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최선을 다하자' 의 함정

아이루다 2012. 8. 25. 08:56

 

어려서 부터 참 많이 들어온 말이다. '최선을 다하자', '최선을 다했니', '그것이 너가 할 수 있는 최고인거니', '이것이 나의 한계인가?'

 

'최선', 오랜시간 별 생각없이 혹은 이것이 나의 기준점인것 처럼 여겨왔다. 여담이지만 군대갔을때 신병교육대 내 담당 조교의 이름이 최선이었다. 아무튼 이 단어는 어떤 일을 할때 나의 만족도를 끝없이 높이는 역할을 해주어서 더 노력하고 더 많이 달성할 수 있도록 해주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내가 노력형 인간인가? 아니다. 나는 매우 게으른 인간이다.

 

최선이란 단어를 사용한 이 문장이 왜 문제가 되는지 생각해보자. 가장 먼저 단어의 정의를 하면서 시작해보도록 하자. 과연 최선이란 무엇인가?

 

최선 : 가장 좋고 훌륭함 (다음 출처)

 

따라서 최선을 다한다는 말은 자신이 할 수 있는 가장 좋고 훌륭함을 다해보자는 뜻이 된다. 물론 최선이란 단어의 또다른 의미에는 '가장 앞선'이란 의미도 있는데 이말을 적용해도 비슷한 의미가 될 수 있다.

 

좋고 훌륭하다는 말은 명확한 한계지점을 기진 것이 아니라 무한한 목표를 향한다. 내가 오늘 10kg의 무게를 들었다고 해서 그것이 나의 한계는 아니다. 내일 나는 11kg을 들수 있다. 그렇다고 해도 그것이 내 한계는 아니다. 내가 최선을 다하면 더 들 수 있다. 그것은 아무도 모르는 일이다. 그나마 이런 예는 물질적인 계량치가 있어서 측정이 어느정도 가능하나 사람과 사람사이의 관계라든지 어떤 일을 할때라든지 이런 것은 도대체 한계가 없다.

 

내가 최선을 다해 공부를 한다는 의미는 24시간 아무것도 안하고 공부를 해야만 하는 것이 최종 목표인가? 아니다. 우리 두뇌는 쉬어줘야 또 일을 하기에 잠을 자야한다. 그렇다면 얼마나 자야 하는가? 2시간 자면 최선인가? 3시간 자면 최선인가? 결론은 모른다.

 

내가 최선을 다해 일을 할때 결과적으로 실패했다면 최선을 다하지 않은 것인가? 우리 사회는 1등 혹은 상위권을 목표로 대부분의 일을 한다. 그러면 어떤 대회에 참가한 요리사가 참가하는데 그리고 또 최선을 다한 것으로 스스로를 위로한다면 정말 최선을 다한 것인가?

 

사람을 트레이닝 시키는 방법은 크게 두가지로 나뉜다. 하나는 강압적으로 목표를 향해 밀어붙이는 것이다. 우리나라 스포츠계의 오래된 훈련법이다. 다른 하나는 그 스스로 훈련을 하도록 목표를 정해주고 의지를 키워주는 방법이다. 하지만 뛰어난 선천적 능력을 타고나도 또다른 타고난 게으름이 있고 목표의식이 부족한 사람은 그 재능을 썩히는 결과를 가져오기도 한다. 답은 없다. 하지만 두 경우 모두 최선을 다했다는 말에는 부합할 수 있는가?

 

최선을 다하면 어떤 결과가 나와야 하는가? 문제는 누구도 그 정답을 알지 못한다는 것에 있다. 최선을 다하는 것은 매우 추상적인 개념이며 자의적인 해석이 가능한 문구이다. 사람마다 그 한계치가 다르고 또한 실제로 이룰 가능성도 매우 다르다. 그런 상황인데도 우린 오늘도 스스로에게 최선을 다했는지를 묻는다.

 

최선을 다했다면 후회는 없다는 말을 한다. 물론 어느정도 일리는 있다. 그런데 어떻게 최선을 다했음을 스스로 납득할 수 있는가? 솔직히 못한다. 이런 증명은 보통 그 사람을 주변에서 바라본 누군가가 대신 해줘야 한다. '누구야.. 넌 최선을 다했어' 라고 말이다. 이것은 증명이 아닌 위로이다.

 

대한민국에 태어나서 자라는 남자는 어려서 부터 부양에 대한 사회적 책임감에 끝없이 압박을 받는다. 남자들은 미래에 절대적으로 경제생활을 해야만 하며 그것을 소흘이 하는 사람은 아예 남자로서 가치도 또한 남자로서 대접도 받지 못한다는 끝없는 불안감에 시달린다. 거기에 또하나 자신에게 최선을 다했느냐에 대한 질문은 남자들을 끝없이 숨막히게 한다. 그리고 그만큼 남자들은 그 스스로에 대한 자부심이 높다. 자존심이 쎄다는 말이다. 그래서 여자들이 절대 건들지 말아야 할 것 하나가 바로 남자의 자존심이다.

 

그 대책없는 자존심의 근거가 바로 최선을 다해 살아온 삶이다. 적어도 나는 딴데 눈돌리고 헛짓안하고 사회가 나에게 주어진 부양의 책무를 다하기 위해 열심히 열심히 노력하면서 최선을 다해 살아온 삶이 바로 그 근거다.

 

문제는 그래서 행복했냐이다. 과연 최선을 다해 살아왔고 그래서 자부심이 넘쳐나는데 결론적으로 행복하냐 라고 묻는 것이다.

 

왜 최선을 다할까? 자신의 삶이 그만큼 소중하고 또한 의미가 있기 때문인가? 스스로에게 떳떳하기 위해 그런것인가? 스스로 떳떳하다면 그 근거가 되는 믿음이나 사상은 도대체 누가 만들어 준 것인가? 예수? 부처? 알라신?  아니면 내 부모님?

 

최선을 다한다고 믿고 또한 그래서 충분히 행복하다면 그렇게 살면된다. 하지만 어떤 일을 해도 늘 찜찜한 기분이 들고 뭔가 더 할 수 있을것이란 생각이 든다면 최선을 다하려 노력하지 않는 것이 더 현명하다. 이루지 못하면 어떤가? 왜 이루려 하는지 조차 모른채 이루고자 하는데 말이다. 그것을 이루면 내가 더 행복해질 것인가? 성취욕에 만족하고 싶은 것인가? 그런데 그것이 얼마나 스스로에게 의미가 있는것인가? 실제로는 경제적 이득이 목표가 아닌가? 잘 생각해볼 부분이다.

 

물론 처음부터 경제적 이득을 목표로 했다면 더 생각할 필요도 없다. 돈이란 것은 나름 실체를 가진 것이기에 노력해서 더 얻을 수 있다면 노력하는 것이 좋다. 여기에서는 타인이 가진 것을 부러워하지만 않는다면 최선을 다하며 살아도 아무런 문제가 없다. 최선은 타인이 아닌 나 자신의 노력인데도 불구하고 타인과 연계되면 매우 이상한 해석이 되어 버린다. 나도 타인처럼 더 최선을 다하고 싶다가 되는 순간 우린 뱁새가 황새 따라가는 형국이 된다.

 

자신을 끝없이 밀어붙이는 삶을 살았다면 그런데도 불구하고 그다지 행복하지 않다면 최선을 다하지 말아라. 최선을 다하는 것이 당신을 행복하게 해주지 못하는 성격이다. 사회에서 우리에게 강압적으로 그렇게 살라고 하는건 오래된 관습일 뿐 반드시 지켜야 할 법률은 아닌 것이다.

 

살아가면서 한번쯤 내가 왜 이렇게 살고 왜 이렇게 생각해보고 살아가는 것도 매우 좋은 태도라고 믿는다. 또한 정말 최선을 다해할 것들은 실제로 우리가 평소에 잊어버리는 사람의 관계이다. 나와 이득을 기반으로 맺어진 수많은 관계라도 내 가족, 내 친구에게 좀 더 헌신하도록 하자. 그들이야 말로 적어도 최선을 다해서 그나마 가치 있는 것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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