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과철학

삶에 정답이 있다면

아이루다 2012. 12. 31. 08:39

 

제목은 정답이란 단어를 언급했지만 실제로는 삶의 정답이란 있을 수 없다는 것이 내가 생각하는 정답이다. 이 정답이란 말 자체가 의미하는 것에는 누군가 답을 했을 때 그것이 맞다는 것을 확인해 줄 주체가 필요한데 우리가 우기는 신이 있지 않는 한 그 역할을 해줄 사람이 없다. 물론 종교를 가진 이들은 정답이 있다고 믿을 수 있다. 물론 그 자신의 착각이지만 말이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보면 실제로 많은 사람들은 정답이 있다고 믿고 살아가는 것처럼 보인다. 특히 삶에 대한 확고한 판단기준과 엄격함을 갖춘 사람일 경우 정말 정답에 대한 확신이 있을것 같은 충분한 믿듬을 준다. 또 다른 경우엔 추구하고 목표하는 것에 대한 집요한 욕심이 확신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믿게 만들어 준다. 예를 들면 '돈' 에 대한 망설임없는 추구나 '명예'와 같은 것에 대한 확고한 신념등이 그렇다. 물론 우리가 좋게 생각하는 '자녀'에 대한 사랑도 그런 범주 중 하나이다. 개인적 신념이나 종교적 믿음도 그 후보가 될 가능성이 크다.

 

'돈' 에 대한 사람들의 집착은 매우 일반적인 정답 중 하나로 보여진다. 왜냐면 자본주의 사회에서 특히 우리나라와 같은 천민 자본주의가 발달한 나라에서는 돈이면 거의 모든 것이 해결이 된다. 오우헨리 단편집에 나오는 '시간은 돈을 살수 없다는' 말에 대해 마차를 이용해 교통 체증을 일으켜 두 연인이 마치에 더 오래 머물 수 있게 해주어 그들의 사랑을 맺어준 어느 갑부의 이야기처럼 시간이나 사랑마져 돈으로 살 수 있는 시대인 것이다. 따라서 돈을 많이 버는 것은 삶의 정답이 될 후보로 매우 높은 가능성을 갖고 있다.

 

'명예' 는 주로 남자들의 세계에서 나오는 이야기지만 어떤 의미에서는 매우 긍정적으로 하지만 다른 면에서는 매우 추악하게 나타나기도 한다. 누구나 명예롭게 살길 바라지만 그렇게 살 수 있는 사람은 매우 극소수이고 대부분은 명예가 있는 것처럼 타인들을 속이며 살아갈 뿐이다. 아무튼 명예를 지키리 위해 자신의 삶을 엄격하게 규율하는 것도 일종의 삶의 정답이 될 가능성이 있다.  그리고  명예는 좀 다양한 형태로 그 모습을 들어내는데 '체면'이나 '타인의 평가' 등에 대한 집착도 같은 형태라고 판단된다. 즉 인간 세상에서 살아가면서 타인들에 의해 평가되는 거의 모든 개인적 가치를 말한다고 보면 된다.

 

'자녀사랑' 은 매우 범용적인 그리고 동물적인 정답이다. 특히 이것에 집착이 심한 부모일 경우엔 자녀를 거의 꼭두각시 키우듯 키우며 자녀가 결혼 한 후조차 마마보이와 같은 완성되지 못한 성인을 만들어내기도 한다. 보통 이런 경우는 부모가 자신의 삶을 제대로 채우지 못했을 때 그 과업을 자녀에게 기대는 현상에서 나타나는데 잘못했다간 자녀에게 과도한 스트레스를 줘서 자살에 이르게끔 하기도 한다.

 

아무튼 자녀사랑은 자신의 DNA를 이은 번식본능에 매우 충실한 결과이고 또한 우리 삶의 유일한 목표이기도 하니 정답이 될 가능성이 가장 높다. 앞서 나왔던 돈이나 명예도 어쩌면 자식에 대한 욕구가 만들어 낸 결과물일지도 모른다.

 

'신념' 이나 '믿음' 자신이 살아야 할 이유를 찾아준다는 점에서 공통점이 있다. 누군가 말한 사상을 믿고 생각을 믿어 이것을 실천하는 삶을 꿈꾸거나 혹은 실제 행동으로 옮기는 삶을 사는 경우도 있고 비슷하지만 조금 다른 믿음의 관점에서 볼 때 종교적으로 적힌 경전을 통해 신에 대한 믿음을 통해 자신의 삶이 의미있고 또한 그 경전에서 말하는 것처럼 살아가는 것 자체가 정답이라고 믿는 것이다. 문제는 자신의 삶의 정답을 온전히 사상이나 믿음을 통해 평가받을 때 우린 매우 편협한 사람이 될 가능성이 크다. 실제로 그 모습은 편협하지 않을지 모르지만 내가 옳다는 확신이 강해질 수록 남이 틀릴 가능성이 높아지는 원리에 의해 결국 표현은 안하지만 자신과 다른 모든 이의 삶을 오답으로 간주해버릴 위험이 있다.

 

뭐 또다른 후보들이 있을 것이다. 넓은 인간관계라든가 재밌고 즐거운 놀거리, 맛있는 음식, 달콤한 휴식 등등이 자신이 행복을 느끼고 행복하기에 정답이라고 믿어질 수 있는 것들이 있다.

 

그런데 이 와중에 나는 정답을 하나 정의하고자 한다. 물론 온전히 내 의견이다.

 

나는 삶의 답을 이렇게 정의한다.

 

삶이란 자신에게 주어진 시간에 온전히 충실한 것. 그리고 행복할 것.

 

너무 일반적인 답으로 보이긴 한다. 하지만 참 지키기 힘들고 또 그렇게 살아간 사람은 찾아보기가 너무 힘들다. 열심히 사는 사람들은 많다. 시장에 가면 새벽부터 늦은 밤까지 일을 하는 사람들도 많고 하루에 3시간 자면서 공부하는 사람들도 많다. 그냥 보면 자신에게 주어진 시간에 온저히 충실하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렇게 하면서 행복한 이는 거의 없다. 단지 이루고자 하는 목표가 있기에 힘듬을 참고 하루하루를 견뎌내는 것이다. 그것은 돈을 벌어야 하는 목표에 또는 돈을 벌 수 있는 더 많은 기회나 명예를 얻을 기회를 위해, 아니면 미래의 나의 DNA을 이어갈 후손을 얻을 더 좋은 배우자를 얻기 위해 그렇게 살아가고 있다.

 

결국 일벌레가 되어 회사에서 인정받고 성공한 사람이나, 또다른 수 많은 자신이 하고 있는일에 대한 과도한 집착은 결국 그 일자체가 아니라 그 일을 하는 주체로서의 자신이 완성되고 또 타인의 좋은 평가를 얻으며 그로 인해 적절한 수입을 보장받기에 그렇게 살아가는 것이 되어 버린다.

 

음식 맛을 알지 못하고 고급 레스토랑에서 비싸다는 이유로 먹는 사람들이나, 음악을 들을 수 있는 귀와 지식이 없으면서 공연장에서는 가장 좋은 좌석으로 가야만 하는 사람들과 같이 그 가치를 제대로 이해하고 평가하지 못하면서 자신이 그나마 가능한 수단을 이용해 마치 그것을 제대로 알고 있는냥 보여주기 삶을 선택하고 있는 사람들도 많다. 물론 그나마도 못하는 사람도 무척 많지만.

 

꽤 오래된 영화로 당시 세계적으로 많은 사람들이 본 영화 '타이타닉' 을 보면 주인공 잭이 죽으면서 비록 며칠간이지만 자신의 전부가 되어주었던 여주인공 로즈에게 이렇게 말한다. 당신을 만난것이 자신의 삶에서 가장 잘한 일이라고, 그리고 꼭 살아서 그 자유로운 영혼이 이끄는데로 행복하게 살아가라고 그렇게 말하고 죽어간다. 그리고 로즈는 자신의 삶에 있어서 남들에게 평가받는 커다란 성공은 거두지 못했지만 자신이 원하고 행복한 일을 거침없이 낭비없이 살아가게 된다. 그리고 그 안에는 잭의 마지막 당부가 그리고 그의 사랑이 늘 함께 하고 있었을 것이다. 나에게 타이타닉이란 영화는 로즈가 가진 숨겨진 자유로운 영혼의  해방이었다. 누군가는 스텍타클한 거대한 배에 대한 영화 혹은 두 연인의 아름답고 슬픈 사랑 이야기로 표현할지도 모르겠다.

 

나는 정답으로서 이런 삶을 말하고 있다. 대부분 사람들이 그렇듯 나에게도 잭이란 사람이 없었지만 나는 잭이 있는 것처럼  그렇게 나에게 충실하게 살아가려고 한다. 사회가 나에게 실제로 가르쳐준 가치들. 돈, 명예, 자식과 같은 것으로 부터 좀 벗어나 내 삶을 온전히 채울 수 있는 가치를 찾고자 한다. 물론 지금까지 살아온 내 삶을 평가하면 우숩기 그지없다. 제대로 해놓은 것도 없고 제대로 행복해본적도 없다. 그래도 나는 그 꿈을 포기하지 않으려 한다. 희망이란 그래서 좋은 것이 아니겠는가?

 

적어도 죽는 그 순간에 내 스스로 나에 대해 '그래 이 정도 살았으면 너 노력했다' 그런 말은 해주고 싶다. 그리고 그렇게 살아온 삶을 마감하면서 영면에 들어가는 순간 행복하게 눈을 감고 싶다. 지난 시간을 후회하고 하지 못한 것에 대한 미련을 가진 채 나의 최후를 맞고 싶진 않다.

 

죽음의 순간을 위해 살아가는 것은 아니지만 평가만은 내려보고 싶다.

 

내가 만약 백살을 산다고 치면 36,500개의 빈칸이 주어진 것이고 나는 매일 그 빈칸을 온갖 색으로 칠하고 있다. 어느 날은 아무것도 못해 하얗게 놔둬야 했고 어느날은 너무도 불행해 검은색으로 칠해야 했다. 하지만 또 그 많은 날 중 며칠은 너무도 행복해 파란 가을 하늘 색으로 칠할 수 있었으며 어느날은 분노와 흥분으로 빨갛게 타고 있는 숯불과 같은 붉은색으로 칠했다. 사랑에 빠졌던 시절은 매일 매일 선명한 분홍색으로 칠했으며 우울하고 힘든 날엔 어떤 색을 칠할지 몰라 회색으로 채워버렸다.

 

그렇게 나는 꽤 많은 빈칸을 채워왔고 돌아보면 하늘색이나 분홍색은 잘 보이지 않고 온통 회색이나 검은색으로 보일 뿐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내 미래의 하루하루를 과거와 같이 채우고 싶은 생각은 없다. 나는 가끔 가을 낙엽과 같은 갈색으로 칠하기도 하고 검게 보이지만 먹음직하게 볶아진 커피색으로 혹은 지금 영월 집을 온통 둘러싸고 있는 하얀 눈색으로 채울 것이다. 같은 검은색, 흰색이라도 그 의미가 달라질 것이라 믿는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나는 선명한 분홍빛은 아닐지라도 약간의 붉은기가 도는 흰색으로는 칠하면서 살고 싶다. 그것은 내가 사랑하는 이에 대한 중단없고 포기하지 않는 사랑이다.

 

나는 그렇게 살아가고 싶다. 그리고 나만의 정답을 간직한 채 남은 삶속에 채우져 갈 시간을 빈 칸없이 빼곡히 색칠하고 싶다. 그렇게 희망하고 살아간다.

 

2012년을 마무리하는 오늘 나는 2013년의 나의 삶에 대한 새로운 희망으로 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