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죽음. 생명체로서는 절대적으로 멀리해야하는 것인가?

아이루다 2012. 6. 19. 15:39

 

혹시 대한민국의 노인 자살률에 대해 관심이 있는 분이 있는가?

 

나 역시 정확한 자료가 없지만 얼마전 본 문서에 의하면 인구 10만명 당 65세 이상 75세 미만은 80명 정도, 그 이상의 나이인 75세이상은 160명이라고 한다. 우리가 흔히 비교하는 주요선진국은 10~15명 안팍이니 우리나라인 경우 75세 이상에서는 10배이상 높은 셈이다.

 

노인자살률이 높은데는 당연히 경제적인 문제가 있다. 특히 요즘 우리나라의 노인 빈곤률이 아주 높은 수준이기 때문에 우리나라 노인 자살률이 높게 나오는 원인이 될 것이다. 65세 이상의 분들이면 지금부터 70년전인 1950년 이후 즉, 한국전쟁 이후에 태어나 1980~90년대의 높은 경제성장률을 이끌었으며 지금은 거의 은퇴하거나 잡일을 하면서 여생을 보내고 있는 세대이다. 특히 부의 편중이 심하며 많은 노인분들은 실제로 끼니를 잇기조차 힘든 것 또한 현실이다.

 

축복속에 태어나 양육되고 교육받고 사회에 진출해 일을 하다가 은퇴해서 여생을 보내다가 생을 마감하는 것이 현대인의 삶이다. 그런데 우린 여기에서 '자살' 이란 단어를 잊고 산다. 물론 많은 사람들이 자살에 대해 생각을 하지만 실제로 자살을 통해 삶을 마감하는 분들은 전체 죽음에서 크게 차지하지는 않는다. 보통은 병으로 죽거나 정말 생기가 모두 소진되어 죽거나 사고로 죽는다.

 

오늘 이런 생각이 든다. 내가 젊어서 혹은 나이를 어느정도 먹어서 아주 행복하게 살고 있다고 치자. 나는 오늘도 행복하고 내일도 행복하다. 그런데 그렇게 행복하게 살다가 내가 죽기 직전에 나에게는 내 생전 절대 없었던 엄청난 불행들이 닥쳐왔다. 나는 아프고 나는 돈도 없고 자식들도 나를 버렸다. 나는 오늘 밥먹기도 힘들고 몸은 아파죽겠고.. 결국 나는 자살로서 삶을 마감한다.

 

나는 어떠한 삶을 산 것인가? 행복한 삶인가? 불행한 삶인가?

 

물론 누구에게 내가 행복했다, 불행했다를 평가받는 것 자체가 우수운 일이긴 하지만 그래도 한번 생각해보자.

 

세상을 살아보면 누구나 정점이란 것이 존재한다. 우리의 산체기능도 20대를 전후로 정점을 지나고 우리가 직업적으로 할 수 있는 능력도 30~40대를 지나면서 정점을 지난다. 물론 직업에 따라 이건 차이가 많이 난다.축구선수는 20~30대이고 아주 오랜 기간 숙련을 해야한 기술직인 경우엔 50~60대가 될 수도 있다. 아무튼 정점이 있다는 사실만큼은 변함이 없다.

 

여기에서 정점을 행복이 정점으로 바꿔보자. 우리가 행복한 것도 정점이 있다. 아무리 행복하고 좋게 살아도 일정시간이 흘러 나이를 먹게되면 점점 그 재미가 사라지고 희미해져 간다. 젊었을 때 그토록 열광했던 그 어떤 것도 내 주변의 사람들이 하나 둘씩 세상을 떠나고 나 또한 언제 죽을지 모르는 나이가 되었다면 기억조차 희미해진 어떤 것이 될 수 있다.

 

과연 삶에서 어떤 순간에 죽는 것이 그나마 나은 죽음일까?

 

지금 이 순간에 생각해본 다면 어쩌면 내가 가장 행복한 순간에 죽는 것이 선택할 수 있는 죽음의 순간 중 가장 적절한 시점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물론 나의 죽음이 나 혼자만의 죽음으로 끝나지 않고 나를 아는 주변인물들에게 영향이 미치기에 그리 단순하게 생각하긴 힘들지만 나만 놓고 봤을땐 내가 가장 행복한 순간에 순식간에 죽어버리는 것. 나는 그냥 행복하게 죽어버리는 것이다.

 

물론 매우 힘든 선택이고 또한 결정하기도 힘든 것이다. 과연 어떤 순간이 내가 가장 행복하다고 장담할 수 있나.

 

우리는 미래에 대한 기대와 미래에 올 행복을 희망으로 살아간다. 결국 자살하는 사람은 미래에 대한 기대치가 없어서 그렇다. 희망이 없는 것은 인간에게 가장 잔인한 형벌인 셈이다.  우리나라 노인들의 자살률이 높다는 점은 우리사회의 심각한 문제점을 알려준다. 하지만 또한 다른 관점에서 보면 살아서 사는 것이 아니라면 죽음을 선택하는 것 그 자체는 아주 자연스럽고 또한 적당히 살았다면 적당한 시점에 세상으로 부터 이별을 해 주는 것도 인간만이 선택할 수 있는 기회가 아닌가 싶다.

 

자신의 뜻에 반하여 희망을 잃고 세상을 등지는 자살의 길을 선택하는 분들에 대해서는 우리 사회가 앞으로 많은 관심을 가져야 할 문제점이다. 노인 자살뿐만 아니라 청소년 자살 문제도 아주 심각하지만 우리나라는 아직도 자살을 개인의 선택으로 치부해버린다. 결국 누군가가 자살을 결심하는데 있어서 개개인의 정신력 문제로 간단히 처리해 버리는 것이다. 약육강식의 냉정한 정글 논리이다. 이 부분은 우리 사회에서 앞으로 오랜 시간을 투자해야만 해결할 문제니 나중에 좀 더 자세히 다뤄보기로 하고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 인간이 선택하는 '자살'이란 형태의 죽음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자.

 

지금부터 말하는 자살은 자신의 뜻에 반하여 하는 수동적 자살이 아닌 스스로 생을 포기하는 능동적 자살을 말한다.

능동적 자살이라고 하니 좀 웃기긴 하지만 딱히 표현할 말이 없어서 그렇게 썼다.

 

만약 내가 70세의 나이까지 건강하게 잘살았다면 난 세상으로부터 나 자신을 분리할 것이다. 이런 말을 내가 하고 지켰다면 일종의 능동적 자살일 수 있다. 과연 70세 이후에 내가 어떤 삶을 살아갈지는 모르지만 내 스스로 적당껏 살았다고 느끼고 더이상 사회에 공헌할 수 있는 것도 그리고 앞으로 더 살아서 딱히 더 행복해질 수 없다면 그쯤에서 삶을 마무리하는 것이다. 물론 살아가는 이유가 자신에게만 있을때이다. 부양해야할 가족이 있고 혹은 자신과 삶을 같이 하는 동반자가 원치 않는다면 해서는 안될 선택이다.

 

하지만 자식들은 스스로 다 독립을 했고 배우자는 죽고 나 혼자 살아서 물론 누구에게 손벌리지 않고 살수 있는 터전이 있다고 하더라도 딱히 그 상황에서 내 생명을 연장하는 것이 어떤 의미가 있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과연 그것을 산다고 표현하는 것이 맞는 것일까? 산다는 말의 의미가 어디까지를 말하는 것인지 나 스스로 정확히 정의 할 수는 없지만 어떤 상황에서는 사는것이 죽는 것보다 못한 경우도 있다는 것은 실제로 사실이니 산다는 것의 정의가 어떤 한계를 갖는것 만큼은 사실인 듯 싶다.

 

죽고 사는 것은 온전히 개인이 선택할 문제이며 삶에 대한 의미를 정의 하는 것 역시 모두 개개인의 영역이다. 누구에게 뭐라고 할 필요도 없고 또한 누구로 부터 이것에 대해 이야기를 들을 필요도 없다.

 

단지 산다는 것 자체에 매몰되어서 왜 살아야 하는 것인지 조차 모른다면 한번쯤 고민해봐야 할 내용으로 생각된다.

 

'죽음' 생명체로서는 가장 멀리해야할 단어이긴 한데 실제로 죽음이 그리 꼭 나쁜것만은 아니란 생각이 든다. 죽음은 일종의 삶의 방점이며 실제로 죽음이 있기에 삶이 존재하는 것이다. 영생이란 말은 영원한 생명을 말하는 것인데 이 역시 죽음이 있기에 생긴 말이다. 원래 죽지 않는다면 영생이란 말조차 만들어지지 않았을테니까 말이다.