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과철학

삶.. 존재의 이유가 없는 자의 슬픔

아이루다 2012. 11. 26. 20:59

 

아주, 꽤 기분이 나쁘지만.. 오랜시간 인간에 대해 공부해 온 결과로 토대로 다각도로 판단해 보면 나는 실제로는 아무것도 아니다 라는 결론에 이르를수 밖에 없다. 물론 나는 대한민국에 등록된 주민등록번호가 있고 나와 친분이 있는 사람들이 있으며 나를 낳아준 부모님과 형제들도 있고 나를 먹고 살게 해주는 직장과 집도 있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어떤 의미를 가진 존재가 되는 것은 아니다 라는 것이 나의 최종 결론이다.

 

과가에 인류의 문명이 시작된 이래 꽤 똑똑한 이들이라고 한시대를 풍미했던 인물들 역시 제각자 나름의 존재 이유에 대한 그럴듯한 설명이나 혹은 종교 교리등을 통해 일반인들에게 보장해주기도 한 역사가 있다. 물론 그 정의 아래에서 그 자신도 거기에 속했기 때문에 그 자신을 물론 그의 말을 믿는 많은 사람들까지 모두 한꺼번에 그럴듯한 존재 이유를 가질 수 있었다. 그리고 이것은 매우 중요한 것이기에 문명의 시작된 초기부터 민족의 설화로 부터 내려오는 수 많은 초기 인류 탄생의 신화에 대부분 그것에 대한 내용이 함축되어 있다. 우리 한민족도 그 예외가 아니고 단군과 마늘을 먹고 인간이 된 웅녀에 대한 신화로부터 우리가 하늘의 신의 자식으로 시작된 존재라고 설명하고 있음을 잘 알고 있다.

 

현대에 이르러서도 인간이 가장 쉽게 존재이유를 찾을 수 있는 분야가 바로 종교이다. 특히 기독교나 이슬람교와 같은 절대 유일신을 믿는 종교는 대단한 효과를 지닌다. '신은 당신을 사랑하십니다' 라는 문구가 얼마나 듣기 좋은가?  내 자신이 비록 아무것도 아니고 비루하고 또 멍청하기 짝이 없고 거기다가 현재 세상의 모든 불행을 다 지니고 있다고 해도 나에겐 나를 지켜봐주는 절대적인 존재가 있다는 믿음.. 나는 비록 그런 믿음을 경험하지는 못했지만 실제로 많은 사람들을 치유해줄 수 있다고 생각한다. 종교가 지닌 매우 긍정적인 효과이다. 하지만 나는 그런 믿음을 갖기엔 세상에 대해 너무 많이 알아버렸다. 그것은 어떤 의미에서는 다행이기도 하고 어떤 의미에서는 불행이기도 하다.

 

고대문명이 신화의 시대였다면 중세는 신의 시대였고 현대는 과학의 시대가 진행되고 있다. 실제로 현대 과학의 발달은 단지 과학의 진보만은 가져온 것이 아니다. 아인슈타인이 증명해 낸 상대성 이론은 우리가 절대적이라고 믿었던 시간과 공간의 개념 자체를 뒤흔들었고 그 후 생물학, 천체물리학, 인지과학 등등에서 상대적 세계관에 대해 상대성 이론에 따르는 것은 아니지만 우리가 느끼고 생각하는 많은 것들이 실제로는 매우 유동적이고 변화무쌍한 것이란 생각을 할 수 있도록 유도하게 되었다. 신으로 부터 만들어졌다고 믿어진 인간의 형상이 아주 오래전 공통 조상으로 부터 원숭이와 인간으로 분리되어 진화되었다고 설명하고 있는 진화론도 역시 과학이 인문학에 큰 영향을 미치는 좋은 예가 될 것이다.

 

기술의 발달로 인해 원자의 세계에서 더 작은 입자인 양자의 세계까지 발을 들인 인간들은 양자역학이란 학문을 만들어내고 오늘도 그것을 통해 세상이 과연 어떤 원리로 움직이고 있는지를 밝히려고 애쓰고 있다. 또한 거대한 망원경들은 130억년 전 발생한 빛의 흔적을 발견하고는 우주 초기의 모습을 상상하면서 그려내고 있다. 물론 아직까지는 모두 이론이지만 언젠가 좀 더 나은 기술들이 발전되면 좀 더 진실에 다가가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물론 지금의 상상력이 모두 멍청한 생각일지도 모른다. '프린키피아' 를 통해 만유인력의 원리를 설명한 뉴튼 역시 중력이 어떻게 작용하는지는 설명하지 못했는데 그것은 바로 중력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그 원리를 기술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뉴튼의 운동학 법칙은 아직도 유용하게 사용할 수 있다. 비록 정답에 가까운 근사치이지만.

 

또다른 예로 들어보면 이런 기초과학 말고도 왓슨과 크릭에 의해 발견된 DNA 나선구조는 분자생물학이라는 새로운 학문의 틀을 마련했고 그 후 수 많은 관측과 실험을 통해 우리의 몸이 어떤 원리로 이루어지고 또한 우리가 어떻게 동작되며 또 어떻게 후대로 전달되어가는지를 알아가고 있다. 그리고 궁극적으로 우리가 지구상에 존재하는 그 많은 동식물들과 그리 많이 다르지 않은 존재라는 것을 연구결과로서 알려주고 있다.

 

그래, 그래서 나는 인정한다.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나는 지구에 존재하는 원소들과 태양의 에너지가 만나 만들어진 에너지 구성체이다. 내 몸을 구성하는 매우 많은 세포들과 나의 머리속에서 지금 끊임없이 다음 글을 생각하는 나의 의식도 그 에너지 활동의 결과물임을 나는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나는 단 하나의 세포로 부터 출발해 복제에 복제를 거듭한 끝에 지금의 거대 세포군으로 자라났다. 그 성장의 과장에 나는 어머니로부터 10달에 걸쳐 배속에서 영양분을 공급받았고 그 영양분은 어머니가 외부로 부터 섭취한 채소와 고기등으로 부터 왔으며 그것들은 모두 흙과 태양을 통해 광합성을 한 식물의 결과물로 나왔다. 그리고 그 영양분은 과거에 또다른 존재의 구성물이였을 수 있기에 나는 지구라는 존재에서 끊임없이 재활용되는 원자들의 조합인 것이다. 결국 나를 이루는 원자들은 오래된 것은 137억년이란 우주 역사만큼의 시간을 가지고 있고 또 어떤 것들은 태양계 구성에 기본 구성물질을 제공한 50억년 전쯤 폭발한 초신성의 잔해물일 수 있다. 아무튼 수십억년 이상 된 원자들과 그들이 뭉쳐서 만들어진 분자들이 끊임없이 재건축되어 과거 공룡을 구성했던 물질이 현재 내 몸을 구성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내가 죽으면 나는 또 썩어서 흙의 영양분으로 돌아가며 그것을 흡수한 식물에 의해 또다시 재활용 될 것이다. 아마도 지금 내 몸을 이루는 원자들은 100년이나 200년 후쯤 수십명의 다른 이의 몸을 구성하는 성분으로서 활용되고 있을지 모른다.

 

결국 지구로 부터 만들어져 지구로 돌아가는 삶이 우리 인간의 삶이다. 하지만 여기에서 우린 스스로 존재를 자각한 유일한 생명체로서의 다른 동물과 구분되는 인간이란 종이기에 스스로 존재이유를 찾고자 한다. 우린 자신에 대해 생각을 하고 존재에 대해 사유를 할 수 있는 능력을 가졌기에 스스로 내가 왜 존재하며 또 어떻게 살아야 할지 고민할 수 밖에 없다. 그것은 바로 주인을 보면 끊임없이 꼬리를 흔드는 강아지와 우리가 다르기 때문에 그렇다. 물론 강아지와 같은 수준으로 살아가는 사람들도 꽤 되지만 인간의 언어를 쓰기에 그리고 외모와 행동이 인간의 그것에 합당한 존재이기에 함께 살아가야 한다는 슬픔도 있지만 그래도 그렇지 않는 사람들도 있기 때문에 인정하고 이해할 수 있다.

 

이러다보니 좀 슬퍼진다. 머리는 이해를 하지만 마음이 이해를 못한다. 내가 가치있어 하는 그 많은 것들이나 혹은 내가 소중하게 여기는 것들의 의미가 모두 그냥 내 머리속에서만 존재하는 것들이라니..

 

희망에 찬 세상을 향해 용기 있게 외치는 정의에 대한 목소리나 마음을 울리는 타인을 위한 아름다운 희생에 대한 이야기조차 그저 우리 삶에서 가진 인간 상대적인 가치일 뿐이라니.. 죽음까지도 함께 할 열정적 사랑이나 나의 목숨을 바꿔도 아깝지 않을 자식에 대한 숭고한 희생도 마찬가지다. 물론 그 자체가 의미없다고 말하고 싶은 것은 아니지만 그냥 그런 가치들조차 결국 우리 인간에게 한정된 가치란 말이다.

 

물론 내가 인간이기에 그런 가치들에 대해 굳이 부정할 필요는 없다. 단지 그것들이 내가 인간이기에 가치를 갖는 절대적인 것이 아닌 상대적인 것이란 것이 슬픈것이다. 이해를 돕기 위해 설명하자면 그것들은 마치 애국심과 비슷하다. 내가 나라를 위해 최고의 가치인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이 가득차 전쟁터에서 적을 향해 용감히 총을 쏠 때 난 단지 태어난 곳이 현재 나의 적이 태어난 곳이 아닌 이유란 차이밖에는 없다는 것과 같은 것이다. 나는 우리나라에서는 용감하고 나라를 위해 싸운 영웅이지만 적군에게는 자국민을 사살한 살인범이나 다름없는 존재인 것이다.

 

좀 더 확장해서 자연계에 속한 인간의 위치를 생각해 본다면 인간의 생명에 대한 숭고한 가치 역시 그를 위해 희생된 셀수 없을 만큼 많은 동물들의 희생에서 내가 돼지였다면 과연 인간의 생명을 그렇게 타당하게 숭고한 가치라고 인정해 줄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생기는 것이다. 물론 실제로 의문 수준이 아니다. 내가 정말 돼지라면 내가 하루라도 더 살기위해 인간이 한명이라도 적어야 한다.

 

범위를 좁혀 인간과 인간 간의 관계에서도 우린 자신의 목숨과 또다른 인간에 대해서 상상하기 힘들 정도로 의미를 부여하고 있지만 늘 그렇듯 타인의 목숨은 내 목숨이 살아있는 한계까지만 가치를 가질 뿐이다. 누군가 나를 죽이고자 할때 나는 능력이 된다면 그를 먼저 죽여버릴 것이다. 그리고 절대적이라고 믿는 내 존재가치를 지켜낼 것이다. 하지만 죽은 그 사람도 역시 나와 다를바 없이 자신의 삶의 가치를 절대적으로 믿었을 것이 틀림없다. 두 절대가치의 충돌에서 나는 철저히 내 편이 된다.

 

그렇다면 무슨 이유로 세상에 계속 존재해나가는 것일까? 이유도 없는데 말이다. 정녕 나는 왜 사는가?

 

얼마전 누군가 나에게 이 질문을 던졌을 때 나는 갑자기 생각나서 대답을 했다. 그 답은 '왜 사는지 알고 싶어서 산다' 였다.

 

"왜 사냐"는 질문에 "왜 사는지 알고 싶어서 산다"는 엉뚱한 답을 했는데도 불구하고 나는 갑자기 혼란스러운 머리가 정리됨을 느꼈다. 물론 답은 알고 있다. 왜 사는지 이유는 없다는 것이 정답이다. 우린 그냥 존재할 수 있기에 존재 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나의 남은 생을 내가 할 수 있는 한 내가 존재하는 이유를 찾고자 한다는 희망을 품을 수 있었다. 왜냐면 그것이 내가 존재하는 이유가 되기 때문이다. 또한 결론적으로 지금도 마음 깊이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는 나의 우연성, 즉 나의 존재 가치없음을 정말 깊이 제대로 인정하길 바란다.

 

아직도 나는 내가 의미 없음을 머리로만 인정하고 있다. 그래서 나에게 주어진 나의 삶은 그것을 마음으로 인정할 수 있는 현명함을 갖길 바란다. 내가 아무것도 아니고 내가 의미없는 존재라고 해서 내가 살지 말아야 할 필요는 결코 없다. 나는 조금 나보다 부족한 사람들에게 도움을 줄 수도 있고 (물론 그 역시 의미는 없지만 행복한 감정은 얻을 수 있다) 내가 소중한 여기는 사람들과 좋은 시간을 보낼 수도 있고 또 내가 좋아하는 일들을 즐기면서 행복을 찾아 갈 수 있다.

 

여기에서 정말 중요한 것은 내가 느끼고 생각하고 믿는 그 모든 것들이 실제로는 의미없음을 인정하고 삶에 대해 내 존재에 대해 최대한 공손한 태도를 보이길 희망한다. 나를 존재하게 하고 나를 살아갈 수 있게 해주는 지구의 땅, 대기, 멀리 있는 태양, 푸른 물, 녹색의 식물, 인간에게 끝없이 사육당하고 죽음을 맞이하고 있는 동물들에게 고개를 숙이고 진심으로 감사할 수 있길 바란다.

 

그때가 될때 난 어쩌면 존재의 의미를 아주 조금이나마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물론 이것도 이루기 매우 힘든 희망이겠지만 말이다. 어찌 인간이 단 하나의 희망도 없이 세상을 살아가겠는가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