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리학

나를 위한 삶 vs 남을 위한 삶

아이루다 2012. 7. 18. 13:51

 

세상은 참 다양한 형태의 삶이 존재하는데, 그 중에서 마치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닌, 다른 존재를 위해 사는 듯해 보이는 사람들이 있다. 남편이나 아이를 위해 최선을 다하는 여자나, 가정을 위해서 온갖 힘든 일을 하는 남자들이 있다. 노환에 시달리는 부모를 공양하는 효자들도 있고, 민족이나 국가를 위해 헌신하는 군인들도 있다.

 

하지만 냉정히 말해서 남을 위해 사는 이는 단 한 명도 없다. 그래서 그들의 입에서 다른 존재를 위해 산다고 말이 나올 때, 그것을 들으면서 고개를 끄덕여줄 수는 있을지 몰라도, 그들이 정말로 맞는 말을 하고 있다고 인정할 수는 없는 것이다. 남을 위해 사는 것 같아 보이지만 실제로는 그것이 자신을 행복하게 해주니까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에 생각해 보기 위해서 남을 위하는 삶을 산다는 사람과 나를 위해 산다고 판단되는 유형의 삶을 한 번 예를 들어보기로 하겠다. 대상은 가장 일반적인 주부의 모습으로 하겠다.
 
주부 A씨는 고등학교/중학교에 다니는 두 아이의 엄마다. 젊은 시절 그녀는 나름 멋 도내고 예쁘다는 소리도 들었던 얼굴을 가졌었다. 하지만 그녀가 결혼한지는 벌써 18년이 흘렀고 25살의 나이에 결혼을 했으니 벌써 43살이나 되어 그런 기억은 빛 바랜 사진에만 남아 있다.

 

초기엔 잠깐 맞벌이를 했지만 16년이상 집에서 살림만 한 탓에 지금은 전형적인 전업주부의 모습이다. 그녀는 어느 날 큰맘 먹고 백화점에 갔다. 그리고 이것저것 자신에게 맘에 드는 옷을 사고 집으로 돌아왔다. 오랜만에 원 없이 쇼핑을 한 탓에 기분이 한껏 좋아졌다. 역시 이 맛에 쇼핑을 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집에 와 사온 옷을 분류 해보니 남편 옷 2벌 아이들 옷 각각 2벌씩 총 6벌이었다. 원래는 자신의 옷을 사려 갔던 백화점인데 사고 나서 집에 와보니 자신이 아닌 가족의 옷만 사가지고 온 것이다. 잠시 황당하기도 했지만 이게 다 행복이란 생각에 다시금 웃음이 지어졌다.
 
주부 B씨는 역시 전업주부이며 두 아이의 엄마이고 백화점을 즐겨 찾는다. 그렇다고 해서 그녀가 A씨처럼 남편/아이들 옷을 사는 것은 아니다. 이번 주말에 있을 동창회에 입고 갈 예쁜 봄 원피스 한 벌을 맞추기 위해서였다. 그녀는 이 옷을 사기 위해 한달 이상을 남편과 실랑이를 했으며 이번에 남편에게 새로 나온 아이패드를 살 수 있도록 허가 해주고 자신은 옷 한 벌 사기로 일종의 협약을 맺은 것이다.
 
3시간 가량을 돌아다녀 자신의 맘에 쏙 드는 너무나 예쁜 원피스 한 벌을 발견하고는 조금 비쌌지만 카드로 계산하고 나왔다. 집에 와서 입은 채 전신거울로 자신의 모습을 비춰보니 주말에 만날 동창 애들의 모습이 눈에 훤하다. 특히 남편이 요즘 돈 좀 벌었다고 명품으로 치장하고 다니는 명숙이 년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생긴 건 무슨 오크처럼 생긴 것이 명품만 걸치면 진주가 되는 줄 안다.

 

이번에 자기가 산 원피스를 입고 나가면 타고난 몸매에 40대지만 아직은 봐줄만한 얼굴로 동창회에 온 친구들의 관심을 한번에 끌어줄 게 분명하다. 그녀는 상상만으로도 행복해서 자기도 모르게 얼굴에 미소가 번져 나왔다.
 
예상보다 돈이 적게 들었다는 생각이 나면서 그 돈을 쓰기 위해 옷을 벗어 잘 개어놓고 잠시 시간을 내어 근처 시장에 있는 옷 가게에 가서 남편 옷과 애들 옷도 조금 샀다. 남편은 워낙 이런데 관심이 없어서 대충 주면 잘 입는다.
 
단순하고 전형적인 예 두 가지를 들었다. 같은 돈을 가지고 남편/자녀의 옷을 산 부부와 자신의 옷을 산 두 주부의 이야기이다. 뭐 된장 녀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니 둘이 어떤 이유로 돈을 썼는지는 따지지 말자. A씨는 자신보다는 가족을 B씨는 가족보다는 자신을 위해 돈을 쓴 것이다.
 
우리의 삶의 목표가 행복에 있다고 치면 누가 더 행복한 것일까? A씨일까? B씨일까? 물론 답은 없다. 똑같이 행복할 수도 있다.
 
A씨는 가족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고 자기보다는 가족이 더 우선 순위에 있으며 그들을 위해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하면서 행복감을 느끼는 성격이다. 즉 가족 구성원들에게 자신의 삶을 투영시키면서 그들이 잘되면 자신이 잘되는 듯한 느낌을 받아 행복한 것이다.

 

남편이 자녀가 밖에서 잘되고 좋은 소리를 들으면 그녀 역시 그런 것처럼 느낀다. 자녀들이 커 가면서 그녀의 범위를 가끔 벗어나는 듯한 느낌을 받기 하지만 아직까지는 그녀를 필요로 하며 남편도 역시 자신의 가정을 굳건히 지켜주는 존재로서 그녀가 늘 잘해야 할 대상이다. 그녀는 가끔 주변에서 자녀들이 다 커서 독립할 때의 모습을 보면서 불안함을 느끼기도 한다. 그들이 다 떠나고 나면 자신의 삶을 지탱해 줄 것은 무엇일까?
 
B씨에게 가족은 그냥 가족이다. 자신의 삶을 더 잘살게 해 줄 사람들이며 자신을 더욱 행복하게 해줄 존재들이다. 물론 자녀에 대해서는 모성애가 있기 때문에 남편처럼 경제적 책임만을 지는 존재가 아닌 자신이 돌봐야 할 존재이긴 하지만 그래도 자신은 자신이고 자식은 자식이다.

 

그래서 어느 정도 자녀들이 스스로 살아갈 나이가 될 때까지만 보살펴 줄 계획이고 특히 자녀들이 결혼을 하면 이제 홀가분하게 자신의 삶을 즐길 계획이다. 아는 분들 중에 손주 보면서 자녀 뒷바라지 하는 그런 모습으로 늙어가긴 너무 싫다. 그냥 그녀는 그녀가 좋아하고 행복해하는 맛난 것을 먹고 좋은 것 보고 예쁜 옷 사면서 살 계획이다.
 
객관적으로 그냥 얘기하자면 A씨는 이타적인 성격이고 B씨는 이기적인 성격이라고 말 할 수도 있겠다. 가정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삶, 자신을 위해 가정을 유지하는 삶.
 
하지만 말이다 한번 이렇게 생각해보자. A씨가 만약 자신의 가정이 아니라 해도 저렇게 행동할까? 답은 당연히 아니다.
 
A씨는 이기적인 범위를 가족으로 확대한 것이고 B씨는 어려서부터 가진 자신의 범위로 한정한 경우다. 그러니 실제로는 둘 다 이기적인 삶이다. 그게 가족 이기주의냐 개인 이기주의냐의 범주만 다를 뿐이다. 어떤 의미에서 B씨는 A씨보다 더 이타적일 수 있다 자기 가정만 최고로 아는 것이 아니니 타인들의 삶에도 약간의 관심은 있을 수 있으니 말이다.
 
대한민국엔 아직도 A씨처럼 살아가는 사람들이 참 많다. 그리고 자신이 가족을 위해 희생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많다. 하지만 잘 생각해보자. 정말 희생한 것인가? 결국 자기 자신에게 행복하게 할 행복 유전자가 없어서 결국 타인의 즐거움을 행복 요소로 생각하는 것은 아닐까?

 

어떤 사람들은 자신이 맛난 것을 먹는 것이 행복하고 어떤 사람들은 사람들이 자신이 만든 맛난 것을 먹어 주는데 행복해 한다. 둘 다 모두 행복 하다는 공통 요소는 있지만 하나는 행복을 느끼고 하나는 행복을 느끼는 모습을 보고 행복을 느낀다. 그래서 둘 다 있어야 한다. 어느 한쪽만 있으면 누구나 음식만 만들어대거나 누구나 음식을 먹으려 만 들 테니까.
 
어느 모임을 가든지 분위기 메이커가 있다. 일종의 웃음 유발 자들이다. 그들은 스스로 즐거워하며 스스로 행복하면서 주변인들에게 행복을 전파시킨다. 그래서 모임이 즐거워진다.  그래서 그들은 어디에서나 환영 받고 많은 모임에서 그들의 존재를 필요로 한다. 그래서 스스로 존재감도 높아지고 더 행복해 한다. 이런 사람들은 주로 나를 위한 삶을 사는 유형이라고 평가 된다.
 
악당이 있어야 선한 자가 인정 받듯이 이런 사람들이 있어야 또한 이타적으로 평가되는 사람들이 존재하게 된다. 누구에게 잘해주고 싶어도 잘해줄 사람이 없다면 어떻게 이타적이 될 수 있겠나. 그리고 또한 남을 위해 살아온 사람들은 늙어서 결국 그 남의 존재가 자신을 배신하거나 혹은 결혼한 자녀들처럼 자신을 떠나게 되면 순간 상실감에 휩싸여 급격한 우울증이 올 수도 있다. 물론 그럴 경우 보통 개를 키우는 것이 현실이지만.
 
우리는 공통체 사회이다. 무리 지어 사는 것이 익숙한 사회이고 그래서 가족단위 친구단위 등등 수 많은 모임을 가진다. 하지만 실제로 그 모든 것은 유동적이다. 가족은 시간에 따라 흩어지고 친구들 모임은 살아가는 모습에 따라 분리되어 간다. 결국 언제나 남는 것은 집안에 있는 화장대 거울을 바라보는 자신이다. 그럼 어떻게 살아야 하나?
 
스스로 혼자 행복을 느낄 수 있는 훈련을 해야 한다. 타인의 모습을 보고 행복해하고 TV를 보면서 행복해 하고 가족 구성원의 잘된 모습을 보고 행복해 했다간 시간이 흘러 그런 것들의 허상을 경험하고 난 후 아무것도 남는 것이 없을 때 급격하게 나락으로 떨어질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해서 B씨처럼 가족보다 내가 우선 식으로 살아갈 필요는 없다. 나하고 가족 비중이 1 : 99 였다면 이제 30:70으로 바꿔야 한다. 나를 위해 쓰는 훈련을 해놔야 나중에 70이 없어져도 30으로 버틴다.
 
행복은 훈련하기 나름이다. 내가 즐기고 행복해하는 그 모든 것이 엄마 뱃속에서 본능적으로 알고 태어난 것이 아니다. 물론 먹고, 자고, 싸고 하는 본능적인 것들은 그렇다고 해도 세상은 아는 만큼 보이고 이해하는 만큼 재미있는 것이다.
 
아무것도 모를 때 하늘의 별을 봐야 무슨 재미가 있겠는가? 별자리를 알고 찾을 수 있으며 밝은 별의 이름을 알 수 있다면 그 별을 볼 때 훨씬 행복할 수 있는 것이다. 모르는 클래식을 아무리 들어도 좋은 음악이다 정도 이상 무엇을 느끼겠는가? 이 곡의 작곡가를 기억하고 그 사람의 삶을 이해한다면 그리고 이 곡이 어떻게 쓰여졌는지 안다면 그 음악을 이해하고 즐기는 깊이가 훨씬 깊어지지 않을까?
 
남을 위해 살아왔다고 자부하는 분들.. 이제 좀 자신을 위해 투자하자. 그것이 스스로 자신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삶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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