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사회

불평등과 삶의 행복

아이루다 2012. 11. 19. 10:56

 

얼마전 기사에 강남구가 구로/금천구에 비해 서울대 진학률이 거의 10배 가량 높다는 기사가 나왔다. 대한민국에서 서울대라고 하면 일단 최고의 학벌을 자랑하는 우리나라 서열 1위 대학교이다. 소위 각 학교에서 상위 1%정도만 겨우 갈 수 있는 대학교이기도 하다. 그래서 과거부터 서울대학교 진학률은 명문고교를 분류하는 주요 수단이 되어왔다. 1등만 최고로 삼는 우리 국민의 대표적 순위매김 놀이이지만 말이다.

 

강남구와 구로구는 같은 서울이다. 지하철로 빠르면 30분 정도로 이동가능한 거리이며 차로 이동해도 막히지만 않는다면 비슷한 시간이 걸리는 거리다. 모두 강남에 위치하지만 강남구는 서울의 부유층의 대표적인 구로서 구로구는 전통적으로 공돌이/공순이가 살던 곳이란 인식이 강한 동네이다. 얼마전 구로공단 역 이름 자체가 디지털미디어역으로 바뀌고 벤처건물들이 어마어마하게 생겨서 예전의 모습은 거의 찾을길이 없지만 아직도 많은 사람들의 인식이 그곳은 과거에서 많이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도 현실이다. 그런것들은 정말 오랜 시간이 걸려야 바뀐다. 보통 한세대를 넘기 쉽상이다.

 

왜 같은 서울에서 이런 차이가 나타나고 있을까? 아마 가장 현실적인 차이는 바로 사설 교육학원일 것이다. 실제로 강남을 비롯한 서초/송파에 사람들이 모이고 거기에 아파트 가격이 수십억까지 치솟는 것은 부모들의 교육열 영향이 아주 크다. 소위 잘나가는 강남 학원의 수준은 타지역에 비해 매우 크게 우수하여 몰려드는 학생들을 아무 치밀하고 효율적으로 수능에 대비한 수능 전문전사로 키워준다. 이것은 선순환을 불러낸다. 아이들이 공부를 점점 더 잘하게 되니 욕심이 있는 학부모들은 또 더 몰린다. 그런 부모 밑에서 아이는 어떤 상황에 놓일지는 뻔하지만 아무튼 학원에 가고 공부를 더해야 한다. 학교는 점점 더 경쟁적으로 변하고 아이들은 경쟁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인다. 처음엔 그런 성향이 아니라도 그곳에서 몇년을 지내보면 자신도 모르게 경쟁에 익숙해져서 이젠 부모의 요구가 아닌 스스로가 원하는 상황으로 변해간다. 거기엔 학벌에 따른 인생의 성공과 실패에 대한 수 많은 사례와 기사가 천천히 학생들에게 흡수되어진다.

 

이런 차이가 몇년 지속되면 처음에 같은 라인에서 출발한 학생들이라도 크게 차이가 날 수 밖에 없다. 이것이 바로 10배의 서울대 입학률 차이를 만들어 내는 이유가 된다. 보통 강남은 타지역보다 부동산 가격이 높아 부모의 능력이 좀 되는 사람들만 살기 때문에 결국엔 부모의 경제적 능력이 자녀가 입학 가능한 대학교의 명단을 만드는데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 우리나라에서 이런 현상은 최근에 나타나기 시작한 현상이다.

 

이 과정을 단순히 말하면 교육 불평등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실제로 우리나라 공교육 자체는 불평등하지 않다. 중/고등학교 과정은 누구나에게 동일한 기회를 주는 교육정책이지만 현실적으로 문제는 공교육이 아닌 사교육 즉, 외고나 과학고 같은 특수 목적을 가졌다고 알려졌지만 입시 전문 고등학교에서 벌어진다. 이미 처음부터 상위권 아이들만 뽑아서 교육시키기 때문에 아이들은 출발선상이 같지 않다. 중학교부터 아니 초등학교부터 이미 줄을 세워 교육을 시켰기에 강남과 구로의 차이는 이미 10세 이전부터 다른 것이다.

 

그렇다며 왜 이런 불평등함이 나타날까?

 

그런데 정말 이것을 질문하고 싶은가? 만약 이것이 궁금하다면 당신은 지금까지 인생을 너무 쉽게 살아왔다. 답은 그냥 우리는 원래 불평등한 존재이기 때문이 그렇다. 나하고 내가 아는 누가 정확히 같을까? 없다. 우린 모두 하나밖에 없는 존재이고 우린 모두 개개인의 수준이 있다. 내 머리와 내 육체능력과 내 얼굴과 내 키는 오직 나만 가진 것이니 누가 나와 같을 수 있을 것인가?

 

자연계는 원래 경쟁의 세계이다. 죽여야 살고 살기 위해 죽인다. 우리 인간도 실제로 죽이거나 죽임을 당하는 것은 아니지만 우린 법이 허용하는 범위에서 최대한 이득을 취하기 위해 경쟁을 한다. 거기에서 좋은 머리나 뛰어난 육체능력은 개인의 경쟁력을 무척 많이 높혀준다. 우린 그런 사례를 무수히 본다. 당장 오늘 TV만 봐도 육체적으로 뛰어난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 돈을 벌고 있는지가 보이고 뛰어난 언변 하나만 해도 대단한 수익을 올려준다는 것을 알 수있다.

 

우리 인간이 원래 불평등하다면 왜 우린 평등에 대해 이야기할까? 어차피 출발이 다른데 왜 평등하려고 할까.. 우리가 무슨 공산주의 국가도 아니고 말이다.

 

사회 연구를 많이한 박사들이 말한다. 불평등한 사회에서 범죄율이 높다고. 그것이 정답이다. 불평등한 사회는 사회 하층계급에 있는 사람들의 불만이 쌓이기 때문에 이에 따른 인식구조 붕괴에 의한 범죄가 많이 발생할 가능성이 높아진다. 즉 스트레스가 인성을 파괴하는 결과를 초래하는 것이다.

 

인간은 절대적으로 사회속에서 살아가는 존재이며 상대와 나를 비교하면서 상대적 행복을 얻어 살아가는 동물이다. 그 정도가 심하냐 심하지 않느냐 차이일 뿐 누구나 이 기본적인 사슬에서 벗어날 길이 없다. 그러니 불평등한 사회가 되면 우린 상대적으로 행복한 사람과 상대적으로 더 불행한 사람이 많아짐을 예상할 수 있다. 그리고 이런 정신적 스트레스나 혹은 실제적인 기회박탈 문제는 사회 구성원의 폭력적 성향을 높이고 화를 참지 못하는 사람들을 양산해 낸다. 이것이 소위 말하는 미국식 범죄이다. 우린 이런 사건을 일년에 몇차례 접한다. 총기를 난사해 무작위적으로 사람들을 죽이는 미국의 개인 테러행위.

 

이것이 개인적인 문제라고 생각하는가? 우리나라도 이런 종류의 반 인륜적인 범죄들이 요즘 점점 더 많아지고 있다. 우리나라에 총이 불법이라 이정도지 만약에 총이 합법이면 한달에 한번은 어디에서 총기 난사 사건이 났다는 기사를 볼지도 모르겠다.

 

불평등함은 사람들을 분뇌시키고 사회를 불안하게 한다. 그래서 결국 비정상적인 범죄들이 높아지고 그렇지 않는 사람도 스트레스를 많이 받아 정신적인 질환을 많이 앓게 된다. 실제로 불평등함이 높은 미국의 국민은 25%정도가 정신 질환이 있고 상대적으로 평등함이 존재하는 유럽 선진국은 10%대를 기록하고 있다. 두배 이상의 차이를 보이고 있는 것이다.

 

국가는 이런 불평등함으로 인해 발생하는 많은 비용을 부담해야 한다. 또한 개개인들은 더 행복할 기회를 뺏기고 자기 것을 지키기 위해 혹은 더 많은 것을 얻어야 한다는 철칙과도 같은 인생의 목적때문에 부담할 필요가 없는 노력과 비용을 낭비하고 그에 따라 스트레스를 쌓는다.

 

빈부격차가 심한 나라 같은 경우엔 부촌과 빈촌의 평균수명이 30년 가까이 차이가 나기도 한다니 정말 돈은 많이 있고 볼 일이긴 하다. 그렇지만 이런 사회가 영구히 지속될 수 있을까?

 

우린 현재 거품속에서 살고 있다. 수십년 미래에 써야할 돈을 땡겨서 쓴 것이다. 우린 부동산 거품을 위해 많은 빚을 지고 그 이자를 갚기 위해 고통을 감수하면서 언젠가 자신이 산 아파트가 가격이 오를 것을 빌고 있다. 하지만 이런 거품은 반드시 빠진다. 거품이 커지면 터질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그럼 부자들도 역시 언젠가는 지금의 부를 누리지 못하는 날이 온다. 물론 아주 극소수의 부자는 지구가 멸망하지 않는 한 손해보지는 않겠지만 그 밑에 어중간한 부자들도 역시 가난한 이들과 비슷한 위기를 맞이할 가능성이 있다. 아주 심한 경우엔 폭동이 일어날 수 있다. 지금이 무슨 18세기냐고? 아니다. 인간은 사회 불만이 극대화되면 언제든 집단 폭발할 가능성을 가진 존재이다. 역사가 이를 끊임없이 증명해내고 있다.

 

해결책이 있을까? 있다. 별로 어렵지 않은 것이다.

 

쉽게 보면 그냥 서로가 서로를 위해 조금만 양보하고 또 이해해주면 내가 남는 밥을 남에게 조금 나눠주는 것을 보고 조금만 더 공감할 수 있다면, 그럴 여유를 갖기 위해 조금씩 노력하고 살아간다면 우리가 언젠가 실패해서 이제 베푸는 것이 아니고 베품을 받는 입장이 되더라도 좀 더 마음이 편해지지 않을까?

 

대한민국은 현재 모두 마음을 닫고 산다. 경쟁속에서만 살아온 우리는 남과 같이 사는 법을 배우지 못해서 그렇다. 남은 그저 나와 내 가족의 이득을 노리는 적일 뿐이니 그들을 경계하고 멀리하고 또 마음의 문을 굳게 닫고 살지 못하면 언젠가 그들이 내 소유의 것들을 빼앗아 갈지 모른다는 공포심에 살아가야한다. 이것은 아주 불필요한 스트레스이며 시골마을에 뜬금없는 가시로 만든 울타리 같은 존재인 것이다.

 

물론 지금 모두 서로 총을 겨누고 있으니 누군가 신호를 보내 동시에 총을 내려놓기는 힘들 것이다. 그것은 상호 신뢰를 바탕으로 하는데 우린 이미 서로를 믿지 못하고 있다. 누구도 믿지 못하니 내가 겨눈 총을 어떻게 내려놓겠는가. 상대는 그대로 총을 겨누고 있는데 말이다. 하지만 이 시간도 내 뇌는 그 상황에 대한 스트레스로 인해 계속 망가져가고 있음을 우린 잘 모르고 있다.

 

행복이 왜 좋은줄 아는가? 행복하면 뇌가 위기에 따른 매뉴얼을 버리고 몸을 이완시키며 그 덕에 마음도 몸다 다 편해진다. 우리 몸은 자연계에서 살아남기 위해 진화해 왔기 때문에 위기엔 위기 대처가 편안할 땐 편안함의 대처가 모두 가능하다. 커다란 육식동물에 쫓길때 몸에서 엄청나게 분비되는 아드레날린은 우릴 빠르게 도망칠 수 있도록 해주지만 그로 인해 우리의 몸은 급속하게 상태가 나빠지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불행이란 것이다.

 

나도 잘 못하지만 자주 웃고 즐겁게 살면 행복을 느끼고 그렇게 되면 또 타인들의 삶에 관대해지고 베풀줄도 안다. 그러면 더 행복해지고 더 좋아지는 선순환이 일어난다. 하지만 여기엔 의식개혁이 반드시 필요하다. 지금껏 경쟁사회에서 타인을 앞서기 위해서만 살아온 자신의 우물안 개구리 같은 생각에서 벗어나 훨씬 넓고 광대한 바다를 볼 생각을 해야 한다. 물론 그러기 위해서는 매우 힘든 노력이 필요하다. 너무 오랜 시간을 경쟁을 통해 행복을 느끼도록 살아온 우리다.

 

가끔 머리를 비우는 것은 좋으나 평생 머리를 비우고 살면 안된다. 내가 왜 또 어떤 원인으로 그 일을 원하고 하려는지 좀 생각해 봐야 한다. 게임을 해서 이기고 내가 응원하는 편이 이기는 것이 왜 나를 행복하게 하는지 좀 생각해보자.

 

나는 지금껏 나를 그다지 행복하지 못한 사람이라고 생각하면서 살아왔다. 그리고 실제로도 그랬다. 나는 남들이 느끼는 아주 단순한 것들에도 즐거움을 많이 느끼지 못한다. 그래서 나는 스스로 불행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잘 생각해보니 세상 사람들은 나보다 더 불행한듯 하다. 가끔 그들이 보여주는 사진 속 모습은 매우 행복해 보이지만 그들의 평소의 삶은 이렇듯 제한되고 각지고 배타적인 삶속에서 끊임없이 타인과 나를 비교하고 경쟁하면서 살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어떤 형태의 삶을 살아가야 한다는 정답은 없지만 이미 답을 정해놓은 사람들 의도대로 살아가기엔 우리 인생이 너무 아깝지 않은가? 정말 아깝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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