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가족/단체 이기주의

아이루다 2012. 8. 5. 09:53

한 10년쯤 되었을 것 같다. 미국 헐리우드에서 만들어진 영화 '버티컬 리미트' 란 작품을 영화관에서 본 때가 말이다. 시간이 오래 흘러 정확한 상황에 대한 기억은 가물가물 하지만 대략 스토리는 이렇게 전개되었었다.

 

아빠와 아들과 딸이 있었다. 그들은 암벽 등반을 했는데 어느날 사고가 난다. 그래서 세명 모두 허공에 대롱대롱 메달리는 상황이 발생해 그들의 몸무게를 버티던 자일이 암벽에서 빠질 지경이다. 이때 가장 밑에 메달려 있던 아빠는 그 위 아들에게 자신과 아들사이를 잇고 있던 끈을 자르라고 한다. 엄청난 갈등속에 결국 아들은 끈을 자른다. 그 위에 있던 딸은 그것을 말리며 울부짓다가 사고가 끝난 후 오빠와 완전 틀어지고 만다.

 

오랜시간이 흐른 후 딸은 험난하기로 소문난 K2봉을 오른다. 부유한 사업가와 등반 전문가와 함께 셋이서 정상도전에 나섰다가 조난이 되고 만다. 그리고 이 사건 소식을 들은 아들은 동생을 구하기 위해 구조대를 꾸린다. 많은 산악인들은 실제로 그들을 가서 볼 수 있다고 해도 구조는 불가능 하다고 말한다. 말그대로 그 높이에서는 자신의 몸 하나 건사하는 것이 인간이 가진 최대 능력 발휘라는 말이다. 타인을 돕거나 데리고 산을 내려오는 것은 불가능한 목표이라며 구조대에 참여하길 거부한다. 이때 갑부의 힘을 빌러 1인당 백만달러를 제시한다. 그리고 대여섯명의 용병 구조대가 꾸려진다.

 

산을 오르면서 사고는 연속으로 이어진다. 마지막에 가서는 겨우 두명만 살아남아 사고현장에 도착하고 그 와중에 여러가지 상황이 벌어지면서 사업가와 동생만 남아 있게 되는 조난현장에 도착한다. 하지만 구조대 중 다른 한사람과 사업가의 오래된 원한으로 인해 둘은 죽고 결국 두 남매만 산에서 내려온다.

 

단순히 따지면 총 10명의 목숨에서 2명이 살아남는다. 단순 수학 계산으로 하면 1명을 살리기 위해 7명이 죽었다. 물론 산위에서 죽은 2명은 그냥 죽었으니 꼭 동생을 구조하다 죽은 것이 아니다. 1명의 목숨을 5명과 바꾼 셈이다.

 

이와 비슷한 영화가 '라이언 일병 구하기' 이다. 물론 이것은 국가차원에서 벌어진 구조작업이니 딱히 같은 종류는 아니나 결국 이 영화도 라이언 일병을 구하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죽는 스토리이다.

 

미국 헐리우드에서 생산되는 많은 이야기에서 주로 모든 문제를 야기시키거나 해결시키는 부분이 바로 가족의 사랑이다. 가족에 대한 사랑은 절대적 가치를 가지며 이를 위해서는 범법 행위도 또는 미친짓이라고 불릴 것 같은 주인공의 만용도 모두 허락이 되고 또 감동이 된다.

 

내 생각에 가족을 위해 가장 많은 사람을 죽인 영화는 아마도 '코만도' 란 영화일 것이다. 딸을 구하기 위해 수백명을 죽였을 것이다. 물론 거기엔 당위성이 있다.

 

우리 인간에게는 자신의 생명을 보호 할 권리가 있다. 그래서 타인의 목숨을 뺏는 행위는 범죄이지만 정당방위라는 명목으로는 허용이 된다. 이것이 조금 확장되면 가족을 위해 혹은 다른 타인의 목숨을 건지기 위한 살인도 통용이 된다. 즉 꼭 자신의 목숨이 아닌 타인의 목숨을 위해서라도 살인은 허용이 되는 것이다. 사형을 받은 사형수의 집행을 처리하는 처리자의 경우가 그런 경우가 될 것이다. 잠재적으로 미래의 살인을 더 저지를 사람의 목숨을 미리 끊어버리는 것이다.

 

미국의 경우는 이렇다고 치고 우리나라의 상황을 한번 봐보자. 우린 어떤 이기주의 현상을 보이고 있는가?

 

일단 우리나라에서도 가족이기주의는 너무도 명백히 나타난다. 한때 우리에겐 공동체 문화가 있었었다. 과거에 작은 마을 단위로 혹은 집성촌 단위로 얼키고 설켜서 결국 가족보다는 더 큰 마을 공동체 단위의 의사결정과 행동이 들어났던 시절이 조선시대엔 존재했었다고 한다. 하지만 요즘 대한민국의 사회, 특히 대도시를 중심으로 한 곳에서는 일반적인 자연스러운 공동체 문화는 이미 무너졌고 이득 기반의 모임들이 그 역할을 대신하고 있다. 실제로 조선시대보다 현대 대도시에 거주하는 사람들 훨씬 많은 단체에 소속되어 있을 것이 분명하긴 하다.

 

마을 단위의 공동체 문화는 과거 수많은 외적의 침탈을 당했던 역사에서 시작되어 진다. 나라가 백성을 구하지 못한 시기에 우리의 조상들은 스스로를 지켜야 했다. 그래서 민간 자치대를 구성하고 전란이 나면 의병이 자연스럽게 나타났으며 나라를 믿기 보다는 스스로 지킬 궁리를 더한 것이다. 그리고 공동체는 개개인이 감당하기 힘든 든 많은 일들을 공동으로 처리해주는 풍습이 자연스럽게 발달하였다. '품앗이'나 '경조사'에 참여하는 문화가 그 전형적인 예인 것이다.

 

하지만 현대에 와서 우린 스스로를 마을 단위로 지킬 필요도 없고 모내기를 같이 할 필요도 없어졌다. 경조사는 인간관계를 유지하는 수단으로 변질되어서 돈을 주고 받는 일종의 전형적인 문서없는 계약서로 전락한 상태이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뭐가 남았을까? 바로 그건 경쟁이다.

 

마을 공동체가 무너지면서 우린 가족 단위로 스스로를 지켜야 할 필요가 생겼다. 그리고 다른 가족 구성원은 나의 가족의 잠재적 경쟁자이다. 그래서 나의 가족 구성원이 다른 가족 구성원보다 더 잘나야 하고 이겨야 할 필요가 생겼다. 그래야 경제적으로 더 우월하고 또 그 결과로 더 행복해진다.

 

여자의 가족을 위한 무한 이기주의는 어머니의 정성이란 말로 포장이 되고 남자의 가족을 위한 무한 이기주의는 가장의 책임이란 말로 포장이 되어있다. 그것이면 타인에게 어떤 피해를 입혀도 어느정도 까지는 인정이 되며 또 공감도 된다. 그래서 어느곳에 가도 늘 가족간의 무한 경쟁이 펼쳐진다. 그중에서 그 정도가 심해 눈쌀이 찌뿌려지는 경우도 있어서 사회 이슈화 되기도 한다. (얼마전 야구장에서 삽결살 굽던 아줌마 사진이 떠오른다)

 

문제는 그런 가정에서 교유받고 자란 아이들이 미래에 가질 가치관이다. 가족을 이해 모든 희생을 한다는 명목하에 무한 이기주의를 보여준 부모세대의 영향이 아이들에게 절대 전달되지 않을리 없다. 물론 어떤 아이들은 거부를 할지도 모르지만 이기주의는 생명체 본연의 특성이다. 그래서 쉽게 거부하기가 힘들다.

 

이기주의는 절대 나쁜것이 아니다. 생명체라면 어쩔 수 없이 가지는 본능이다. 이게 없어지면 죽을 수 밖에 없다. 하지만 사회에 이기주의가 너무 심각하게 퍼지면 공멸의 길을 간다는 점에서 이기주의는 나쁘다. 누구나 자신의 몫만 챙기려 한다면 인간이 사회를 이뤄 얻을 수 있는 장점이 많이 사라져버리는 것이다. 그 예는 과거 조선시대에 장인의 기술들이 가족을 통해서만 전수되던 과정에서 이해될 수 있다. 결론적으로 누군가 중간에 전수하지 못하고 죽어버리면 그 오랜 시간 누적된 기술이 한순간에 사라져 버리는 것이다. 그 기술을 일반인에게 널리 전수했다면 자신이 밥벌어 먹고 사는것은 조금 힘들어질 수 있었을지 모르겠지만 그 기술 자체가 맥이 끊겨버리는 사태는 벌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인간이 인간의 문명을 이룬것은 절대 한세대에 이루어진것이 아니다. 우린 아주 오랜 반복적인 기술발전과 축척으로 현대 문명을 이루어낸 것이란 말이다. 여기에서 개인 이기주의가 만연해서 자신이 가진것을 타인들에게 공개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바로 정체를 의미한다.

 

우리 사회가 더 건강하게 또 미래지향적으로 발전해나가려면 개인,가족,친척,동문회 이기주의로 부터 벗어나야 한다. 물론 친목과 친교의 행복을 위해 관계를 유지하는것은 좋은 일이지만 거기에 또다른 이득을 지향하면 바로 우린 공멸의 길로 접어들 수 있다. 그리고 지금 그 징조가 세계 곳곳에 또 한국에 나타나고 있다. 우린 자신과 가족을 위해 미래의 가치를 땡겨와 부를 이루었으며 이 모래성 '빚을 기반으로 한 부'는 거품이 꺼지면서 사방에서 곡소리를 내고 있다.

 

난파된 배에서 가장 많은 사람이 살아남으려면 질서가 필요하다. 각 구명정엔 최대한 많은 사람들이 타야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모두의 공감대가 있어야 한다. 나만 살겠다고 너도나도 달려드는 순간 그곳은 아수라장이 되며 살아남을 확률은 급격히 줄어들고 만다. 그곳에서 자신이 돈이 많다고 권력이 있다고 혹은 현장을 지휘하는 선장이나 선원에게 인맥이 있다고 해서 쥐꼬리만한 이득을 취하는 순간 대다수의 그렇지 못한 사람들의 분노는 폭발하게 되는 것이다.

 

사회에서 공정성은 그만큼이나 중요하다. 그리고 이기주의는 그 공정성을 끊임없이 파괴한다. 내 가족을 위해서라면 위법 행위를 하는 것에 대해 거의 아무런 양심적 가책도 없다. 그리고 그것을 능력이나 혹은 최선을 다했다는 식으로 포장해버린다.

 

내 딸이 대학에 합격하기 위해 그 대학교수에게 과외를 받고 합격을 했다면 정확한 연결고리는 없어도 이건 일종의 부정행위가 된다. 그리고 그로 인해 누군가는 그 자격을 박탈당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런 경우 대다수의 사람들은 그것을 능력으로 보지 불법이라고 규정하지 않는다. 그리고 만약 이것을 불법으로 규정하고 비난하게 되면 바로 인간관계가 단절된다. 그래서 누구나 자신이 아는 사람에 대한 비리에 대해서는 침묵한다.

 

조직내에서 조직의 비리를 고발한 내부 고발자는 용감하고 조직의 미래를 위해 큰 일을 한 사람이 아닌 조직의 배신자가 된다. 그 사람은 조직에서 왕따를 당하고 누구도 그와 친하게 지내려 하지 않는다.

 

이 문제는 우리나라가 가진 가장 구조적인 문제이다.

 

그리고 이것을 미래에 어떻게 풀어나가 줄을 잘세워서 구명보트에 차례로 탈 수 있게 해주느냐는 바로 우리가 손을로 뽑을 입법/행정/사법권을 가진 존재들이다. 하지만 현재 상황을 보면 너무도 암울함을 느낄수 밖에 없는 것은 어쩔수없다. 그나마 행정/입법인 대통령과 국회의원은 우리 스스로 뽑을 수 있지만 법을 집행할 사법권을 가진 그들은 공부를 해서 되어갈 뿐이다. 그져 머리 좋은 사람들이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그리고 위에서 이미 썩어도 단단히 썩어있다.

 

사회 구성원은 가족단위의 이기주의에 제대로 물들어 있고 사회는 개인을 기반으로한  조직 이기주의가 엄청난 위력을 보이고 있다. 그리고 그 시스템 속에 자라나는 아이는 그것이 바로 제대로 사는 것이라 교육받고 동경하고 있다.

 

과연 우린 줄을 서서 구명보트를 탈 수 있을지 아니면 마구잡이식으로 달려들어서 순식간에 무너져내릴지 그것은 온전히 나를 포함한 대한민국 국민의 몫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