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과철학

자신이 아닌 존재에게 관심없는 사람들

아이루다 2012. 12. 24. 10:46

 

세상을 살아갈 때 타인에게 관심을 갖는 것은 꽤 피곤한 일이다. 특히 남에게 관심을 갖다 보면 내가 굳이 알 필요가 없는 정보를 얻거나 혹은 그들의 입장을 생각하게 되는 의도하지 않은 역지사지를 경험하기에, 그냥 해 버려야 할 일도 제대로 못하거나 나의 권리임에도 불구하고 소극적으로 부탁을 하는 경우도 있다.

 

그래서 내가 아닌 타인의 관점을 고려하거나 혹은 그 사람에 대한 관심을 조금이라도 갖고 정보를 취득하려 한다면 내가 그 타인들의 시선을 의식하는 좋지 않는 결과를 초래한다쉽게 말하면 눈치를 본다는 말이다.

 

나는 어느 순간부터 내가 다른 사람들의 눈치를 보는 것이 싫었다. 세상에 대해 그리고 세상을 구성하는 많은 다른 존재들로부터 자유로워지고 싶었고, 또한 내 마음대로 가식적이지 않게 사는 것이 옳은 삶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마음은 지금도 그리 다르지 않다.

 

세상을 살면서 타인의 눈을 의식하고 타인이 나를 평가하는 잣대를 끊임없이 고려하면서 산다는 것은 물론 공동체 생활을 하는 인간에게는 타고나기도 하고 절대적으로 필요한 성향이다. 하지만 이것으로 인해 내가 아닌 가면을 쓴 내가 되어야 하며 원하지 않는 일을 해야 하는 일도 있고 그리고 결정적으로 그렇게 살아가야 하는 내 존재에 대한 실망감도 매우 크기에 나는 다른 사람들의 시선을 극복하고 싶었다.

 

어려서 읽은 거지스님이라 일컬어진 중광스님과 같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난 어떻게 해야 저런 사람들처럼 완전히 다른 사람의 눈으로부터 자유로워질까 하는 절망도 느끼기도 했다.

 

그런 나에게 꽤 오랫동안 풀지 못한 이상한 현상이 하나 있다그것은 바로 흔히 보이는 사람들은 내가 꿈꾸는 타인에게 무관심한 단계를 이미 거의 달성하고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보면 나는 길을 걸을 때나 지하철을 탈 때 끊임없이 사람들을 관찰하는 버릇이 있다. 꼭 뭔가 얻으려고 하는 게 아니라 나도 모르게 버릇처럼 그렇게 한다. 그런데 요즘 보면 길에나 또는 다른 공공장소에서 행동하는 사람들은 나를 거의 길가에 서 있는 전봇대 같은 존재로 대한다. 특히 길에서 스마트폰 보면서 지나가는 사람에겐 난 그냥 자신의 길을 방해하는 방해물로 여기는 듯 보인다.

 

나는 꽤 나에 대해 오래 생각하고 고민하고 그렇게 살아오면서 나를 의식하는 것들로부터 자유로워지려고 그리 노력했음에도 아직 턱없이 부족하다. 하지만 별다른 생각을 하는 것처럼 보이지 않는 많은 사람들이 내가 진정 도달하고 하는 타인에 대한 무관심 상태에 이미 도달해 있는 것이다.

 

도대체 나는 무엇을 하고 있는 것인가? 이미 사람들이 기본적으로 가진 능력조차 갖지 못해서 이렇게 안달을 하고 살고 있단 말인가? 하는 조금 개인적으로는 어처구니 없는 의문이다.

 

타인에게 거의 아무런 관심이 없는 대다수의 사람들, 타인에게 관심을 갖지 않으려고 용을 쓰는 나, 도대체 난 어떻게 생겨먹은 인간이란 말인가.

 

그런데 어제 생각을 하다가 문득 깨달아 지는 것이 하나 있었다. 그것은 바로 사람들이 왜 타인들에게 무관심한지 그리고 그것이 또 어떤 결과로 이어지는지 말이다. 그리고 결론적으로 세상을 구성하는 많은 사람들이 왜 그런 모습으로 살아가는지 모든 것이 한꺼번에 이해가 되었다.

 

이제부터 그 이야기를 쓰려고 한다.

 

만약 세상에 나 혼자만 존재했었다면 과연 나는 나 자신을 인식할 수 있을까? 물론 흐르는 물에 비친 나를 보면서 내가 어떤 식으로 생긴 존재인지는 알겠지만 내가 잘생겼는지 혹은 얼굴에 문제가 없는지 또는 키가 큰지 작은지 뛰어난 능력을 가진 존재인지 열등한 존재인지 내가 그것을 인식 할 방법이 있을까?

 

당연히 없다. 왜냐하면 그것을 판단하기 위한 비교 가능한 존재가 없기 때문이다. 결국 쉽게 말하면 우리가 우리 자신을 인식하는 것은 바로 타인을 통해서 가능하다는 결론이 나온다. , 타인은 나를 비춰주는 거울인 셈이다.

 

물론 그것 자체를 인식하기도 쉽지 않다. 아버지를 싫어하는 아들이 나이를 먹고 아버지를 닮아가지만 실제 본인은 그것을 잘 인식하지 못하고 여전히 아버지를 싫어하는 것처럼 말이다.

 

우리가 우리를 인식하는 가장 중요한 방법이 타인이라면 내가 타인에게 관심이 없다는 말은 어떤 의미가 되는가? 거꾸로 말하면 내가 나에게 관심이 없다는 말이 된다.

 

물론 그 자신은 자신에게 관심이 없다는 것 자체를 인식하지 못할 것이다. 마치 타인에게 내가 관심이 없다는 것을 인식 못하듯. 무인도에 태어나 혼자 살아가는 존재처럼 세상을 사는데 정말 최소화의 관심만 가지고 살아간다.

 

그것은 내가 길을 걸을 때 누군가와 부딪히지 않으려 하는 것이나 내가 심심할 때 만날 친구, 나를 보듬어줄 가족 정도만 유지하면서 거기에 욕심을 좀 더 내자면 나에게 이득을 가져다 줄 타인들에게 정도만 관심을 가지면서 살아간다.

 

그 외의 거의 모든 다른 존재들은 내가 살아가는 데 필요한 부속품이거나 혹은 방해요소가 된다. 그러니 실제로 내가 필요 하는 존재 이외의 타인들은 신경 안 쓰고 살아가는 게 옳다.

 

이것은 인간의 범위를 벗어나기도 한다. 내가 맛있는 소고기를 먹거나 먹음직한 삼겹살을 구울 때 분위기 내는 커피 한 잔이나 무척 비싼 상어 지느러미 고기를 먹을 때 내가 그것이 어떤 경로로 생산되고 제공되고 있는지를 고려할 필요가 없다.

 

지구가 인간에 의해 오염되고 평생을 좁은 우리 속에서 알을 낳다가 우리에게 맛있는 치킨으로 제공되는 그 수 많은 닭이나 씨가 말라가는 바다 생물들의 미래를 내가 맛있게 먹는 이 시점에 생각하고 또 평소에도 관심을 가질 이유는 단 1%도 없다. 그것은 나의 행복을 방해하는 요소이지 나를 더 행복하게 도와주는 정보들이 아니다.

 

이런 무관심은 나를 행복하게 하는데 커다란 도움을 준다. 어려운 사람들이나 혹은 내가 배려해야 할 사람들에 대해 굳이 관심을 가져서 괜히 마음 불편하게 살아갈 필요가 없다. 나는 나를 둘러싼 나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사람들에게만 관심을 갖고 사는 것도 충분히 힘들며 나의 시간은 오직 나의 행복을 위해서만 써야 옳은 것이다. 이것이 바로 타인에게 무관심한 사람들의 진정한 정체이다.

 

내가 달성하고자 하는 무관심의 단계에 이미 도착한 사람들은 그래서 실제로 타인의 눈을 잘 의식하지 않는다. 또한 타인의 감정이나 처지에 대해서도 쿨하게 무시할 수 있으며 자신의 권리를 명료하게 잘 전달한다. 그리고 혹시나 자신이 입을 수 있는 손해도 역시 제대로 보상 받는 똑똑함을 가지고 있다.

 

나는 가끔 이런 생각을 한다. 만약 빵이 98개가 있고 그것을 먹을 사람이 100명이라면 줄을 서서 98명만 먹는 게 옳은지 힘으로 경쟁해서 싸워서 98명만 먹는 게 옳은지 98개의 빵을 잘 쪼개서 100개를 만들어 먹는 것이 옳은지 말이다.

 

나는 세 번째 방법을 선택하는 스타일이다. 그것이 생각할 줄 아는 인간이 그나마 현명하게 결정할 수 있는 방법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세상 사람들은 실제로 두 번째 방법만 있는 줄 안다. 경쟁사회이고 또한 재수가 있으면 빵 하나가 아닌 10개를 얻을 기회도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세 번째 방법을 공산주의라고 한다.

 

줄다리기를 할 때 모두 같은 방향으로 동시에 당겨야 그나마 이길 가능성이 있다. 이것이 바로 공동체놀이의 특성이다. 모든 사람이 같은 방향으로 보고 같은 시점에 힘을 써줘야 효율이 극대화되는 것이다. 그런데 우린 같이 살면서 이런 현명한 힘쓰기를 전혀 못하고 있다. 서로 두려움에 떨면서 누군가 내 것을 뺏어가지 않을까 걱정하면서 더 많이 얻고 더 많이 행복할 방법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전혀 그것을 얻어내지 못한다.

 

21세기 대한민국이 가진 정말 심각한 한계이다. 우린 지금 개개인의 능력으로 달성할 거의 최고의 목표에 도착해 있다. 이젠 힘을 모아서 댕겨야 상대를 이길 수 있는데도 불구하고 아직도 각자 원하는 방향과 원하는 시간에 줄을 당기도 있다.

 

왜 갑자기 타인이야기에서 줄다리기 이야기로 바뀌었는지 궁금할 것 같기도 하다.

 

줄을 제때 당기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물론 누군가 신호와 방향을 지시해주는 사람이 있다면 좋을 것이다. 그것이 사회를 이끌어나가는 훌륭한 리더의 존재이다. 하지만 그렇지 못할 경우라면?

 

당연히 옆 사람이 어느 방향으로 또 어떤 시점에 힘을 쓰는지 관찰을 해야 한다. 그리고 내가 그것에 맞추고 또 다른 사람이 나에게 맞추고 그렇게 퍼져나가면 전체가 맞춰진다. 일종의 동시성 추구이다. 그리고 이렇게 모아진 힘은 정말 어마어마한 위력을 발휘할 수 있다.

 

처음부터 타인에게 무관심한 사람들은 이런 훈련을 받은 적이 없다. 그리고 평생 그렇게 살아갈 것이다. 내가 아닌 그리고 내 가족이 아닌 다른 이들에겐 최소화의 관심만을 가진 채 자신의 행복을 위해서 할 수 있는 최선을 노력을 다해 살아갈 것이다.

 

하지만 대다수의 사람들의 이런 행동은 풍선 속에 갖힌 공기와 같은 모습을 가질 뿐이다. 공기가 풍선을 뚫고 자유를 찾기 위해서는 방향으로만 힘을 써야 하는데 모두 각자 힘을 쓰는 바람에 풍선 모양만 둥글게 예뻐지는 것이다.

 

그런 이런 삶은 또 다른 안 좋은 결과를 가져온다. 남에 대해 관심이 없기에 나에 대해서도 관심이 없고 그래서 사는 것에 대한 인간적 성찰도 없다. 따라서 어떤 정보에 대해 합리적이고 합당한 판단을 하기 보다는 누군가 의도적으로 주입시키는 정보에 현혹되어 자신도 모르게 기계처럼 동작하면서 살아가는 된다. 즉 개개인의 철학이 부재하여 결국 인간이 아닌 먹고 싸고 돈 벌어 쓰는 기계가 되어버린 것이다.

 

내가 아닌 남에게 대한 무관심은 결국 세상을 구성하는 아주 다양한 요소에 대한 무관심이다그리고 또한 나의 행동 하나하나가 세상에 어떤 영향을 미칠 수 있는지 전혀 고려하지 않는 지극히 개인적이고 돌발적인 행동만을 의미하게 된다.

 

이 시대에 개개인이 하는 투표가 그것의 아주 큰 예가 된다. 물론 투표를 했다고 해서 모두 남에게 관심을 가진 사람들이 아니다. 실제로는 거의 없다고 보는 게 맞다.

 

그 중 아주 소수만이 세상에 타인들과 행복하게 살아가야 한다고 믿는 사람들이며 나머지 대다수는 자신의 이득을 잃을 수 없다는 두려움에 투표를 한다. 물론 빨갱이가 싫어서 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그 사람들 역시 빨갱이에 대한 두려움이 있기에 그렇다.

 

그런데 왜 이득을 잃을까 걱정할까? 왜 빨갱이 세상이 될까 걱정할까?

 

그것이 실제로 일어날 일일까? 아니면 누군가 주입시켜 놓은 세뇌일까?

 

만약 세뇌라면 왜 그것을 스스로 인식하지 못할까?

 

이것이 바로 타인에게 무관심하고 그래서 결국 자신에게 무관심한 사람이 갖는 치명적인 오류이다. 결국 이 인식의 부재가 바로 이들이 갖는 커다란 문제인 것이다.

 

처음 혼자 사는 사람에 대한 이야기를 했듯 나 혼자 살면 인식이란 개념 자체가 없다고 봐야 한다. 우린 같이 모여 살면서 인식을 하기 시작했고 철학이 발전되었고 그렇게 세상이 발전되어 왔다.

 

그런데 현대 이르러 상상할 수 없을 만큼의 문명 발달을 이루었음에도 우린 인식의 부재 속에 살아가야 하는 처지가 되어 버린 것이다. 이것은 마치 60~70년대 자유가 없던 시절로부터 90년대 들어서 민주주의를 겨우 피워낸 대한민국의 사회가 그 후에 태어난 세대들이 민주주의의 가치 자체를 인식시키지 못하고 그들 스스로도 그 가치에 대해 그다지 심각하게 생각하고 있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다.

 

과학과 문명의 발달은 반대로 개개인의 인지력을 저하 시키는 결과를 초래한 것이다.

 

나는 이제 길에서 만나는 많은 무관심 단계에 도달한 사람들을 이해한다. 물론 그 모습이 내가 도달하려는 목표는 분명하다. 단지 나는 그것을 위해 지금 단계를 극복하려 하는 것이고 그 사람들은 그냥 처음부터 그 모습이었다는 것만이 차이이다. 하지만 이 차이는 생각보다 클 것이다.

 

타인에 대한 무관심 + 자신에 대한 무관심 => 인지의 부재 => 철학의 부재 => 공동체 삶에 대한 인식 부재 => 나만 잘살고 행복하면 끝이란 논리가 전체를 점령 => 타인에 대한 무관심 심화 => ...

 

무한 반복이 될 것이다. 그리고 누군가 앞서서 서로를 바라보고 서로를 인식하고 그로 인해 우리 자신을 인식해야 한다고 제대로 알려주지 못하면 아마도 다들 이렇게 살아가리라 생각한다. 슬프지만 이것이 21세기 대한민국의 표준적인 삶이다.

 

나는 이제야 비로소 사람들의 표준 생각을 제대로 이해하고 또 그들이 왜 그렇데 될 수 밖에 없는지 완전히 정리할 수 있었다. 그리고 내가 가진 의문점도 해결을 했다.

 

슬프지만 인정해야 하는 진실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