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과철학

자신을 용서하는 과정, 자기 합리화.

아이루다 2012. 4. 28. 08:56


미국 할리우드 영화에서 나오는 형사 캐릭터의 공통적인 특성 하나가 바로 몇 년 혹은 몇 십 년 전 자신의 판단착오나 실수로 인해 동료나 가족을 잃고 그 후로 폐인처럼 지내는 인물이다. 아주 많은 영화에서 주인공은 일종의 타락한 오래된 영웅 캐릭터이다.

(과거의 아픔을 간직한 정의감에 불타는 형사가 바로 대중이 바라는 이미지인가보다. 그리고 수년간 폐인처럼 살아서 잃을 것도 없으니 막장이다. 그래서 기존의 형사들이 못하는 짓을 서슴없이 하면서 관객의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해준다)

 

그들은 자신을 송두리 채 바꾼 그 사건에서 단 한걸음도 벗어나지 못하고 매일 약이나 알코올에 의존해서 하루하루를 보내게 된다. 개중에는 자살을 기도하기도 하고 실제로 죽음만이 마지막 은총이라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

 

보통 영화는 그런 상태에서 시작되고 과거의 인연이 연결되거나 혹은 다른 비슷한 사건에 의해 자신의 의도와 상관없이 사건 수사에 끼어들고 만다. (보통은 여자 형사가 찾아가서 설득하면서 로맨스가 싹튼다)

 

'만약 인간이 자신의 과거에 저지른 잘못을 스스로 용서하지 못하면 어떻게 될까' 에 대한 답이 되기도 한다.

 

우린 신문에서 가끔 자신의 과거에 대해 자수하는 소식을 접하게 된다. 작게는 몇 십 년 전 차비를 내지 않고 탄 기차 값이나 크게는 살인을 한 후 죄책감에 못 이겨 자수를 했다는 뉴스들이 있다. 이런 것을 보면 인간이 자신의 잘못을 용서하지 못하면 얼마나 고통 받는지를 대충 짐작만 해볼 수 있다.

 

인간은 망각의 동물이라고 한다. 그렇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큰 잘못을 했다고 쳐도 시간이 지나면 서서히 잊는다. 물론 가끔 자다가 악몽을 꾸기도 하겠지만 그것을 계속 머리 속에 기억하다가는 미치고 말 것이 분명하기에 뇌는 당연히 생존을 위해 해당 사건을 잊는 것이다. 실제로 어린 시절에 당했던 끔찍한 사건은 아예 기억 속에 지워버리는 일도 서슴지 않는 것이 뇌의 망각능력이다.

 

하지만 잘 생각해보자. 우리가 망각을 할 때 정말 단순히 잊기만 하는지를.

 

처음 우리가 커다란 잘못을 하면 두려움에 떨거나(그에 향응하는 법적 처벌을) 혹은 많이 당황하고 자신에 대해 실망을 한다(이건 법적 처벌을 받지 않는 업무상 실수나 혹은 타인에게 사기를 당한 경우) 그래서 많이 괴로워한다.

 

예를 들어 생각해보자. 집을 사기 위해 돈을 벌고자 아내와 상의 한 후 가진 돈을 다 털어 주식을 샀는데 폭락해 다 털려서 집안을 말아 먹은 경우를 가정해보자.

 

처음 몇 달은 그렇게 괴로워하며 지낸다. 그런데 말이다. 웃기게도 시간이 지날 수록 자신이 한 잘못에 대한 평가가 조금씩 바뀐다. 물론 원래 사건에는 전혀 변화가 없다.

 

단지 그 사람은 자신의 잘못에 대해 타인과 공유하면서 위로를 받거나 인터넷 커뮤니티 사이트에 접속해서 자신과 비슷한 처지에 있는 사람들의 글로부터 정보를 얻는 과정을 계속 되풀이 한다. 왜냐하면 그 순간만큼은 조금 편해지기 때문에 그렇다. 그리고 그런 교류를 통해 추가적인 정보를 얻는다.

 

그 정보는 자신이 산 주식회사의 사장이 사기꾼이다 라든가 회사의 재무 재표가 개판이며 또 회사가 발표한 특허항목이 사기에 가깝다는 것을 알게 되는 것 등이다. 그리고 자신이 집안의 재산을 말아먹는 동안 자신을 믿고 있던 아내에 대해서도 왜 자신을 중간에 말리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그건 자신이 아는 A씨가 자신도 그럴 뻔 했다가 아내가 알고 주식을 하지 못하게 해서 큰 손해를 입지 않았다는 글을 읽은 후부터 조금씩 드는 생각이었다.

 

아무튼 자세히 알고 보니 자신은 큰 잘못이 없는 것이다. 회사 사장이 거짓말을 해서 속은 것이고 그것을 관리감독 하지 못한 정부기관의 문제도 심각하다. 그리고 내부적으로는 내조를 못한 아내가 자신의 판단에 도움을 주지 못한 것도 큰 문제다 싶다.

 

그리고 시간이 갈수록 점점 그 생각들이 확신이 생긴다. 물론 근본적인 자신의 잘못은 인정하지만 주변 여건도 큰 문제다 라고 인식이 바뀌어 가는 것이다.

 

보통 사람이라면 이 글을 읽으면 단순하게 이 남자가 왜 이러지? 하는 생각이 들것이다. 하지만 이 남자의 판단의 전이 과정은 절대 특별한 것이 아니다. 단지 그 정도나 사건의 경중에 따라 달라질 뿐 우리도 역시 쉼 없이 이런 자기 합리화 과정을 진행하고 있다.

 

이 남자가 최악의 경우로 빠지면 결국 자신이 불행하게 된 건 모두 주변의 탓이며 세상이 더럽고 썩어서 내가 이지경이 되었다고 생각한다. 심하면 아내가 왜 현명하지 못하게 나에게 돈을 줘서 다 날리게 했는지를 탓하며 세상을 저주하고 아내에게 손찌검도 할 수 있다.

 

내가 '틀렸다' 에서 '옳다' 라고 바뀌려면 '옳았던' 세상이 '틀림' 으로 바뀔 수 밖에 없는 것이다. (너무 단순한 수학적 논리다)

 

다시 이 남자를 객관적으로 보자.

 

이 남자의 가장 큰 잘못은 일단 자신이 주식을 하는데 있어서 실제로 확실하게 파악된 정보가 아닌 소문에 의해 주식을 산 것이다. 그러니 사장이 거짓말을 했던 뭐했던 간에 일단 사기꾼에게 속은 것은 일차적으로 자신의 잘못이다.

 

이것을 세상 탓으로 돌리기엔 세상은 너무나 사기꾼 천지다. 이미 사기꾼이 넘쳐나는 세상에서 속은 것은 마치 물에 빠져 죽는 것을 아는 사람이 수영도 못하면서 물에 뛰어든 격인 것이다. 속지 않으려면 부단히 의심하고 알아봐야 한다.

(사기꾼 천지의 세상이라면 사기꾼이 없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 같이 공동으로 노력해야 한다. 그것은 바로 투표와 같은 행위이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은 자신만 물에 안 빠지면 되지 하면서 살아간다)

 

자신이 탓하고 원망하는 아내는 결혼 전 너무도 예쁘고 사랑스러운 사람이었기 때문에 결혼한 것이다. 그리고 그런 그를 믿고 그가 어떻게 돈을 쓰든지 간에 그에게 모든 것을 맡긴 아내를 탓하는 것은 정말 웃기는 생각이다. 하지만 사람이 그렇지 않다.

 

사람의 성공에는(꼭 금전적인 것이 아니더라도) 반드시 필요한 것이 이런 자신에 대한 경계이다. 자기를 쉽게 용서하기 시작하면 될 수 있는 일이 없다. 자신이 한 잘못을 모두 주변의 탓으로 돌리고 대놓고 핑계를 대지는 않아도 끝없이 어떤 핑계거리를 찾고 있는 것이 바로 우리 자신의 모습이다.

 

공부를 하기로 마음먹고 삼일 후 친한 친구의 생일모임이라고 빠질 수 없다고 스스로를 합리화하면 그 후로는 또 어떤 사건들에 의해 그 결심이 흔들리게 될지 모른다.

 

말 그대로 그 이유를 찾기 시작하면 내가 이 나라에 대통령이 될 이유가 수백 가지이고 지구가 멸망해야 할 이유도 수천 가지이며 내가 이정도 밖에 안 되는 인간이 된 것도 수만 가지 이유가 있다.

 

개신교의 행사 중 회개나 고해 같은 것들이 있다.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자신이 믿는 신에게 용서를 구하는 것이다. 끝없이 용서를 구한다. 이 얼마나 정형화된 자기 합리화 과정인 것인가? 정말 자신이 저지른 잘못을 신이 용서했다면 진정하게 그 잘못이 없어지는 것이다.

 

자신의 합리화가 아닌 신이 용서를 해준 엄청난 것인 것이다. 그런데 잘 생각해보라. 그것이 정말 신이 용서해준 것인가? 목사가 혹은 주변 인물들이 해준 것은 아닌가?

 

사람은 누구나 잘못을 한다. 그리고 이후 합리화 하는 과정이 없으면 미치거나 세상으로부터 튕겨져 나가 버리니 당연히 해야 할 과정이다.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자기 합리화를 할 때 반드시 그것을 스스로 인식하라는 것이다. 내가 편해지고 행복해지기 위해 합리화를 하는 것은 좋으나 그것들을 인식하지 못하면 아주 잘못된 판단을 하고 그릇된 합리화를 할 수 있는 것이다. 제일 안 좋은 경우가 바로 다른 사람이나 환경을 탓하는 것이다.

 

뜻하지 않는 사고를 빼고 세상일의 대부분은 스스로 택한 결정이다. 물론 타인이 시켜서 멋모르고 한 행동은 그것이 아니라고 말하고 싶겠지만 결국 자신의 판단착오가 불러온 행동이다. 자신의 사지를 움직이는 주체가 누구인가? 바로 자신의 뇌이다. 이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만약 이것을 부정하는 사람이라면 자신의 뇌가 타인에게 종속되었다고 인정하는 꼴이다.

 

스스로 결정했다면 모든 문제는 자신에게서 한발자국도 벗어나지 못한다. 그것을 타인의 것으로 여기는 순간 개인의 자아는 망가지는 것이다. 사람은 나이를 먹은 만큼 잘못을 한 숫자는 계속 늘어난다. 물론 잘한 일도 늘어난다.

 

아무튼 잘못한 일이 늘어나면 그 만큼의 자기 합리화를 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자기 합리화가 과정이 많이 반복되면 될 수록 머리는 점점 고정화 되고 나중에는 자신이 한 잘못도 처음부터 타인의 잘못으로 여겨 버리는 사태가 벌어진다.

 

처음에는 자신이 걷다가 타인과 부딪히면 미안하다고 하고 자신의 부주의를 스스로 탓하지만 나중에는 자신을 피해가지 않는 사람에게 욕을 하는 경우가 되는 것이다.

 

우리는 이것을 고정화된 사고라고 부른다. 그리고 사람이 나이를 먹을 수록 이 정도가 심해진다. 자신의 생각에 더해 끝없는 합리화 과정을 거쳐서 만들어낸 어떤 개개인의 논리는 심각하게 고정화되어서 정말 엄청난 충격을 주는 사건이 아닌 바에야 대부분은 깡그리 무시되어버리고 만다. 우리 사회를 지배하고 있는 지역감정이나 특정 정당을 지지하는 태도에서 그 부분이 극명하게 나타나기도 한다.

 

나이를 먹는다는 것은 단지 숫자가 늘어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나이를 먹을 수록 현명해져야 하는 의무가 있다. 만물의 영장인 인간이라면 말이다. 사고가 굳어지는 것은 현명함의 반대다. 부드러울 수록 유연하고 현명할 수 있는 것이다. 자신이 아무리 옳다고 믿는 것이라고 해도 돌아서서 의심을 하는 태도가 반드시 삶의 진행방향과 함께 존재해야 한다.

 

과연 이 나라에 우리가 어르신이라고 부르며 존경할 만한 사람들이 몇 %나 될까?

 

그리고 나는 과연 그런 사람으로 나이를 먹은 현인이 될 수 있을까? 그렇게 되기 위해 난 충분한 노력과 반성을 하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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