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과철학

흐르는 강물을 거슬러 살아간다는 것은

아이루다 2012. 11. 11. 21:27

 

몇 년전 부터 대한민국의 청소년들의 겨울용 외투는 '노스페이스' 라는 이름을 가진 등산용품 전용 브랜드 로고가 찍힌 패딩 점퍼로 거의 고정되어졌다.  인터넷을 통해 우연히 봤던 어떤 사진에서 한 평범한 교실로 보이는 장소에 뒤에서 학생들의 뒷모습을 찍은 사진에는 모두 검은색 계통의 옷에 선명한 브랜드 로고가 찍힌 웃기면서도 씁쓸한 사진 한장의 느낌이 떠오르기도 한다. 물론 그 사진 역시 평범하지는 않았기에 사람들 사이에 공유되었겠지만 그만큼 학생들의 쏠림도가 심하다는 것쯤은 꼭 등골 브레이커 (부모의 등골을 빼먹는 제품이란 의미)라고 불린 그 제품에 대한 기사를 읽어보지 않아도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들에게는 노스페이스 패딩점퍼는 선택이 아니였다. 물론 소수의 여유로운 경제사정에 놓인 어떤 가족의 아이들은 그것이 너무도 좋고 마음에 들어서 샀겠지만 수십만원씩 하는 그 제품을 부모에게 사달라고 조른 학생들 중 많은 아이들이 바로 오직 흐름에 뒤쳐지지 않기 위해 샀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 슬픈 일이다. 그리고 부모는 자기 자식이 남들에게 기죽어 사는 모습이 마음 아프거나 혹은 아이의 끝없는 요구에 지쳐서 제품을 사기 위해 길을 나섰을 것이다.

 

인생이란 짧고도 긴 여정을 통해 보면 나이가 어릴 수록 자기 또래의 생활방식 흐름에 거역하는 일은 매우 힘들다. 아직 자기만의 체계적인 가치관이 잡히지 않은 그 나이에는 옳고 그름에 대한 판단, 가야할 길과 가지 말아야 할 길에 대한 선택도 매우 힘들며 누군가 내뱉은 한마디 말에 크게 영향을 받거나 심지어 이성을 잃을 정도의 반응을 보일 수 있다. 아직 충분히 살아보고 또 미숙한 경험으로 인해 충동적인 자살도 이루어지고 타인에게 상처주거나 혹은 상처입는 일에 대한 스스로 자각도 잘 하지 못한다. 그리고 누구나 그런 시절을 보냈고 거기에서 살아남았기에 지금 성년이 되어 세상을 살아갈 수 있는 것이다.

 

성인이 되면 가정을 꾸리고 자녀를 양육하는 부모세대가 되면 이제 또 반대 입장에서 그런 청소년들의 판단과 행동패턴에 대해 상당히 부정적으로 변한다. 누가 골목 한구석에 어두침침한 곳에 모여서 담배를 피우고 있는 10대를 긍정적인 시선으로 바라볼까? 하지만 떠올려보라.. 그들의 모습은 우리의 과거이다. 누군가는 이렇게 항의할지도 모른다. 나는 중고등학교 시절 담배도 안피우고 저런 으슥한 곳에서 모여서 욕하면서 지내지 않았다고. 그럼 스스로 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해보라. 고등학교 시절의 나와 지금의 나는 완전히 다른지를 말이다. 우린 모두 변했다. 만약 변하지 않았다면 당신은 지금도 고등학생 수준의 정신세계를 가진 사람일 뿐이다. 반대로 고등학교 시절에 성인의 가치관을 갖기는 힘들다. 경험은 절대적으로 시간을 필요로 하는 행동인 것이다.

 

한때 정의로움이나 도적적 가치관을 판단기준에서 최상위에 놓았던 어떤 학생이나 인간을 위해 살리라고 마음먹은 어떤 가슴 따뜻한 마음을 가진 여린 학생이나 인술과 법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자신의 길을 가려했던 학생들도 성년이 되어 세상을 살다보면 점점 세상에 적응해서 적당히 타협을 하게 되는 것이다. 반대로 뒷골목에서 담배를 피우며 침을 뱉던 아이도 언젠가 또 장사를 하고 트럭을 몰며 자신이 책임져야할 몫을 감당하고 살아가게 된다. 이것이 변해가는 우리들의 자화상이다.

 

대한민국이 거의 대부분의 아이들은 휴대폰이나 스마트폰을 가지고 살아간다. 그들은 또 대부분 학교를 다니며 방과후 학원에 간다. 물론 시골은 안그럴 수 있겠지만 서울과 경기권 지역에서 학원을 다니지 않고 학교를 마치는 경우는 거의 없다고 봐야 한다. 이들은 흐르는 강물에 올라탄 것처럼 끊임없이 낮은 곳을 향해 획일적으로 움직이며 여기에서 벗어나 그 자리를 지키거나 더 노력해서 역류를 하려는 시도를 한다는 것은 매우 힘든 일이다.

 

물론 부모의 특별한 노력에 의해 그런 흐름을 타는 아이들이 있다. 홈스쿨링이라고 해서 아예 학교를 가지 않고 검정고시로만 고등학교 졸업장을 따거나 대안학교라고 해서 아이들을 좀 많이 다른 방향으로 가르치는 부모들도 있다. 또한 정규 공교육을 받긴 하지만 학원을 가지 않는 아이도 아주 가끔 있다. 물론 이런 경우는 전체의 10%를 넘지 못하며 그나마 부모의 의지가 많이 영향을 미친 경우이다. (이정도에 대한 부모의 의지 또한 대단한 결심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실제 아이가 이런 흐름을 거부할 용기를 가질 수 있을까? 물론 사람이니 가능성을 열어두자. 불가능하지는 않지만 아이가 획일화된 교육을 거부하고 노스페이스를 교복처럼 입는 아이들의 모습을 비판적 시각으로 바라보며 스스로를 그들과는 다른 분리된 존재로 인식하기가 쉬운 일일까? 모든 아이들이 문자로 혹은 카톡으로 서로에게 연락하고 통화하면서 살아가는 모습에서 스스로 나는 공부하는 학생이므로 전화기가 필요없다고 말하면서 거의 모든 관계를 단절시킬 수 있을까?

 

결론은 거의 불가능하다고 봐야 한다. 특히 대한민국처럼 쏠림 현상이 심한 사회에서는 그래도 어느 정도 자신의 길을 찾았다는 성인들 조차 단 한발자국도 그런 흐름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사람들이 천지인데 이제 겨우 20년도 살지 못한 아이들이 과연 그런 힘든 여정을 스스로에게 채찍질 하면서 살아갈 용기는 거의 힘들다고 봐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또 다른 많은 어른들은 아이들의 그런 모습을 혀를 차면서 바라본다. 음주, 흡연, 청소년들의 연애, 과도한 휴대폰 집찹, 노스페이스 같은 브랜드에 목숨거는 행동, 집단 따돌림, 학교폭력 등등 아이들의 모습은 마치 일그러진 렌즈를 통해 세상을 바라보듯 뒤틀려 있을 뿐이다.

 

실제 문제는 이 청소년들이 아니다. 그런 청소년기를 보내고 성인이 된 그 사람들이 그 청소년기의 모습을 전혀 벗어나고 있지 못한 것이 훨씬 큰 문제이다. 아이들의 흐름 순응 현상이 단순한 옷이나 행동으로 제약되어 있었다면 성인들의 행동은 이제 실제 경제적인 부분, 즉 이득 및 타인의 시선에서 한 발자국도 벗어나지 못하거나 혹은 그 윗세대가 가르친 삶의 지혜라고 알려진 돈벌어 잘살기에 대해 고개를 끄덕이며 살아보니 어른들 말이 맞다 라면서 스스로를 납득시키고 설득시키며 합리화 한다. 집을 통한 돈을 벌기 위한 부동산 투기를 '재테크' 라는 명목으로 치장하고 직장에서 자신을 능력 이상으로 치장하는 행위를 아부가 아닌 '자기PR'이란 이름으로 바꾼다.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상대방의 부정행위에 대해 눈감고 적당히 세상의 더러움을 용서하고 또 자신도 거기에 합승해 이득을 챙기면서 살아간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이 자신의 가족과 자신을 위해 어쩔 수 없이 하는 일이며 또한 하지 못하는 것이 바보라고 여기고 비웃는다.

 

결혼을 할 때 자신의 배우자에 대해, 사람을 만날때 어떤 사람인가 궁금하기 보다는 어디에서 자랐고 어느 대학교를 나왔으며 어떤 직장을 다니는지를 궁금해 한다. 자신의 경조사에 사람이 얼마나 많이 왔는지를 토대로 삶의 성공을 가늠하여 판단하고 그래서 그 자신도 끊임없이 경조사를 찾아 다닌다. 거기에 좀 더 이기적으로 발단한 사람들은 이제 대놓고 자신의 경조사에 대해 광고를 하고 더 많은 사람들이 오길 유도한다. 한사람 한사람이 다 돈으로 계산이 된다.

 

자신이 그 일을 할때 행복할지를 생각하기 보다는 자신의 거기에서 일을 하면 얼마나 더 높은 연봉을 받을지 고민하고 그렇게 일하는 직장에 대해서 끊임없는 불만을 늘어 놓는다. 대부분 자신의 자신의 능력에 비해 적은 연봉을 받는다고 느끼고 매일 기회를 노려 더 높은 연봉을 받을 수 있는 곳으로 이직하기 원한다. 배우자를 선택할 때도 자신의 급과 맞는 상대를 원하며 여자들은 경제적 능력을 남자들은 외모적 우월성을 우선적 가치로 삼고 또 모두들 그것이 당연하다고 말한다.  물론 아주 소수 그것에 대해 거부감을 가진 이들이 있다. 하지만 이들도 대부분 대체적으로 그런 경향을 거부하긴 힘들다. 누군들 돈 많고 외모가 수려한 상대를 거부하겠는가?

 

이렇게 흘러가는 세상에서 어떤 이들은 이제 도저히 숨막히는 압박을 이겨내지 못하고 중간에 스스로 목숨을 끊거나 혹은 도시를 탈출해 흐름이 좀 많이 원만한 곳으로 향하기도 하며 기회가 좋아 외국에서 다른 흐름을 경험한 이들은 우리 모두가 한강의 흐름처럼 한줄기가 아닌 수 많은 작은 줄기로 바다로 향하는 것도 아무런 문제가 되지 못한다는 것을 깨닳기도 한다. 개개인은 그저 자신이 행복한 방향으로 살아가면 된다.

 

그렇게 살아가는 성인들은 아이를 낳고 아이에게도 그렇게 사는 것이 행복한 것이라고 교육시켜준다. 남들보다 더 잘벌고 남들보다 더 잘먹고 남들보다 더 나은 배우자를 찾아야 한다고 가르친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 지금 이 시간이 매우 중요하고 그래서 공부하고 또 공부를 해야 한다고 한다. 설령 여기에서 참교육을 하겠다고 아이들이 어떻게 행복할지를 가르치는 교사가 있다간 바로 학부모들의 시위와 항의속에 살아남지 못하고 도태된다. 이제 성인들은 경쟁에 이기는 것만이 최고의 행복이 되는 세상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어린 아이들에게 커보면 고마워할 것이라고 말해준다.

 

어떤 아이들에게 이런 흐름은 매우 긍정적이다. 머리를 좋게 태어나고 좋은 성격을 가졌으며 열심히 공부하면 좋고 행복한 인생을 살아갈 아이들이 그런 대상이다. 하지만 과연 얼마나 많은 아이들이 이런 조건에 들어갈 수 있을까?

 

사회는 삶의 정답을 굵은 글씨로 적어두고는 아이들에게 이것만이 살아가는 유일한 방법이라 끊임없이 주입시킨다. 아이들은 꽃을 가꾸거나, 여행을 하거나, 수필이나 시와 같은 책을 읽거나, 고민하고 사색하거나 하는 행동은 경쟁력을 갖추는데 아주 불필요한 요소라고 생각하고 그런 것에서 부터 행복해 하는 법을 배우지 못한채 성인이 되어 그들 역시 그 전세대를 그대로 답습하면서 살아간다. 행복이란 것은 연습이 필요한 감정이다. 어린시절 힘들게 피아노를 배웠어도 성년이 되어 어느날 혼자 집에서 치는 피아노가 행복할 수 있으며 힘들게 요리학원을 다니면서 배운 요리실력은 다른 사람들과 모임에서 그 자신과 지인들을 행복하게 해준다. 줄줄히 꿰고 있는 프로야구 선수 이름은 그가 야구를 볼때 그를 더욱 즐겁고 행복하게 해주는 것이다. 하지만 그런 것들이 모두 살아가는데 불필요하다고 여겨지게 되면 도대체 어떤 일을 통해 우린 행복해지는 법을 배우게 될까? 내가 아는한 대한민국의 성인들 행복공식은 TV, 게임, 술, 모임, 가끔가다 국내여행, 영화, 쇼핑, 맛난 먹거리 먹으로 다니기, 여유되면 해외여행, 남자들의 밤문화, 이정도 일까?

 

도대체 왜 그리고 무엇을 위해 사는가? 모두들 행복하게 살고 싶은것이 아닌가?

 

돈을  많이 벌어서 행복하게 쓰고 싶어서 사는가?  정말로 옆집 철수보다 입사동기인 영수보다 더 빨리 진급하고 더 많은 연봉을 받기 위해서 살아가는가?  그렇다면 철수나 영수가 없어지면 그땐 무슨 행복으로 살아갈 수 있겠나?

 

포기하는 이들도 많고 심지어 도태되고 결국 자살로 삶을 마감하는 이들도 많다. 구체적인 연관관계는 없을지 모르지만 과도한 스트레스에 의한 질병 사망도 아주 많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우린 경쟁 스트레스로 인해 나를 죽이고 상대를 죽이고 있다. 그리고 모두들 커다른 흐름 속에서 허우적 거리면서 잠시 견고한 땅에 두 발을 대고 설 엄두조차 못내고 있다. 내가 잠시 쉬는 동안 남들은 모두 저 멀리 먼저 가버릴것 같은 불안감은 우리를 절대 쉽게 쉬게 해주지 못한다. 수십년을 교육받은 그 성과가 너무도 잘 나타나고 있는 형편이다.

 

어떤 삶을 살아왔는가? 또 남은 생애동안 어떤 삶을 살아갈 것인가? 물론 모든 것은 개개인이 판단할 몫이다. 그리고 스스로 내가 어떤 삶을 살아갈 것이란 생각을 한다고 해서 절대 쉽게 이루지 못한다. 흐르는 강물을 거슬러 가는 행동은 용기가 있기도 하지만 매우 많이 힘든 일이다. 반대로 순응은 그만큼 편안한 삶이다. 하지만 나도 멈추고 내 옆에 있는 혁성이도, 동석이도, 종운이도 멈추면 그래서 몇몇 이들이 멈추면 그 작은 방해로 인해 강의 흐름은 조금이라도 느려질 수 있다. 그렇게 되면 또다른 멈추고자 하는 이들이 또 멈춰서는 용기와 기회를 줄 수 있다.

 

하지만 아마도 이나라에 그런 세상이 오기엔 아직도 많은 시간이 필요해보인다. 나역시 그러 흐름에 겨우 겨우 견디며 이제 반발자국 덜 밀려 갈려 애쓰며 살아간다. 이조차도 이렇게 쉽지 않는데 어찌 온전히 서서 그 강물에 버틸 것이며 거기에 거슬러 올라갈 용기는 또 얼마나 힘든 길일지 상상해본다.

 

나는 나의 30년 후를 기대한다. 이렇게 살아가다 보면 내가 충분히 나이를 먹은 어느날 내가 그렇게 힘들이지 않고 강물을 거슬러 오르며 행복한 웃음을 짓는 그날이 오길 바란다. 내가 이 사회의 흐름을 바꾸진 못하지만 적어도 힘을 보태지는 않아야겠다는 것이 나의 작은 소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