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자식사랑

아이루다 2012. 8. 24. 08:35

 

자연계를 조금만 살펴봐도 진화적으로 우위에 있는 객체가 좀 더 후대의 생존에 대해 적극적이다. 물론 조류보다 포유류가 더 진화되었다고 판단되어지긴 하지만 실제로 조류의 자식사랑도 매우 남다르기도 하다. 얼마전 보았던 다큐멘터리에 나온 남극의 황제펭귄 이야기는 정말 자식사랑이란 것이 무엇인지 제대로 보여주는 드라마였다. 물론 펭귄이 조류란 것을 다들 아실테지만 혹시나 해서 언급한다.

 

자궁을 이용하여 몸속에서 일정기간을 키운 후 출산 과정을 거쳐 포유를 하는 우리 인간과 같은 포유류는 곤충류, 파충류, 어류, 양서류 등등과 비교했을때 매우 놀랍고도 현저할 만큼 커다란 자식사랑을 보여준다. 특히 다량생산이 아닌 소량생산을 꾸준히 해내는 시스템은 버려지는 자녀수를 최소화 하며 양육의 성공 가능성을 높이는 쪽으로 진화해온 것으로 판단된다. 즉 하등생물일수록 다량의 자손을 낳아 많이 죽어도 많이 남도록 하는 구조라면 고등생물이 될 수록 소량을 낳아 적게 죽는 형태로 바뀐다는 것이다. 우리 진화론에서 보면 거의 최초단계로 꼽히는 단세포 생물인 바이러스와 같은 존재들은 짧은시간에도 정말 엄청난 개체발생을 통한 증식을 할 능력이 있다.

 

자연계에서도 기본적으로 자식사랑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보통 일반적인 자연계의 부모들은 자식을 양육하기 위해 스스로 손해를 보게 되는데 일단 많은 먹이를 필요로 하고 이에따라 어미는 늘 먹이를 구하기 위해 동분서주하기 마련이다. 그렇다고 해도 일반 동물들이 자식을 위해 죽음까지 불사하지는 않는다. 물론 자식을 지키기 위해 상대와 싸우는 경우는 많다. 그렇다고 해서 그 스스로가 죽음의 길이 뻔한 상황인데도 뛰어들지는 않는 것이다. 자식을 잃는 것을 슬퍼하긴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자신의 목숨과 바꾸지는 않는다.  이런 부분에서 인간은 타 동물과 확연한 차이를 들어낸다.

 

자식의 생명과 부모의 생명의 가치를 비교하는 것은 DNA관점에서는 아주 명확한 판단이다. 본인은 현재 자신의 DNA의 100%이지만 자식은 50%만 가진 존재이다. 그러니 자기 자신이 더 소중한게 정상이라서 둘 중 하나를 포기해야 한다면 당연히 자식이다. 하지만 인간은 이런 관점에서 보면 좀 다르다. 어떤 경우엔 인간은 자식을 위해 그 자신을 희생할 수 있다. 설령 판단의 결과가 정확히 죽음을 의미하더라도 아마 부모들 중에 자식을 살리기 위해 자신의 목숨을 내놓는 부모들도 꽤 있으라 믿는다. 심지어 자식을 낳으면 죽을 가능성이 높아도 임신을 하고 출산 후 죽는 부모들도 있다.

 

그렇다면 왜 인간은 유별나게 자식사랑이 강해졌는가?

 

물론 가장 큰 이유는 아마도 모든 객체중에 자식을 키우는데 있어서 가장 오랜 시간을 공들이는 존재가 인간이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보통 인생을 70년 정도로 봤을 때 우리는 한 자녀를 키우는데 20년 이상을 투자한다. 심지어 30년이상도 요즘은 평범한 축에 속할지도 모른다. 그러니 자신의 인생의 절반 가까운 시간을 자녀를 위해 투자했으니 그 소중함이란 1~2년 키우고 새로운 자녀를 갖는 일반 동물들과 비교할 수 있으랴.

 

거기에 더해서 우리 인간은 머리가 좋기에 계산이 명확하다. 그래서 자녀를 키울때 들어간 비용을 제대로 잘 계산할 줄 안다. 그러니 자녀을 잃을 때 입은 손해가 얼마나 크다는 것을 충분히 잘 알고 있다. 내가 가진 재산이 명확할때 내가 입은 손해도 명확해진다. 그리고 자신이 가진 재산을 제대로 계산해낼 줄 아는 동물은 인간이 유일하다. 다람쥐는 올해 도토리가 얼마나 많이 열렸는지 계산하고 살지 않는다.

 

또다른 관점은 자녀양육의 성공여부이다. 양육관점에서 자연계에 비하면 인간의 성공률은 매우 높다. 물론 예전에 과학문명이 덜 발달한 시기엔 약간 덜했지만 요즘 같아선 성공률이 99.99% 이상으로 보인다. 매우 발달한 의학기술로 인해 인간 개개인의 생존률이 높아지면서 나타난 현상이다. 그리고 이와 함께 재미난 현상이 하나 있다. 과거 어린이 사망률이 높던 시기에 우린 다산의 풍습이 있었다. 그러니까 아이를 5~10정도 낳는 것이다. 내 아버지 세대가 그랬다. 물론 그 전 세대도 그러했을 것이다. 낳고 싶어도 먹을것이 부족해서 못낳았고 또 낳아도 잘 죽어서 인구가 늘지 않았을 뿐 다산에 대한 욕구는 아주 오래동안 인류와 함께 했다.

 

하지만 요즘 들어서 부부당 출산률이 매우 현격하게 낮아지고 있다. 심지어 대한민국에서는 1.2명 정도이다. 이것도 그나마 늘고 있는 현상이며 심할때 1.09명이간 되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물론 대한민국의 출산률이 떨어지는데는 또다른 이유가 있기에 이것만으로 의학기술이 발달하면 아이를 적게난다라고 말하기는 그렇지만 선진국으로 되어갈수록 후진국에 비해 출산률이 떨어지는것은 국제적인 현상이다. 그리고 선진국 즉 잘사는 나라일 경우 후진국에 비해 아이들의 생존률이 매우 높다.

 

그리고 중요한 포인트는 다산이 될수록 아이에 대한 소중함 정도가 떨어진다. 즉 10명을 낳았을 때 한두명 죽는 것과 세명을 낳았을 때 한두명 죽는 것은 매우 다르다는 의미이다. 부모는 자녀의 수가 적을수록 자식 하나하나에 대한 집착이 매우 강해진다.

 

결국 인간은 오랜시간 공을 들여 자녀를 키우는데 그것에 대한 명확한 계산을 하고 있으며 또한 성공가능성이 월등하게 높아서 우리가 원론적으로 가진 유전적 한계를 넘어 인간 고유의 자식사랑 개념을 가지게 되었다. 그런데 이것말고도 하나가 더 있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오늘 내가 얘기하고픈 이야기이다.

 

인간을 포함한 모든 생물에게 태어난다는 개념은 수동적으로 동작한다. 즉 내가 태어나고 싶어서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부모세대의 짝짓기에 의해 태어나진다. 물론 단성생물인 경우엔 짝짓기도 하지 않지만 말이다.

 

아무런 이유없이 부모 DNA 보존을 위해 태어난 나는 도대체 왜 태어났으며 또 살아가는 이유는 무엇일까?

아마 정말 특이한 사람아니고는 다들 살면서 한번정도는 이 질문에 대해 생각을 해봤거나 들어는 봤을 것이다. 우린 살아가고 있긴 한데 이유를 모른다.

 

그래서 우린 존재의 이유를 찾으려 평생을 무의식적으로 노력한다. 물론 의식적으로 알려고 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리고 그런 경우라면 철학을 하거나 종교에 심취할 가능성이 높다. 젊은 시절은 양육이 되어지는 과정이므로 부모의 사람을 듬뿍 받고 자라면서 자연스럽게 존재의 이유가 있다. 적어도 부모에게 나는 필요한 존재가 아닌가? 하지만 나이를 먹다보면 그 존재의 이유는 누구나 가진것이란 것을 알게된다. 마치 내가 태어난 것처럼 부모의 사랑은 당연한 것이다.

 

그렇게되면 나만의 존재이유가 부족해진다. 왜 꼭 '내가 존재해야 하는가'를 알고 싶다.

 

어릴때부터 그것에 대한 욕구는 이득의 개념과 함께 다가온다. 즉 내가 주변에 영향력 있는 사람이 되면 나의 존재이유는 높아지고 또한 이로인해 경제적 이득까지 취할 가능성이 높아지는 것이다. 주변의 아이들이 나를 따르면 나는 매일 그 아이들로 부터 불림을 받게되고 그렇게 되다보면 어디 생일파티 한번이라도 더 초대를 받아서 맛난 음식을 취할 가능성이 높아진다. 그래서 어떤 아이들은 명확히 생일파티를 노리고 친분을 유지하는 경우도 있고 그냥 단순히 많은 친구를 사귀는 것을 좋아하는 경향도 나타난다. 물론 어릴땐 후자의 경우가 많다. 아직은 인간관계에서 계산능력이 덜 발달했기 때문이다.

 

좀 더 나이를 먹어 청소년기를 거쳐 사춘기에 오면 '내가 존재하는 이유'에 대해 좀 더 많이 궁금해지고 그때야 비로소 존재에 대한 적극적 자각이 이루어진다. 즉 자신을 객관적으로 보려고 하고 타인이 나를 보는 시선을 알려고 한다. 그래서 그때는 마음을 많이 열어 주변과 교류하려는 성향이 나타나며 그 덕분에 아주 작은 일에도 크게 상처 받는 경우도 많다. 그렇게 되면서 서서히 자신을 보호하는 벽을 만들어 간다.

 

20대에 들어서면 대학이나 취업을 향해 나가며 슬슬 세상에서 경제적으로 살아남는 법에 대한 고민이 커진다. 그래서 그때쯤 되면 내가 살아가는 이유쯤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내가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에 대한 관심과 남들보다 더 많은 것을 얻고 살아가고자 한다.

 

30대가 되면 취업이 되고 보통 어느정도 안정적인 직장을 갖게된다. 그렇지만 반대로 이제 생업에서 어느정도 안정감을 가졌기에 다시 '내가 존재하는 이유'에 시달리게 된다. 판에 박힌 삶에서 자신만의 고유함을 찾고자 하는 것이다. 그래서 보통 이때쯤 사람들은 취미활동을 시작한다. 물론 훨씬 전에도 시작하는 사람들도 많지만 30대에 사람들은 좀 더 부지런해지면서 취미생활을 매우 적극적으로 즐긴다. 물론 지금 50~60대의 어른들은 그것조차 회사에서 야근하면서 충당했을 것이다.

 

30대는 또한 결혼과 출산의 시기이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자녀를 얻는다. 즉 부모에 의해 비의지적으로 태어난 존재가 이제는 의지적으로(꼭 의지적은 아니다) 자녀를 출산하는 것이다. 이렇게 되었을 때 자신이 앞으로 20년 가까이 돌봐야 할 존재가 생겨버렸다. 경제적 책임을 지는 아버지는 열심히 돈을 벌어와야 하고 양육과 생활을 담당하는 어머니는 젖을 먹이고 예방접종을 하고 옷을 사 입히고 하믄 과정을 거친다. 물론 아버지의 경제적 능력이 부족하거나 일에 대한 욕구가 강한 여자는 이때 양육과 경제를 동시에 처리한다.

 

사람들은 보통 자신의 삶에서 자녀의 존재를 매우 예쁘고 사랑스러운 존재로만 인식하는 경우가 많은데 실제로 따져보면 아이는 그 부모에 대한 '내가 존재하는 이유' 가 된다. 즉 자녀를 낳아 키우는 부모들에게 특별히 이상한 성격이 아니라면 보통 내가 왜 살아가야 하는지에 대한 고민이 없어진다. 당장 내일 먹어야 하는 내가 낳은 예쁜 자식이 있는데 그 무슨 배부른 고민이란 말인가.

 

인간 중에는 자식을 의도적으로 낳지 않고 사는 부부들도 있다. 그런데 그 부부들이 하는 얘기 중 꼭 빠지지 않는 것이 하나 있다. 그것은 바로 자녀가 없어서 맏벌이를 하기 때문에 생활에 여유가 있고 그래서 많은 여행을 하고 있으며 또 맛난것도 많이 먹고 취미생활도 같이 하면서 재미나게 살고 있다는 말을 꼭 한다.

 

왜 그들은 꼭 자신이 어떻게 살아가는지 얘기를 하려고 할까? 이건 당연하다. 아이가 없으니 '내가 존재하는 이유'가 딱히 없고 그렇게 되었을때 내가 존재하는 이유가 바로 나 자신의 행복임을 증명해야 하기 때문이다.

 

결론적으로 보면 아이를 낳아 키우는 것은 부모에게 매우 현명한 결정이다. 유전적으로 봐도 후대를 낳아야 하는것이 옳고 양육의 과정이 좀 힘들긴 하지만 아이를 낳아 키우는 동안만큼은 내가 존재하는 이유가 매우 명확해서 인생에 대한 회의론적 관점을 가질 필요가 없다. 물론 그로 인해 경제에 대한 불안감을 수십년간 극복해야 하며 또한 아이에게 우연히 닥칠 불행에 대한 불안감도 있지만 말이다.

 

요즘은 늦동이를 낳는 부부가 늘었다고 한다. 인구가 줄고 있는 우리나라에서는 환영할 만한 일이지만 결국 이 늦동이는 그 부분의 미래의 행복이다. 아이들은 어느정도만 커도 부모를 벗어나 버린다. 사춘기를 거쳐 10대 후반만 되어도 부모의 사랑이 자신의 존재 이유가 될 수 없는 흔한 것임을 자각하기에 그 스스로 다른 존재 이유를 찾아간다. 이것은 그 부모가 그 시기에 했던 것과 완전히 똑같다.

 

문제는 모든 아이를 성인으로 키워 놓은 시기이다. 자식을 다 키우고 나면 이제 내 존재이유가 희미해져 버린다. 거기에 이로 인해 내가 준비할 내 노후의 삶에 대해 너무 투자를 하지 않았다. 물론 자녀가 없이 산 사람이 투자를 매우 잘 했으리라는 기대를 할 순 없지만 적어도 그 부분에 대해 좀 더 고민했을 것이 틀림없다. 그런데 자녀를 통해 존재 이유를 찾은 사람은 어느날 갑자기 자식이 품을 떠나면서 텅빈 순간이 와 버린다. 이때가 보통 40대말 ~ 50대중반까지로 보면 된다.  그나마 아직 직장이 있고 또 교류를 할 사람들이 존재하기에 버텨낸다.

 

인간의 유별난 자식사랑에는 또다른 많은 이유가 있을수도 있다. 하지만 여기 언급된 네가지 사항이 실제로 많은 이유를 차지하게 될 것이고 특히 네번째 존재에 대한 해결책은 인간이 자녀를 잃었을때 단순히 또다른 자녀를 쉽게 낳아 해결하지 못하는 이유가 된다. 단순히 계산하면 내가 키우던 자녀가 죽었을 때 바로 하나를 더 낳으면 해결이 되지만 실제로 부모들이 그리 단순하게 행동하지 못한다. 자녀를 잃었을때 찾아오는 상실감이란 정말 어마어마할 것이다. 내 존재 이유가 하루아침에 사라지고 내가 투자한 시간이 무용지물이 된다. 그야말로 공든탑이 무너지면서 또한 사는 목표가 사라져 버린것이다. 거기에서 어떻게 쉽게 또다른 목표를 세워 그것을 극복해낼 것인가?

 

모든 부모는 자식을 키우기 위해 자신이 힘들게 노력을 하고 있다고 생각할 것이지만 실제로 자식은 그 부모에게 살아간 이유를 그리고 일해야 할 이유를 만들어 주고 있다. 실제로 자신에게 좀 더 집중적인 사람들은 자식을 낳아도 자식에게 커다란 애정을 쏟지 않는다. 우리의 부모들은 모두 자식에게 절대적인 사랑을 보여주는 존재만 있는 것은 절대 아니다.

 

사족으로 말하면 나는 우리나라의 인구가 너무 많다고 생각한다. 특히 수도권 집중도는 정말 상상을 초월할 지경이다. 그래서 우리나라 출산률이 낮은것이 좋다. 지금 인구에서 한 반정도 줄어야 우리가 좀 인간답게 살 것이다. 많은 인구는 경쟁을 유발한다. 버스를 탈때도 음식을 먹을때도 영화를 볼때도 우린 늘 누군가와 경쟁해야 한다. 우린 너무 심한 경쟁속에 살아간다. 먹고 살기위해서 경쟁하고 그 스트레스를 풀기위해 고속도로로 나와도 다른 차들과 경쟁한다. 해수욕장에 가서도 누군가와 경쟁해야 하고 또 잘때도 경쟁한다. 이젠 경쟁하는 것이 너무 익숙해서 경쟁하지 않으면 불안할지도 모른다.

 

어떤 사람들은 내수를 위해서는 인구가 늘어야 한다고 말하는데 그말도 맞다. 그런데 적어도 살만한 인구밀도여야지 미어터지는데 더 늘어나는 것은 모두가 불행해지는 결과이다. 사람을 줄이고 사람 하나하나를 소중하게 여기는 세상이 더 맞다고 본다.

 

또하나 사족을 달면 자식을 낳아 키우는 것은 그 부모에게 엄청난 이득을 준다. 특히 존재감에 대한 증명은 정말 대단한 것이다. 설령 그 부모가 잘 느끼지 못하더라도 말이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자녀를 낳아 키우는 것을 마치 사회를 위해 공헌한다는 생각을 한다. 물론 후대를 낳아 키우는 것은 우리 사회의 연속성면에서 훌륭한 일이다. 하지만 어떤 부모가 인간종족의 미래를 위해 자녀를 낳고 있는가?

 

모든 부모는 그 자신을 위해 자식을 낳고 양육한다. 출산이 애국심이 아니란 말이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자신이 자녀를 키우는것에 대한 사회적 책임을 매우 당연하게 받아드린다. 물론 어느정도 사회에서 자녀 보육에 대한 지원을 하는 것을 반대하는 것은 아니다. 단지 실제로 보면 우리 사회에서 결혼하고 자녀를 낳고 사는 사람들은 정말 어느정도 먹고 살만한 사람들이 아닌가?

 

정작 정말 도움을 받아야 할 독거노인이나 결홀한 능력이 안되어 혼자 사는 노총각/노처녀 1인 가구들에 대한 지원은 도대체 논의조차 되지 않고 있다. 사회는 복지를 말하지만 무상급식이나 보육비 지원, 반값 등록금 같은 문제만 얘기되어 진다. 정말 누가 돈이 필요한가? 그리고 국가에서 지원해줘야 하는가?

 

자식을 낳아 키우는 것은 그냥 단순히 섹스 후 임신, 출산이 아니다. 그것은 매우 엄중한 책임감이며 또한 더할나위 없는 행복이다. 그러니 욕심 좀 적게 부리자. 내아이가 오늘 공짜로 맞는 주사 한대는 누군가에게는 생존의 문제를 해결시킬 수 있는 돈으로 쓰일 수 있다는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