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리학

다가치 시대가 주는 혼란

아이루다 2012. 5. 22. 10:45

 

만약에 한번도 와인을 사본적이 없는 사람이 어느날 커다란 마트에 있는 주류 판매대에 갔다고 생각해보자. 나도 그런 경험이 있지만 일단 처음엔 그 어마어마한 종류에 입이 벌어지고 두번째는 정말 레드와인과 화이트 와인조차 구별하지 못하는 수준의 지식에서 맛있고 좋은 와인을 고른다는 것이 얼마나 황당한 생각이었는지를 알게 된다. 결국 보통의 다음 절차는 점원에게 도움을 청하고 잘은 모르지만 반쯤 알아들을 법한 설명에 고개를 끄덕이다가 "이정도가 좋으실 거예요" 한마디에 혹하다 하나 더 추천해주는 것을 보면서 자신이 처음에 생각했던 가격을 기억해내고 저울질하다가 결국 싸거나 비싼쪽으로 마음을 정하게 된다.

 

반대로 점원시점에서 봐보자. 이떄 점원은 어떤 기준으로 매장을 찾은 손님에게 추천을 했을까? 아마 가장 중요한 것은 손님이 어떤 것이든 사는 것이고 두번째는 가능하면 비싸서 자신에게 이득이 많이 남는 것이어야 하며 또한 추후에 또 이 매장에 다시 들를 수 있는 만족감을 선사하는 것이 목표였으리라. 결국 내가 어떤 와인을 고르든 그 결과는 점원의 목표와 나의 목표가 일치하길 바라는 운일수 밖에 없다.

 

그래서 아마도 와인을 좀 더 제대로 즐기고 싶다면 수년간 수많은 종류의 와인을 맛보고 심지어 공부까지 따로 해야할 것이다.

 

동일한 상황에서 만약 와인을 사러 또다른 가게에 갔는데 와인이 딱 한가지 종류만 있고 주인은 간단히 맛과 특성을 설명해줬다고 하자. 여기에서는 선택이 훨씬 쉬워진다. 다른 것을 쳐다볼 필요도 없고 그저 사느냐 마느냐만 결정하면 된다. 여기에서는 거의 가격만이 주요한 요소이다. 물론 단 하나만의 제품을 팔 경우 정말 급한 일이 아니거나 혹은 이미 정보를 알고 있지 않는 한 사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

 

물론 후자인 경우에 선택의 폭이 없어서 완전 망하거나 생각보다 좋았거나 할 수 있다. 그런데 전자의 경우나 후자의 경우나 특별히 다를까? 차라리 전자의 경우일때 비싼 돈을 주고 산 와인이 맛이 없었다면 다른 것을 고를걸 하는 후회가 더 들지 않았을까?

 

사람은 남의 떡이 더 커보이는 심리를 정말로 가지고 있다. 자신이 이미 가진 것보다 자신이 아직 갖지 못한 것에 더 집중을 하고 갖고 싶은 욕구를 심하게 더 느낀다. 그러다보니 남의 떡 종류가 많으면 많을수록 정도가 심해진다.

 

나는 가끔 이런 생각을 한다. 선택이 폭이 넓다고 해서 과연 우리가 만족할 만한 선택을 할 수 있는 가능성이 높아지는가? 수십개의 음식메뉴를 판매하는 식당과 단 하나의 메뉴만을 판매하는 음식점에서 보면 확실히 그건 아니다. 둘 다 비슷하다. 메뉴 종류가 많으면 들어가서 어떤 것을 고를지 고민을 하고 메뉴 종류가 적으면 들어가기 전에 들어갈지 말지를 고민할 차이가 있을 뿐이다. 김밥천국과 30년 전통 설렁탕집의 차이일 뿐인 것이다.

 

우리 인간은 근본적으로 자신이 가진 가치기준에 따라 살아간다. 즉 자신이 가치있다고 느끼는 것을 얻기 위해 살아가고 또한 이것이 과정 및 결과에 걸쳐 개개인에게 많은 행복감을 준다. 그리고 그 가치기준은 사람마다 천차만별로 다르며 내가 최고라고 여기는 것이 어떤 이에겐 쓰레기보다 못한 것이 될 수도 있다. 따라서 우린 어떤 선택을 하든지 그 자신만이 정의한 고유의 가치이기가 쉽다.

 

그런데 사람의 심리중에 자신이 한 선택이 옳았다는 것을 검증 받고 싶어하는 심리가 있다. 이것은 자신의 가치기준의 정당성을 확인받으려는 행동인데 우린 타인과의 대화나 자신이 쓰는 글등에서 본증적으로 늘 그것을 표출한다. (지금 쓰고 있는 글도 그런 유형의 하나다) 그리고 그것을 자신의 신념이라 믿고 타인과 충돌이 나게되면 강한 반동이 나타나 토론을 하거나 논쟁을 하고 심지어 육체적인 충돌까지 일어나게 된다.

 

이 근본에는 자신의 선택한 가치기준이 최고의 선택임을 인정받고 싶어하는 심리가 숨어있다. 설령 최고의 선택은 아니더라도 잘못된 선택이 아니였으면 하는 것이다. 즉 자신이 심사숙고하여 선택한 어떤 가치기준점이 누구에게나 그것이 옳다고 그리고 중요하다고 생각되어지고 싶어하는 심리이다. 그래서 이런 심리가 강한 사람일수록 타인들에게 그 자신의 생각을 말하고 설득하려 한다.  이와 연관되어서 나타나는 행동 중 혹시라도 그것이 흔들드리게 되는 다른 사실을 알게되면 재빨리 그것을 부정하는 논리가 있는지 찾아보고 있으면 읽으면서 안도를 하는 사람도 정말 많다.

(인간의 이 행동은 정말 좋으면서도 좋지않다. 자기의 사고방식을 바꿀 수 있는 계기임과 동시에 자기 부정을 통한 커다란 고통을 견뎌내야 하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보통은 생각을 바꾸지 않고 생각을 바꾸게하는 대상이 틀렸음을 증명하려 한다)

 

하지만 말이다 자신의 주변인물들이 그것을 맞다고 말하고 또한 최고의 가치라고 말한다고 해서 정말 그것이 가치가 생기는 일인가?

 

미국 NASA에는 태양의 움직임을 관찰하여 태양 예보를 하는 분들이 있다. 그분들은 11년 주기로 반복되는 태양의 변화를 매일 관찰하여 보고하며 가끔은 태양의 흑점 활동이 활발하여 몇달내에 무시무시한 태양풍이 지구를 덮칠지도 모른다고 경고를 한다. 이분들에게 태양의 변화는 정말 엄청난 사건이다. 그런데 일반인 중에 누가 태양의 흑점 활동에 관심을 갖겠는가? 하지만 반대로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아는데도 넋놓고 당할 수 있는것은 아니니 누군가는 연구를 해야한다. 그런데 이런것을 하려면 비용이 많이 드는데 다 국민의 세금이니 왜 이런 연구활동이 필요한지 근본적인 이유가 필요해지고 그러기 위해서는 일어날지도 모를 사건에 대해 매스컴 노출을 시켜야만 하는 것이다. 물론 실제로 그런 사건이 일어날 수도 있지만 말이다. 이분들은 모였을때 자신들이 하고 있는 일에 대한 가치를 높게 평가할 것이다. 그렇다고 가치가 없다는 의미는 아니다. 단지 어떤 가치들은 그들만의 리그일 가능성도 높다는 의미이다.

 

현대사회를 살아가는데 있어서 가장 큰 문제는 어쩌면 다가치관의 사회가 주는 혼란스러움일지도 모른다. 특히 딱히 중요한 가치기준을 마련하지 못한 사람들은 끝없이 자신의 가치를 그리고 가치기준을 만들어내기 위해 노력할 수 밖에 없는데 만약 일제시대라면 어땠을까? 어쩌면 단순하게 독립운동을 하느냐 아니면 그냥 순종하고 살아가느냐만 선택할 상황이 아니였을까? 70~80년대 역시나 독재정권에 맞서 목숨걸고 싸우느냐 아니면 순종하고 조용히 사느냐 문제만 있었듯이.

 

그런데 지금은 너무도 그 가치기준이 많다. 물론 요즘도 종교나 사상에 가치기준을 명확하게 두고 사는 사람들도 꽤 있다. 하지만 실제로 보면 그것조차도 단순한 선택의 문제일 뿐이다. 어려서부터 가치기준을 선택할 기회조차 얻지 못했거나 혹은 성격적으로 잘 맞아서 명확해진 경우가 많다. 즉 종교의 가치기준은 일명 모태신앙도 있고 사상같은 경우엔 북한에서 태어난 어떤 어린이들의 모습일수도 있다. 이 모두 자신이 스스로 가치기준을 찾기 전에 이미 누군가에 의해 주입받아 버린 결과가 되어버린다.

 

타인의 생각을 쉽게 받아들이는 성격을 가진 사람은 자신의 어떤 우연한 경로에 의해 접한 환경을 거부감없이 쉽게 받아들인다. 종교도 그렇고 다단계도 그렇다. 물론 비판없이 받어들여진 이런 것들에 있어서 나타나는 문제점은 다단계가 훨씬 위험하지만 실제로 나는 그 둘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의 근본적인 심리는 동일하다고 믿는다.

(굳이 종교와 다단계를 같이 예를 든 이유는 종교도 그렇고 다단계도 그렇고 일정시간 모여서 어떤 연설을 듣고 팀웍을 다지며 우리가 옳다라고 믿고 힘내자 으쌰으쌰 하는 군중세뇌의 효과를 이용한다는 방식에서 동일하다고 느끼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런 주입식 가치기준을 거부하는 사람들은 어떻게 이런것을 찾아야 할까? 단순히 찾기만 해서도 안된다. 최선의 선택이어야 하는데 물론 자전거를 타는 가치기준을 가진 사람은 자전거가 얼마나 인생에 커다란 도움을 주는지 설명하는데 하루종일 떠들 수 있다. 마라톤도 마찬가지고 등산도 마찬가지다. 자동차도 그렇고 RC카도 그렇다. 오토바이 타는 것도 그렇고 좋은 오디오를 찾아 헤매는 사람도 그렇다. 사진을 찍는 사람도 그렇고 온라인 게임을 하는 사람도 자신이 하고 있는 취미가 얼마나 긍정적인지 설명할 수 있다. 독서, 영화보기, 여행 모두 마찬가지다.

 

하지만 과연 정말 그럴까? 우리 스스로가 좋아하고 하면서 행복하다고 해서 그게 정말 유일한 가치이며 다른것들과 비교도 안될만큼 중요한 것인가?

 

물론 많은 사람들은 자기만 좋으면 되지라고 말을 한다. 하지만 이런 사람들과 대화를 하다보면 자주 이런 가치에 대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다. 숨기고 있는것 뿐이며 내가 관심을 가져주지 않기 때문에 말하지 않을 뿐 언제라도 자신의 가치기준을 알아주는 사람을 만나면 하루종일 떠든다. 그리고 마치 몇년을 사귄 사람처럼 쉽게 친해진다.

 

이 자체가 잘못되었다는 것이 아니고 우리가 얼마나 자신의 가치기준을 중요하게 생각하는지 생각해보게하는 대목이다. 그것이 얼마나 중요하면 나와 같은 가치기준을 느끼는 사람을 만나자 마자 모든 경계벽이 허물어지고 그렇게 쉽게 친해지겠는가?

 

처음에도 언급했듯이 사람은 가치기준을 찾을 수 밖에 없고 또한 그 가치기준이 최고의 가치가 되길 바라는 심리는 본능적인 것이다. 절대 바꿀 수 없다는 것이다.

 

단지 내가 경계하는 것은 내가 가진 가치기준점이 최고가 되어야 하기에 그 가치기준을 높게 책정해주는 얘기들만 듣고 또 반대 급부에 있는 가치기준을 무시하며 결과적으로 자신이 살아가는 삶의 형태만 옳고 자신처럼 살지 못하는 사람들을 자신의 밑으로 놓아버리는 사람이 되지 말아야 한다는 생각이다.

 

내 가치기준이 높아질수록 타인의 가진 가치기준과 차이가 점점 더 벌어지게 마련이다. 그리고 오랜 시간을 쏟을수록 그 가치기준은 점점 더 높아지고 되돌리기도 힘들어지기 때문에 나이를 먹어갈수록 타인의 가치를 더 무시하고 말이 통하지 않는 사람이 되어가는 것이다. 우린 이것을 보수화라고 말한다.

 

조심해야 한다. 가치기준을 만들고 찾아가는것은 개인적인 선택이지만 그것으로 인해 타인의 삶 자체를 단편적으로 평가해버리는 모습으로 변해가는 것은 정말로 경계해야할 점이다.

 

나 역시 이것에 절대로 자유롭지 못하고 또한 반성을 많이 해야할 부분이 있다. 물론 정말 인정하기 힘든 가치 기준점을 가진 사람들도 많다. 아직은 그런 사람들까지 이해하려는 것은 욕심이고 어쩌면 평생 불가능한 목표일 수 있다. 하지만 결국 그런 것들도 인정하는 내면의 모습을 가졌을 때 정말로 내 가치기준이 최고의 선택이 되는것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