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와 책

데미안

아이루다 2012. 8. 5. 12:20

 

아마 세번째로 기억된다. 이 묘한 책을 읽은 횟수가. 그리고 바로 세번째 읽기는 바로 어제밤부터 해서 오늘 새벽, 아침까지 해서 단숨에 해치워졌다.

 

이 책의 저자는 헤르만 헷세라는 분이다. 독일 출신의 아주 유명하신 저자인데 약력을 보니 노벨문학상도 받은 경력이 있으시다. 데미안은 어린 싱클레어의 정신적 성장기를 기록한 일종의 자서전적 기록물로 여겨지며 1919년에 처음 발표되어 그 당시 유럽의 젋은이들에게 많은 도움을 준 책이기도 하다.

 

아마 우리나라 어른들 중에서도 어린시절에 한번쯤 데이만을 읽었던 기억을 할 것이다. 그리고 희미한 책 이름만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나는 어린시절 그리고 대학교 그리고 지금 총 세번에 걸쳐 이 책을 읽었다. 현재까지로보면 마지막 독서인 오늘은 몇주전 이 책을 다시 읽은 유진이의 추천으로 이루어졌다.  그녀는 책을 읽고 나에게 내가 싱클레어 같다고 말했다.

 

아마 지금 생각으로는 앞으로 죽는 날까지 데이안을 다시 읽지는 않을 듯 하다. 그리고 세번의 독서기회 중 가장 큰 떨림이 있었던 적은 바로 두번째였다. 가장 민감하고 가장 고민이 많을 시기였으면서도 방향을 못잡고 방황하던 시절.. 그 책은 어쩌면 나에게 단비처럼 느껴졌을것이다.  굳이나 '것이다' 라고 표현한 것은 솔직히 그때 느낌이 거의 기억이 나지 않아서 이다. 내가 기억하는 것은 바로 한줄기 문구였다.

 

'새는 ... 껍질을.. 날아오른다'

 

새로운 자아로 가기위해서는 자신을 감싼 두껍고 도저히 파괴 불가능하게 보이는 껍질을 스스로 깨어야만 한다는 의미로 이해했었다. 그리고 나는 그 껍질을 발견하고 또 껍질의 약한 부위를 부수기 위해 부단히도 노력하면서 살아온것 같다.

 

나는 요즘 사람들의 삶을 관성이라고 부른다. 그리고 이 관성의 힘은 우리를 초.중.고 과정을 거쳐 대학교 , 취업 , 결혼 , 출산, 양육 , 죽음으로 향하게 한다. 또한 이 과정은 누구나 가는 길이며 이 길을 갈때 우린 보통 행복하다.

 

책에서 어린 싱클레어는 세상의 밝음과 어둠사이에서 고민에 빠진다. 밝음은 가족을 중심으로 한 깨끗하고 고상한 삶이고 어둠은 바로 앞마당에서 벌어지는 술주정뱅이의 폭력과 폭언이다. 어린 그는 그 두가지 세계를 늘 보면서 어쩔줄을 몰라 한다.

 

그리고 인간은, 특히 대한민국의 국민은 관성속에서 밝음을 발견한다. 보통과 같이 정규 교육과정을 거치가 대학교에 나와 번듯한 직장을 잡고 또 괜찮은, 남들에게 소개해서 절대 부끄럽지 않을 배우자를 고르고 골라 결혼하고 섹스하고 애를 갖고 낳고 키운다. 그와중 틈틈히 남들보다 조금이라도 더 잘살아 보기 위해 여러가지 시도를 하며 또한 그 밝음을 유지시킬 수 있는 많은 인간관계를 맺고 종교를 갖기도 한다.

 

물론 이 관성에서 어떤 연유로 인해 브레이크가 걸려 거의 멈추거나 혹은 탈선한 사람들이 나오기도 하지만 그것은 소수이기에 원래 속도를 유지하고 사는 사람들에게는 그런 존재는 곧 잊혀지고 만다. 그리고 가끔 오래된 이야기속에서 비극의 주인공으로 언급되기도 한다.

 

그런데 가만히 보면 이 관성속에 산다는 것은 실제로 죽음과 같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왜냐면 그 끝이 그냥 죽이란 결론이 너무도 쉽게 돌출되기에 마치 영화가 시작되면 영화가 끝나듯 출생과 동시에 달리기 시작한 관성은 죽음에 이르러 멈추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사람들은 평생에 걸치 자신이 가진 속도가 줄거나 옆으로 빗나갈까 두려워 끊임없는 걱정과 함께 타인이 가진 속도를 뺏어서 자신의 속도에 더하거나 혹은 순간 많은 속도를 내기 위해 커다란 모험을 하다가 아예 멈춰서버리고 스스로 자신을 폐기처분할때도 있다.

 

인간을 인간으로 만들어주는 DNA가 명하는 바를 아주 충실히 따르며 사는 삶이다.

 

나는 이번에 책을 읽으면서 '각성'이란 단어가 데미안에서 나오는 것이 무척 신선했다. 아마 두번쨰 읽었을 때는 이 말를 아예 감지조차 못했음이 분명하다. '각성' 이란 말은 불과 내가 몇년 전부터 써오던 단어이기 때문이다.

 

'각성' 은 한문으로  覺醒 이며 각각 깨달을 '각' 깰 '성' 이다. 쉽게 말하면 깨어서 깨달음을 말하는 것이다. 새가 알에서 깨어 알의 세상으로 부터 나와 넓은 세상으로 나오듯 우리의 정신이 깨어 자신만의 틀이나 관성속에서 벗어나 더 넓고 무한한 세계로 나오는 과정을 말한다.

 

책에 이런 글귀가 나온다.

 

'각성된 인간에게 있어서는 단 한 가지 - 자신을 찾고 자기의 내부에서 확고부동하게 되고 그것이 어디로 통하고 있든 자신의 길을 앞으로 더듬어 나가는 것 이외에 다른 의무란 존재치 않는 것이다'

 

놀라운 말이다.

 

내가 아주 고민하고 또 그 방향성에 대한 의구심에 대해 스스로 고민하고 결론내렸던 그것에 대해 몹시도 단호하고 명확하게 정의를 내린 것이다. 나의 질문은 바로 이것이었다. 얼마전 쓴 글의 주제이기도 했다.

 

과연 각성하고 자신에 대해 알아간다는 것이 행복을 위한 길은 아닌것이 분명한데 왜 그 길을 힘들게 가려고 하는가?

 

내가 아는 한 세상엔 아니 한국엔 '각성'을 한 사람은 무척 드물다. 실제로 나 역시 각성을 한 것인지 아니면 각성을 한다는 것을 지식으로 알고 있는것인지 모른다. 단지 난 내가 각성한 사람이라면 하는 가정과 함께 그 길을 가려고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나는 싱클레어처럼 그런 깊은 성찰의 시간을 보내지 못했다. 나는 관성속에서 단지 속도를 조금 늦추거나 혹은 방향을 살짝 틀어버린 정도일 것이 거의 분명하다.

 

단지 요즘에 와서야 이제 겨우 다른 길로 갈 용기를 낸 정도이다.

 

하지만 또다른 관점은 그래서 다른 길로 가는 것이 과연 내가 정말 진정으로 원하는 것인가에 대한 스스로 의구심이 있다. 만약 어린 시절 나에게 카인의 표시가 되어 있었고 또한 데미안과 같은 친구가 있었다면 나는 아마 싱클레어의 삶을 살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에게 그만큼의 용기도 기회도 또한 확신도 없었을 뿐더러 이세상엔 데미안이 없다는 것이 슬픈 현실이기도 하다.

 

인간은 어류로부터 진화해 왔다는 것이 진화론적으로 정설이다. 그렇다면 바다에서 최초로 육지로 올라온 그 놀랍고 용기있는 우리들의 조상은 과연 어떤 각성과 확신을 한 것일까?  몸속에 산소를 물로부터 얻어내는 것이 아니라 대기중에 녹아있는 놀라울 정도로 순도가 높은 산소를 얻어내어 몸의 에너지 효율을 극대화 시키는 방법을 시도한 피스토리스트가 보여준 동물학 책에 나왔다는 그 고풍창연한 물고기의 각성 수준은 말이다.

 

나는 솔직히 많이 외롭다. 소설 데미안의 주인공인 싱클레어는 후반에 데미안의 엄마와 그녀를 통한 일종의 각성자 네크워크를 통해 많은 정신적 위로와 성장을 이루어내지만 나는 단 한명의 다른 나를 발견하지 못했다. 싱클레어는 결국 데이만이 그 자신과 같은 존재임을 깨우치면서 마무리 짓지만 나는 이 나이가 되도록 그런 경험을 하지 못했다. 물론 고등학교 / 대학교 시절 웃기는 개똥철학을 논했던 친구들은 있었지만 실제로 그들은 이미 다시 다 자신만의 관성속으로 돌아갔고 그러지 못한 나는 아직 길을 찾지 못한 사람들과 때때로 어울리면서 살아가고 있다.

 

그나마 나를 조금 이해해주는 나의 소중한 여자친구가 있지만 아직 그녀는 어린시절 선악의 갈림길에 서있는 어린 싱클레어와 비슷한 단계에 왔있다. 물론 앞으로 십 수년이 지난 후 아마도 나는 그녀와 싱클레어와 피스토리우스 혹은 데이안 그리고 궁국적으로 데이안의 엄마가 나누었던 대화를 재현할지도 모른다. 난 단지 이 순간에 내가 가진 생각과 내가 알아낸 각성의 결과들을 공유할 사람이 없음이 아쉽다는 말이다.

 

그렇다고 해서 지금 슬픈건 아니다. 어쩌면 나는 아직도 제대로 각성을 하지 못하고 있을 것이므로 앞으로 나에겐 더 많은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그리고 실제로 그 단계가 내가 삶의 마무리를 하는 시점까지도 오지 않을 수 있다. 하지만 적어도 내가 생각하고 고민했던 것들이 기록으로 남아 먼 훗날 어떤 또다른 이에게 데미안처럼 일종의 도움을 주는 글이 될 수 있다면 그것으로도 만족 할 수 있을 것이다.

 

데이안을 쓴 헤르만 헷세 역시도 그가 책에 쓴 것처럼 껍질을 깨고 날라올라 아프락사스에게 날아가지 못했을 것이다. 그 역시 그의 희망을 적고 있음이 분명하다. 이 세상에 그 누가 진정한 각성을 할 수 있으리오. 만약 했다고 주장한다면 그것은 바로 정신병일 뿐이다. 모든 가치를 하나에 집중할 수 있다는 것은 편집증이며 광신도가 된다.

 

웃기는 것은 이런 결론적 사실을 잘 알면서도 이런 삶에 대해 미련을 버리지 못하는 나의 집착이다. 아마도 너무 오랜시간 나만의 관성으로 살아온 탓이이라 생각한다.

 

어제는 정말 오랜만에 남자 둘 여자 둘 모임을 가졌다. 나와 내가 아끼는 동생 혁성이 그리고 내가 사랑하는 유진이와 그냐가 아끼는 동생 신현아가 함께했다. 대화의 내용은 그리 중요하지 않았다. 그냥 좋은 사람들끼리 느껴지는 공감대.. 그리고 대화의 순수한 즐거움.

 

나는 사람들이 그냥 그렇게 즐거웠으면 좋겠다. 꼭 뭔가 하고 자극을 받을것이 아니라 그냥 가만히 있고 그 분위기를 즐기는 여유로움이 있었으면 한다. 어차피 자극적인 즐거움은 꼭 나와 함께 있을때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니 그런 즐거움은 다른 장소에서 즐기고 나와 함께하는 자리에서는 그냥 민밎한 즐거움 정도로 만족해줬으면 하는 작은 바램이 있다.

 

날씨가 무척 덥다. 싱클레어는 어제 밤부터 더워서 새벽에 잠을깬 새벽, 그리고 오전에 두시간 정도의 시간만에 완주를 끝낸 데미안에서 쉽게 각성해버리고 자신의 길을 찾았다. 동이한 과정을 수십년의 세월동안 해야하는 나로서는 무척 부럽지만 결국 나 역시 그로 인해 살아갈 힘을 얻을 수 있으니 그리 나쁜것만은 아니다.

 

8월 초 아주 무더운 일요일 아침에 오랜만에 독서 후기를 남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