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와 책

우리와 그들 무리짓기에 대한 착각 (최종정리)

아이루다 2012. 3. 4. 10:15

데이비드 베레비

 

4주에 걸친 송파도서관 방문덕에 거의 500페이지에 달하는 꽤 두꺼운 책에 속하는 '우리와 그들 무리짓기에 대한 착각' 을 모두 읽었다. 읽는 도중에도 느끼긴 했는데 이 책은 그냥 한번 읽고 말 책으로 넘기긴 아깝다. 나중에 기회가 되면 사서 집에 한권 놔두고 싶다.

 

책을 너무 띠엄띠엄 읽어서 그런지 책 내용 정리를 하려니 마음 한구석이 답답해진다. 거기에 책도 없으니.. 뭔가 찾아보려고 해도 불가능한 상태이다. 그래서 글 읽는 도중 떠올랐던 생각이나 책 내용 중 중요하다고 생각했던 글을 정리한 내 노트를 보고 이 책에 대한 최종 정리를 해볼 생각이다.

 

이 책은 기본적으로 우리가 어떤 방식으로 같은 무리임을 인정하고 또한 그 무리짓기는 무엇을 근거로 이루어지며 그것으로 인해 어떤 문제들이 파생되는지에 대한 근본적인 고찰을 한 일종의 전문 연구서적과 같다. 

 

나는 한국인이다. 그리고 서울시민이고 또 우리가족의 일원이며 남자이다. 누구나 이런 정의가 가능하다. 물론 사람마다 모두 그 분류가 다르다. 한국인이나 남자와 같은 커다랗고 범용적인 분류도 있지만 육군 어느부대 33기 훈련병 같은 특수하고 희미한 분류도 있다. 그것이 타고난 것이든 아니면 인생의 선택에 의한 것이든 또다른 어쩔 수 없는 확률적인 것이든 간에 분류는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그럼 왜 우리는 이런 분류를 통해 내가 속한 부류와 남이 속한 부류를 구분하느냐에 대한 이유가 궁금해진다.

 

우리는 왜 내가족과 남의 가족을 구분할까? 우린 왜 한국인과 일본인을 구분할까? 우린 왜 내회사와 다른회사를 구분할까?

또다른 의문은 이런 구분이 복합적으로 작용하게 될때 우린 어떤 판단기준으로 내가 어떤 무리에 속하는지를 결정하게 되는가 이다.

 

예를 들어 내가 한국이이며 일본인 처를 데리고 살고 있고 현재 나는 의사라는 상태라면 한국과 일본간에 전쟁이 나서 내가 의무관으로 징집되어 전쟁에 참가하게 되었을 때 상황을 보자.

 

병실에 있는 환자들을 볼때는 나는 의사라는 무리에 속해있다. 아마 대부분의 의사는 그순간에는 환자가 한국인이든 일본인이든 상관하지 않고 치료를 하게 될 것이다. 이때는 나는 의사라는 무리에 속한 역할에 충실하다. 그러다가 내가 속한 전투부대가 어떤 전투에서 거의 전멸하고 나 역시 총을 들고 싸우게 된다면 순간 나는 한국군이란 무리에 속해 일본사람을 죽여야할 대상으로 삼게된다. 그런데 우연히 싸우던 적들 중에 내 아내의 동생을 보게 되었다면 겨누던 총을 내려놓게 될지도 모른다. 이때는 나는 급작스럽게 한국군에서 내가정의 무리에 속한 의무를 행해야 한다. 아마 많은 혼란이 오게될 것이다.

 

물론 이 예는 아주 극단적인 상황이긴 하지만 넓게 응용해서 생각하면 또한 꽤나 일반적인 상황도 된다. 전쟁을 회사간 경쟁으로 의사를 영업사원으로만 바꿔도 쉽게 상황이 도출될 수 있다.

 

어떤 사람들은 이 분류가 태생적인 것이라고 생각한다. 보통 인종차별주의자 같은 사람들은 피부색에 의한 분류에 대해 아주 맹신한다. 혈액형으로 통해 사람을 분류하는 사람이나 한민족의 IQ가 다른 민족보다 높다고 믿는 사람들이 이런종류의 예이다.

 

이 책의 저자의 기본입장은 바로 이런 무리짓기가 절대로 태생적인 것이 아니라고 말하고 있다. 그 예로 여러가지 상황을 들었는데 예전에 못사는 계층에 속한 사람들이 갑상선암에 걸릴 확률이 높게 나온 통계가 있어서 결국 경제적인 능력이 낮은 사람은 갑상선 암에 걸릴 확률이 높다라는 결론을 내린적이 있었다. (책에 나온 내용인데 기억이 가물가물하니 대충 알아들으세요 ㅠ) 그후  그들의 해부를 통해 좀 더 조사를 해보니 그들은 비정상적으로 큰 가슴샘(용도는 모름;;)을 가지고 있었고 다시 비정상적인 가슴샘을 가진 사람은 갑상선 암에 걸릴 확률이 높다라고 결론이 바뀌었다. 그러나 나중에 최종 결론에 의하면 못하는 사람들이 잘 먹지 못해 비정상적인 가슴샘을 갖게 되었고 그것에 치료법으로 방사선 치료를 처방한 탓에 이 방사선 치료가 암을 유발시켜 갑상선 암을 걸리게 한 것이었다. 정리하면 비정상적인 가슴샘은 영양부족에 의한 것으로 단지 더 좋은 먹거리를 통해 치료할 수 있는데 불구하고 그것이 못사는 사람의 고유특성으로 간주하여 방사선치료를 시행했으며 그 결과 갑상선암 발생률을 높이게 된 것이다. 잘못된 통계분류의 기막힌 오류였던 것이다.

 

이렇게 우리의 선입견에 기반한 분류는 많은 위험을 가지고 있다. 종교적 차이에 의한 광적인 분노, 민족적 차이에 기반한 적개심등이 그런것이다. 또한 여기에 통치자는 그 결정적 무리짓기를 아주 잘 이용하는데 쉽게 말하면 내부불만을 처리하기 위해 타국과 벌이는 전쟁등이 그 예이다. 물론 지금 현대사회에 들어서 그렇게 대놓고 하는 경우는 드물지만 그래도 끊임없이 이용되는 정책인것이다.

 

지역별로 나뉜 프로야구는 각각 타고난 고향을 근거로 자신이 지지하는 팀을 나누고 경쟁하면서 승리의 기쁨과 패배의 아픔을 공감한다. 그리고 그렇게 사는 모습은 통치자에게는 아주 좋다. 왜냐면 적어도 정치관련 기사를 한줄이라도 덜보게 되어 자신들이 어떤 문제를 일으키고 있는지 모르게하기 때문이다. 뭐 이런 예는 수도 없이 많다. 9.11테러를 아주 제대로 이용한 부시나 과거 북한문제를 끊임없이 이용했던 자칭보수들. 우리나라의 근원적인 문제중 하나인 지역감정도 이런 무리짓기를 악용한 아주 악질적인 정치인들의 정책산물이다. 이 예도 설명하자면 삼박사일은 걸릴듯 하니 이정도로 넘어가자.

 

하지만 잘 생각해보라. 내가 본능적으로 나누고 있는 분류는 과연 얼마나 관념적인 것인지를. 누군가 백인이고 누군가 흑인이라고 해서 그들이 인간이 아닌가? 우리의 분류방법은 절대 생각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그 분류는 쉼없이 바뀌고 파괴되며 새롭게 만들어지고 있는것이다. 오늘 나는 어느지방에 살고 있는 A씨와 아무런 관계가 없지만 며칠 후 그 사람은 나와 어느동호회 모임에서 우연히 만나 절친이 될수도 있다. 또한 오늘은 나의 배우자였던 사람이 내일 바람피웠던 것이 발견되어 가족보다도 못한 관계가 될수도 있는 것이다. 아무런 관계없던 사람이 중요한 분류에 들어가고 너무도 중요했던 사람이 아무것도 아닌 분류화 되는 것이다.

 

왜 인간은 이런 분류를 끊임없이 하는가?

 

우리는 인간의 분류를 통해 빠르게 상대에 대해 알고자 하는데 유용하기 때문이다. 우리 인간은 서로 처음만나게 되면 '그는 누구인가' 를 궁금해하지 않고 '그는 어떤사람인가'를 궁금해한다. 그리고 것을 제일 먼저 알게해주는 방법 중 하나가 바로 외모이다. 머리가 짧고 군복을 입고 있으면 군인이라는 생각을 하며 그 사람이 나에게 해를 끼칠 가능성이 낮다고 인식하고 머리가 짧은데 목에 문신이 보였다면 조직폭력배로 가정하고 그사람을 피하려고 할 것이다. 이런 경험적 분류는 우리 생존에 많은 도움을 준다. 낯선사람을 집에 들이지 않거나 하는 방어적 행위에 영향을 주어서 개개인의 생존확률을 높여주고 꼭 생존에 관련된 것이 아니라해도 이득과 관련도 된다.

 

하지만 반대급부로 이런 종류의 선입견은 일종의 진입장벽과 상호이해에 있어서 아주 커다란 벽이된다. 알지도 못하는 상태에서 미리부터 접근자체를 막아버리니 그 후 어떤 이해가 이루어지겠는가? 그런 관점에서 보면 사회적인 낙인, 즉 범죄자표시나 예전 중세시대에 주홍글씨와 같은 낙인은 철저하게 사람에 대한 선입견을 만들어주는 행위였던 것이다. 비단 사람이 인공적으로 만든것 뿐만 아니라 장애인이나  외부로 표시되어 나타나는 병(나병 등등)에 대한 사람들의 인식은 비록 그것이 실제로 전염될 가능성이 없다고 해서 본능적으로 피하거나 꺼려하게 되는 것이다.

 

무리짓기는 철저하게 이익을 기반으로 한다. 자신이 속한 무리에 대한 충성은 추후 적절한 보상이 주어지게 되고 배신은 반대의 경우가 된다. 그리고 그 무리에 속하지 못한 사람들은 철저히 이방인 취급되며 차별을 받는다. 그렇게되면 무리에 속한 구성원은 그 모습을 보며 두려워하고 더 무리에 충성하게 되는 것이다. 조직에서 배신자를 엄벌하는 이유도 바로 이것이다.

 

여기에서 한가지 무리짓기와 이타심에 대한 재미있는 관점이 있는데 곁가지로 정리해본다.

 

최초에 진화론을 주장했던 다윈은 동물에 나타나는 이타주의에 대해 많은 고민을 했었다. 왜냐면 모든 생명체는 자신의 생존을 위한 극도의 이기주의속에 살아가는데 새의 무리중에 적을 발견하면 소리를 내어 경고하는 모습이나 망을 보는 역할을 맡은 무리의 일부가 자기희생을 하는 모습에서 또한 인간에게서도 나타나는 이타주의에 대한 이해가 힘든 것이 그의 주된 고민이었던 것이다. 뭐 여러가지 상황을 거치긴 했지만 지금은 동물이나 인간에게서 나타나는 이기주의는 '호혜적 이타주의'라고 정의되어 진다. 풀이하여 쓰자면 '내게 쓸모있는 사람, 내가 쓸모있는 사람이 내 형제' 라는 베두인 속담에서 그 설명을 알아볼 수 있다. 즉 나에게 어떤 이익관계가 보장된 무리속에서 사람은 이타심을 발휘하는 것이다.

 

군인이 나라를 위해 총을 들고 싸울 수 있는 것은 내가 잘못되더라도 나라가 나의 가족을 돌봐줄것이란 믿음이 있기 때문인 것인 상황으로 이해하면 될 것이다. 조직의 범죄를 대신해 감방에 가는 조직원같은 삐뚤어진 경우도 있지만 아무튼 인간의 이타주의는 주고 받을 수 있는 믿음에 근거하고 있으며 또한 그 주고 받는다는 범위가 바로 내가 속한 무리에 한정되는 것이다. 물론 그 무리의 견고함이 보장되어야 한다.  (오랜시간 더 훈련받은 군대가 더 이런 근거가 강해져 더욱 용감히 싸울 수 있다)

 

우리는 인간의 이타심에 대한 환상을 가지고 있지만 늑대에게 어려서부터 자란 아이는 늑대의 이득을 위해 싸우는 것이다. 우리의 이타심의 근거는 바로 이 무리에서 찾을 수 있다. (인간 전체에 이타심을 발휘하는 성인이라도 외계에서 침략한 외계인에 대한 처리는 어떻게 하겠는가? 에일리언 영화를 생각해보자)

 

책의 결론을 내야겠다.

 

이 책 역시 결론이라고 따로 만들어서 친절하게 정리를 해주었으니 최대한 책에 근거해서 결론을 내야 책에 대한 예의가 아닌가 싶다.

 

인간은 끝없이 분류하고 구분하며 살아간다. 이 분류코드는 누구나 고유하게 갖고 있으며 살아가는데 많은 도움을 주기도 한다. 하지만 잘못된 분류코드는 (민족우월주의에 근거한 히틀러 유태인 학살 등) 치명적인 문제를 일으킨다. 우린 어쩔수 없이 잘못된 분류코드를 갖게되는데(노숙자, 장애인 등등) 좋은쪽으로든 아니면 나쁜쪽으로든 생각하는것만은 아무런 문제가 없다. 그것을 행동으로 옮기면(노숙자는 사회의 악이라고 규정하고 노숙자를 폭행한다든지 하는 행동) 문제가 되는 것이다.

 

'우리'  '우리가 아닌 그들' 의 코드가 우리를 지배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그것을 지배한다. 가족이니까, 같은 민족이니까 하면서 판단하고 행동하는 것은 옳지 못한것이다. 그리고 절대 자신이 정한 분류코드를 타인에게 강요해서는 안된다. 그 강요하고 있는 분류코드는 오직 당신의 이득에 관련된 것이다.

 

누군가 가족을 소중히 여기며 나라에 대한 충성을 의무시하고 동창회 활동을 열심히 하며 회사의 모든 행사에 빠지면 안된다고 생각한다고 치자. 그렇다고 해서 자신의 밑의 직원에게 혹은 친구나 지인에게 결혼은 꼭해야하며 전쟁이 나면 꼭 나라를 위해 싸워야하고 동창회에 왜 참석하지 않는지 다른 비협조적인 동창들을 비난하고 회사의 회식에 빠진 동료나 밑의 직원을 질타하는 것은 옳지 않다는 말이다. 나를 포함한 누구나 잘못된 분류를 하고 살 수 있다. 자기방어체제를 가동하다보니 실수가 나오는 것이다. 흑인을 보면 원인모를 위헙감을 느끼는 미국의 백인처럼 딱히 인종차별주의자가 아니더라도 사회가 그동안 알려준 잘못된 지식체계를 통해 잘못된 분류를 할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먼저 생각해야 할 것은 자신의 분류코드는 완벽히 주관적이란 부분에 대해 인정하고 타인과 다른 자신, 자신과 다른 타인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생각이다. 당신이 아무리 옳고 정당한 근거에서 대의를 가지고 분류를 했더라도 그건 단지 그 분류를 타인이 좀 더 인정해주는 정도 밖에 없다.

 

가장 근본적이고 많은 보편적인 지지를 얻는 인종/종족/국가의 차원에서 분류라도 일본으로 이민간 한국인은 한국과 일본이 전쟁하면 과연 누굴 위해 싸워야 하는가?

당신 아이를 살리면 50명의 아이가 죽고 당신 아이가 죽으면 50명의 아이가 산다면 당신은 어떤 분류에 의해 아이의 생사를 결정할 것인가? 가족인가? 인류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