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운명과 선택을 통한 마음가짐

아이루다 2012. 7. 17. 11:40

내 아침 출근은 보통 자전거를 타는 날이 많다. 가끔 걷기도 하고 가끔 대중교통을 이용하기도 하지만 기본적으로 자전거가 주요 운송수단이다.

 

그런데 이 자전거를 타다보면 한강변에 이르러서 잠실철교를 통과해 강북으로 이동해야 하는데 여기에는 두가지 방법이 있다. 하나는 다리에 설치된 엘리베이터를 이용하여 다리위로 올라가는 방법이고 다른 하나는 좀 더 멀리 돌아서 계단을 이용하는 방법이다. 당연히 나는 전자를 우선시 하지만 가끔 엘리베이터에 대기중이 자전거가 많을때 (이 엘리베이터는 원래 자전거 이용용도가 더 크다) 많이 기다려야 하기 때문에 좀 더 멀리 돌아서 계단을 이용한다.

 

보통 이런 경우에 내가 약간의 갈등을 겪게 되는데 왜냐면 자전거 몇대가 앞에서 기다리더라도 조금만 기다리면 다음번 차례가 되어서 탈 수 있는데 굳이 멀리 돌아서 힘들게 계단을 올라야 하는지에 대한 귀차니즘때문에 그렇다. 그러다보니 정말 소소한 갈등을 겪으면서 자전거를 계단 가는길로 향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오늘 아침에도 그런 상황이 벌어졌었는데 웃기게도 내가 이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 내가 나도 모르게 스스로 선택한 길이므로 좀 더 안전하게 가야한다고 생각하고 있던 것이다. 거기가 나름 자전거 통행이 꽤 되는 편이기 때문에 잘못 하다간 사고가 날 수 있는 상황인지라 내가 엘리베이터를 타면 겪지 않을 상황을 돌아가겠다고 마음먹으면서 겪게될 원하지 않는 부차적인 단계에 대한 약간의 두려움? 혹은 걱정 같은 종류였으리라. 만약 거기에서 사고가 났다면 나는 그냥 사고가 난 것보다도 훨씬 더 후회할 것이 뻔하기 때문이다. 그냥 기다리다가 엘리베이터를 탔으면 나지 않을 사고를 굳이나 돌아서 가서 나게 된 것이니까 말이다.

 

이 경우를 좀 더 확대해서 생각해보았다. 모르는 길을 일자로 뻗은 길을 걸을때 하고 계속 갈라지는 길을 갈때하고 마음이 어떨까?  다른 말로 하면 선택의 폭이 없는 일을 할때하고 내가 뭔가 끝없이 선택을 해야하는 일을 할 때하고 우리 마음에 어떤 차이가 있을지 생각해보았다.

 

마약 어떤 일을 할 때 내 선택이 아닌 누군가에 의해 이미 결정된 길을 가야 한다면 만약 그 일이 잘못되었을 때 솔직히 나는 크게 자책감이 들지 않는다. 왜냐면 그것을 결정한 주체가 내가 아닌 탓이다. 반대로 내가 어떤 결정을 해서 그 길을 가야 한다면 그 일이 잘못되었을 때 내가 느끼는 자책감은 상대적으로 확실히 클 것이다.

 

아마 직장에서 예를 든다면 팀장과 팀원의 차이라고 할까?

 

내가 느끼는 외국 교육과 국내 교육의 큰 차이점 중 하나가 바로 이점이다. 스스로 선택하고 책임지는 훈련을 받는 것과 누군가가 정해준 길을 가면서 누군가가 옳다고 알려준 일을 잘 하는 훈련을 받은 것과의 차이.

 

초.중.고를 고쳐 대학까지 심지어 직장까지도 스스로 결정하지 못하고 부모나 기타 누군가의 생각에 의해 결정하고 결혼조차도 그런사람들이 꽤 된다. 그래서 만약 그 일일 잘못되었을 때 스스로 책임지려는 자세보다는 자신을 그런 길로 가게 만든 그 주체에 대한 원망이나 원인제공자로서의 책임감 회피 같은 사고를 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은 실제로 어떤 일을 벌이는데도 사람을 많이 망설이게 만들고 어떤 결정을 하는데 수 많은 고민을 만들어내어서 실제로 하지 못하게 만들기도 한다. 시도가 없으니 결과가 없을 수 밖에 없다. 창의력이란 것 잘 생각해보면 다양한 시도를 겁없이 해대는 것이다. 수 많은 잉여짓을 통해 단 하나의 제대로 된 짓을 해내는 것이 바로 창조적이란 말이다. 그런데 우리는 이런 시도를 못한다.

 

살아오면서 스스로 결정하고 스스로 책임지는 훈련을 받지 못한 탓이다. 물론 기질상으로 이것을 극복한 사람들도 많다. 그리고 그것을 극복하게 만드는 힘은 바로 엄청난 욕망이다. 어떤 지위나 어느정도 수준의 부를 이루고자 하는 욕구가 강해서 이겨내는 것이다.

 

사람이 어떤 교육을 받는지간에 어떤 일을 결정할 때 마음의 부담이 없을 순 없다. 선진국 교육이나 우리나라 교육기관을 통한 사람이나 마찬가지이다. 하지만 그 기준점은 무척 다르다. 누군가는 10의 부담감으로 결정을 하겠고 누군가는 100의 부담감으로 선택을 할 것이다. 그렇다면 10의 부담감을 갖도록 교육시킨 곳에서 성장한 사람이 100의 부담감을 가진 사람보다 훨씬 마음 편하게 결정하지 않을까?

 

운명처럼 결정된 삶을 사는 것은 마음이 편하다. 일제시대에 독립운동과 같은 절대적 가치나 전쟁시 나라를 위해 싸운다는 어떤 명백한 목표가 있을때 우린 삶과 죽음에 대한 본능적 두려움을 있을망정 내가 한 선택이 잘되었는지 못되었는지 타인들은 어떻게 사는지에 대한 의문이나 갈등은 없다. 하지만 현대와 같이 그런 명백한 목표가 없는 사회에서 살아갈 때 내가 한 선택이 제대로 된 것이냐 아니냐를 끝없이 고민하게 되는 상황이라면 마음이 편할 수 없다.

 

그래서 다들 결정을 하기 싫어하고 또한 누군가 결정해주길 바란다. 이끄는 자와 이끌리는 자의 역할이 있다면 다들 이끌리는 자의 위치에 서고 싶어한다. 물론 이것이 긍정적인 면도 있다. 이끄는 자는 늘 주장이 강하기에 이끄는자가 많으면 배가 산으로 간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이끌리는 자의 위치에만 서고 싶어하기에 사회적으로 생기는 수많은 문제에 대해 누구도 나서려 하지 않는다.  오직 나설땐 스스로 명백한 손해를 입었을때만 그렇다.

 

주어진 삶에 대해 순응하면서 사는 것도 일종의 행복일 수 있겠지만 스스로 내가 왜 이렇게 살아가야 하고 또한 이런 선택을 해야하는지에 대해 조금만 더 생각해보는 것을 어떨까? 우리가 동물이 아니고 생각할 줄 아는 인간이라면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