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과철학

진실 혹은 사실을 대하는 우리의 자세

아이루다 2012. 8. 19. 09:29

 

어릴때 아이들의 언어를 보면 매우 직설적임을 금방 알 수 있다. 그 이유는 아이들은 상대의 기분이나 혹은 심리를 파악하는 능력이 부족하고 또한 그것으로 인해 파생되는 나의 유불리를 예측하는것이 아직 제대로 발달하지 못해서 그렇다. 그리고 그 미발달한 이유는 역시나 많은 사람들과 아직 어울려보지 못한 경험부족과 함께 절대적 시간부족이다. 아이들은 그래서 직설적으로 표현하고 공격하고 심지어 괴롭히기도 한다. 가끔 아이들과 함께 있다보면 아이들의 정직한 표현에 어른들이 재밌어 하거나 당황하거나 하는 모습을 보기도 한다.

 

"엄마 저 아저씨 못생겼어" 이런 표현은 엄마를 많이 난처하게 한다.

 

나 역시 그런 어린시절을 보냈다. 그리고 나이를 먹으면서 점차 내가 하고 싶어서 내뱉는 말들이 어리다고 해서 마냥 용서가 되지 않는 시기를 거쳐(고등학교때나 대학교때 "엄마 저 아저씨 못생겼어" 라는 말을 했다가는 한대 맞을 수도 있다) 이젠 제대로 된 신호를 받기 시작한다. 즉 상대가 기분좋은 말을 하는것과 상대가 기분나쁜 말을 하는 것에 대한 확실한 상벌에 대한 인식을 하는 것이다.

 

가는 말이 고와야 오는 말이 곱다는 인식을 하는 것이다. 물론 가는 말이 험해야 오는말이 곱기도 하다. (이 경우엔 자신이 절대적 유리한 위치에 있을때이다)

 

아무튼 사람은 나이를 먹으면서 점점 상대에게 마음 속 생각의 진실을 표현하기 보다는 같은 표현을 하더라도 매우 간접적인 방식이나 혹은 아예 마음속에 묻어버린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행동까지 변하지는 못한다. 누군가에게 호감이 있다면 얼굴에 들어나기 마련이며 또한 뭔가 섭섭함을 느꼈다면 하나하나 행동에서 그것이 나타나기 마련이다. 그리고 실제로 그것의 미묘한 변화들을 잘 잡아서 상대의 마음을 풀어줄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사람이 훨씬 많은 사람들과 좋은 관계를 유지할 가능성이 높다. 물론 그전에 섭섭함 자체를 못느끼게 해주는 탁월한 능력을 가진 이들도 있지만.

 

이렇게 우리는 진실을 표현하는 능력도 또한 진실을 받아드리는 능력도 점차 쇠퇴되어 간다. 그리고 여기에 나이를 먹으면서 점점 더 알게되는 수 많은 공동체 사회의 문제에 대해 태도를 다르게 가져간다. 우리는 민주주의를 기반으로 한 자본주의 사회에 살고 있다. 그렇다보니 생각보다 심각한 문제가 아주 많이 일어난다. 과거에 독재정권에 투쟁했던 수많은 이들의 죽음이나 하루에 16시간의 노동을 통해 만들어진 노동착취의 상품들, 그리고 엄청난 빈부격차와 소외되어 도태되는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들로 세상은 가득차있다. 물론 그것들을 보지 않고 살면 세상은 분홍빛 알록달록 무지개같은 세상이다. 나의 부모는 나를 사랑하고 충분한 경제력과 특별히 돈걱정하지 않고 살아갈 개인적 능력과 운이 따른다면 세상은 그져 아름답고 행복하기만 한 것이다.

 

어떤 세상에서 살아갈지는 온전히 본인이 선택해야만 하는 몫이다. 진실을 말하고 진실을 듣고 진실을 얻고자 하며 살아가는 것이나 자신을 둘러싼 좁은 범위의 진실만을 보고 느끼며 행복하게 살아가느냐에 대해 누구에게도 이렇게 살아라라고 말해줄 수는 없다는 말이다.

 

어떤 과학자들은 자신이 하는 연구가 너무 중요하고 행복해서 세상 모든 일을 잊고 그 연구만을 집중해서 한다. 또한 어떤 공학자 역시 자신이 만들어 내는 모든 결과물이 너무 중요해서 내가 그 분야에 공부하고 또 연구해서 살아가는 것이 중요하지 세상사는 일에 관심을 가질 여유도 필요도 없다.

 

또다른 과학자는 자신이 하는 연구가 세상에 끼칠 영향을 생각하고 고민한다. 스스로는 최고의 연구성과를 거두었지만 이것이 세상에 있어 악용될 경우 매우 커다란 문제를 일으킬 수 있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있기 때문에 자신의 연굴에 대해 매우 고민스러워 하는 것이다. 또다른 공학자는 자신이 만들어내고 있는 것이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매우 커다란 도움을 주긴 하지만 자신이 소속된 기업의 악마와 같은 성격에 의해 매우 비싼 가격에 아주 소수의 사람들만 그것을 사용할 수 밖에 없음을 슬퍼하며 대안을 찾는다.

 

이 예들은 실제로 매우 현실적으로 일어나고 있다.

 

가끔 사회 부조리를 매우 적나라하게 파해치는 영화들이 있다. 최근엔 도가니 나 부러진 화살과 같은 류가 그런 종류의 영화이다. 물론 많은 사람들이 그 영화를 보긴 하지만 어떤 이들은 그런 영화를 잘 안보려고 한다. 왜냐면 보고나면 기분이 우울해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사람이 이상한 사람은 아니다. 누구나 그런 종류의 영화를 보고나면(특히나 나쁜놈들이라고 판단되는 애들이 더 성공하는 모습을 보면)  심한 분노와 함께 정말 기분이 매우 나빠지게 되기 떄문이다.

 

사회에 숨겨진 악날한 진실은 안보는게 속편하고 맘편하게 살 수 있는 지름길이다. 내가 지금 사용하고 있는 아이폰이 중국의 팍스콘이라는 인권착취 공장에서 만들어지고 있다는 사실은 알아도 그리 신경쓰지 않는 것이 편하다. 또한 수많은 백혈병 환자를 양성중인 삼성의 반도체 공장에서 만들어진 메모리를 내 컴퓨터에서 쓰고 있는 것도 생각 안하는것이 좋다. 내가 쓰는 그 모든 제품들이 어디에선가 노동착취를 통해 만들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되면 정말 세상에서 내가 즐길 수 있는건 없다. 또한 그렇다고 해서 내가 소비를 하지 않으면 그 노동착취를 당하는 사람들은 아예 노동조차 못할 수 있어서 굶어 죽는다.

 

밍크코트를 예쁘다고 입는 사람과 밍크들이 정말 심각한 생육환경에 놓인채 불쌍하게 껍질이 벗져지고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동물보호 운동을 하는 사람 역시 그런 맥락에서 이해해야 한다. 누군가는 들어도 잊어먹거나 혹은 '그래서?' 라고 넘기고 누군가는 왜 그런지 또 그렇게 하면 안된다고 말한다.

 

이 부분에 대한 인간의 가장 중요한 능력 중 하나는 공감 이다. 공감, 타자의 감정을 스스로 경험하지 않아도 과거의 경험을 통해 그것을 유추해내는 능력이다. 그리고 이것은 현재 힘든 사람들에게 우리가 힘을 줄 수 있는 매우 중요한 능력 중 하나이다. 그리고 이 공감능력은 인간의 범위를 벗어나 무생물에게도 발휘되면 동물과 심지어 식물까지도 확장될 수 있다. 이 공감능력의 차이가 사람들의 태도를 결정하는데 매우 큰 영향을 미치며 거기에 성격적 요소가 결합되어 최종 모습이 나타나는 것으로 보인다.

 

그냥 알게된 진실도 잊어먹는 훈련이 잘되어 있는 사람, 그냥 알게된 진실은 기억하지만 오래 안가는 사람, 그냥 알게된 진실로 인해 변화가 있는 사람, 그냥 알게된 진실뿐만 아니라 스스로도 차아내려는 사람, 찾아낸 수 많은 진실에 분노하며 자신과 타인의 삶에 많은 관심을 갖는 사람 등등 사람은 매우 다양한 모습을 진실을 대하게 된다. 그리고 그 중에 내가 어디에 속하는지는 그 스스로 판단할 수 있다.

 

하지만 이것은 있다. 그 자신이 사이코패스 혹은 소시오패스와 같은 공감능력 미달자가 아닌다음엔 보통 숨겨진 사회적 문제를 대하고 나면 약간의 양심적 가책은 느끼기 마련이다. 하지만 보통 그것을 강요하면 반대로 또 매우 큰 화를 낼수도 있다. 인간관계에서 매우 조심해야 할 비난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자신이 진실이라고 믿는 생각을 타인에게 좀처럼 말하지 않는다. 그것은 마치 어린 아이가 다른 아이에게 '이 그지같은 놈아' 라고 말하던 것을 어느날 그 그지같은놈이 나의 직장 상사가 되었을 때 내가 왜 그지같은 놈이라고 불렀을까 하는 후회하면서 스스로 다짐하는 것과 같다.

 

사람마다 진실을 말하길 꺼려하고 셋만 모여도 그져 즐겁기만 바란다. 젊은 시절엔 그래도 진실을 알고자 하는 욕구는 있지만 나이를 먹으면서 그런것이 과연 무슨 소용인가 그리고 또한 그래봐야 나만 손해다라는 생각에 마음을 닫아버린다. 진지함은 피해야 할 태도이며 잘놀고 행복한 사람들이 환영받는다.

 

이렇게 우린 진실로 부터 최대한 멀어지려 애쓰며 행복하려고 살아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