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과철학

늙음에 대한 생각

아이루다 2012. 5. 24. 10:14

자신이 가진 종교에 따라 인간의 생사에 관한 믿음은 모두 다르겠지만 객관적 사실만을 기준으로 할 때 우리 인간은 태어나서 자라고 늙어가다가 죽는다는 사실만큼은 현제 21세기 초반 기준으로 옳다. 아마 앞으로 한 100년의 세월이 흐른다면 영원한 생명을 살 수 있는 기술이 개발되었을지도 모르겠지만 말이다.

 

우리나라를 기준으로 봤을때 보통 우리는 20세가 될때까지 그리고도 한 5~10년 이상 자신이 속한 가족으로 부터 보호를 받는다. 잘곳과 쓸돈을 제공 받으며 심지어 결혼을 늦게하는 경우 더 늦어지는 경우도 있다. 그리고 우린 50세쯤 부터 늙어가기 시작한다. 현재 한국인의 평균 수명이 매년 늘어나고 있기 때문에 내가 죽을때 쯤이면 기대 수명이 거의 100살 가까이 될지도 모르니 50세도 젊은 시대라고 말할지도 모르겠다.

 

자연계에서 조직생활을 하는 늑대와 같은 종을 보면 어린 동물들은 무리로 부터 보호받고 자라서 성체로 자라 무리을 지탱하는 역할을 하고 자식을 낳고 기르고 그러다가 결국 늙어서 죽음을 맞이하게 되는데 실제로 늙은 동물은 어떤 의미에서는 거의 무가치하기 때문에 버려지다시피 한다.

 

뭐 전설처럼 전해내려오는 코끼리 무덤과 같은 늙어서 죽을 때가 다된 코끼리가 가는 장소가 있다는 얘기도 있지만 아무튼 죽어서 어느 일정장소로 가 영면을 맞이하기 보다는 무리에 뒤쳐져서 언제가 포식자나 적에게 당해 죽고 다시 자연의 일부로 돌아가는 것이 일반적인 죽음에 대한 이야기라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인간의 경우는 어떠한가? 인간과 동물의 가장 큰 차이는 육체적 능력과 지적 능력의 역할 뒤바뀜으로 볼 수 있다. 즉 인간만이 유일하게 머리를 써서 육체적 단점을 극복해내는 존재인 것이다. 동물계에는 절대적으로 육체적 능력이 우선시된다. 더 빠르고 더 힘쎄고 더 날카로운 이빨을 가진 존재가 지배하는 약육강식의 세계인 것이다. 하지만 우리 인간이 사회가 약유강식은 맞지만 그 힘이 바로 육체가 아닌 지적 능력에서 나온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아무리 뛰어난 육체적 능력을 가졌어도 권총에는 못 당한다. 아무리 뛰어난 싸움꾼도 어둠속에서 급습해오는 칼을 피하진 못하는 것이다.

 

이런 인간 고유의 능력은 우리가 나이 먹음에 있어서 일반 동물계와 아주 다른 양상을 가져다 준다. 동물로서 인간은 육체가 노쇠해가기 시작하는 50대부터 젊은 시절 가졌던 많은 능력들을 잃어가지만 그렇다고 해서 뇌가 바로 늙어버리는 것은 아닌 탓에 실제로는 오랜시간 어떠한 일에 종사해 온 경험이 더욱 더 해왔던 일을 하는데 도움을 주는 명인의 길을 갈 수도 있게 해준다.

 

그래서 우리 인간은 나이를 먹어도 그 가치가 유지가 된다. 물론 그러기 위한 기본 조건은 자신이 쌓아온 지적능력이 나이를 먹어도 의미가 있을때 유효하다는 단서는 붙는다. 단순한 업무에 종사해온 사람들은 더 젊고 빠리빠리한 젊은이에게 생존권을 뺏길 수 밖에 없는 현상도 나타난다. 그래서 20대부터 40대까지 어떤 일을 하고 보냈는지 또한 더 나이를 먹고 제 2의 삶을 계획할 때 어떤 방향을 잡을지를 결정할 때 그 사람의 노년에 대한 기대치가 결정되는 것이다.

 

물론 이 관점은 경제적이거나 혹은 개개인의 능력의 관점에서만 본 것이다. 그렇다면 인간의 지혜라는 주제로 보면 어떠할 것인가?

 

'지혜' , '현명함' 이런 단어는 솔직히 명확히 설명을 하기가 힘든 것들이다. 지혜롭다라는 말이 주는 의미는 어떤 해석을 해야할 까 고민스럽기도 하지만 지금은 이런 주제로 고민하는 글은 아니니 일단 개개인이 가진 의미로 받아드리고 글을 이어나가도록 하겠다.

 

지혜나 현명함이 잘 나타나는 상황은 누구나 행복하고 누구나 즐거운 상황은 아니다. 이런 가치는 실제로 갈등이나 혼란스러움 그리고 비정상적인 상황에서 그 가치가 들어나는 것들이다. 특히 인간과 인간이 겪는 갈등은 너무도 자주 출몰하는 우리 삶 그 자체라고 해도 틀리지 않는 것인데 이때 이 갈등을 풀어낼 해결책을 찾아내는 능력이 바로 이런 것들이다. 중재나 협상과 같은 능력들이 바로 그것이다.

 

여기에서 중요한 사전 지식은 바로 인간에 대한 이해이다. 갈등을 해소하려고 중재를 하려고 한다면 결국 갈등을 빚는 두 주체의 입장을 이해해주고 공감해줘야만 어떤 다른 제안을 할 수 있는데 경험이 미천하여 인간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다면 중재를 하려다 싸움만 더 부추기는 결과만 초래한다. 그리고 인간에 대한 이해는 시간과 노력으로 얻을 수 있기에 젊은 시절엔 참 갖기 힘든 능력이다.

 

따라서 우리는 결국 나이를 먹을수록 더 현명해질 수 밖에 없는 운명이다.

 

하지만 정말 나이를 먹을수록 현명해질 수 있는 가능성이 얼마나 있을까? 인간에 대한 이해를 하려고 노력하고 고민하는 사람이 과연 얼마나 될까?

그냥 살다보면 자연스럽게 현명해질 수 있는 것일까?

 

절대 아니다 라고 단정짓는다. 인간에게 있어서 나이를 먹는다는 것은 견고한 껍질을 점점 만들어가는 과정이기 때문에 더 그렇다. 젊은 시절은 가능성이 있기에 지금 갖지 못한 것은 나이를 먹으면 가질 수 있다는 믿음이 있기에 매우 유연하게 대처하지만 나이를 먹으면 자신이 갖지 못한것은 미래에 가질 가능성이 거의 없기 때문에 그것의 가치를 무시해버리는 경향이 쉽게 나타난다. 이솝우화에 나오는 여우의 신포도 이야기와 비슷한 맥락이다.

 

가능성이 줄어버리고 육체적으로 노화된 노인이 된 인간은 기본적으로 퇴락되어 버린 존재이다. 따라서 딱히 부단한 노력을 하여 이런 잃어버린 것을 채울 다른 것을 만들어내지 못하면 정말 심각하게 늙어버리고 마는 것이다.

 

늙으면 장점보다는 단점이 심하게 나타난다. 장미빛 미래는 없어지고 언제 닥칠지 모를 죽음과 같은 회색빛 미래가 기다리고 있으며 이미 많은 것을 경험하고 알아서 젊은 시절 너무도 재밌고 행복했던 일들이 심드렁하게 되고 실제로 하고 싶어도 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른다. 성적능력은 퇴화되고 외모는 아름답기 보다는 혐오스럽게 변하고 시대를 주도하는 젊은이들과는 점점 그 차이가 심해지며 친한 친구들도 하나씩 둘씩 영면에 들어선다. 키우던 아이는 어느새 자라 독립을 하고 늙은 육체로 할 수 있는 행동은 너무도 많이 줄어들어 버린다. 오래된 육체는 자주 아파 늘 병원을 들락날락하게 만들며 퇴화된 오감은 많은 즐거움을 뺏아아 버린다. 맛난 음식을 즐기던 미각도 아름다운 음악을 듣던 청각도 예쁜 풍경을 보던 시각도 점점 더 그 능력을 상실해가버리고 만다.

 

우리가 늙는다는 것은 단순하게 나이를 먹고 외모가 늙어버린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육체적 퇴화는 정신적 퇴화와 맞물려서 영향을 미치는 것이다. 그래서 결국 나이를 먹을수록 남는 유일한 가치는 바로 뇌가 가진 영역만 존재할 뿐이다. 물론 물질적으로 가진 재산이 늘어난 효과는 있겠지만 재물이 얼마나 많은들 무슨 소용이랴. 건강을 잃고 즐길 꺼리조차 없다면 말이다.

 

요즘은 노후를 위한 준비 중에 돈말고 늙어서 어떻게 살 것인가 에 대한 고민을 하는 이야기도 찾아 볼 수 있다. 그리고 이것은 실제로 매우 중요한 것이다.

 

무엇을 준비하든 그건 오직 그 자신만이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실제로 젊은시절 부터 준비하지 않고 좀 더 나이를 먹은 후 부터 시작해도 별 상관없다. 단지 현재 내가 사는 삶에 대한 관점이 내가 나이를 먹을수록 더욱 장점으로 작용할 것들에 대한 이해가 없다면 실제로는 나이를 먹는다는 것은 불행함만을 의미하게 된다.

 

어떤 삶을 선택할 것인가? 그것은 온전히 우리 자신에게 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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