은 삶의 형태이다. 매트릭스 속의 세상처럼 그 모든 것이 뇌로 전달되는 가짜 자극에 의해 결정되는 세상이지만 내가 인식을 못하면 아무 상관이 없을 수도 있다. 실제로 그렇게 사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믿는 이들도 꽤 될 것이다. 내가 기분이 좋고 행복만 하다면 그것이 가짜든 진짜든 무슨 상관이 있으랴.

 

물론 그런 사람들 조차 매일매일 행복하게 미소짓고 사는 동네 바보나 정신병원 환자가 되고 싶어하지는 않을 것이다. 이해는 안가지만. 누군가 매일 매일 행복하게 살 수는 있지만 보통 인간으로서의 삶은 포기해야 한다면 그것을 선택할 사람은 인간 중 과연 몇 %나 될까?

 

실제로 인간을 움직이는 가장 중요한 목표인 행복조차 그 배경엔 우리를 구성한 46쌍의 유전자가 가진 치밀한 욕구가 숨어 있는데도 우린 마치 그런 유전자의 존재조차 느끼지 못하는 개체로서 스스로 행복에 대한 선택을 하고 있다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마치 내가 따뜻한 커피를 마시면서 이런 아침을 보낼 때 행복하다고 믿지만 그 행복이 과연 어떻게 발생되는지는 모르는 것이다. 물론 몸속에서 일어나는 현상이라서 전문적인 지식이 없다면 유추하기도 힘들다. 하지만 실제로 전문적인 지식을 가졌다고 해서 약간의 추가적인 이해만 있을 뿐 또 별로 다른 점도 없는 것도 사실이다.

 

내가 절대적으로 믿는 행복에 대한 것조차 이런 우리 착각속에서 이루어지는 일인데 과연 우리가 착각하지 않는 것이 단 하나라도 있을까?

 

착각속의 행복 조차 좋은 것이라고 받아들이는 사람이라면 뭐 더 할말은 없다. 물론 예를 들었던 그래서 행복한 동네바보가 되겠느냐 하는 질문에 "예" 라고 대답할 용기있는 이가 있을지는 모르지만.

 

 

'인간과철학' 카테고리의 다른 글

삶의 본질.. 행복과 고통 사이  (0) 2013.03.06
존재증명을 위한 치열함  (0) 2013.02.20
좀비 이야기  (0) 2013.02.01
불행하기 위해 해야 할 일들  (0) 2013.01.27
시간에 대한 짧은 소견  (0) 2013.01.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