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과철학

자존감과 존재감

아이루다 2012. 8. 11. 18:24

 
실제로 현실에서 보면 자존감이란 단어보다는 자존심이란 단어가 더 많이 사용되는 듯 싶다. 그리고 자존심은 그리 좋은 의미로 사용되지도 않는다. 그래서 이 두 단어는 비슷하지만 사실상 완전히 다른 단어이다. 어떤 면에서 보면 반대의 의미로도 사용될 수 있을 정도이다.

 

또한 존재감이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의미는 아님을 먼저 밝힌다. 흔히 '너는 존재감이 없어' 할때 그런 존재감이 아니다. 사람이 살아가면서 인생 전반에서 느끼는 감정이지 절대 어떤 상황마다 평가될 것이 아니다. 또한 타인의 한마디 말로서 쉽게 정의 내릴 수 없는 것이기도 하다.
 
자존감을 정의하자면, 스스로 느끼는 자신에 대한 평가이다. 반면에 존재감은 타인이 나를 느끼는 평가이다. 두 단어 모두 나에 관련되어 있지만 그 평가 주체가 자신이냐 남이냐의 차이가 있는 셈이다.
 
인간은 보통 둘을 합쳐 최종 평가를 내린다. 즉 자신에 대한 최종평가 = 자존감 + 존재감이다.
 
우린 불가항력적으로 이 세상에 태어난다. 엄마 젖 이외에는 아무것도 모르는 시절을 거쳐 사춘기가 오는 10대 중후반의 나이까지 우린 실제로 자신의 존재에 대한 실체적인 질문을 거의 하지 않는다. 그땐 참새가, 닭이, 개가, 고양이가 옆집에 사는 철수가 궁금하지 내가 궁금하진 않는다.
 
하지만 어느 날 두 가지 중요한 사실을 깨닫는다. 하나는 내가 타인들을 볼 때와 같이 타인들도 나를 볼 수 있다는 생각이다. 그리고 그것이 어떤 모습일지 궁금해진다. 둘은 인간들은 경쟁을 통해서만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어려서는 누구나 '엄마 백 원만' 하면 백 원이 나왔으나 언젠가부터 내가 백 원을 얻기 위해서는 그에 합당한 노동을 해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리고 그것을 위해 다들 노력하고 있으며 따라서 남들보다 더 노력해야 백 원을 얻을 수 있음을, 그것이 세상의 진실임을 알게 된다.

 
내가 타인을 인식하듯, 타인들도 나를 인식하고, 내가 타인을 인식하는 가장 중요한 이유에는 바로 경쟁과 협력을 통한 나의 이득 극대화라는 것을 알게 된다. 또한 타인 역시 나와 마찬가지란 것을 알게 되는 것이다.
 
경쟁을 느끼고 나면 경쟁에서 이기는 법을 배운다. 공부를 하고 개개인간의 관계를 끊임없이 맺고 끊으며 운동이나 대화를 나누면서 자신의 존재가 얼마나 가치 있는지를 증명한다. 이것이 증명이 잘될 수록 많은 사람들과 관계 맺기가 수월해지며 또한 자신도 행복해진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안다.


남들보다 하나라도 더 알아야 자신의 가치가 더 높아질 것이며 한 푼이라도 더 있고 써줘야 남들이 자신과 관계를 끊지 않게 된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래서 타인들의 평가, 즉 평판이 아주 중요해진다. 자신 스스로 만들어낼 수 없는 평판은 나의 미래를 결정하는 아주 중요한 요소이며, 이것과 함께 나 자신 스스로 가진 능력 즉 공부, 운동, 발표력, 설득력, 분위기 파악력 등등이 매우 매우 중요해진다. 특히 이중 공부를 하는 능력은 이후 안전하고 고정적인 수입을 보장하는데 아주 중요한 요소가 되기에 세상을 어느 정도 아는 부모들은 자신의 아이들이 공부를 잘하길 바란다.
 
이런 과정을 통해서 존재감이 형성된다.
 
처음에도 언급했듯 존재감은 절대 직설적으로 말해지지 않는다. 성인이 되어갈 수록 자신에 대한 평가는 점점 은연중에 이루어진다. 고등학교 시절 친구와 인생에 대해 그리고 자신의 문제에 대해 논할 때 가졌던 즉흥적이고 감정적이며 또한 직설적인 대화는 거의 불가능해진다.

 

누구나 그런 대화를 잘못하면 사람을 잃을 수도 있다는 사실과 자신에게 매우 불리해질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모두들 최대한 가면을 쓰려고 한다. 그것도 웃는 가면을. 웃는 가면을 가장 잘 쓴 사람이 동일한 상황이라면 성공가능성이 매우 높다. 즉 경쟁에서 이기는 것이다.
 
나에 대한 타인의 존재감은 매우 희미하면서도 다양하게 나타난다. 내 연락처에 있는 친구 목록도 그 중 하나이며, 나에게 쉼 없이 연락 오는 친구들도 그 중 하나다. 회사에서 나를 찾는 빈도나 내가 없을 때 회사가 잘 돌아가지 않길 바라는 심리 역시 내 존재감에 대한 확인작업 중 하나이다.

 

세 명의 친구 중 하나가 자신이 가진 힘든 고민을 나에게만 이야기 했을 때 느끼는 은연 중의 우월감도 이런 존재감이며, 사내 비밀이라며 나를 따로 불러 얘기해주는 사장의 모습에서도 나의 존재감이 확인된다. 어느 장소에 들어가 한마디 했을 때 그것이 얼마나 빨리 처리되느냐 도 매우 중요한 존재감 확인 과정 중 하나이다.
 
그래서 사람은 무시당하면 많은 화를 낸다. 식당에서 서빙 보는 아줌마에게도, 공공기관의 민원실에서 일하는 공무원에게도 무시당했다고 느껴지는 순간 매우 화가 난다. 그들은 내가 말하면 즉각 즉각 반응해줘야 한다.
 
내가 놀러 가고 싶다고 말하면 어디로 갈지 찾고 있는 친구들이 진짜 친구이며, 내 스케줄을 고려하지 않고 놀러 갈 계획은 세운 친구는 그냥 유지되는 관계이다. 내 스케줄을 무시하고 여름휴가를 잡은 친구들은 밉지만 또 그 동안 쏟은 정성이 있기에 스스로 분노를 삭히면서 그들과 같이 놀러 가려 한다. 그래야 다음 번 기회가 있다.
 
여럿이 대화를 할 때 내가 한말에 사람들이 즐거워하고 웃으면 존재감이 확인되는 순간이므로 매우 기쁘고 행복해진다. 그 친구들은 또 언젠가 모임이 있을 때 잊지 않고 재미있는 소리를 했던 나를 불러줄 것이 분명하기에 집에 와 생각해봐도 행복하고 나 자신의 센스 있는 언어능력이 매우 자랑스러워진다.

 

내 존재감이 자존감을 높이는 형국이다. 하지만 이렇게 높아진 자존감은 매우 위험하다. 이후 어떤 모임에서 나보다 훨씬 재미있는 이야기를 하는 친구가 나타나는 순간 파괴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 모임에서 내가 재미있을 만한 순간이 별로 없었으며 결국 거기 모인 내 친구들은 모두 새롭게 나타난 친구에게 연락을 하기 시작하는 순간 존재감이 급락하면서 자존감은 더욱 급락하여 많이 불행해지고 만다.
 
내가 먹여 살리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 가족 역시 내 존재감을 높여준다. 직장에서는 나를 어떻게 평가하더라도 적어도 난 집에서는 나를 최고로 생각하는 아들과 딸 그리고 사랑하는 와이프가 있지 않은가? 그래서 난 행복하다. 하지만 이런 경우엔 너무 한정적으로 조건적이기에 자존감까지 전달되지는 못한다. 뭐 결혼하고 애를 낳은 것만으로도 자존감을 느끼는 사람도 있겠지만 말이다.
 
이것도 저것도 안 되는 사람은 이젠 즉각적인 평가를 원하게 된다. 도대체 은연중에 나타나는 존재감이 아무래 해도 안 느껴지니 이제 물건 중심으로 가야 한다. 그리고 그것에는 돈이 매우 중요하다. 좋은 옷, 가방, 비싼 차, 남들보다 다른 어떤 소유물 등등이 나를 나타내주고 또 나의 존재감을 인식시켜 준다. 사람들은 일단 돈이 많아 보이면 사람들에게 호감을 보이기 마련이다.

 

그리고 호감은 존재감을 느끼게 해주는 꽤 중요한 요소이다. 이 호감이 생기는 이유는 돈이 많은 사람과 친해지면 미래의 어떠한 이득이 생길 가능성이 조금 더 높기 때문이다. 새로운 가방을 쌌다는 이유로 쓰던 아주 멋진 가방을 공짜로 줄 수도 있는 일 아닌가?
(하지만 슬프게도 실제로 세상을 살아보면 돈이 많은 이들이 더 인색하다는 것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그래도 고급 정보를 얻을 기회는 주어진다)
 
사람들은 이것을 허영심이라고 칭하기도 하지만 실제로는 존재감에 대한 피눈물 나는 노력이다. 스스로 타인들에게 존재감을 만들어 낼 능력이 안되기 때문에 거기에 매달리는 것이다. 하지만 이 역시 제품이 없어짐과 동시에 사라진다. 그러니 이런 식으로 존재감을 느끼려는 사람은 돈을 많이 벌어야 한다.


새로 산 물건이라고 해도 얼마 지나지 않아서 금세 그 존재감이 사라져 버리고 말기 때문이다. 그래서 꾸준히 새로운 제품을 사야 한다. 사람도 몇 년 지나면 그 속에서 존재감을 확인할 수 없는데, 말 못하는 제품은 당연히 그 순간이 훨씬 짧다. 우리는 이때 권태를 느낀다고 말한다. 즉, 상대가 사람이든 제품이든 상관없이, 그 대상으로부터 그 어떤 존재감도 느낄 수 없는 상태에 놓이면 그것을 권태로움이라고 인식한다.

 

하지만 또 슬프게도 이런 사람은 보통 성공하기 힘들고 기본적으로 성공할 가능성이 매우 낮다. 이미 성공할 가능성이 있는 사람이라면 그 전에 내 존재감을 이미 확인했을 수 있으니까 말이다. 그래서 여자의 경우엔 결혼을 잘해야 한다. 그래서 외모를 위해 많은 투자를 해야 하며, 나보다 예쁜 여자는 모두 나의 적이며 경쟁자이다.
 
내 최종 평가는 자존감과 존재감의 합이라 했으니 이번엔 자존감으로 가보자. 스스로를 높게 보는 힘은 어디에서 나올까? 어렵지 않다. 바로 능력에서 나온다. 남들보다 뛰어난 머리, 남들보다 잘 치는 피아노, 남들보다 잘하는 축구 등등 내가 잘하는 것이 많을 수록 자존감이 높다.
 
실례로 보면 회사에서 일 잘하고 카리스마 넘치는 사람들이 운동도 잘하고 또 악기도 하나 둘쯤 다루는 사람들이 많다. 그들은 평생 뭔가 자신을 더 높게 하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해 온 것이다. 남들이 당구장 갈 때 영어학원에 다니고, 사람을 사귀는데 노력하고, 또 더 늦게 일하고 잘하려고 온 힘을 쏟는 것이다. 그래서 자신의 존재감을 스스로 높이는 자존감을 높이게 된다.
 
내 자존감이 스스로 높아져 있으니 타인들의 존재감에 대한 느낌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이미 내 자존감이 높아져 충분히 만족한 상태가 되면 이젠 타인들의 시선에서 어느 정도는 자유로워 진다. 그렇다고 해서 타인들이 멀어지는가?


아니다. 이미 자존감을 높이기 위해 해왔던 일들이 나의 존재감을 높이는데 충분히 일조를 해서 따로 노력하지 않아도 존재감이 높다. 집안에서는 돈 잘 벌어오는 남편이나 가정을 잘 꾸리는 아내이면서 직장에서는 일 잘하는 직원이며 또 사장이다. 이런 사람들은 어디에서든 환영 받는다. 즉, 뭔가 많은 성과를 이룬 사람일수록 어느 모임이든 간에 더 환영을 받는다.
 
스스로 자존감이 높아지면 쉽게 휘둘리지 않는다. 문제는 귀가 막히는 것이다. 타인과 맞출 필요가 없기에 독불장군이 될 수 있으며 추진력 있고 카리스마는 있을지 모르지만 밑에서 일하는 직원에게는 죽을 맛을 보여주게 될 것이다.
 
이와는 다르게 아무런 능력 없이 자존감이 높으면 사람들에게 비웃음을 당하게 된다. 대학교육은 썩었다 라고 말하면서 대학에 자퇴서를 내려면 적어도 서울대, 연/고대는 다녀야 인정해준다. 지방에 이름 모를 대학교에 다니면서 그런 얘기를 하면 모두들 그래서 뭐? 라고 말할 뿐이다.
 
이 시대의 리더들이라고 일컬어지는 사람들을 보면 그 현상이 극명하게 나타난다. 자존감이 극대화되어 또한 존재감도도 극대화 된 사람들. 요즘에 안철수 같은 이들이 그런 종류의 사람들인데 그가 만약 서울대 의대를 들어갈 머리가 없었다면 그가 현재의 그 모습이 될 수 있었겠는가? 머리가 좋지 않았다면 아마도 시장에서 장사하고 있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런 그들이 착각하는 가장 큰 것은 바로 스스로 그것을 이루었다고 평가하는 것이다. 이 시대의 리더들은 아마도 대부분 그것을 알고 있다. 스스로 어렵게 만들어 낸 것들에 대한 자신만의 자존감을.
 
하지만 그 바탕엔 유전학적으로 이미 정해진 그럴 수 있는 가능성을 부여해준 부모로부터 받은 능력이 있었다는 것은 간과한다. 수퍼맨이 아버지로부터 혹은 크립톤 행성에서 왔기 때문에 가진 수퍼맨적 능력을 마치 자신이 원래 가진 것처럼 자부할 때처럼 말이다.
 
사람이 오랜 시간 노력을 해서 그 능력을 갖게 되면 그 능력이 오직 자신의 능력으로만 얻어졌다고 착각하는 경우도 많다. 10년을 기타를 쳐서 얻어진 뛰어난 연주 실력은 과연 만약에 그의 손가락이 반절로 줄고 손가락 움직이는 속도가 반절로 줄며 음표를 보고 이해하는 속도가 반절도 준다고 해도 과연 10년 동안 기타를 치기나 했을까? 하다가 짜증나서 기타를 던져버렸을 수도 있다.
 
어떤 분야에서도 이것은 마찬가지로 나타난다. 자신이 노력해서 얻었다고 자부하는 것은 신체적으로 이미 그것이 가능하게끔 타고나서인 것이다. 이것을 무시하고 오직 그것을 자신의 피땀 어린 것으로만 스스로 감동하여 자존감만 높이면 그것을 얻지 못하는 이들에 대한 근본적인 이해는 불가능해지는 것이다.
 
글이 옆으로 세긴 했는데 아무튼 자존감과 존재감 중 더 중요한 것은 자존감이다. 자존감은 존재감을 존재감은 자존감을 서로 이끌어주는 상호적인 관계이기 하지만 자존감은 스스로 지킬 수 있는 반면 존재감은 어느 순간에 망가져버릴 수 있는 위험한 놈이다.
 
그렇다고 자존감에만 매달려 자신이 모든 것을 스스로 이루었다는 망상에 빠지면 매우 위험해진다. 늘 경계하고 내가 가진 자존감이 누군가로부터 선물 받은 것임을 인정하면서 그로 인해 타인으로 부터 오는 존재감 역시 선물임을 알아야 한다.
 
자존감은 반드시 자신이 가진 능력을 통해서만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도덕적 가치를 높이 둔 사람도 어떤 신념을 가진 사람도 종교에 빠진 사람도 모두 그렇듯 자존감이 무척 높아지게 된다.  하지만 이 과정은 쉽지 않다. 도덕적으로 사는 것도 무엇인가 자신만의 가치를 믿고 지켜내는 사람도 많이 힘들다.

 

이런 가치들은 실제로는 자신의 물질적 손해를 입힐 가능성이 매우 높다. 세상은 반칙으로 돌아간다. 심판이 없기 때문에 누구나 마음껏 반칙하고 반칙을 얼마나 눈에 안 띄게 확실하게 하느냐가 그 사람의 능력을 나타내는 척도이다. 그래서 정직하게 신념대로 살아가는 것이 힘들고 만약 그렇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다면 존경을 받게 된다.
 
우린 늘 자존감을 높이는 훈련을 해야 하며 또 실천해야 한다. 그것이 바로 인간을 인간답게 만들어주는 유일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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